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氣一元論
정의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서 본체의 ‘이(理)’와 현상의 ‘기(氣)’가 별개의 존재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임을 주장하는 이론.
내용
이기론에서는 이와 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기초적인 중심 문제의 하나이며, 크게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와 기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은, 이와 기는 뒤섞여도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理氣不相雜)이며, 동시에 둘 사이를 갈라서 나누어 놓을 수도 없는 것(理氣不相離)이라는 상반된 규정이다.
이 두 규정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 이와 기는 인식 과정에서는 개념적으로 서로 ‘구별’할 수 있지만, 존재의 차원에서는 하나의 실재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와 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더라도 두개의 존재가 함께 있는 것이라는 입장에 서면 이기이원론이 되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다른 양상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에 서면 이기일원론이 된다. 따라서, 이기일원론에서는 이와 기 사이에 앞서고 뒤서는 것[先後]이 있다거나, 이가 기를 낳는다는 관계로 파악하는 이기이원론적 입장을 철저히 거부한다.
정자(程子)는 성(性)과 기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지 못한 것이요, 기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다.”면서 성과 기의 일체성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도 “기가 아니면 이도 머물 곳이 없다”고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기론을 집대성한 주희의 경우는 이와 기가 어느 한 쪽이 없이 다른 한 쪽만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기는 확실히 두 가지 존재”라고 이기이원론적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이와 기의 일원적 통일성을 주장한 이기일원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명나라 때의 나흠순(羅欽順)을 들 수 있다. 그는 주희의 이기이물설(理氣二物說)의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이는 기에 의거해 수립하고, 기에 붙어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이가 기에 의존해 통일된 존재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인식에서 이와 기의 구별이 필요함을 인정해, 이는 기에 나아가 인식하는 것이지만 기를 이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나흠순의 영향은 16세기 전반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항(李恒)은 “심·성과 이·기는 혼연한 하나의 존재”라고 이기일물설의 일원론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은 “기의 바깥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다스리는 것(氣之宰)”이라 면서, 이가 기의 밖으로부터 와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다스린다는 것은 기의 작용에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규정해 기 중심, 곧 주기론(主氣論)의 이기일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황(李滉)은 서경덕이 <비이기일물설 非理氣一物說>에서 말하는 “기이하고 기이하며 오묘하고 오묘하다.”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이기일물설에 빠진 것이라 비판하면서, 나흠순도 같은 입장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이 이·기를 분별하는 입장에 반대하면서, “이·기는 오묘하게 결합한 가운데 혼융(渾融)한 것”이라고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이(李珥)의 경우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틈이 없어서 원래 서로 떠나지 않았으니 두 가지 존재(二物)라 할 수 없다.”라고 이기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라 서로 떠날 수 없으니, 이와 기는 하나다.”라고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와 기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이·기의 오묘함(理氣之妙)’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를 발동하는 것(發者)이라 하고, 이는 발동하는 까닭(所以發者)이라 하여, 기가 없이는 발동할 수 없고(不能發), 이가 없이는 발동이 없다(無所發)라 하여 어느 한쪽이 결여될 수 없는 통일체로 인식하고 있다.
이기일원론은 조선 중기에는 서경덕·이이 등에 의한 주기론적 입장에서 이를 기 속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는 기정진(奇正鎭) 등에 의해 유리론(唯理論)의 입장에서 기를 이 속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기정진은 이기일체론을 전제로 하면서, 기를 이와 상대[對擧]시키는 것은 성현의 말씀이 아니라 하여 이기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리고 기를 이 속의 일이요 이가 유행하는 데 손발 노릇 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이기일원론은 본체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통일시켜 일체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가치론에서는 이이의 경장론(更張論)처럼 현실과 이상의 이원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적극적 관심을 지닌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한말 위정척사론의 경우처럼 이상을 현실화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이상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수양론적 도학의 학풍에 비해 능동적인 현실 참여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단칠정[ 四端七情 ]
4단이란 맹자가 말한 것으로 인간 본성이 선함을 설명하는 예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을 말한다.
7정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용어로서 희노애구애오욕(憙怒哀懼愛惡欲)등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일컬은 것이다.
즉 4단이 도덕적인 감정이라면, 7정은 일반적인 감정(욕망까지를 포함하는 전반적인 것)이다.
■ 조선 중기 기대승과 이황 사이의 사단칠정논쟁 사단칠정논쟁이란 조선 명종 때인 1559년부터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과 고봉 기대승 선행이 8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
원래 주자(朱子)는 '이(理)'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이치로서 '기(氣)'의 활동 근거가 되는 것이고, '기(氣)'란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사물을 낳는 도구라고 설명하였다.
4단7정(四端七情) 논쟁은 퇴계 이황이 정추만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일부 구절을 수정하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자, 고봉 기대승이 퇴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靑氣之發)"고 하여, 선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인간감정의 총칭인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라고 구분하고(理氣互發說), 이(理)를 기(氣)의 우위에 삼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를 주장했다.
이에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인간감정인 4단과 7정은 칠정이 4단의 범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감정의 발현에 理와 氣를 구별할 수 없고, 理와 氣가 함께 작용하여 발현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1559년부터 약 8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후에 퇴계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계 성혼과 그에 반대하는 율곡 이이 사이의 논변으로 전개되었으며, 급기야는 조선 성리학자 대부분이 이 논의에 참가함으로써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퇴계 계열의 '주리파'와 '기발일도(氣發一途)'를 주장하는 율곡 계열의 '주기파'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4단7정에 대한 논란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 냈으며, 조선 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심리적 인성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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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선도 이론서를 읽을 때 이기일원론을 알아두면 이해가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