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금화숙 성휘에게 보냄(與琴和叔聖徽)
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찾아오심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보통사람에게 있어서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늙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이겠습니까? 작별한 뒤로 며칠 동안 성대한 뜻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엄동설한인지라 조용히 지내는 덕리(德履)가 건승하리라 생각되나 염려가 배나 됩니다.
선생의 문집은 눈이 어두워서 그 일부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으나 신도비문(神道碑文)은 대략 한 번 훑어보았는데, 내용 속에 ‘주화오국(主和誤國)’ 한 단락은 제가 눈을 가리고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초기(草記)〉에서 기록한 것을 살펴본 뒤에야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월(金寧越) 어른은 문장이 참으로 훌륭하나 일생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두 오활(迂闊)하다고 지목하니, 일을 기록한 잘못이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임진왜란 당시 왜적(倭賊)이 기미(羈縻)하자고 요청한 것은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에게서 나왔는데, 우리나라 제현(諸賢)들이 힘껏 간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명나라 황제가 강화를 허락하여 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면서는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때 경박한 무리들 중에서 간혹 서애(西厓) 선생께서 황제의 명을 쟁집(爭執)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자도 있지만 이 또한 의혹된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산림(山林)에 있어서 그 일의 전말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글이 있게 되어 결국 한 변방의 사악한 무리들의 화젯거리가 되었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초기(草記)〉내용에는 명나라에서 기미(羈縻)를 힘써 허락했다는 조항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기미로써 말을 삼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논할 것이 못 됩니다. 비문 가운데 그 말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서 서애 선생에게 어찌 털끝만큼의 손해를 끼치겠습니까마는 하늘에 계신 선생께서 아신다면 옳다고 여기시겠습니까? 그르다고 여기시겠습니까?
예전에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구양수(歐陽脩)의 비문을 삭제했다는 말을 계암(溪巖)등 여러 현인들이 옆에서 보고서도 바로잡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망녕되이 생각건대〈초기〉를 진실로 비문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국유대사(國有大事)’ 아래 몇 줄의 글은 반드시 삭제하기를 기다린 뒤에 용주(龍洲)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말을 판각(板刻)함에 있어서는 간혹 지문(識文)을 간략하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앞뒤로 힘을 다한 방백(方伯)이나 시종일관 일에 임했던 제현들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자세히 기록하여 문장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하시길 바랍니다. 말이 진심에서 나왔으니 남에게 보여주지 마십시오.
[脚註]
[주01] 금화숙(琴和叔):
금성휘(琴聖徽, 1622~1682)로,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화숙, 호는 낙포(洛浦)이다. 금개(琴愷)의 아들로, 예안에 살았다. 1660
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김응조ㆍ홍여하ㆍ이휘일ㆍ이현일 등과 교유하였다.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을 지냈다.
[주02] 선생: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중종 19)~1606(선조 39)]을 말한다.
[주03] 신도비문(神道碑文):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찬한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신도비문을 말한다.
[주04] 초기(草記):
〈월천선생언행초기(月川先生言行草記)〉를 말한다.
[주05] 김영월(金寧越) 어른: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지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을 말한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
ㆍ와운자(臥雲子)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남치리ㆍ권우 등과 교유하였다.
157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조 좌랑ㆍ사헌부 지평ㆍ병조 정랑ㆍ진주 제독ㆍ안동 교수ㆍ강원 도사
ㆍ전라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 선무이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8년에 군기시 정을 거쳐 영월 군수에 제수되었다. 도산서원
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조성당집》이 있다.
[주06] 기미(羈縻):
적국과 적당히 친선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외환을 막는 것을 말한다.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난촉부로(難蜀父老)〉에
“대개 천자가 이적을 다루는 것은 그 이치가 기미의 방책을 써서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일 뿐이다.[蓋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
而已.]”라고 하였다.
[주07] 심유경(沈惟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援軍)의 유격장군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들어와 일본군과의
화평을 꾀하였으나 강화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1597년 명나라 조정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주08]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 말:
범 충선공은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을 말한다.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범중엄과 여이간(呂夷簡)이 중간에 사이
가 나빠졌다가 뒤에 다시 마음을 합쳐 정사를 함께하였다. 범중엄이 죽은 뒤에 구양수(歐陽脩)가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
는데, “여공이 다시 재상이 되고 공도 재기하여 기용되었다.
이에 두 공이 환연(驩然)히 서로 약속하고 힘을 다해 국적(國賊)을 제거하였다.[呂公復相, 公亦再起被用. 於是二公驩然相約, 戮
力平賊.]”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범순인(范純仁)이 자기 아버지는 원한을 푼 일이 없다고 하여 이 문구를 빼 버렸다.
이 말을 들은 구양수가 한탄하기를, “내가 일찍이 범공(范公)은 스스로 평생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고 한 말을 들었기 때
문에 이렇게 쓴 것이고 그 사실이 범공의 문집에 들어있다. 어찌 아버지는 스스로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그 자
식이 지하에 있는 아버지로 하여금 원한을 풀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부자의 성격이 이다지도 다르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唐宋
八家文 卷12 資政殿學士戶部侍郞文正范公神道碑銘》.《朱書節要 卷7 答周益公》
[주09]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6~1650)의 호이다.
[주10] 국유대사(國有大事) …… 글:
정온이 찬한 조목의 신도비문의 ‘국유대사’ 아래의 글을 발췌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또한 일찍이 깊이 걱
정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상국(相國)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과는 동문(同門)의 의리가 있었는데, 서애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상국은 평생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얻은 바가 단지 이 강화오국(講和誤國) 네 글자입니까?’라고 하였는데, 글이 매우 준엄하였으니 선생의 지업을 여기에서 볼 수 있
다.[國有大事, 則亦未嘗不深憂而痛斥之. 與西厓柳相國 成龍, 有同門之義, 聞西厓在領台主和議, 乃抵書曰: ‘相國平生讀聖賢
書, 所得只此講和誤國四字耶?’ 詞甚峻截, 先生之志業, 於此可見矣.]” 하였다.
[주11]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의 호이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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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與琴和叔聖徽。
冒寒遠訪。意非偶然。在凡人。尙不敢當。況耄老垂死人歟。別後累日而不敢忘盛意也。卽日雪寒。想靜中德履珍勝。奉慮倍品。先生文集。目盲不能窺其一斑。而神道碑文。略一披閱。其中主和誤國一款。愚嘗掩目而不忍看。及考草記中所錄。然後乃知出於此。金寧越丈。文筆固優。而一生人皆以迂闊目之。記事之誤。何足怪乎。當日南賊羈縻之請。出於天將沈惟敬。我國諸賢力爭而不得。至於皇上許和。出送通信兩天使。事至無可奈何。而一時浮薄之輩。或疑西厓先生之不能爭執皇命。亦惑矣。先生在山林中。未詳其事之顚末而有此書。遂爲一邊邪黨之口實。有識者竊惜之久矣。今草記中。全沒皇朝勒許羈縻一疑。而以我國羈縻爲言。此固不足論。碑文中仍存其說。於西厓先生。豈有一毫加損。而先生在天之靈有知。以爲可乎。不可乎。昔范忠宣刪歐陽碑語。溪巖諸賢之傍觀而不爲證正。抑何故歟。妄料草記固可去碑文中。然國有大事以下數行文字。必須去之然後。可以請序文於龍洲如何。至於刊刻顚末。或可以識文略記。而前後致力之方伯。終始任事之諸賢。皆不可知。幸詳錄轉囑于能文之手。似當。言出血心。勿以示人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