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 전서 2장 8절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개역개정)
헬라어 티알
και << λιθος προσκομματος και πετρα σκανδαλου>>
οι προσκοπτουσι τω λογω απειουντες εις ο και ετεθησαν.
KJV 1611
8 And a Stone of stumbling, and a Rocke of offence, euen to them which stumble at the word, being disobedient, whereunto also they were appointed.
KJV 1769:
And a stone of stumbling, and a rock of offence, even to them which stumble at the word, being disobedient: whereunto they were appointed.
(흠정역)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반석이 되되 순종하지 아니하여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에게 그리되었나니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하여졌느니라
(한글킹제임스)
또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실족하는 자들에게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이라.
여기에서 정해졌다에 사용된 핵심단어는 그리스어 티쎄미였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Τιθημι : put, place, set, assign, lay down, give up, appoint, destine (Mt 24:51, Lk 12:46), make, render, listen to, deposit,
이 단어는 예정을 위해 전문적으로 쓰여진 프로오리조 (προοριζω)와 다릅니다.
이 프로오리조는 사도행전 4장 28, 로마서 8장 29, 30절, 에페소서 1장 5, 11절에 쓰이면서 예정하심을 전문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반면에 티쎄미는 일반적으로 놓다, 두다, 세우다, 맡기다, 버려두다, 포기하다, 지명하다, 정하다로 쓰였는데 설사 정하였다로 쓰이는 경우에도 마태 24장 51절에서와 같이 범죄에 대하여 정해놓으신 형벌을 가리킬 때의 정하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정론으로 치우친 번역을 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단어입니다. 이제 각 번역들을 살펴봅니다.
우선 킹제임스 성경의 1611판과 1769판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포착하셔야 합니다. 1611년 판에는 disobedient, whereunto 로 번역되었고, 1769 disobedient: whereunto 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 것은 whereunto 는 엘리자벳단 영어에서 unto which 를 의미함을 킹제임스 성경을 통독하신 분들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whereof, wherefore, whereby, whereupon 등으로 of which, for which, by which, upon which 등을 표현한 것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 또한 unto which 로 중문의 마지막 문장을 이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만일 쉼표가 있다면, 그 쉼표로는 앞 문장에서 선행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헬라어 문장은 전치사와 관계대명사가 결합한 단어들로 이어졌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바로 unto which 의 선행사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문제인데, 킹제임스 1611판은 그 앞의 word(말씀)으로 본 듯합니다. 그리고 1769 킹제임스는 앞 문장 전체로 본듯합니다. 선행사를 말씀으로 보면 예정론적 해석이 불가능하고, 앞문장 전체로 보면 예정론적 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선행사일 때는 저희는 그 말씀을 위해 세워졌었던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고 반면에 1769판처럼 콜론으로 이어져서 앞문장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되면, 앞문장의 사실을 위해,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저희는 세워졌다는 예정론적 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물론 원어문에는콜론도 없었습니다. TR에는 위에 찍는 마침표를 두었습니다. 다수사본 편집본에는 쉼표를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 원어문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이 구절에 대하여는 사본들간에 불일치나 이견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본들은 다음과 같은 원어문을 갖고 있으며 위에 찍는 마침표와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혹은 해석하느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페트로 2장 7절
Υμιν ουν η τιμη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απειθουσι δε,
<<Λιθον ον απεδοκιμασαν οι οικοδομομουντες,
Ουτος εγενηθη εις κεφαλην γωνιας>>
Λιθος, λογος => masculine, 남성
Πετρα, κεφαλη => feminine, 여성
Εις Ο => neuter, 중성
8절 και << λιθος προσκομματος και πετρα σκανδαλου>>
οι προσκοπτουσι τω λογω απειουντες εις ο και ετεθησαν.
Λιθοσ = > 남성
Πετρα => 여성
Εισ ο = > 남성
영문 킹제임스 1769 페트로전서 2:7
Unto you therefore which believe he is precious: but unto them which be disobedient,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disallowed, the same is made the head of the corner
한글킹제임스 페트로 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그가 귀중하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흠정역 페트로 전서 2:7
그러므로 그분께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로우시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거부한 그 돌이 되셨느니라.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하토브역
그러므로 믿는 자들인 너희에게는 귀중함이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실격시킨 돌, 바로 그것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느니라>,
7절을 그분께서 … 보배로우시나, 로 번역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주어가 없기에 영문 킹제임스 성경은 이탤릭체로 번역하여 첨가하여 둔 것이고, 보배롭다는 단어를 여성명사로 쓰고 있기 때문에 문제됩니다. 이 단어는 앞문장 6절에서부터 계속되는 모퉁이 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모퉁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문법의 첨예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티쎄미 동사가 정하다는 뜻으로 쓰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 24장
51 그를 둘로 갈라내고, 위선자들과 함께 그의 몫을 할당하리니 거기서 통곡함과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이 예정론을 가르쳐줍니까?
이 구절은 각자가 선택하고 고집했던 길에 대하여 응당의 대가를 지불받게 해주는 것이며 미리 예정된 것을 할당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벧전 2:8을 번역함에 있어서 에이스 호를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중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에이스 호는 unto( for) which 에 해당되는 관계대명사 구입니다. 그것은 중성 관계대명사이므로 영어의 unto(for) it 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앞문장에 있는 유일한 명사인 Word (말씀)는 헬라어에서 로고스로서 그것은 남성명사입니다. 따라서 에이스 호가 남성명사인 로고스를 가리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한가지 예외는 고전 13장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가리키는 세 명사는 모두 여성명사였는데 중성 복수로 받았습니다. 그 경우는 추상명사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남성명사를 중성 관계대명사로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믿어집니다. 대신 그 앞서의 단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분을 돌(남성)과 바위(여성)로 동시에 표시하며 그 앞에서는 머릿돌(여성)로 표시하므로, 그것이 중성의 무생물 물질들이고 따라서 여러 성을 한가지로 중성 관계대명사로 받았을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AA) 그리하여 앞문장이 아닌 보배로운 돌, 모퉁이돌을 가리키는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나옵니다.
페트로 전서 2장 8절
8 그리고 <부딪힘의 돌이며 실족케 함의 바위라>;
저희가 불순종하여 그 말씀에 부딪히나니, 그것을 위해 저희는 맡겨졌었느니라.
이 경우 부딪히다는 동사는 현재시제인 반면 맡겨졌었다는 부정과거로 한 시제 앞서고, 수동태입니다. 그리하여 해석은 저희가 불순종하여 그 말씀에 부딪히고 있는데 그 말씀이신 돌에게 저희는 원래 맡겨졌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원래 그 말씀에게 맡겨졌었지만 그들은 불순종하였고 그리하여 부딪히는 것입니다.
BB) 다음의 번역은 앞문장 전체로 받는 것입니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합니다.
페트로 2장
8 그리고 <부딪힘의 돌이며 실족케 함의 바위라>;
저희가 불순종하여 그 말씀에 부딪히나니, 그것에 이르도록 저희는 세워졌었느니라.
이 경우에는 상당히 예정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마저도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불순종하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 모두가 그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불순종하는 자들을 미리 아시고(프로기노스코), 그러한 불순종하는 자들은 부딪히도록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번역상 상당히 첨예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헬라어 원어문에서 관계대명사가 앞문장 전체를 받는 문법에 대한 설명은 제가 10개 이상의 문법책을 살펴도 안나옵니다. 또 특히 관계대명사 앞에 전치사가 붙는 경우 앞문장 전체를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앞문장들에서 여성과 남성명사인 실체가 돌과 같은 무생물일 때는 중성 관계대명사로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 번역들은 모두 예정론에 치우친 번역들이며 영문 킹제임스 1769판 또한 그러한 편견이 심어져 있다고 저는 분별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에 대한 결론은 나중으로 미루고 싶습니다. 아마 그리스어 사본들의 마침표나 쉼표등의 부호들에 대한 확인, 그리스 현지의 고대문헌들에 밝은 헬라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첫댓글 답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맨처음에는 KJV 1611판에서처럼 관계대명사 호가 말씀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주 쉬운 문제로 큰소리 쳤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복잡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어떤 단어 못지않게 쉼표냐 세미콜론이냐가 의미상 상당한 차이를 가져옴을 볼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예정론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를 변질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는 성령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가 관건일 것입니다.
지적하신 부분에서 세미콜론(;)이 아닌 콜론(:)으로 표기되어 있지않은지요? 제가 가진 영한대역에는 콜론(:)이네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정성들여 답변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ㅎㅎ 한 번 읽은 것으로는 제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며 묵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콜론이 맞습니다. 제가 그 인식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명칭을 혼동했습니다. 그냥 점두개를 세미콜론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정정했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식으로 예정론으로 번역을 만들어간다 하여도, 하나님이 불순종하도록 정해놓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이 그런 악을 행하시다니!
반대로 불순종하는 자는 넘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즉 안믿는 자들은 지옥에 가도록 예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안믿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믿도록 미리 정해놓으신다음 안믿는다는 이유로 형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릇 묘사하고 불의한 분으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누구든지 예수믿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안믿는 자들은 형벌받도록 미리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안믿도록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그러한 자유의지와 자유 결정권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장난감이나, 로봇이나, 인형이나, 꼭두각시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작은 하나님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창조의 사역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말씀받은 신(요10:35)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안믿기를 택하고 결정합니다. 그 선택과 결정에는 대가가 따르며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정론과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