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정희 별세
배우 윤정희씨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한국영화의 전설이 또 한 분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10여년전 감상한
그녀의 마지막 영화" 시"가 떠올랐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 과 '시'를 연달아 본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삶은 죽음의 고통보다 무겁다는 것이다.
'시'라는 간결하며 문학적인 제목의 표면적인
인상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반면'시'
라는 울타리 안을 채우는 것은 아름다움도
간결함도 아닌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를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 '고통'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것' 에서 '친절한 금자씨'까지 독립된 별개의 작품을 복수3부작
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엮는것처럼 시간이
흐른뒤 이창동 감독의 작품관을 되돌아 볼때
그의 작품인 밀양과 시는 완벽히 불완전한
인간의 삶과 고통을 다룬 '비극' 2부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라 케이이치 감독의 '컬러풀'이 전혀 컬러풀
하지 않은 절망적인 청소년과 그 가족의 삶을
길게 스케치 하며 제목의 아이러니를 주었듯이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시는 극중 주인공인 미자
에겐 이상이자 견뎌내기 힘든 현실의 도피처다.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꽃과 햇빛이 등장한다.말투는 올바르고 걸친 옷도 화려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주어진 일인분의 힘겨운 삶은 그녀의 화려한 겉모습 마저 치부를 감추고픈
인간의 나약함으로 보이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인 밀양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탓할 가해자와 이를 구원해줄 종교가 있었다.그러나 가해자 입장의 미자는 그의 억울함을 속으로 삭힐뿐 억울함을 토로할 지인도 이를 구원해줄 존재도 없다.
그러니 그녀의 모습이 더욱 화려해 질수록 챙이 넓은 모자의 그림자 아래 숨겨진 그녀의 얼굴에는 외로움과 슬픔만이 가득한 여린 존재가 보이는 것이다.
'시'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그들은 번역된 자막으로 이 영화를 느끼고 이해했을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대사가 담고
있는 한국적인 정서와 느낌 그리고 은유를 번역된 자막에 담는건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영화 종반부에 등장한 미자의시 '아네스의 노래
'가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간 '그분'을 추모하는 이중.
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은 한국인만이 느낄수 있는 독특한 감동중 하나이다.)
■세상을 향한 그녀의 작은 외침■
영화 ‘시’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윤정희).그녀는 꽃 장식 모자부터
화사한 의상까지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다.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시상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설렌다.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찾아오면서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시(詩)가 죽어가는 시대속에서 살고 있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도 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ᆢ이창동 감독ᆢ
■<시>에서 만나는 특별한 조연들■
하나, 김용택 시인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시>에서 미자가 다니는 문화센터의 시 강사는 바로 ‘김용택’ 시인이다.
우리 나라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섬진강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김용택 시인이 영화에
도전한다. 실제 시인이 시 선생님으로 출연하는 것. 이것만큼이나 가장 확실한 캐스팅이 어디 있을까.
생애 첫 연기에 도전하는 김용택 시인의 유쾌한 ‘시’ 강좌가 있다.
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김희라
김희라는 <마부> 등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故김승호의 아들.
1969년 영화 <독 짓는 늙은이>로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연예인 2세 시대를 화려하게
열었던 장본인이다. 이후 김희라는 <깃발 없는 기수> 등의 수많은 영화를 통해,
김희라만의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 김희라는 특히 액션연기의 일가를 이루며
박노식의 뒤를 잇는 액션 명배우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 <시>에서 김희라는 미자가 간병하는 ‘강노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맡은 배역은
한마디로 ‘무력해진 ‘마초’이다. 권위의식, 지배욕, 남성주의를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 이창동 감독이 김희라를 택한 이유이다.
셋, 맛깔 나는 연기 ‘안내상’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배우 ‘안내상’. 그는 오랜 무명 생활을
벗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미 영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홍종두의 친형역할로 이창동 감독과 호흡을 맞춘 안내상이 다시 한번 이창동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요즘엔 TV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로 수많은 아줌마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그가, 영화 <시>에서 또 어떤 맛깔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윤정희 약력■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윤정희는 조선대학교
영문학과 재학중이던 1966년 합동영화사의 신인
배우 공모전에 응모한 1,200명 중 단 한 명의 입상자가 되어
충무로에 입성한다.
그녀의 첫 영화는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1967).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20만 명이 넘는 큰 흥행을 기록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한 윤정희는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수상한다.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상징이었던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남정임, 윤정희) 중 가장 긴 기간 동안 활동했던 윤정희는,
우리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이력을 지닌
배우 중 한 명일 것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결혼한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던 고인은, 60대 중반인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로 칸 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습니다.
■영화 시에 등장하는 시모음■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 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창동감독의 시 아네스의 노래----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시던
엄마 기억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 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내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퍼내고 퍼내어도
자꾸만 차 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그 것, 그 쬐끄만한
물푸레 나뭇잎 만지는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조영혜
십일월
당신의 등에선
늘 쓰르라미 소리가 나네
당신과 입술을 나누는 가을 내내
쓰르라미 날개를 부비며 살고 있네
귀뚤귀뚤 나도 울고 싶어지게
쓰르람쓰르람
눈부비며 살고 있네
이제껏 붉던 입술은
낡은 콘크리트 벽안의
박제 된 낙엽처럼
바시시바시시 떨고 있네
지난 여름 손톱에 핀 봉선화 져 가도록
당신의 등에서 자꾸 쓰르라미가 울고
귀뚤귀뚤 나도 따라 먹먹해져서
당신과 포개어 가만히 누워 보고 싶네
-조영혜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하나 짓네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 비평사, 1997
장미 가시의 이유
날 훔치려 말아요
내 안의 가시
온 몸 소름으로 돋는 날
더딘 맥으로 밀어내는 저 대궁의 우울
자결을 꿈꾸는 검붉은 미소 보아요
내민 손 거두어 주세요
수레바퀴는 구르기만 하던 걸요
어여쁘단 말로
꺾으려 하지 말아요
아프단 말 대신 자꾸 키워지는 가시
붉은 입술을 지켜야 하는 필사의 무기
소리 없는 눈물
그건, 무던히도 견디어 준 인내의 꽃
모르나요
겹겹의 붉은 물결이 잠시 흔들리는 것은
단지 내 안의 오월 탓이란 걸
이젠 정말
비가와도 가지려 하지 말아요
수레바퀴는 그냥 구르기만 해요
-조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