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예산 본당 주임신부/ 로베르 리샤르/ 이동현(李東鉉)
(1950년 9월 26일, 대전 목동수도원에서 순교 - 총살)
이 창재
나는 1949년 9월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국민(초등)하교를 졸업하고 예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예산읍 교남동으로 이사하였다.
나는 신양공소에서 예산본당으로 왔으니, 우선 매일 등교하기전, 아침(새벽)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다.
본당 신부님은 나를 무척 사랑하셔서, 아버지 없는 나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방과후에도 성당 마당에 가서 놀았고 본당 신부님과는 부자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신부님께서는 나를 크게 인정하시어 주일학교(초등 학생반) 선생으로 임명하셨다.
1950년 학기 변동으로 우리는 6월에 2학년으로 진급하였는데,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은 함락되었고 경찰은 철수(후퇴)하니, 학교도 문을 닫아 매일 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만났다. 인민군이 오기전에 피난을 가야 하는데 신부님은 그냥 성당에 계셨다. 신부님은 프랑스 빠리외방선교회 소속이신데 우리말을 아주 잘 하셨다.
‘신부님, 인민군이 오기전에 피난 가셔야지요?’
‘교우들이 다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니?’
‘저희는 상관 없지만 신부님은 피난 가셔야 한대요’
‘공산당은 인민이 모두 노동을 해야 한다 하니까, 나도 노동을 하면 되지, 나도 열심히 노동을 할거야, 나도 교우들 처럼 여기서 노동하며 살거야’
드디어 우리 예산읍에도 인민군이 들어왔고, 그 후 신부님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인민군은 미군 폭격기가 피해가는 십자가 종각이 높이 달린 성당을 접수해 성전은 내무서가 되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 없는 외로운 자식이 되었고, 아버지(신부님)의 행방조차 알길 없는 가운데 매일 찾아오는 미군 폭격기를 반기며 그 지겨운 여름을 보냈다.
다행이 우리반에 <이준>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서로 죽이 맞아서 매일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는 서울에서 해방후에 예산에 내려와 과수원을 하는 집 아들인데 토박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어찌나 꼼꼼한지 노트 필기 속도가 느려서 매번 나의 노트를 빌려가는 통에 나를 극진하게 대하는 친구였다.
이준이네 과수원은 읍내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언덕에 있었는데 과수 그늘 아래서 미군 전투 폭격기를 맞이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준이도 나처럼 외 아들이고, 어머니가 보통 시골에서 보는 부인과는 달랐는데 아들 친구인 나를 자식처럼 대하고 때 마다 맛있는 음식도 주셨다.
인공 3개월이 지나고 국군이 돌아 왔으나 우리가 살든 고향은 이미 살아졌고, 살벌하고 무섭게 변하였다. 그 정든 고향은 영영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
페허가 된 우리 성당, 다시 볼 수 없는 나의 아버지(신부님), 백사장에서 학살 당한 우리 본당 윤갑수 회장님, 아버지와 형님을 잃은 동창들, 오! 산산이 부서진 나의 아린 가슴, 살아진 나의 고향이여! (2007년 6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