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름 루스에서 벧엘로”(창세기 28:16-19) 2013. 4. 21.
요즘 온 천지가 화사한 봄꽃으로 단장한듯 싶습니다. 우리 주변만 해도 개나리 벚꽃 목련이 한창입니다. 우리나라의 봄소식은 통상적으로 경남 섬진강 하류 하동의 매화꽃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어김없이 봄만 되면 이같이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 예레미야 1장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렘1:11-12)”
여기에 나오는‘살구나무’가 성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우리나라의 매화나무같이 봄에 제일 먼저 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살구나무를 히브리 말로는‘깨어 있다’는 말인‘솨케드’인 것입니다. 제일 먼저 동면에서 깨어나는 꽃나무라는 의미이지요.
봄이 되어 처음으로 피어나는 살구꽃을 보면서 당연히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의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예언의 말씀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깨어나 실현되고야 만다는 것을 가르친 줄 압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 17절에 보면“야곱이 잠이 깨어 일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면서 육신의 잠에서만이 아니라 영혼의 잠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야곱의 인생이 마치 옛 이름 루스가 새 이름 벧엘로 변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루스’라는 말이 고대 셈어로 살구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살구나무가 원어성경에서만도 이같이‘루스’와‘솨케드’두가지로 나옵니다. 여하튼 그 지역에 살구나무가 많아 지명까지 루스라고 불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여기 루스에서 야곱이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신앙의 새로운 각성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가 새롭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리 한가지 참고 삼아 말씀드리는 것은 원어성경의‘루스’와‘솨케드’가 우리 성경은 이를 살구나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아몬드나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전에는 아몬드를‘편도나무, 파단행’이라 해서 잘 알 수 없지만, 요즘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이를 수입하여 즐겨 먹기 시작하면서 아몬드를 알게 되었습니다.‘아몬드’라는 말도 역시 이 열매가 서양쪽으로 전래되면서 영어로 그리 불리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편도나무, 파단행’이란 말도 그렇습니다. 납작한 복숭아 닮았다하여‘편도나무’라고 하였고,‘파단행’도 고대 페르샤에서는 이 열매를‘바담’으로 불리운 것을 중국으로 오면서‘파단’으로 의역 되었고 여기에 살구행(杏)자를 붙여‘파단행’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창세기 43장에 야곱이 애굽의 바로에게 보내는 선물의 품목이 나오는데 가나안 땅의 특산물이라면서‘파단행’이 나옵니다. 지금 개역개정성경에서는 감복숭아로 고쳤지만, 바로 그 파단행이 바로 가나안 땅에만 있는 살구인 아몬드 열매였던 것입니다. 이 아몬드인 살구나무가 당시 애굽이나 다른 지역에는 없는 수종이지만 성지 팔레스틴에는 참으로 흔한 나무였고, 열매 외에 나무는 지팡이나 여러 흔한 생활도구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본문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평상시 그저 평범한 루스 땅이 야곱에게는 전혀 새로운 땅인 벧엘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왜입니까? 거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꿈을 통해서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는 간접적으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서 여기 루스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고향집이 아니라 한 데나 다름없는 외지 루스 땅에서 노숙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놀라지 않던가요.“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여기가 어디랍니까?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부모님의 슬하에서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한채 머나먼 외삼촌 집을 향해 도망하던 도중에 그만 해가 져서 불가피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채 아무데서 돌을 베개하고 누워 자던 곳이었을 뿐입니다. 가장 의지할 데 없어 쓸쓸하고 외롭고 두렵고 막막하고 비천한 처지에 놓였을 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그같은 상황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으니, 그것도 생전 처음이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야곱은 외칩니다.“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야곱에게 루스는 자신만의 하나님 즉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곳이요, 또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곳이기도한 거룩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한 것입니다.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요.“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하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20절이하에 나옵니다.“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즉 야곱은 이제야 비로서 앞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처음으로 세워지는 성소 안을 비추는 일곱 금 촛대의 형상이 살구나무로 되어있다는 것은 자못 그 의미가 새롭다고 하겠습니다(출 25:31-40). 살구나무가 하나님의 집인 성소안에 들어왔으니, 루스가 벧엘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야곱이 루스에서 본 꿈의 환상이 바로 하늘의 하나님께로 통하는 사닥다리였으며, 천사들이 이 길을 통하여 오르내리며,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친히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즉 야곱은 인생의 앞 길 뿐아니라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한 영혼의 길, 생명의 영원한 길을 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에 나오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민수기 1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중에 고라의 반역사건이 있은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며, 모세와 아론 만이 하나님께서 택한 자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지팡이 이야기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의 각 지휘관이 지닌 지팡이 12개를 각기 이름을 써서 성소 법궤 앞에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택한 자의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는 것으로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위 지파는 아론의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지요.
민수기17장 8절이하에 그 결과를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를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집어들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이 역시 곧 대제사장 아론의 살구나무 지팡이가 지성소 안에 까지 들어왔으니, 루스가 벧엘이 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더 나아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이르신 것을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을 때마다 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감탄해마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 우리의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는 봄을 맞는 것보다 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놀람은 오늘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도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전혀 뜻밖에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야곱이 가장 어려울 때, 도망가고 있을 때, 가장 외로울 때 찾아주셨기에 그 놀람과 감격은 더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과 같이 우리도 간혹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해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습니다만,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길이 되시며 진리되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로 어느 누구도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또“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라고요.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할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항상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중요한 신앙의 관점 하나는, 이미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옛날 야곱과 같이 우리가 전혀 무관심하고 있을 때, 아니 우리가 죄인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구원을 모두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를 늘 마음에 기리며 확신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야곱에게만 벧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벧엘이 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도 이를 증거합니다.“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랴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신약의 말씀에서는 이를 받아“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하)”라고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항상 우리의 인생을 마치 야곱과 같이‘옛 이름 루스를 새 이름 벧엘’이 되게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말씀에 입각한 우리의 부활 신앙을 더 한 단계 깊고 생명이 넘치는 신앙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