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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학창시절의 상동 이야기를 하면 동문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책을 엮어도 몇 권은 엮을 수 있을 정도로 각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정겨운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들을 모두 여기에서 이야기할 수 는 없으므로 몇 가지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호칭도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바뀌었다.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였는데 나랑 친하게 놀던 친구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입학시험에 떨어진 친구와 진학을 하지 않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은 4개 반이었는데 중학교는 2개 반이었으니 모두 입학할 수 없었다. 공도 잘 찼고 나를 데리고 두 번이나 “토록산”에 수정을 줒으러 갔던 친구와 같이 중학교에 다지니 못하게 되어서 서운하고 허전했다.
중학교 교육 환경과 생활은 초등학교 때와 다른 게 너무 많았다.
초등학교는 담임 선생님이 모든 과목을 가르치는데 비하여 중학교는 과목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따로 있고 선생님들은 대부분 각자의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은 재미는 있으나 선생님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호칭으로 느껴졌다.
선생님께서 학습 태도가 나쁘거나 불량한 언행을 한 학생에서 가하는 “사랑의 체벌”이 초등학교 때 보다 몇 곱절은 셌다. 선생님 대부분은 손바닥 보다는 팔목 부분을, 엉덩이는 멍이 들 정도로, 머리는 혹이 날 정도로 체벌을 가했다.
초등학교에는 거의 없었던 “단체기합”도 있었고, 가끔은 상급생이 선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체벌을 헤도 하소연 못하고 맞아야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때는 선생님의 체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성인이 되어 생각하니 체벌을 많이 하신 선생님이 기억에 남고 감사의 마음도 깊다.
( 선배들이 후배를선도하기 위하여 행하는 체벌은 학교 창립과 동시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전통이라고 하지만 그 선도의 매질이 가끔 폭력에 가까울 때가 있었다. 우리 동창들도 그 전통을 따랐지만 구타(歐打)는 행사하지 않았다.
나도 동급생들이 하급생 반에 들어가서 덩치가 큰 하급생을 때려주고 오라고 몽둥이를 주면서 하급생 반에 들여보내서 할 수 없이 하급생 반에 들어갔더니 모두 같은 동네에 살고 아는 사이라서 때리는 폼만 잡고 나온 적이 있었다.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주먹으로 얼굴과 복부를 강타하여 병원으로 후송을 가게 하거나, 치아 등을 손상케 하는 행위가 교내에서 있었는데 이는 선도의 한계를 넘는 구타(歐打)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등하교시에는 초등학교와 달리 교복을 입고 교모를 써야 하고, 체육 시간에는 우천이 아니면 체육복을 입고 체육 활동을 하고, 상급생에게는 목례가 아닌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필기를 할 때는 수학 시간을 제외하고 연필이 아닌 펜이나 볼펜을 써야 했고 손은 잉크를 어설프게 다루어 항상 검은 물이 들었다.
교과목 중에 영어, 화학, 물리 등은 처음 접하는 과목이고 나머지 과목은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과목과 연관이 있었다. 처음 접하는 과목은 호기심도 있고 재미도 있었지만 어렵기도 했다. 학력고사를 칠 때는 초등학교 때와 달리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토록산 방향에 있는 운동장 울타리가 군용 철조망이라서 고무공으로 축구를 하다보면 철조망에 공이 펑크가 많이 났는데 중학교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축구공이 지천이고 체육 시간에는 경기 규칙을 배우고 공식 규격인 송구공. 농구공. 야구공으로 경기를 해서 구기(球技)를 배우는 체육 시간이 많이 기다려졌다.
특히 뜀틀을 할 때는 3단부터 뜀틀을 못 넘는 친구가 발생하는데 뜀틀을 못 넘는 친구는 선생님이 뜀틀 속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체육 시간이 끝날 즈음이면 뜀틀 속에 친구들이 가득했다.
과학실에는 생전에 보지 못했던 실험 기구가 가득했고, 음악실에는 검은색 큰 피아노와 영화에서 군악대가 행진할 때 사용하는 노란색의 각종 악기가 많이 있었다.
음악 시간이 끝나고 악기를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선생님께 악기를 만져 봐도 되냐고 물어 봤더니 선생님은 웃으시며 친절하게 모든 악기를 만져 보게 하시며 악기의 이름과 용도를 하나하나 알려 주셨다. 그 후 50여년이 지난 지금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악기의 명칭은 다 잊어버리고 몇 개만 기억난다. 그때 악기의 명칭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신 자상하신 선생님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나중에 선생님은 승진하셔서 교장선생님으로 집무하셨고 퇴직하신 후에는 미국으로 이사 가셨다는 이야기를 내가 장성한 이후에 들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등하교 길은 상동 중심가를 지나가야 한다. 학교까지의 거리는 그 당시 편도 10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4Km에 못 미치는 3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등교하는 시간은 40분 가깝게 소요되지만 하교하는 시간은 예측할 수 없다.
수업 종료 후 곧장 집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고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치랭이골에 들어가 멱도 감고,”칠랑리사택“ 뒷산에 있는 폐광이 된 ”주석(朱錫)광산“ 폐석더미에서 토록을 줍는 등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등하교 길은 상동 시내 중심가를 모두 지나야 하므로 학교를 갔다 오면 그날 상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졸업반이 되자 1~2 학년 동안 알게 된 선, 후배도 많아졌고, 멀게 느껴졌던 등, 하교 길도 가깝게 느껴지고, 학교생활이 즐겁고 ”선후배 관계의 질서“를 지키는 것도 익숙해 졌다. 행동반경(?)도 많이 넓어져서 상동을 벗어나 ”박십리“재를 넘어 적멸보궁(寂滅寶宮)인 ”정암사“도 갔었고 선배들을 따라서 ”태백산“ 등산도 갔었다. 지금 같으면 고찰을 찾거나 등산을 하면 승용차로 이동하고 목적지에 맞는 복장을 갖추어 입고 가겠지만 그때는 운동화를 신은 상태에서 교복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타박타박 열심히 걸어서 다녔다.
(정암사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수마노탑“이 있는데 그 탑 아래에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탑은 수마노석(석영 계통의 암석)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으로 여러 차례
중건(重建)을 거쳐 관리하여 왔는데 2020년에 국보로 승격했다. 중건하기 전에는 사람들의 손이 닿는 탑 하단 수마노석에 온통 낙서와 이름을 음각(陰刻)으로 써 놓았다. 상동 사람들도 이에 질세라 좋은 위치에 방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름과 낙서로 파였던 수마노탑은 국보로 승격하기 전에 중건을
하면서 낙서 등으로 가득한 하단의 수마노석의 위치를 조정, 배치하여 지금은 음각한 흔적을 탐 하단에서 찾을 수 없지만 그 탑에 쓰인 이름과 낙서 등은 대한민국 국보 수마노탑 어딘가에 남아서 수마노탑과 함께 국보의 보호(?)를 받으며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중학교 생활은 초등학교 때 즐겨 행하던 전쟁놀이, 구슬, 딱지치기, 제기차기 등과 거리를 차차 멀게 했고 졸업할 무렵은 완전히 이별(?)을 하게 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영어, 화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운 게 된 것, 생각과 행동이 개구쟁이의 틀에서 벗어난 것, 초등학생 때에는 공부보다는 재미있게 노는 친구와 가깝게 지냈지만 중학생이 되어서는 생각이 같거나 등하교를 같이 하는 친구와 가깝게 지낸 것, 초등학교 때는 전혀 하지 않던 시험 기간에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 등이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은사님의 별명이 생생히 기억난다.
“합죽이” 영국신사“ ”팅구리“ ”하마” “꼼배” “약장수“ ”왼직이“ ”홍각구“ ”딱다구리” ”허직이“ .....
선생님들께서는 실력이 쟁쟁하셔서 모교에서 퇴직하시고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들도 많으셨다.
만시지탄이지만 ”훌륭하신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무슨 이유로 딴전만 그렇게 열심히 피웠는지....“ )
❏ 고등학생
중학교 3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명실상부한 ”고등교육“을 받는 관문에 들어가는 입학식날은 중학교 때와는 달리 기쁨보다는 매우 우울했다. 입학식을 한 달 가깝게 앞두고 우리 가족의 운명을 좌, 우할 수 있는 큰 우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친께서 몹시 추운 날 황해도에서 피난 온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상칠랑리 뒷산에서 매장하는 일을 도우시고 집에 오셔서 저녁 식사 후 전축 앞에 앉아 레코드판을 정리하시다가 쓰러지셨다.
회사에서 보낸 응급차로 병원에 긴급 후송했는데 의사 선생님들이 진찰하시고 ”원주기독교병원“으로 후송하셨고, 그곳에서 뇌 사진 등 각종 검사를 받으시고 입원하신 후 며칠 이 지나서 의식을 찾으셨지만 언어와 보행등의 기능이 마비되는 의학적으로 회복이 지난하다는 ”뇌출혈 후유증“ 진단을 받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친께서 병원에 입원하신 일이 있었다.
갱내(坑內) 좁은 공간에서 동료들이 중량물을 운반하는 것을 도와주시다가 머리와 허리를 다치셔서 부속병원에 입원하신 것이다.
그때는 부상 부위가 크게 위중하지 않으시어서 얼마간 입원하시고 회사에 복직하셨는데 이번에는 휴직과 복직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퇴직을 하셔야 했다.
우리 가족은 종업원 사택을 명도하고 장마철이면 지붕에서 비가 새어 방으로 떨어지는 낡은 판잣집을 구입하여 이사를 했다.
우리 형제의 연령이 어리고 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가족에게 가장 선친의 보호가 절실할 때에 선친께서는 투병을 시작하시고 실직도 하신 것이다.
어린 내가 생각해도 절망적이고 앞이 캄캄했다. 우리 형제의 생각도 그러했지만 어머니의 걱정 중에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선친의 쾌유는 현대의학으로 힘든 것이니까 이는 뒤로하고 자식들 교육이 문제였다. 나와 동생들도 ”과연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 까“를 깊게 걱정했고, 나는 내 동생들이 기가 죽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학창 생활을 하는데 신경을 써야했다. 우리 가족 모두는 각자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처지에 직면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세상 물정과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창립 후 처음으로 교내에서 데모를 하는 등 중학교 시절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다.
(데모를 주도한 선배들은 데모 계획을 수립할 때 우리에게는 사전에 알려 주지 않았다. 우리 교실로 상급생 몇 명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서 “당장 운동장에 집합해라!”라고 겁을 주면서 소리를 지르기에 모두 나갔다.
선배들은 운동장으로 나온 학생들을 학년별로 줄을 세워놓고, 데모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자기들이 제공해 주는 여러 가지 구호를 학년별로 큰 소리로 외치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구호 중에 하나는 “개교 15년에 암(癌)이 들었다!”인데, 우리 학년 선두에 서서 구호를 제창하는 친구가 선배가 지시하는 구호를 “개교 15년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잘못 알아듣고 “개교 15년에 아무것도 없다!”로 외치자 우리는 구호가 조금 이상했지만 모두 그렇게 따라했고 옆에 있던 중3 학생들은 우리를 따라서 그렇게 구호를 외쳤다. 구호 내용이 이상한 것을 알게 된 상급생에 의하여 구호를 정정하여 외쳤다)
수학여행은 학창시절과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견문을 넓히는 여행이다. 특히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더 그러할 것 같다.
동창들은 단풍이 좋은 가을에 선생님 인솔하에 동해안과 월정사를 둘러보는 코스로 여행을 떠났는데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수학여행은 생활이 어려운 나에게 사치였다. 자식을 수학여행 못 보내는 어머님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프다는 것을 어머니 표정을 보고 쉽게 알았다.
학창 시절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과 중학교 졸업 앨범이 없는 것인데 불혹의 나이가 지나서 그 아쉬움을 풀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우리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갔던 코스를 따라서 월정사, 낙산사, 경주 불국사를 여러 차례 갔었다. 뜻한 바가 있어서 숙박은 5성급 또는 4성급 호텔에서 하면서 뒤늦은 최고의 수학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졸업 앨범은 구하지 못하여 동창 카페에 올려놓은 졸업 앨범으로 만족하고 있다.
교내에서 쉬는 시간에 담배를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망을 봐주는 친구와 서로 교대
하며 화장실 건물 뒤 또는 화장실(대변실)에 들어가서 두세 명이 담배를 피웠다,
가끔 상급생들이 선도(善導) 명목으로 책가방과 주머니를 조사하고 담배가 나오면 체벌을 가했다. 이렇게 조사를 하는 상급생 중에는 자기들이 교내에서 담배를 피울 때 우리보고 망을 보라고 하기도 했다.
음주는 하교 후에 하는데 하칠랑리 중석물 가에 자리한 민가에서 사업자 등록 없이 막걸리를 파는 집이 있었다. 하교하면 그 곳에 모여서 중석물을 바라보며 풍월놀이(?)를 하며 술을 먹었다. 술 맛도 모를 텐데 한 사발 들이키고 입을 손으로 닦으며 “술 맛이 좋다”느니 “시원하다”느니 하는 친구를 보면 우습기도 했다. 언변이 좋고 설득력이 강한 훌륭한(?) 몇몇 친구들은 막걸리집 주인하고 일치감치 외상을 터서 외상술도 먹곤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술도 음식이니 알맞게 먹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하며 술을 파셨지만 우리들이 과음하지 않도록 통제하기도 했다. 나도 친구들과 여러 차례 풍월놀이를 하며 술과 담배를 해봤지만 네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지속하지 않았다.
졸업하던 해 가을에는 색시 집에도 갔었다.
그 당시는 월남전으로 인하여 중석 경기가 활황이라서 극장 앞, 시장 동네. 아우라지 등의 웬만한 술집에는 대부분 접대부를 두고 장사를 했다. 일요일에 칠랑리에서 친구들과 사택 골목에 똥을 싸며 분주히 돌아다니는 암탉을 몰래 잡아서 삶아 먹고 놀다가 어스름해질 무렵 아우라지 도로를 지나는데 “유산공장”에 다니는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 “교복을 안 입고 사복을 입었으니 같이 한잔하자”고 하면서 거절하는 나를 끌고 바로 옆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와 구면인 유산공장 직원 두 명이 자기들 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접대부 세 명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동석해서 난생 처음 접대부가 따라주는 맥주를 두 손으로 받고 고개를 돌려서 먹으니 친구가 웃으면서 “이런 곳에서 술을 먹을 때는 아가씨에게 존댓말을 하지 말고, 두 손으로 술을 받지 말고, 고개를 돌려서 먹지 말라”고 접대부와 대작할 때 주법을 친절히 나에게 알려 주었던 일도 있었다.
당구를 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칠랑리, 아우라지 지역에 사는 친구들은 “칠랑리당구장”, 시장 동네 친구들은 “칠성당구장”,
초등학교 위에 사는 친구들은 “삼일당구장”과 극장에서 “도계여관” 사이의 골목 좌측에 있는 중년 부인이 운영하는 무허가 “과부당구장“을 많이 다녔다.
당구를 잘치는 친구는 150까지 쳤고 나는 큐대는 만져 보았어도 당구는 쳐보지 못했다. 그 당시 당구장은 유기장으로 관리되어 학생 출입이 금지 되었는데도 당구를 치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징계를 받은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환갑이 훨씬 넘어서 당구장 출입을 했고 150을 놓고 친다. 사실 150 실력에서 많이 미달 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숫자를 놓고 치고 있다
사제지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고 꾸지람하는 선생님의 지적을 반항하듯이 받아드리자 선생님이 체벌
을 가하려고 다가가자, 대걸레 자루를 부러트려 몽둥이를 만들어 선생님에게 대항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서로의 접근을 막아서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이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제지간의 도(道)를 깨는 행위였다.
(그 친구는 졸업한 후에 그때 있었던 일을 회상 하며 ”내가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여러 번 후회 하면서 많이 괴로워했다) (16)
수업 시간에는 진학을 하지 않는 친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선은 칠판을 향하고 있지만 생각은 다른 세상을 헤매고 있고 딴전을 피우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교무실 앞 복도에서 표면의 도금이 조금 벗겨진 낡은 손톱깎이를 줒었는데 주인을 찾아 줄 만한 물건도 아니고 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서 수학 시간인데 선생님이 ”등차수열“은 이렇고 ”등비수열“은 저렇고 하시면서 열심히 수열을 가르치시는데, 수열 등 고등 수학은 배울 때는 잠시 이해가 되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십상이고 설령 배워서 익혀 봤자 사회에서 써 먹을 일도 없을 것이고, 대학교도 못가는 처지인데 수열에 대하여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주머니에서 손톱깎이를 꺼내서 선생님께서 칠판에 문제를 푸실 때 기회를 봐서 또깍 또깍 정성스럽게 손톱을 깎다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여 걸려서 손톱깎이도 뺏기고 신나게(?) 체벌을 받았는데, 그 손톱깎이가
묘(妙)하게도 선생님께서 잃어버린 것이었다.
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일요일에 친구와 치랭이골에 족대(반두)질을 하러 갔었다.
치랭이골 개천은 물고기를 계속 잡아도 개체수가 줄지 않고 계속 나오는 화수분인 듯 그날도 제법 많이 잡았다. 치랭이골에서 집으로 가기 위하여 나오다가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께서 족대와 댓고(지렛대)를 보시더니 내일이 시험인데 ”너희는 시험공부도 안하고 뱃장도 좋다“ 고 하시기에 당돌하게 ”대학교도 안 갈 건데 시험 공부할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했더니 어이가 없으셨는지 웃으시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면 소설책이라도 봐라. 중국 고전이나 명작소설 등 도서관에는 너희들에게 필요한 책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난 이후 중학교 때는 가끔 들렸으나 그 이후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여 집에서 틈이 나는 데로 봤다. 이해가 되고 재미있는 내용도 있는 반면 사서삼경, 사기 등은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어도 생소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읽다가 포기했지만 사기(史記)속에 포함된 수많은 열전(列傳) 중에는 재미있는 내용도 더러 있고 열전을 통하여 생성된 고사 성어(故事成語)도 배울 수 있었다.
(설국. 닥터 지바고, 삼국지, 수호지. 죄와 벌, 채털리 부인의 사랑. 바다와 노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햄릿, 베니스의 상인. 좁은 문.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등을 그때 읽었다.)
대학입시가 가까워지자 학교에서는 진학반과 비진학반으로 나누어 진학반은 별도로 팀을 만들어 공부를 했고, 어떤 친구들은 휴학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입시전문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여러 방향으로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매우 부러웠다.
학창시절 중 가장 슬프고 충격적인 일은 선친께서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0년
도에 3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소천(召天)하신 것이다. 소천하시기 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전과 같지 않고 나쁘셨다.
아침에 학교를 갈려고 하는데 선친께서 손짓으로 우리를 학교에 못 가게 하시고 누워계시는 당신 옆으로 모이라고 손짓하셔서 가족 모두 선친 좌우에 모이자 선친께서는 우리들의 손을 당신의 가슴에 모두 모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언어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이지만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시며 운동 기능이 상실되지 않은 왼손으로 우리 가족의
얼굴을 모두 어루만지시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시면서 무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소천 하셨다.
선친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우리 가족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모두 알아들었다.
그 말씀은 ”너희들은 어머니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건강히 잘 살아야 한다.였다.
(우리가 어렸어도 선친의 장례는 잘 치렀다. 선친과 친분이 있는 분들이 장례에 필요한 자재와 차량을 회사에서 지원받아 선친을 세송 골자기 첫 민가가 있는 도로 위쪽 등성이에 모셨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상여를 보고 선친과 함께 피난 오신 분들과 이웃에 사는 많은 분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셨다.
묏자리는 광업소 정문 앞에 있는 ”상동광업소장 이상구 선생 송덕비“의 공덕 내용을 회사의 의뢰로 지으시고 붓으로 써서 비석에 음각을 할 수 있게 하신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분이 당신의 묫자리로
로 잡아 두신 곳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관(下棺)때 풍수도 보아주셨다.
그 할아버지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다니시며 한학(漢學)을 하신 분으로 선친은 그분을 한학자(漢學者)라고 하셨고 모교에서 국어와 고전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 할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할아버지 댁은 음지사택 뒷줄인데 설날이 오면 선친께서는 어린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께 세배를 드리러 가곤 했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 할아버지께 잊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다.)
학창 시절을 통하여 기억에 남는 뿌듯한 일이 있다면 수영장과 스케이트장을 만드는데
우리 학년이 주축이 되어 참여한 일이다.
학교 운동장 뒤 공터에 옥외 수영장을 건설할 때 수영장 벽을 쌓는데 필요한 돌을 조산골에서 날랐고 겨울에는 회사 소방차의 지원을 받아 운동장 바닥을 얼려 넓은 스케이트장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멋진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기여한 것이다
졸업식을 하는데 선친과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어머님께서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온갖 고생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공부를 가깝게 하지 않고 3년간 농땡이만 치면서 지내 온 나날이 죄스럽고 후회가 되어서 회한(悔恨)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더니 ”졸업하니 그렇게도 슬프냐.
너는 그런 일로도 그렇게 우냐 ? 마음이 참 여리구나. 라고 했었다.
졸업식이 끝내고 학교 앞 다리를 건너오다가 다리 위에 서서 잠깐 모교를 바라보니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훌륭하신 선생님 아래서 공부에 진력하지 않고 큰 복을 차 버린 나날들이 눈물을 나오게 했다.
졸업장을 받고 나서야 만시지탄(晩時之歎)을 한 것이다. 그 날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매우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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