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난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혹시 꿈속에서 들은 걸까. 침대에 누운 채로 잠시 더 기다려본다. 창을 통해 달빛이 새어든다. 얼마간 귀를 세우고 가만히 있어봐도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정말 꿈속에서 들은 걸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도 꿈은 아닐까. 실내를 가로질러 문으로 다가간다. 만약 문밖에 누군가 서 있다면,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굴까. 혹시 돌아온 걸까.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걸까. 천천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어두운 문밖엔 아무도 없다.
*
“오늘 촬영 몇 시에 온다고 했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내 어깨를 툭 치며 동료가 묻는다.
“아, 잠시 후면 올 거야.”
“아침부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으응, 그냥.”
내가 사는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은 바다와 딱 붙어 있다. 상어, 바다거북, 가오리, 펭귄들이 파란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곳. 사람들은 내 직장을 아쿠아리움이라고 부른다.
오늘 오후에는 지역 방송사에서 촬영을 오기로 돼 있다. ‘아쿠아리움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교양 프로를 제작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해저 생물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백 명 가까이 살고 있다. 방송사 제작진과 통화하는 중에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듣고 나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곳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들인 모양이다.
방송사 프로듀서는 내게 어떤 사람들이 ‘그림이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상어를 비롯한 수중 생물 사육사들, 다이버들, 그리고 얼굴이 예쁘장하고 다리가 긴 가이드와 사이보그처럼 강인해 보이는 시설 보안 요원 등을 추천해줬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 오는 방송 제작진들은 결국엔 상어에게 카메라를 집중시킨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특히 3미터가 넘는 길이에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는 ‘빅보스’가 대형 수족관의 새파란 물을 헤치고 유유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 내가 카메라맨이라도 숨을 죽이고 앵글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잠시 후 카메라에 담을 만한 곳들을 여기저기 미리 둘러보던 내가 생명 유지 장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프로듀서 일행이 카메라와 조명 장비들을 둘러메고 나를 찾아왔다.
“이곳은 생각보다 덥군요?”
악수를 건네며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처럼 말이다. 밖에서들 상상하는 것과 달리 실상 아쿠아리움이라는 일터는 그리 시원하지 않다. 물론 관람객들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서는 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돌아다니지만, 그 이면의 공간들은 끈적끈적하다거나 후텁지근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다. 처음 이곳에서 일하게 됐을 땐 직장이 시원해서 참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주곤 했지만, 그것도 조금 피곤해진 터라 요즘은 그냥 “그렇죠 뭐” 하고 넘어가버린다.
정해진 순서대로 촬영을 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그들 일행을 따라다니는 것으로 나의 일과가 시작됐다. 바다 깊이 사는 물고기들을 촬영할 땐 조명을 너무 강하게 밝히지 말아달라고, 인터뷰이들에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해가면서 말이다.
*
오늘은 바다의 표정이 어둡다. 몇 년 전 이 도시로 와서 바다를 바라볼 때면 매일 보는 바다의 표정이 사뭇 달라져서 놀라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게 됐다. 바다는 오롯이 하늘의 얼굴을 따라서 그 표정을 달리한다는 것을. 오늘처럼 거무튀튀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면, 말할 것도 없이 바다 또한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퇴근길에 차를 세워놓고 이렇게 차창 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마치 사과 파이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정작 출출해지면 사과 파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듯이 오랫동안 바다는 내 출퇴근길 풍경의 들러리 정도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한데 오늘따라 그냥 다시 한번 그래 보고 싶었다. 어쩌면 너무 새파래서 가끔은 실재하는 바다가 아니라 무슨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비현실적인 유리 속 바다만 보다가, 저렇게 적당히 우중충한 빛깔의 진짜 바다가 문득 보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모래 위를 걷다가 밀려오는 바닷물에 살짝 발을 담가보는 여자,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여자의 옆에 앉아 볼에다 입을 맞추는 남자, 교복을 입은 채로 동그랗게 둘러앉아 모래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 차창을 닫아놓아서일까. 바다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한데 어느 순간, 그렇게 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일시에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차창을 몇 번 때린다 싶더니 이내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를 피해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래사장은 텅 비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여자는 만약 내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면 오십 걸음 정도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바다 쪽을 보고 앉아 있었는데, 투명한 우산 하나만 달랑 쓴 채로 덩그러니 빗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의 물안개를 날리는 세찬 빗줄기 속에 홀로 그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빗물이 번지는 차창을 통해 보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가 거친 붓 터치로 그려놓은 유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떠나간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떠나온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저도 아니면 다만 비 오는 바다를 보는 것이 그녀의 오랜 취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차를 세워놓고 하릴없이 남의 사연이나 추측하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는 듯 손목을 들어 눈앞에 한 번 갖다대었다가 몸을 돌려 내 차가 있는 쪽으로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차 바로 앞에서 보도로 올라선 그녀는 다시 방향을 틀어 사라져갔다. 빨간색 상의에 짙푸른 바지. 그녀는 주유소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혼자서 그곳을 지키던 그녀마저 가버리자 바야흐로 비 오는 모래사장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새 어둠이 깔려 멀리 바다 쪽부터 조금씩 보이지 않게 되더니, 이내 주위가 온통 까맣게 되어버렸다.
……아 정말 덥군요. 혹시 청취자 여러분은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윙 하는 소리 때문에 녹음 스튜디오 안에는 에어컨을 설치할 수가 없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구요? 하하. 어쩌긴요. ‘땀 흘려 일하는 디제이’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아죠.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혹 어두운 바닷가에 홀로 앉아서 떠나간 누군가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쩌면 떠나간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사이에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는 ‘순전히 일방적인 사건’이란 없지 않겠습니까. 얘기가 장마만큼이나 길어졌네요.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이런 음악은 어떨까요…….
음악이 시작되자 볼륨을 약간 높이며 차를 움직였다. 디제이의 말 때문이었을까. 오랫동안 멈춰 서 있다 천천히 차를 움직이는 내 모습이 모래사장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모래를 털며 일어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번화한 도로로 나와 퇴근을 서두르며 늘어서 있는 차들의 긴 행렬 사이로 끼어들 때쯤, 좁디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연신 땀을 닦고 있을 디제이보다는 에어컨을 틀고 운전하고 있는 내가 적어도 이 순간만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기다리든 말든.
*
나처럼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 회사에서 당직을 서는 일은 그리 괴로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곳처럼 스물네 시간 생명 유지 장치가 거의 모든 일들을 알아서 해주고 있는 경우라면, 오랜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당직이란 그저 책을 읽거나 밀린 일을 처리하거나 공상에 잠기는 정도의 시간일 뿐이다. 물론 두어 차례의 정해진 순찰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익숙한 동선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상어 수족관 위의 조명이 햇빛에서 달빛으로 제대로 자동 전환됐는지 정도만 점검하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일들이다.
한밤의 아쿠아리움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당직실이 있는 곳은 윙 하는 기계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 때문에 조용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두운 수족관 통로들을 따라 돌 때면 수백 종 수만 마리의 바다 생물들이 검푸른 물속에서, 대낮과는 달리 큰 움직임 없이 고요함을 자아내는 풍경은 마치 깊은 밤 적막한 심해를 홀로 유영하는 다이버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느낌은 어두운 물 색깔만큼이나 무겁고 깊은 것이어서, 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진 시설 보안팀에 이상 유무를 전달하려 실내로 들어선 처음 몇 분간은 도무지 사람들이 사는 현실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별이상 없지?”
“그렇지 뭐.”
“대체 홍보실 사람들에게 왜 당직을 서게 하는 거야? 우리가 다 하는데.”
“별수 없잖아.”
“어서 가서 쉬어. 이제 할 거 다 했잖아.”
“그래, 수고.”
새벽 네 시. 그렇게 두 번의 순찰까지 마치고 나서 집으로 향하려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바닷가의 도로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지만, 멀리 모래사장에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내 눈에 문득 계기판의 주유 램프가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램프가 켜졌다고는 해도 남은 휘발유로 집까지는 가고도 남을 터였지만, 왠지 주유 램프가 켜지면 신경이 거슬려 나는 꼭 곧바로 주유소를 찾곤 한다.
“어서 오세요.”
주유소로 들어서는 내 차를 보고 달려온 여자. 새벽녘까지 일한 사람치고는 꽤 낭랑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가득 채워주세요.”
말을 주고받으며 얼굴을 봤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지만 퍼뜩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주유를 하는 동안 주유기 옆에서 발을 까딱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어렴풋한 기억이 뚜렷해졌다. 며칠 전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가 분명했다.
“혹시 절 아세요?”
카드를 건네주며 내가 그녀의 얼굴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임 직한, 그러니까 이십대 중반가량의 깨끗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아, 예. 며칠 전 바닷가에서…….”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
“네?”
“며칠 전 비 오는 바닷가에 앉아 있는 걸 본 것 같아서요.”
“풋.”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눈이 초승달처럼 변하며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혹시 나더러 자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조금 당황스러워 별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내게 그녀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바닷가에 혼자 앉아 있던 자기를 며칠이 지나서도 기억을 할 수가 있느냐며 다시 웃었다. 그러고는 쪼르르 사무실로 달려가 계산을 마치고 난 뒤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면서, 농담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다시금 시동을 거는 내게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일 끝났는데, 어디 음반 많은 바에다 좀 내려주실래요?”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바닷가 주유소에서 차로 이십 분가량의 거리에 있는 바의 실내에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게 됐다. 마침 당직을 서고 난 뒤라 그렇지 않아도 한잔 하고 싶었다고 하자, 그녀는 역시 내가 자길 좋아하는 것이 맞다며 또 한 번 밝게 웃었다. 잠시 후 바에 앉자마자 그녀가 바텐더에게 부탁한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댄싱 인 더 스트리트」가 흘러나왔고, 그러자 그녀는 칵테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로 한동안 눈을 감고 음악을 들었다.
세상을 향해 소리쳐봐
새로운 비트에 맞출 준비가 되었냐고
여름이 왔으니 때가 된 거야
거리에서 춤을
……
네가 뭘 입고 있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이곳에 있기만 하면 된 거야
한번 해봐, 사내 녀석 모두 여자애 하나씩 붙잡고
온 세상 여기저기서
춤을 출 거야
거리에서 춤을
나이답지 않게 무척이나 오래된 노래를 알고 있다고 하자 그녀는 어떤 남자가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노래라 자기도 듣게 됐다고 대답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그 주제로 얘기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기색인 것 같아 나는 하려던 물음을 접었다. 한데 그녀가 대뜸 나를 놀라게 했다.
“아쿠아리움 일은 재미있을까.”
“…….”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듯 눈이 동그래진 내게 그녀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차 앞 유리 한쪽에 스티커가 붙어 있던데 뭘. ‘AQUARIUM’이란 글자 밑에 상어가 그려져 있는.”
“그랬구나.”
“거기 진짜로 상어도 있어?”
“응. 제일 큰 놈은 3미터가 넘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물이랑 함께 사는 일은.”
나는 그녀에게 ‘상어라는 생물과 함께 사는 일’에 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줬다. 먹이를 충분히 주지 않을 경우 수족관 안의 다른 어류들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포악하거나 호전적인 모습은 웬만해선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얘기. 그녀는 내 얘기를 듣는 동안 내내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고, ‘빅보스’에 대해 얘기할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몇 곡의 음악을 더 신청해 듣고, 칵테일을 한 잔씩 더 마셔가며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아쿠아리움이 생기기도 전에 자신이 이 도시에 살았던 적이 있었고, 이제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어떤 남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아쿠아리움이 생긴 것이 사 년 전이니까, 적어도 그녀가 이 도시를 떠나 있었던 시간이 그 이상인 것은 분명했다.
“마마스 앤드 파파스 좋아하는 남자?”
“응. 바닷가 주유소 사장.”
“많이 사랑하는 모양이네, 그 남자를.”
“아니.”
“…….”
“참 오랜만에 왔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구.”
“…….”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그 사람을 보면 답답해.”
“그런데 왜……?”
“또 떠날 거야. 그 사람, 실은 나 말고 기다리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 난 그 사람 인생에 들러리가 되긴 싫어. 부담 주는 것도 싫고.”
‘그 사람’에 관한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쳤다. 창밖으로 희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은 칵테일을 다 비우고 바를 나오면서 그녀는 내게 함께 술을 마셔준 것과 자신의 얘기를 들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한잔 하게 되면 이번에는 자기가 내 얘기를 많이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태워다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제 버스가 다니니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날은 밝아오고 있었지만 구름 낀 하늘은 쉬이 환해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 또 비 오는 바다를 바라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당직 다음 날의 나른한 하루를 찾아 집으로 향했다.
*
딩동댕.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니, 아직 꿈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실내의 모습이 평소와 너무 똑같다. 밖엔 비가 오는지 커튼을 걷어놓았는데도 실내가 까만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초인종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간다. 만약 발소리를 크게 내면 문밖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 소리에 놀라 되돌아가버릴지도 모를 일 아닌가. 돌아온 걸까. 이렇게 갑자기 돌아온 걸까. 천천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문밖엔 아무도 없다.
*
수달이 새끼를 낳았다. 어미 수달의 산고를 곁에서 체험한 사육사는 “이런 맛에 이것들을 키운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축 늘어진 어미 수달과 꼬물거리는 새끼 수달들이 보호실에서 지내는 동안 수달 수족관은 수놈 혼자서 헤엄치게 될 터이다. 사육사는 싱글벙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새끼줄에 주렁주렁 고추를 매달아 수달 수족관 앞에 걸고는 ‘수달이 새끼를 낳았어요’라는 간판을 달아놓았다. 나는 그 모든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신문사와 방송사에 보내고 확인 전화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쿠아리움의 문을 닫는 것은 아홉 시, 관람객을 받는 것은 여덟 시까지다. 그러니까 여덟 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들어오는 관람객은 없고 나가는 이들만 있다는 얘기다. 하루 종일 사람들로 복작거리던 이곳에서, 썰물이 빠지듯 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이내 고요함을 되찾는 시간이다. 퇴근을 위해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가려면 상어 수족관을 지나야 한다. 상어, 자이언트 피시, 바다거북, 가오리들과 수를 셀 수도 없는 작은 물고기들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짙푸른 물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스스로에게 일러둔 것이 하나 있었다. 결코 수족관 물빛을 넋 놓고 쳐다보기 시작하지 말 것. 거대한 수족관에 가득 들어찬 파라디파란 저 물빛을 시선을 풀고 바라보다 보면,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느낌도 없어지는 듯싶더니 나중에는 눈을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묘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럴 땐 누가 옆에 와서 어깨라도 쳐주지 않으면 도무지 그 상황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있었네?”
누군가 어깨를 툭 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돌아보니 며칠 전 주유소의 그녀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왔구나. 주유소 일은 어떻게 하고?”
“오늘은 일 안 해도 돼.”
나는 마법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상어 수족관의 물빛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내 모습이 좀 창피해져서 짐짓 태연한 척 표정을 꾸몄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아까의 내 모습을 옆에서 오랫동안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와. 저놈이구나.”
상어 수족관 옆으로 이어져 있는 수중 터널, 그러니까 그녀의 머리 위쪽으로 거대한 몸집의 생물체가 나타났다. 빅보스는 분명 처음 마주한 상대를 완전히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는 크고 멋진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내 옆에 서서 녀석의 거만하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자긴 상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인데 맨 처음 일 초를 제외하면 무섭기보다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고 했다.
“참 이상하다.”
“뭐가?”
“저 상어. 만난 지 십 분이 지났을 뿐인데.”
“그런데?”
“무작정 따라가고 싶어지니 말야.”
“…….”
“하지만 그럴 일은 없지. 나 수영 못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본 나도 따라 웃음이 나왔다. 문을 닫기 위해 부산스럽게 정리를 하는 동안,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곳에 사는 물고기들에 관해 설명해줬다. 그녀는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족관 내부를 응시하기도 했고, 가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잠시 후 배가 고파진 그녀와 나는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내 아파트에서 피자를 주문해 맥주와 함께 먹기로 하고 지상으로 올라와 차를 탔다.
“왜 혼자 살아?”
“응?”
식탁에 마주 앉아 피자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그녀가 문득 내게 물었다.
“이번엔 당신 얘기 들어주기로 했잖아.”
“아, 그랬지.”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내가 무슨 대답이든 선뜻 하질 못하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이 되더니 화제를 돌리려는 듯 실내를 빙 둘러봤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확대 사진이었다. 파란 상어 수족관 속에서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다이버의 모습이었다.
“누가 아쿠아리움 사람 아니랄까 봐.”
“…….”
“그런데 누구야, 저 사람?”
“아내야.”
“…….”
“지금은 없어.”
“그랬구나. 실은 아까 수족관 앞에 있는 당신을 옆에서 한참 쳐다보고 있었어.”
“…….”
“내가 다가가도 모르더라. 물속을 바라보던 눈빛이 좀 슬퍼 보이길래 한참을 기다렸지 뭐야.”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젠.”
“괜찮긴. 지금 눈빛이 또 아까처럼 돼버렸는데.”
그녀는 내게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하다며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다른 얘기도 없는 데다 지난번 그녀가 ‘그 사람’에 관해 말해준 것도 있고 해서 아내에 관해 얘기해줬다. 이 도시에 아쿠아리움이 생기면서 직장을 얻은 나는 살던 도시를 떠나 이곳으로 왔고, 그렇게 해서 다이버로 일하는 아내를 만났다는 얘기. 여섯 달 동안 함께 저녁 먹고 함께 술 마시고 함께 자다가 결혼해 함께 살게 되었고, 일 년이 지나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아내가 날 떠났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아내에 관한 얘기를 한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남은 피자 조각은 식은 지 오래였고, 그사이 그녀와 나는 캔맥주 두세 개씩을 마셨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혼자 있을 때 침묵은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잠깐의 침묵도 길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없을 뿐인데도 관심이 식었거나 대화를 싫어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말없이 그녀와 마주 앉아 맥주만 홀짝이면서, 몇 번인가 나의 침묵에 관해 불평을 토로하던 아내가 떠올랐다.
“알 것 같아. 어떤 사람이었을지.”
“…….”
“당신 아내가 새로 사랑하게 됐다는 남자.”
“…….”
“아마 당신이랑 많이 다른 사람이었겠지. 체구가 당당하고, 유창하게 말 잘 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그렇겠지. 보진 못했지만.”
“아직 기다리고 있구나.”
“…….”
“돌아올 걸로 믿는 거야?”
“글쎄.”
그러는 동안 식탁 위엔 빈 맥주캔들만 남게 되었고, 그러자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집을 나갔다. 텅 빈 집안이 새삼스레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떠난 후 이 년이 넘도록 혼자서 저녁 먹고 혼자서 술 마시고 혼자서 잤는데 아직도 문득문득 이 작은 실내가 넓게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수족관 안에서 밖을 보면 어떤 줄 알아요? 처음 한동안은 갇혀 있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 같지만 나중엔 거꾸로 생각될 때가 있어요. 끝도 없이 넓은 바다 속의 작은 유리집 속에 사람들이 들어 있고, 난 그 밖에서 상어들과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오기가 싫어지곤 해요.
처음 내게 말을 걸어오던 날 아내가 말했다. 그렇게 넓디넓은 바다 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섬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내게 아내는 상어를 타고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벽에 붙은 커다란 사진 속에선 변함없이 아내가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아내는 사진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자, 한잔 더 해야지.”
어느새 캔맥주와 안줏거리를 더 사온 그녀가 식탁 위에 그것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밖에 비가 내리는 듯 그녀는 머리며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내게 그녀는 우산을 가지러 돌아오려다가 그냥 좀 덥기도 하고 해서 비를 맞기로 했다며 수건으로 긴 머리를 닦았다. 물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수족관에서 막 나온 다이버 같아 보이기도 했고, 혹은 비 오는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들어온 사람 같기도 했다.
“그땐 왜 그런 거야?”
“응?”
“비 오는 날 바닷가에서.”
“아. 그날. 그냥 추억에 좀 잠겼던 거야.”
“그 사람과의 추억?”
“응. 예전에 함께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곤 했거든.”
“그랬구나.”
“한데 이제 좀 지긋지긋해졌지 뭐야.”
“…….”
“그 사람이 너무 바보 같아서 말야. 오지 않을 사람을 잊지도 못하고. 칫.”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녀의 눈이 조금 발개지는 듯하더니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물은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대신 눈에만 송골송골 맺혀 있다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화제를 돌릴 겸해서 그녀에게 텔레비전을 보자고 했고, 곧 그녀와 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게 됐다. 그녀는 화면 속에서 우스갯소리가 나오면 까르르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맥주를 들어 내 것에 부딪치며 함께 마시자는 몸짓을 하기도 했다.
토크쇼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스르르 내 볼에 입을 갖다댔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마주한 채로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런 자세로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입을 맞추는 동안, 마치 아이가 젖을 빨 듯 내 혀를 입속에 넣고 있던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서 흐릿한 망설임의 징후 같은 것을 느낀 걸까. 그녀는 천천히 입을 떼며 물었다.
“내가, ……싫어?”
“아니.”
“그럼?”
“그 사람은.”
“나 곧 떠날 거라고 했잖아.”
“…….”
“착한 사람이야. 당신은.”
그녀는 가볍게 한 번 미소지은 뒤 내게서 몸을 떼고 식탁으로 가서 앉으며 술이나 더 마시자고 했다. 나는 음반첩을 뒤져 마마스 앤드 파파스를 찾아내 턴테이블을 돌린 후 그녀와 마주 앉았다. 바에서 들었던 노래가 흐를 때 그녀는 아마도 아내가 나를 떠난 것이 여름이 아니었느냐며,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사는 연인들에게 여름은 정말 주의해야 되는 계절이라고 했다. 한여름 바닷가는 ‘사내 녀석 모두 여자애 하나씩 붙잡고’ 거리에서 춤을 출 정도로 쉽게 마음이 들뜨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몇 시쯤 되었을까. 취기가 많이 오른 그녀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늘어진 그녀를 들어다 침대에 눕히고, 소파에 누워 잠시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다가 나도 곧 잠들었다.
*
“자, 한 잔씩들 들자구.”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이야깃소리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사람들은 반바지에 소매 없는 셔츠 등의 편한 옷차림으로 과일과 해산물 요리가 차려진 몇 개의 테이블들을 돌아다니며 술잔을 기울였고, 한 켠에선 빙글빙글 바비큐가 익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한여름에 직장 사람들 모두가 모이는 회식 자리. 실내가 아닌 바닷가에서, 그것도 회사가 면해 있는 모래사장에서 하는 이런 식의 파티가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저녁나절의 바닷가엔 사람들이 많았다. 한여름의 바닷가라는 곳은 새벽이 될 때까지도 사람들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다가 훤하게 날이 밝아올 때에야 조용해지곤 한다. 만약 누군가 한가로운 바닷가의 저녁 정취를 느끼고 싶어 왔다면 분명 짜증을 냈겠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계절에 그런 기대는 아예 갖지 않는다.
사람들의 얼굴에 조금씩 취기가 오르고,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이야기들도 끝날 줄을 몰랐다. 그사이 조용한 음악이 흐르자 몇몇의 남녀가 가볍게 서로를 안고 춤을 추었는데, 그 파급력은 대단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분위기가 되었다. 누군가 내게 춤을 추자고 하면 대번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할 것만 같아 술잔을 들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입을 맞추는 연인들, 둘러앉아 술을 마시다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함께 마시자고 농을 던지는 사내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쉴 새 없이 깔깔거리며 모래 위를 뛰어다니는 여학생들. 술을 홀짝거리며 그들 사이를 걸어 어느새 방파제가 있는 곳까지 왔다. 저 멀리 회사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모래 위의 파티장을 포함해 그 뒤로 줄지어 늘어선 휘황한 불빛들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칠흑 같은 방파제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선 얼마간 어둠에 눈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정도였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몇 번을 더 홀짝거리자 이내 술잔이 다 비었다. 조금 더 마시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다시 사람들 사이로 가서 섞여야 했기에 그냥 참기로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거대한 Y자 모양의 콘크리트 방파제들이 얽히고설킨 사이의 공간에 들어앉아 시간을 보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곳이 얼마나 은밀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지를 안다. 저 아래 발밑으로 파도가 그르렁거리며 지나다니는 모습에 처음엔 좀 겁을 먹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익숙해진다.
신기한 느낌이네. 저 위로는 하늘이 보이고, 저 아래로는 파도가 넘나들고. 망망대해에 배를 타고 누워 있는 것 같아. 만약 넓디넓은 바다 위에 당신과 내가 작은 집을 만들어 띄워놓고 산다면 어떨까? 그런데 내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 속으로 잠수하고 나면 당신 혼자 너무 심심하겠네. 혼자서 기다려야 되니 말야. 하지만 사람이 우리 둘밖에 없으니 바람날 일도 없고 좋잖아?
아내를 만나고 나서 첫 바닷가 파티가 있던 날, 이곳에 함께 누워 입을 맞추고 난 뒤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파제 틈새로 무슨 소리가 새어나왔다. 단속적인 흐느낌과도 같은, 혹은 낮은 기합 소리의 반복과도 같은 그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흡, 흡, 헉, 헉, 헉, 흡……. 아마도 내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씩 남자가 여자의 입을 손으로 막는 듯 여자의 신음 소리는 가끔 끊어지곤 했다. 얼마 안 있어 절정을 알리는 남자의 긴 탄식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마치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곧 휴대폰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
“응. 친구들이랑 바닷가에 놀러 나왔어.”
“…….”
“아니. 이제 들어가려고.”
“…….”
“알았어. 나도 사랑해.”
“…….”
“알았다니까. 끊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의 틈에서 나와 다시금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모래사장으로 돌아왔다. 밤이 이슥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한여름 밤 바닷가를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파티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고 이미 많이 취한 몇몇은 모래사장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기도 했다.
*
어둡다. 나는 지금 심해 야광 생물 수족관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고 있다. 이 녀석들에겐 낮이 없다. 환한 낮이 있어서도 안 된다.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밤낮의 주기가 없이 온통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일생을 사는 저 생물들에겐 혹 그리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밤낮의 바뀜과 같은 아무런 시간의 표식이 없으니,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이 없는 삶일 테니 무엇 또는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기억이 없어 그리움도 없다면, 진짜로 그럴 수 있다면 저들은 분명 행복하다.
내가 이곳을 걷고 있었던 이유가 생각나질 않는다. 당직을 서고 있었을 수도 있고,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다 막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향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면 한밤의 아쿠아리움을 취재하려는 방송팀을 마중하러 가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봐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 또한 시간의 흐름이 없는 삶을 사는 저 생물들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기억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솔직히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기억들 중 팔 할은 없는 것이 더 낫거나, 혹은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좁고 어두운 복도를 돌아나오자 저 멀리 넓은 실내의 정중앙 쪽으로 거대한 상어 수족관의 투명한 유리벽이 보인다. 달빛으로 자동 변환된 조명 아래에서 상어 수족관의 물빛은 낮보다 두 배는 더 깊어 보인다. 바닥에 붙어 있는 커다란 가오리들, 두둥실 허공에 뜬 비행선처럼 미동도 없이 정지해 있는 자이언트 피시, 바위에 엎드린 채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바다거북들, 그 외 수많은 작은 물고기들……. 그들 모두를 나는 검은 그림자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다.
한데 검푸른 물속의 익숙한 그림자들 사이로 낯선 느낌의 생물체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정확한 형체를 알아차리기엔 물이 너무 어둡고 거리가 너무 멀다. 유선형을 닮아 있긴 하지만 완전한 유선형은 아닌 듯하다. 새로운 해양 생물을 넣었나.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모르고 있을 리 없다. 잠시 후 그것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삼면이 투명한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상어 수족관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벽의 반대편으로 잽싸게 뛰어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로 한다. 혹여 놓칠세라 그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수중 터널을 통과해 그것과 좀더 가까운 쪽의 유리벽에 다다른다.
보인다, 조금씩. 그것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어인가. 바다에 인어가 정말로 살고 있었던 건가. 아니,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인 것 같다. 분명 여자다. 그렇게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며 어느새 내가 서 있는 유리벽 앞으로 다가와 날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아내다.
“당신, 언제 왔어?”
“…….”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왔으면 집으로 오지 않고.”
“…….”
아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유리벽 너머 물속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다이버 옷이나 물갈퀴도 없이 온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하얀 맨살로 물속에 떠 있다. 아내의 긴 머리카락과 성기에 솟아 있는 털들이 살랑살랑 물을 따라 춤을 추고 있다. 그렇게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흘리고만 서 있다. 나를 처음 만났던 날 다이버 옷을 벗고 나타나 해맑게 웃던, 그 표정으로 그냥 그렇게 서 있다.
순간 아내의 뒤쪽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온다. 빅보스다. 아내 몸의 몇 배는 됨 직한 녀석이 유연하게,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아내의 눈이 날 똑바로 응시한다. 눈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걸까. 하지만 파란 물빛으로 물들어버린 아내의 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윽고 아내가 천천히 내게서 몸을 돌려 멀어진다. 유리벽을 주먹으로 두드려본다. 두꺼운 성벽은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아내가 멀어진다. 검고 푸른 물속 저 멀리로, 상어의 지느러미를 붙잡고 사라져간다. 그래, 다시 저쪽 반대편 벽으로 돌아가면 된다. 한데 몸을 돌려 뛰려던 나는 이내 바로 옆의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튕겨져나오고 만다. 어느새 내 둘레로 두꺼운 유리벽이 빙 둘러쳐져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어두운 물이다. 내가 있는 곳은 작은 유리집이고, 저 밖은 바다다. 누굴 찾으러 갈 엄두도 나지 않는 끝없는 바다다.
*
“어서 오세요.”
퇴근길에 바닷가 주유소를 들렀을 때 반갑게 인사하는 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주유를 하는 동안 이곳저곳을 눈으로 둘러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직원에게 그녀에 관해 물어보려다 혹시나 싶어 차를 돌려 바닷가로 향했다.
지루한 장마는 언제나 끝나려는지, 또다시 투둑투둑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즈음엔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거세진 후였다. 사람들은 이미 비를 피해 흩어지고 모래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곧 떠날 것이라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말대로 다시금 이 도시를, 그 사람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한데 난 왜 그녀를 찾아온 것인가. 오랜만에 만난 낯선 말동무와 불현듯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진 것인가. 차를 세워놓고 곰곰 생각해봤지만 결국 나 스스로에게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다시 빗길을 달려 집으로 향했다.
*
딩동댕.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혹시 꿈속에서 들은 걸까. 침대에 누운 채로 잠시 더 기다려본다. 얼마간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있어봐도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정말 꿈속에서 들은 걸까. 실내를 가로질러 문으로 다가간다. 문밖에서 빗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천천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어두운 문밖엔 커다란 트렁크를 든 그녀가 서 있었다.
“놀랐어?”
“아니. 실은, 조금.”
우산을 썼지만 비가 거센 터라 그녀는 군데군데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히고 잘 마른 수건을 건네주자 그녀는 혹시 냉장고에 마실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비에 젖은 그녀와 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녀는 떠나는 길에 잠시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들렀다고 했고, 나는 잘 왔다고 했다.
“실망한 거 아니야? 나라서.”
“그렇지 않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인데.”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실은 오늘 주유소로 찾아갔었어. 바닷가에도.”
“그랬구나.”
그녀의 표정은 어떻게 보면 조금 슬픈 듯도 보였지만, 그저 담담하다고 해도 별상관은 없는 그런 쪽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사람을 다시 떠나는 것이냐고 했고, 그러자 그녀는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그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크게 상관할 것 없다고 말했다. 거기까지 얘기한 뒤 한동안 맥주만 홀짝거리며 말이 없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우리 아빠야.”
“…….”
“기다리는 건 우리 엄마고.”
“그렇구나.”
“엄마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듣질 않아. 내가 어릴 때 엄만 아빠보다 훨씬 돈 많고 키도 크고 말도 잘하는 사람에게 가버렸거든. 난 엄마를 따라가기 싫어서 아빠랑 살았지만, 그러다 답답해져서 이젠 다른 도시에서 혼자 살아. 이제 그만 좀 자기 삶을 찾으라고, 그건 사랑도 순애보도 아니고 스스로를 올가미에 묶어놓고 괴롭히는 일일 뿐이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야. 엄만 얄밉도록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말야.”
“누군가를 잊는 일에는 각자의 시계가 있는 것 같아.”
“각자의 시계?”
“응. 누구는 일 년이 걸리고 누구는 십 년이 걸리고 그러잖아.”
“그런 건가. 정말 못 말릴 정도로 불쌍한 사람이야.”
그녀의 눈가에 스르르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보면 나도 누굴 위로해줄 처지는 아닌걸 뭐.”
다행히 내가 던진 말에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보면서 아빠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가.”
“두 사람, 꼭 바다 위에 주유소를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 같아.”
“바다 위의 주유소?”
“응. 망망대해에 주유소를 지어놓고는 어느 날 배를 타고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야. 아주 가끔 다른 배를 탄 사람이 주유를 위해 들르기도 하지만,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도 기다리던 사람 때문에 잡지 못하고 언제나 그냥 떠나보내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녀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딱 들어맞는 얘긴데 미안할 게 뭐 있느냐고 말해줬다.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와 나는 오랫동안 입을 맞췄고,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소파 아래로 한 꺼풀씩 옷을 벗어 내려놓기 시작했다. 또다시 오랫동안 빗속에서 바다를 바라본 것인지 그녀의 몸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내 몸의 따스함을 남김없이 받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한 뼘도 떨어지지 않고 나를 껴안았다. 그렇게 둘의 움직임으로 푹신한 소파에 땀방울이 배어들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아까 왜 날 찾았던 거야?”
“…….”
“당신, 나 좋아하는 거 맞구나?”
“…….”
“다음번엔 당신이 내가 사는 도시로 찾아와. 하지만 조건이 있어.”
“…….”
“바다 위 당신의 주유소에 폐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면……. 당신의 시계가 다 가고 나면…….”
첫댓글 잘 있었어.. 원츄! 사람마다 망각의 시계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느 누구의 시계도 다 가기는 간다는 거지.
('' 한가하구나 ㅎㅎ
그런 내용이군... 아쿠아리움 안가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