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도 꽃을 피워 생존을 대비하는데...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시대 모두의 숙제가 된 생태 영성을 몸소 배우고 살며 함께 나아가자고 외치는
한 수도자의 체험이 진솔하고도 아름답게 빛나는 수필집
수도회 장상으로부터 생태 영성을 살라는 소임을 받고 강화도에서 생태영성의 집을 운영하며 12년 넘게 비료와 농약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조경자 수녀. 생전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선 수녀님은 수없이 검지를 호미로 찍히며 밭 일을 하면서 마침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는 흙이요 작물들이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흙을 하느님의 자취가 숨 쉬는 터전으로 받아들인 날, 하느님께서 자신을 아신다는 것을 알게 된 날처럼 행복했다고 한다. 흙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땅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길을 이만큼 걸어오게 되었는지 묻는 많은 사람에게 그저 한 발짝씩 걸어왔노라며 자신의 체험을 나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타들어 갔을 때, 생전 처음 보는 일이 생겼다. 고구마 줄기에서 보랏빛 꽃이 피어난 것이다. 너무 가물다 보니 땅속에서 열매를 키워내기 힘들어진 고구마가 씨앗으로라도 번식하려 꽃을 피운 것이다. 수녀님은 지금이 우리에게도 이런 생태적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 위기를 겪는 요즈음, 고구마에게 일어났을 간절함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수녀님이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법을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가족과 이웃과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사랑의 기억으로 기후와 주변 생명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3부에서는 노숙인들에게 밥 나눔을 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기후행동과 피켓 시위를 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전하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로 보고 깨닫도록 이끌어 준다. 기후 위기가 닥쳤는데도 위기인 줄 모르고 다른 세상 이야기인 양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거창한 활동이 아니라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초대한다.
[책 속으로]
공동체 수녀님들은 내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해주신다. “해님이 입 맞추고 갔구나!” 정말 듣기 좋은 표현이다. 내 얼굴에 태양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 손에 풀의 흔적이, 손톱 밑에 흙의 흔적이 있을 때도 행복해진다. 자연에 내어주는 내 손과 발, 내 마음에 흔적이 남는다. 물이 드는 것이다. 자연을 돌보는 우리는 서서히 자연에 물들어 간다.
48-49쪽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우리 곁에서 함께하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원리가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다. 이른 새벽부터 식은 구들장을 덥히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신 아버지의 마음에는 어머니와 우리를 위한 사랑이 있었고, 아버지 곁에 있던 내게도 연로하신 아버지 옆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
99쪽
오늘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일만 상상하다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는 미약한 행동부터 시작해야 한다. 침묵 속에서 행하는 그 미약한 행동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행동임을 믿으며, 묵묵히 피켓을 들고 싶다.
_179-180쪽
1부 땅의 자리에서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이 되어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
땅이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안다
하늘이 주신 일
땅 같은 사람
우리
나무에게 배운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
오늘이 바로 그때
말씀이 오셨다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움켜쥔 손을 펴야 할 때
2부 삶의 자리에서
어릴 적 꿈을 이루셨나요?
아버지와 나
농부의 마음이 되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다리는 마음
모든 것은 그분의 계획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담대히 파도를 타며
내 눈의 들보
그리운 자리
아버지의 집으로
너를 위한 사랑
나의 아버지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사람
신앙인의 월동 준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기다림은 그리움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3부 세상의 자리에서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하느님의 시선으로
마음으로 바다를 쓸어주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우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땅을 알아보는 순간 사랑을 깨닫는 순간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주님, 당신 백성을 기억해 주십시오
선택된 이들의 부르짖음
가난한 모습의 우리 예수님
글쓰니 조경자
노틀담수녀회 수녀. 2010년부터 강화도에 있는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에서 소임을 하다가 2022년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JPIC(정의, 평화, 창조 보전)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23년 다시 생태영성의 집으로 부르심을 받아 자연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며 피조물과 더불어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