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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5월, ‘봄의 왈츠’를 추자
남해 남파랑길 43코스(남해바래길 11코스)
행선지: 선구마을 팽나무⇒ 선구몽돌해변 ⇒ 항촌마을⇒ 다랭이 지겟길⇒ 다랭이마을 약 6.8km
남해의 봄빛이 눈부시다. 연둣빛 신록과 완두콩을 감싼 콩주머니의 알참이 바다위에서 우아하게 춤을 춘다. 계절의 여왕 5월답게 온 산천이 녹색지대이다. 그 바다는 파랑색 물감을 풀어 놓았다. 해변마을의 빨간 지붕도 하얀 벽돌도 봄빛에 산뜻해졌다. 남해 바래길 11코스 시작점을 선구마을 팽나무에서 출발하였다. 필자는 많은 여행지 마을에서 만난 보호수들이 느티나무, 정자나무, 은행나무들이 대부분인데 이곳에서 400년(392년 2023년 기준) 수령에서 기백을 뿜어내는 팽나무를 본다. 팽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촌마을과 고동산(359.6m)이 파란 물빛과 타원형을 이루어 첫 출발부터 감동 한 자락 밀려온다. 선구마을로 내려와 몽돌해변으로 갈 참이다. 낡은 쓰래트 지붕, 비탈진 골목길, 오래된 함석 문짝, 녹슨 자물쇠, 염소와 수탉들이 한데 어울려 봄을 즐기는 풍경이 철망 사이로 보인다. 선구마을에서 가천 다랭이 마을까지 푸른 바다를 벗 삼아 길을 걷는다.
선구마을에서 향촌마을까지 1km 해변은 몽돌밭을 이루고 있다. 바다가 고요해 잔 물결까지 숨어버린 날이라 몽돌끼리 부딪히면서 빚어내는 맑은 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몽돌 위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에서 “차르르 차르르∼.” 몽돌스럽게 귓전을 두드린다. 에메랄드 빛 바다가 출렁이고 햇살은 금줄을 튕긴다. 윤슬이 바다를 황금 물결로 반짝인다. 파도의 고요한 속삭임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해안선을 따라 구부러진 길을 걷는다. 완두콩 재배가 한창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남해 바래길 11코스(남파랑길 43코스)이다. ‘바래’라는 말은 척박한 환경에서 바다를 생명으로 여기고 물때에 맞춰 갯벌과 갯바위 등에서 해조류와 해산물을 캐는 행위를 뜻하는 남해사람들의 토속어다. 남해 바래길은 남해의 토속어 ‘바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붉은 땅길과 밭이 기름져 보인다. 해안선을 따라 우아하게 걸어 보려다 칡 넝쿨에 길이 막힌 곳에서 우람한 바위그룹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다시 역주행하여 해변을 따라 구불구불 걸어가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유연하다. 멀리서 달려온 파도가 해변 바위와 만나면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아침엔 쌀쌀스러웠는데 일교차가 크다. 초여름 날씨이다. 향촌마을을 지날 무렵 언덕배기나무그늘에 앉아 집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는다. 소풍기분이다. 향촌마을을 벗어나 가천 다랭이 마을로 가고 있다. 황톳빛 밭길로 해변으로 나아갈 때는 마치 바다로 걸어가는 느낌이다. 전망 좋은 곳은 이국적 건축물을 자랑하는 펜션과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완두콩이 토실히 익어간다. 할머니의 거친 손이 한 뜸 한 뜸 추려 바구니에 담는다. 길가에 핀 찔레꽃이 참 순결하게 피었구나. 남이 보아주던 보아주지 않던 그 자리에서 순백의 꽃향기를 수 놓는다. 산토리니가 있는 그리스를 가지 않고도 이곳의 바다 뷰(View)가 멋진 곳에 펜션들이 참 아름답기도 하지…아름다운 건축물 상을 받은 펜션도 수두룩하다.
다랭이 마을에 도착했다. 유채꽃이 피었다면 다랭이 논의 상하가 구분이 쉬울 텐데 이제는 초록식물이 자라고 있다. 모내기를 앞둔 논에서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정겹다. 이곳은 바다가 코앞이지만 배 한 척 볼 수 없다. 가파른 해안절벽을 끼고 있어 선착장을 만들 수 없는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대신 농사를 택했고 먹고 살기 위해 산비탈을 힘겹게 일궈 논으로 바꿔 나갔다. 척박한 땅을 개간해 한 층씩 석축을 쌓아 올렸고 그렇게 108층 680개의 계단식 논과 마늘 밭이 탄생했다. 들쭉날쭉 높이도 모양도 제멋대로 생긴 논들이 들어 앉았다. 시골마을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에 정겹고 투박한 봄의 서정이 흐른다. 산과 바다가 그림처럼 어우러지고 다랭이 논과 꽃밭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보물섬이다.
논과 논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허브향이 코 끝에 머문다. 봄바람에 초록 잎이 흔들리고 아련한 파도 소리와 작은 새의 지저귐까지 더해지니 걷는 것만으로 힐링이다. 야생화 핀 한적한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숲과 바다를 즐기다 보면 가슴이 봄의 왈츠로 물든다. 고조선급 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이팝나무가 준수하게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다. 탁 트인 남해 바다를 즐기는 언덕에 자리 잡은 탤런트 박원숙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다랭이 마을과 남해 바다를 견주어 본다. 느긋이 잔을 비우며 남해 출신 내 친구 시인의 시 ‘남해 멸치’를 읊조려 본다. 참 고왔던 남해 길이다.
남해 멸치
고두현
너에게
가려고 그리
파닥파닥
꼬리 치다가
속 다 비치은 맨몸으로
목구멍 뜨겁게 타고 넘는데
뒤늦게 아차,
벗어둔 옷 챙기는 순간
네 입술 네 손끝에서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오 아름다운 비늘들
죽어서야 빛나는
생애.
오늘 이 남해길을 걸으면서 본 단어를 적어 볼까한다.
황톳밭. 찔레꽃. 아카시아 향기. 햇마늘. 개구리 울음소리. 완두콩. 담쟁이. 몽돌자갈. 펜션. 칡넝쿨. 데이지 꽃. 박원숙카페. 홀로 핀 고조선급 이팝나무. 조금 남은 유채꽃. 야자수나무. 로즈마리 향(허브향). 정자. 묘박지. 물살을 가르는 배. 빨간등대. 팽나무. 오래된 집. 녹슨 문짝. 흑염소. 메꽃. 길이 끝난 곳. 카페마레.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간지붕. 하얀벽. 투명 통유리. 할머니. 유약을 바른듯한 연초록 나무. 윤슬. 남해 막걸리. 구부러진 길. 다랭이 논. 노을길.......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
2023.5.2 여행작가 전정식
가천 다랭이 마을
경남 남해군 남면 남면로679번길 21 (남면 홍현리 898-5)
다랭이마을
남해! 평지를 달리다 깎아지른 듯 높은 지형을 굽이 돌아가며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가 더 깊고 푸르다. 수시로 변하는 오묘한 바다색이 좋다.
2016년인가 내가 터키를 방문했을 때의 파묵칼레처럼 층층 논에는 유채꽃은 지고 푸른 곡물이 자란다. 탱탱하고 싱싱한 시금치와 쭉쭉 올라온 마늘과 하늘거리는 허브향이 코끝에 감겨온다.
천수답 다랭이 모내기 물속에서 개구리 소리가 정겹다.
가천 다랭이마을의 논은 바다 곁 경사진 산 위에다 밭을 일군 우리네 조상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관광자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닷가 급경사에 계단을 쌓고 일궈 만든 정말 손바닥 만한 다랭이 논을 보면서 한평이라도 더 만들어 한톨의 수확이라도 더 늘리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전망 좋은 박원숙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남해의 보드라운 바람이 다시 찻잔을 채운다.
다랭이논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는 동안 마을의 오밀조밀한 집들과 오래된 돌담과 식당들이 고향집처럼 정겹다.
가천 다랭이 마을은 국가지정 명승 제 15호이다.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중 하나로 CNN에 소개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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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액자
- 다랭이 마을에서
고두현
멀리 있는 것이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커 보이는
원근법의 원리 이미 배웠지만
세상 안팎 두루 재보면
눈에 멀수록 더 가깝고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요.
오늘처럼
멀리 있는 당신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오는 것이
※ 頓梧頓修 의 유리 거울이라면
끊임없이 가 닿기 위해
나를 벗고 비우는 일이
원근보다 더 애달픈 사랑이라는 걸
마음의 액자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오늘
※ 돈오돈수 의 뜻 : 오와 수를 한 순간에 모두 완성하는 것
글 : 고두현 의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중에서
고두현 시인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대국문과 졸업.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늦게 온 소포』(민음사, 2000),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첫댓글 남해 현장에 생생함이 숨결에 느껴집니다
아름다운 여행기 감동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