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은 비굴이 아니라 더욱 당당해지는 것
‘있다·없다’ 삿된 견해
우치와 미망 속 성품 있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 비우는 훈련 해야
11. 네 가지 원(四願)
우리는 계속 정혜, 무념, 무상, 무주, 좌선, 삼신불
이렇게 우리 존재원리를 다양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우리는 법을 깊이 이해했으니까
원력을 세워 이것을 바탕으로 중생 교화를 하자.
말하자면 자기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자는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자본주의 체제가
자유스럽고 능력에 따라서 살아가는 시장원리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나쁜 것은 모든 것을 밖으로 밖으로 자꾸 소유하고자 하는 것,
욕망 때문에 이 자본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잘못된 방향을
사회주의로 바로잡아야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갈등과 혼란만 자초할 뿐입니다.
자본주의가 잘못되는 패해가 있다면
이것은 부처님 법으로 바로잡아 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에 의해 돈만을 목표로 살지 말고,
그 돈은 수단이고, 정말로 인간답게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인간냄새 사람냄새 나는 사회로 만들어 가면
이 자본주의가 정말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생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이 어찌 보면,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법을 공부하게 되면
최소한 수단과 목적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춘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과 목표가 완전히 뒤엉켜 혼돈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은 직장 가지고 돈벌이 하는 것도
정말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무슨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시대나 육조 스님 시대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 생활화도 강조를 하셨지만 네 가지 원(願,)을 세워 사회화도 강조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말씀하셨잖아요.
상구보리(上求菩提)가 생활화이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사회화입니다.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게 귀의해 마쳤으니,
선지식으로 하여금 네 가지 넓고 큰 원(四弘大願)을 발하리라.
선지식아, 다 함께 혜능을 따라 말하라.
가없는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가없는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 번 합창〉
이렇게 세분화한 거지요.
우리는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무상불도서원성이라고 거꾸로 했는데 같은 것입니다.
선지식아, 가없는 중생을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선지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을 각각 자기 성품(自性)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없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마음 가운데 중생을 각각 자신의 자성으로써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그 자리를 보면 바로 제도가 됩니다.
혜능 스님이 우리를 제도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뒤에 나옵니다만, 마음 밖에 아무리 선지식이 있더라도
마음 속의 선지식을 못 보면 제도가 안 됩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내면의 선지식을 봐야 한다는 말이 뒤에 나옵니다.
이 말도 그와 같은 말입니다.
그럼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를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邪見)와 번뇌, 그리고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정견(正見)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삿된 견해가 뭔가 하면 ‘있다-없다’ 하는 견해거든요.
‘있다-없다’ 하는 견해와 번뇌와 우치(愚癡)와 미망(迷妄)하는
그 속에 본각성(本覺性)이 있어요. 성품이 있어요.
사견 속에 성품이 있고, 번뇌 속에도 성품이 있고,
우치 속에도 성품이 있고, 미망 속에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견과 번뇌와 우치와 미망이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중도라고, 공이라고 보는 것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악(惡)한 것을 생각하면 악행이 나오고 선(善)한 것을 생각하면 선행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선하든 악하든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걸 알면
악(惡)이 악이 아니고, 선(善)이 된다고 그랬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견, 번뇌, 우치, 미망 그 속에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 하는 걸 알면 본각성을 보는 것과 같아요.
정견(正見)을 가져 제도한다고 하는데, 정견(正見)이 뭡니까?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고,
사견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연기현상이고, 번뇌도 우치도 미망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는 정견을 가지면 바로 제도가 되는 거예요.
이미 정견(正見)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다.
여기는 제거라는 말을 썼는데
정견(正見)을 깨달으면 우치, 미망이 변해 가지고 바로 반야가 돼 버려요.
제거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변해서 된 거예요.
우치, 미망이 바로 변해서 반야가 되면 중생이 각각 스스로 제도하는 게 됩니다.
그럼, 정견(正見)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오는 정견(正見)이 뭡니까?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는 게 정견(正見)입니다.
우리가 바른 수행을 하려면 먼저 정견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근대에 효봉 스님 같이 발심이 바로 된 사람은 이런 게 필요 없습니다만,
대체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중도연기를 바르게 이해해서
일상생활과 수행의 길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춰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견(正見)을 세운다면
화를 내거나 초조, 불안, 근심, 걱정 등 스트레스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차별하더라도
상대나 나나 본래는 연기로 존재하는 무아이니
비난과 차별도 실체가 없는 연기적 현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로 정견으로 본다면
화낼 나도 없고 화낼 대상도 실체가 없는 연기 현상일 뿐입니다.
단지, 나와 남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 착각 속에서
화를 내고 초조, 불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일상생활에서 정견으로 지혜로 보는 사람은
웬만한 스트레스는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견이라는 것도 이해한 정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을 해서 정견이 세워질 때는 이와 같이 연기, 무아로 볼 수 있는데,
급박한 상황이나 화가 극도로 나는 상황에서는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즉 순경계나 역경계에서도 자유자재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중도연기와 하나가 되어 무아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은 중도연기, 무아, 공을 이해해서
정견을 세우고 하게 되면 바르고 빠르게 향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삿된 것이 오면 바름(正)으로 제도(濟度)하고,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또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善)으로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니,
이와 같이 제도(濟度)함을 진실한 제도라 한다.
여기에 선(善)도 양변을 여읜 겁니다.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誓願)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한 것을 없앰이요,
법문을 다 배우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無上正法)을 배움이요,
위 없는 불도(無上佛道)를 다 이루기를 서원하는 것은
항상 마음 낮추는 행동(下心)을 하여 일체를 공경하며 어리석은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를 내어 미망(迷妄)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루어 서원력을 행함이다.
무상정법(無上正法)은 양변을 여읜 겁니다.
여기에서 항상 하심(下心)을 행하고, 일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굴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니고, 그 자리가 실체가 없고 공인 줄 알면 첫째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면서 굉장히 당당해져요.
왜냐면 남하고 비교해서 나보다 조금 나은 사람 앞에 가면 위축되고
또 나보다 못한 사람한테는 교만심도 내고 이러거든요.
그런 게 없어지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나 못한 사람 앞에 항상 당당해집니다.
그리고 당당해지면서 굉장히 겸손해집니다.
항상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자비스럽고 이해심 많고 친절해지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2007. 01. 30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