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희건
우리는 왜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또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어 있길래 아직도 역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고, 또 우리 역사를 되찾자는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요?
어떠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는 파괴당했을까요?
저는 신문사 문화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발굴현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발굴현장의 교수가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도 못알아 듣겠더군요.
적어도 저는 한국의 평균수준은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때 고민을 했죠.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나더군요.
'해외에 나가 있는 관리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 외국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혹시 장관들은 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났습니다.
요즘 아주머니들이 다닌다는 박물관 대학을 국가에서 만들었을 때 제가 우리 출입기자들을 전부 등록시켰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바쁘다고 잘 나오질 않더군요.
1년동안 저는 열심히 배웠고, 비로소 본격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기자라는 직은 특수직업입니다. 때문에 누구라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의문이 나거나 모르는 것은 직접 찾아가서 질문을 했고, 개인교습도 받았습니다.
또 더욱 깊이있게 알기 위해 대학교의 사학과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결론은 우리 역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82년에서 83년에 걸쳐 2년동안 많은 교수님들의 협조 속에 일반국민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이 이 박물관 대학입니다.
기사형식은 예를 들자면, 물건을 보여주고 이 물건이 무엇이냐는 식이었지요.
당시 저 혼자의 힘으로는 벅찼기에 , 어려운 것은 대학 교수를 선정해서 3개월 내지 6개월 정도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추후 작성된 원고를 가지고 교수와 협의를 하다 보면 자기 주장의 글이기 때문에 저의 견해와 차이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럴 때는 기사를 쓸 때 교수님의 글을 살려주면서 그 옆에 감상메모와 취재메모를 같이 올렸습니다.
감상메모와 취재메모에는 일반 다른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 어느 기록에 나오는 것, 그리고 외국과의 비교를 실었습니다.
처음 이 시리즈는 6개월만 하기로 했지만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2년간 더 연장했습니다.
그 뒤 박물관 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책을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비매품으로 내놓았는데, 후에 월간조선이나 주간조선에서 정기구독자를 위해
일 년에 한번씩 주는 보너스 북으로 전국 지국장 회의에서 선정이 되어, 약 7만권이 배포되었습니다.
일반인에게 역사교육은 언제부터?
문화부기자가 되기 직전까지 저는 서양의 문학가나 화가 또는 건축가에 대해서는
어디 가서든지 폭 잡히지 않을 정도로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밖에 안가본 파리에 대해서도 누가 놀던 데는 어디이고, 어느 거리에 가면 뭐가 있다는 것까지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하라면 한국인에게도 외국인에게도 못했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 문화부 기자가 된 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문기자로서 이런 문제점을 제기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선 국사 교과서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앞선 이 들은 한국사를 어떻게 교육을 받았고, 나는 어떻게 받았으며,
또 우리애는 어떻게 배우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교부가 하도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하다 보니까 교과서를 모아둔 적이 없었더군요.
만약 6 25가 없었더라면 심판받을 공무원들이 많았었을 겁니다.
6 25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없어지고 정리가 덜 되어서 당시 공무원들이 면죄가 되었습니다.
뒤늦게나마 문교부에서도 이런 데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교과서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용산도서관이나 고서점들을 뒤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재미있는 것이 참 많이 나오더군요.
1946년에 발행된 것으로 미군정에서 발간한 국사교본이라는 조그만 포켓북을 찾아 냈는데,
이건 광복이후에 발간된 것이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 역사서가 없었겠습니까만은,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 삼국사기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처럼 고조선에 유기가 있었고,
삼국시대만 해도 많은 사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에는 아쉽게도 그 실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일반인들에게 언제부터 교재로서 영향력을 발휘했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에 촛점을 맞춘다면 역시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당교재로서 동몽 선습이 채택된 이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는 아직 가설로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사립교육기관으로서 고구려시대에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연구논문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교육기관은 오늘날까지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 때(992년)의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을 기점으로 하면,
국가적으로 공교육이 생긴지 작년에 천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천 일 년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교육적으로 대단한 나라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느 대학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대단한 교육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반교육으로서 서민들이 받을 수 있었던 시점은
조선시대의 서당교육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교재로 써야 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마련된 책이 바로 동몽선습이었습니다.
물론 동몽선습은 중국사에 치중하여 그 내용을 수록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판해야 할 충분한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한국사를 수록하여 천자문을 뗀 학생에게, 윤리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가치덕목으로서의 역사를 교육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그 때부터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인식시킨 한국사라는 점입니다.
그 때부터 쭉 이어져오다가 언제까지 이 서당교육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제 경험으로 6 25 피난 갔을 때도 시골에서 서당교육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은 1915년에 일제에 의해 서당교육에서 추방됩니다.
왜냐 하면 '한국사를 한국인에게 가르치면 안되겠다'는 일제의 결론 때문이었습니다.
끝내는 서당에서조차 한국사 교육은 추방되었고, 동몽선습은 교재로서의 역할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더 넓혀서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른바 신식교육 당시에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신식교육은 1883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키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미 뒤에서 우리를 조정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또 신식교육을 제창하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오늘날의 교육부 같은 학부가 설치하여 교재를 편찬해야 했는데,
그럴만한 능력이 당시 일본에게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일 한국 공사관에 훈령을 내려서 일본이 일본인에게 가르쳤던 신식교재들을 전부 모아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교재로서 나온 것이 국민덕본이라는 것이 있었고, 한국역사에 관한 교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사가 일본인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그 조선사의 내용이
삼국의 초기역사 이전을 무시한 삼국 이후의 한국사를 정리했다는 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고시대에 한국의 상당부분은 중국이 지배했고,
그 아래는 자기네 일본이 지배했다는 날조된 학설을 주장한 점입니다.
바로 임나일본부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이 일본의 착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명치유신 후 일본 국민들의 교육은 일본참모부에서 주도했습니다.
그들은 먼지투성이 속에 들어있었던 일본서기를 되찾아 다시 정리하여
거기서 자기들이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뽑아 확대 해석한 후 국민들에게 그 내용을 교육시켰습니다.
7C 후반의 일본
여기서 우리는 이 날조된 역사의 배경과 함께 명치유신 전의 일본의 역사가 어떠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약 350여 개의 번국(藩國)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이름이 이 지구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서기 670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이라는 명칭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스스로 일본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일본서기가 나온 720년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일본이라는 명칭을 만들고도, 자기들 스스로 일본이라는 글자를 기록에 남긴 것은 50년 후라는 얘기가 됩니다.
서기 670년은 어떤 때였습니까? 2년 전에 고구려가 멸망했고, 10년 전에는 백제가 멸망했던 때였습니다.
이것은 670년 이전에는 일본이 통일된 국가를 이룰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누구로부터 조정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때 일본은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가 쳐들어 올 것이 염려되어 대단결을 하는데, 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만 이천년 전부터 한국에서 일본으로 걸어서는 못갔습니다.
그 전에는 오끼나와와 대만이 연결되어있었지만, 그 후 오늘날과 같은 기후를 가지면서
빙하가 녹아 대륙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 이후에 간 사람들은 걸어서 간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간 것이 됩니다.
인간은 직접 눈에 보이는 곳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해 두면서 생각할 때,
부산 태종대에만 가더라도 대마도가 보입니다.
대마도에 가면 이끼도가 보이고, 이끼도에 가면 홋가이도가 보입니다.
즉 징검다리로 이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 갔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유물과 비교해 보았을 때
고조선 시대에 이미 그 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방사선측정 같은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서도 그 연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염두해 둘 것은 당시에 배를 타기 위해서는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해야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선장과 주방장 또 갑판원이 있어야 했고, 이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한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노릇도 하고 노비노릇도 했으며, 신하노릇도 해야 하는 등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해야 원양을 나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까지 가는 것은 큰 항해였습니다.
일본에 상륙을 해도 배에서 생활할 때와 똑같이 선장의 명령에 따라 모든 생활이 이루어졌을 겁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다른 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서로 집적거리기도 하고, 서로 눈치를 보다가 뭉치기도 했을 겁니다.
이것에 대한 역사서들을 보면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300개의 소국이 있었다는 것과 200백개의 소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한국에 통일된 국가가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역사가 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그 역사의 주체는 바로 대륙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겁니다.
일본이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을 만든 것에 대해 아직도 일본에서는 2개의 학설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소위 일본의 중심세력이 누구였고, 지도자는 누구였느냐 하는 점입니다.
일본에 가실 기회가 있으면 볼 것도 많지만 박물관이나 역사자료관에 한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백제의 멸망년도를 서기 660년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박물관에 걸려있는 연표를 보면, 백제의 멸망년도가 서기 663년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우리가 배운 것과는 3년이라는 공백이 생깁니다. 여기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한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역사의 전개가 660년 후에 일본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백제멸망이 왜 열도에 전해지면서 왜 열도에 있던 사람들이 백제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일본서기에 의하면 소위 천지천황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백제가 멸망하자 구원을 위해 구주로 나와 백제로 대군을 출진시킵니다.
당시 이 대군을 이끈 장군이 부여풍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백제가 말년에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바꿨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백제라는 나라 이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백가제해(百家濟海)라 해서 많은 집단이 바다를 건너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신라라는 이름은, 제일 가난하고 힘없던 신라가 살아 남기 위해 통일직전에
나라의 통일정신을 집합하기 위한 뜻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는 당시 신라보다 엄청나게 큰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이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떻든 일본이라는 이름이 태어나기 전에 왜 열도는 백제가 멸망당하자
백제왕손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백제와는 끊지 못할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백제멸망 후 백제왕손이 이끄는 군대가 백강에서 패한 해가 바로 663년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구원군이 패배한 때를 곧 백제가 멸망한 때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 패배 후 일부 국민을 싣고 왜 열도로 가서 땅을 치며,
'이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조상의 묘에 성묘할 것인가'하며 우는 소리가 왜 열도에 넘쳤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일본어가 아닌 한자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결국 고구려까지 망하니까 견신라사를 보내게 됩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로는 당시 신라의 침공이 두려워서 구주지역에
처음으로 기의성이나 대야성 같은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구(倭寇)할 때의 도적 구(寇)자처럼 해안가에 '신라구'에 관한 경고문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신라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셈입니다.
그러면 일본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요? 일본은 해의 고향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 가 보면, 일본에서는 해가 뜨질 않습니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를 보면, 일본을 지배했던 조상들은 하늘에서 돌배를 타고 내려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서술은 아직도 일본에서 생활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마을이나 성스러운 데를 가면 반야성이라 해서 돌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왜식집에 가 보면 사시미라 해서, 그것을 싸는 것이 도자기나 나무로 만든 배입니다.
조금 이름있는 고급집엘 가 보아도 생선회를 올려놓은 그릇은 역시 배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그들의 생활양식에 계속적으로 이 신화가 반영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가 나온 배경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지구가 둥근 것을 증명하는 여러가지 예 중에 배 얘기가 나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배가 저 먼 수평선에서 올라올 때, 먼저 돛대부터 보이고 조금 뒤에 배 끝이 보이고,
맨 나중에 배 전체가 보인다고 배웠습니다.
당시 인지가 덜 발달된 왜 열도의 종족들은 그런 것을 보고서,
'우리는 하늘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종족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러한 신화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종족들이 보았던 배를 몰고 온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 주인공은 일본에서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지역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반일교육을 열심히 받아서 일본에 대해 욕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지리책이나 지구본을 놓고 볼 때 지금처럼 강대하고, 한 때는 우리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일본이
매년 날아오는 태풍을 막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우리에게 피곤한 나라이지만,
지리학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는 병풍과 같은 역할을 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인이 뎀뿌라 장사를 해도 대대로 이어서 하는 이유
이제 일본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누구일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시리라 봅니다.
책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어떤 책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망이라는 일본 역사소설책입니다.
대망만 잘 읽어보아도 일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총20권에 달하는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 약 백만질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는 완간을 못하고 망했습니다.
그래서 그 출판사에 종이를 납품하던 사람이 그 출판사를 인수했는데,
현재 그 사람은 엄청난 부자가 되어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책만 잘 읽어도 일본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이 장식용으로 꽂아두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그 책을 전부 읽는다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일인들의 생활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책읽기가 처음엔 힘들었지만,
읽고 또 읽고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일본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망의 내용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전국시대는 패자(覇者)를 만들어 내는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망에 등장합니다.
그 때가 일본이 66개 번국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입니다.
전 일본이 전국시대까지 통일된 적이 없었고, 이것이 명치유신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 최초로 통일을 하게 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본은 항상 전국시대의 인물들을
국민정신의 단결을 위한 교육교재로서 활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예야스는 대망이라는 소설을 통해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
2차세계대전 이후 국민들의 절약정신을 기르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도쿠가와 시대는, 우리가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는
조선조보다도 더 엉망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엉망이었는가 하면, 예를 들어 고기를 못먹게 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 야성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일본사람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게 된 것은 명치유신 때입니다.
또 66개주를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는 자기와 같은 사람이 역사에 나올까봐 번국의 세력을 약화시킵니다.
공신들에게 봉토를 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강한 나라들을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신들로 하여금 1년은 도쿄에 와서 근무하게 하고, 1년은 지방에 내려 보내 생산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품을 도쿄까지 가져오게 할 때,
엄청난 행렬을 만들어 공신들의 우위를 자랑케 하여 공신들의 재산을 탕진하게 만듭니다.
또 호화전쟁을 유발시켜 명치유신 전까지 일본이 350개 번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막부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을 통일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요즘 훌륭하신 기업가들이 일본에 가서 감격을 하고 옵니다.
일본은 뎀뿌라 장사를 해도 5대 6대를 하고, 뭐하나 해도 계속 그것만 하니
우리는 일본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경제력에서 우리가 현재의 일본보다 열등하니까
그 이유를 우리 민족성에서 찾아 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소치입니다.
일본에 가서 넋을 빼앗기고 난 뒤 하는 말일 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먼 항해를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의 생활상태를 갖춰야 했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이 갖고있던 신분은 선장이 바꿔주기 전에는 신분의 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번주가 바꿔주기 전에는, 그리고 천황이 바꿔주기 전에는
신분의 변화를 생각할 수도 가져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한가지 일만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부자라도, 국민은 가난하다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 최소한 천 삼백년 내지 천 오 백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해도 그들의 잠재의식이 그것을 허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남아에 가서 기생관광이나 자유로이 할까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어떻게 보면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러한 국민성이 패전 후 미국을 스폰서를 잡으면서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가 맞아떨어져,
각 분야에서 오늘날 일본을 만들어 내게 된 동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측면에는 앞서 얘기한 그러한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恨의 민족인가?
938번 침략당했으면 939번 이겼기에
여기에는 역사학도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후에 여러분은 기업가도 될 수도 있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도 될 수 있겠지만,
일본을 단지 통일된 막강한 나라로만 보지 말고 1898년 이전까지는
삼백 오십여 소국가 연합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일본사람을 만났을 때 150여 년 전의 역사를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은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150여 년 전의 역사를 물어 보면 우왕좌왕하지만,
그들의 고향얘기를 해 보라고 하면 신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국가전체적인 면에서,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은 일본과 무역을 하려면 동경의 대기업하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옛날의 뿌리를 찾아가서 지방자치제 중심의 기업과 거래를 트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역사를 왜 배웁니까? 미래를 위해 배우는 것 아닙니까?
과거에 저질렀던 시행착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위해서 역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시대에 우리 한국이 938회의 침략을 받았다는 연구를 해서 모 교수가 국회의원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대두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수의 연구를 보고 상당히 놀랬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셀려면 대단한 시간을 소비했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연구는 일제시대 때 일본학자가 한국의 독립심과 자주력을 저하시키기 위해 조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망령이 되살아나서 유신에 일조를 했고, 이 사실을 뒤져서 내놓았던 자가 국회의원을 지냈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 교수와 어느 자리에서 자리를 같이 하여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침략당한 것이 구백 삼십팔번이야? 그러면 구백 삼십팔 더하기 일은 뭔지 알아?
더하기 일은 우리 민족이 구백 삼십구번을 이겼기 때문에 이 자리에 당신도 있고 나도 있는 거야!"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또 어떤 유명한 교수는 우리 역사가 한(恨)의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무조건 한의 역사이고, 이에 노래도 한이요 그림도 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만년을 살았건 이천년을 살았건 그 오랜 기간을 살면서 그 정도의 한이 없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중국대륙의 수많은 민족이 종족의 이름조차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이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글을 쓰고 우리말을 하고 사는데, 왜 한이 우리의 정서입니까? 恨이야말로 일본사람들의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한국인 교수에게 그 한을 위한 유행가를 작곡하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의 찬미' 같은 곡으로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이것은 일본 총독부 작품입니다.
술 먹고 기분 좋아서 작곡하고 작사한 것은 우리 한국인이었지만, 뒤에서 배후 조정한 것은 일본총독부 였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간에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정도의 한도 없었겠습니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한이 그렇게 많은 민족이 아닙니다. 이런 한을 우리에게서 빨리 추방해야 합니다.
한은 일본인에게 고스란히 돌려 줘야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다 있습니다.
우리 역사 바로 알자
이제는 제가 한국인으로서 최소한 손자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한국은 이렇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좀 한국적인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소양을 닦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한가지 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구구단을 언제부터 썼습니까?
제가 우리 수습기자들에게 이것을 물어보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일제시대 때 들어왔겠죠'하고 답변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이들은 학벌도 좋고 성적도 우수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라비아 숫자처럼 서양냄새가 좀 난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이 일제시대 때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보면 신라시대 때도 구구단을 했습니다.
단지 '일일은 일'이라 하지않고, '일승일 여일'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수학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때 중국에서 산수학자들이 유학을 올 정도였습니다.
하나 더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고려나 조선 때 중국에 조공한 것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욕을 하지만,
조공을 무역의 형태로 보면 상황인식이 달라집니다.
당시 중국의 영향이 컸던 점을 고려해서 오늘날의 외교와 비교해 본다면,
그 때의 외교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계속 일등만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의 국력은 세계은행이 발표한 최신자료에 의하면 세계 32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 4강만을 생각하고 우리를 한 5위쯤으로 착각합니다.
제 역사도 모르면서 심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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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성균관대 불문학과 졸업 현 조선일보 문화부장 연재물 지상박물관 대학, 생활 예절,
高僧 이야기,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외
저 서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1,2,3
출저=잊혀진 역사 http://ace9103.hihome.com/hw-h/right.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