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학교박물관(관장 김승옥)이 최근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높은 부안(부령·扶寧) 김씨 군사공파(郡事公派) 문중의 목판 등 유물을 기탁받았다.
이번에 기탁된 유물은 문집인 지포집(止浦集) 목판(木版)을 비롯해, 문한공단권(文翰公丹券), 문한공단권(文翰公丹券) 목판(木版), 도동서원(道東書院) 중수(重修) 상량문(上樑文) 현판(懸板) 4건 등 62점이다.
부안(부령) 김씨 군사공파 문중(대표 김정환 도유사)은 5월 1일에 전북대학교박물관과 기탁협약을 체결하고 유물의 안전한 보관․관리와 적극적인 학술적 활용을 당부했다.
부안김씨 문중이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을 전북대에 맡겨온 것은 소중한 유물을 학술적 자료로 널리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이 모아졌기 때문.
현재 전주 향교 소장 전라감영 목판 5천여 점과 전국 대학 박물관 중 최다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전북대 박물관은 부안 김씨 군사공파 문중의 목판과 인쇄물 등의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기초 사료를 확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전북대 박물관은 이번에 기증받은 유물들을 문중과 협의해 조선시대 기록문화에 대한 연구에 적극 활용하고, 전시에도 적극 활용해 우리 선조들의 인쇄 등 기록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는 데 노력할 예정이다.
전북 부안에 정착한 부안(부령) 김씨
부안김씨의 중시조는 고려 평장사 문정공 김구(金坵)이다. 김구의 선대(先代)는 신라 경순왕의 태자 일(鎰)이며 그의 후손 춘(椿)이 부령부원군에 봉(封)해지면서부터 부령(扶寧 오늘 날의 부안)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 대부터 부령 김씨 집안은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중시조인 김구 역시 최씨 무인집권기부터 몽고 간섭기 초기인 충렬왕 4년까지 관료이자 학자로 활동하다가 재상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는 부안(부령) 김씨 군사공파의 대규모 묘역, 재실인 취성재(聚星齋), 율곡(1536~1584) 선생이 지은 김직손(金直孫)의 신도비(神道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재상에 오른 김구와 그의 아들 김여우, 다락에서 세상에 나오다
부안(부령) 김씨 군사공파 문중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번에 기탁된 62점의 유물은 목판 60점, 전적 1점, 현판 1점으로 집계된다.
지포집(止浦集) 목판(木版)은 모두 57점이며, 서문 ․ 권1 ․ 권2 ․ 권3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포는 김구의 호이며, 지포집은 김구의 문집이다. 본디 3권의 본권과 1권의 연보로 된 4권 2책으로 1801년(순조 1)에 간행되었다. 서문은 1795년(정조 19)에 송환기(宋煥箕)가, 발문은 1801년에 김인순(金麟淳)이 썼다. 지포집에는 김구의 시문, 왕명에 의해 쓴 응제록(應製錄), 왕세자와 왕후에 관한 정치적인 글, 원나라와의 관계를 적은 글, 김상국(金相國)과 김인경(金仁鏡)에게 올린 글, 불법(佛法)에 관한 해설과 민생안위를 기원하는 글, 그리고 비문 등이 담겨 있다.
김구는 원나라와의 외교문서 작성에 많이 참여하였으며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北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1263년(원종 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오른 후 재상의 지위인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이장용·유경 등과 함께 신종(神宗) · 희종(熙宗) · 강종(康宗)에 이르는 3대 실록을 찬수하였고, 충렬왕 때에 『고종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문한공단권(文翰公丹券)
은 16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292년(충렬왕 19) 12월에 쓴 내용을 판각한 목판본이다. 문한공은 고려 후기 학자인 김구(金坵·1211~1278)의 아들 김여우(金汝盂)를 말한다. 김여우에 대한 사료는 많지 않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 봉익대부(奉翊大夫)까지 올랐다. 이 책은 김여우의 애국심을 치하하기 위해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서 면책특권을 부여한 ‘단서철권(丹書鐵券)’이다. 이를 찍어낸 목판과 비교할 때 글자 크기는 동일하나 행간과 일부 글씨에서 차이가 나며, 표지의 배접면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경주 김씨 세보가 붙어 있어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한공단권(文翰公丹券) 목판(木版)은 모두 4점이었지만 1점(3-4판)이 유실되어 3점만 남아있다. 문한공단권과 내용이 일치하고 글씨 크기도 동일하지만, 목판의 행간과 여백이 목판본보다 넓어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점은 복각(復刻)과 편집 과정에서 판형의 크기가 달라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일반적인 목판보다 두껍고 커서 육중한 느낌을 준다. 시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목판의 형식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것과 달라 시대가 고려 혹은 조선 초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으며 연대 추정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중수(重修) 상량문(上樑文) 현판(懸板)은 가로 131cm, 세로 34cm에 이르며 판각면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도동서원은 1534년(중종 29)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김구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부안읍 연곡리-부안(부령) 김씨 군사공파 문중 선산 일원-에 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훼손된 현판에는「...□□三十四年 甲午暮□... 後學 知縣」이라는 내용이 남아 있어 훼철되기 전인 1834년(순조 34)에 중수 상량문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전북대학교 보도자료>
첫댓글 훌륭한 결정을 하신 부안김씨 군사공파 김정환도유사님을 비롯한 임원님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진에는 이종철박물관실장님이 함께 촬영하였다고 합니다...
6월초에 박물관에 답사를 군사공 도유사님과 함께 가려고 합니다.
왜 우리유물을 넘기느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것같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참 잘한결정인것같습니다. 더잘보존할수있고 널리 알릴수 있기 때문이죠. 역시 호남의 명문거족다운 결정입니다.
참고로 해당 유물에 대한 기탁 기간은 매10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나면 자동갱신되고, 유물의 대외 전시 등을 할 경우에는 문중의 허가를 받도록 했답니다.
보안면 우동리의 세덕각 보물900호도 우리가 직접 관리할 필요없이 이런 방식으로 맡긴다면 매우 좋은 것입니다.
또한, 숭지공파 모 종친님의 댁에도 보물900호와 견줄만한 문화재가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서울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힘겨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사례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므로해서 더욱 관리를 못할 바에는 이런 국가기관에 관리를 위탁하는 방법도 아주 현명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증이 아니라 기탁이란 방식이 있구요. 소유권은 언제나 기탁한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관리능력이 생겼을 때에는 다시 돌려 받을 수 있는 방식이랍니다.
예전에 모종친님께서 취성재에서 다량의 문화재를 연구목적으로 임의 반출했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자손에 의해 반출된 모든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들었습니다. 과연 어떤 방식이 우리 문중의 소중한 문화재를 잘 지키는 일일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좋은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