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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진강 물소리
곡성(谷城)은 골짝나라다. 오곡면, 죽곡면, 석곡면 등 곡자(谷字) 이름의 마을이 많다. 곡성 북쪽에는 섬진강이 동으로 흐른다. 강북 상귀리의 635m, 강남 신기리의 753m 높은 산 사이의 강은 물살이 빨라 흐름을 들을 수 있다. 섬진강 발원지는 전북진안군백운면신암리의 데미샘이다. 임실, 장수, 진안군이 나뉘는 지점이다. 섬진강은 곡성 바로 동북쪽에서 요천과 합류해 동남쪽의 구례로 흐른다. 곡성에서 옥과로 가려면 동악산 북쪽의 섬진강을 따르든가 남쪽의 60번 지방도를 걸어야 한다. 우리는 섬진강 길(840번 지방도 쪽)을 택했다.
숙소 바로 근처의 <달빛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한 답사자들은 8시 이전에 출발했다. 곡성읍내를 10여분 지나면 곡성 성당을 만난다. 천주교 신자인 김 사장 부부가 뜻밖의 성당을 보더니 큰 관심을 보였다. 성당 입구에는 정해박해진원지라는 표지가 있었다.
2. 안개 속의 산책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멋진 840 지방도보다 약간 남쪽에 곧게 뻗은 자전거도로가 있다. 답사자들은 안개 자욱한 자전거 도로를 걸으며 아침의 신선함을 가슴 깊이 마셨다.
“이런 길을 조성했다니 곡성, 괜찮은 고을이네.”
“아마도 옛 철길 아닐까?”
“곧게 뻗은 것을 보니 그럴 것 같다. 지난번에 걸은 전주의 ‘바람 쐬는 길’도 철로를 복개한 길이었잖아.”
이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마침 산책 나온 주민을 만나 검암이 물었다.
“아저씨, 이 길이 옛 철로 맞습니까?”
“그러지요. 기차 다니던 길을 덮은 거구만요.”
이번 답사는 ‘섬진강 꽃길’이라는 말에 여성들이 많이 참가했다. 지난해 3월 중순, 구례-하동 순례구간은 매화가 만발했는데 그때도 여성 순례자가 많았었다. 올해의 구례 곡성 구간은 벚꽃이 만발했다. 고요한 시골에서 안개 속을 걸으며 나는 고교 시절에 배운 헤세의 시(Im Nebel)가 생각났다.
3. 걸을 만한 840 지방도
“저기를 봐, 매우 오래된 다리 같잖아.”
좁은 냇물을 건너는 다리는 기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 검게 변색된 시멘트가 오래된 다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산책로를 한 시간쯤 걸으면 자동차 도로와 합류한다. 한시간 걸으면 쉬는 것이 ‘순례자 건강 수칙’이다. 답사자들은 마침 정자를 만나서 충분히 쉬었다. 그들은 현수막을 펼치고 인증사진을 찍은 후 다시 출발했다(09:20).
차가 많지 않은 도로이므로 걷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바로 옆에 섬진강이 흐르므로 경치는 더 좋다. 30분 쯤 가면 청계동 계곡 입구다. 답사자들은 입구의 동악산 등산안내판을 보면서 잠시 쉬었다. 동악산 고도가 749m란다. 그런데 인터넷 지도는 753m로 되어 있다. 전라남도는 섬진강 길가에 거리표지 말뚝을 박았다. 말뚝에는 하구(기점)부터 하천 거리 84km 지점이라 표시되어 있었다.(10:00)
올해는 유난히 봄이 일찍 찾아왔다. 평지에는 3월말인데 벌써 벚꽃이 다 졌다. 그런데 이곳은 산골이라서 아직도 꽃을 볼 수 있었다. 김 여사는 분홍색을 자랑하는 멋진 벚나무를 발견하고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3시간 가까이 걸어서 입면 표지석을 만났다. 그 고을청년회가 세운 붉은 색 표지석에는 멋진 필체의 입면송(立面頌)이 새겨져 있었다. 20분 쯤 가면 ‘전망 좋은 곳(함허정)’ 안내 화살표를 볼 수 있다. 섬진강은 도로 멀리서 급하게 굽어지면서 이곳에 너른 지역을 만들었다. 벌판에는 멋진 수형의 나무가 있는데 머리에는 까치집을 이고 발치에는 아담한 정자를 두었다. 안개에 쌓여 끝이 안 보이는 벌판은 새로 나온 푸른 잎으로 덮여 있었다.
4. 섬진강 둔치의 모래밭 산책로
함허정은 도로가 다시 섬진강을 가까이 만나는 곳에 있는 정자다. 남원시와 순창군이 만나는 지경으로 지명은 제월리다. 답사자들은 강가의 벤치에 앉아 쉬었다. 명함에 ‘세계가 궁금한 여자’라 새긴 노 작가는 함허정이 궁금한지 정자까지 올라갔다. 피곤이 뭔지 모르는 철인이다. 길가다 쉴 때는 보통 7, 8분 쉰다. 답사자들은 평소의 두 배 이상인 17분을 쉬었다. 다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굽이쉼터’를 만났다. 중장비가 쉼터를 조성 중이었다. 강의 둔치에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이미 4시간 반을 걸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힘들지만 부드러운 강변길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연지마을 버스정거장을 지나서 무창리의 토끼굴을 통과하면 옥과면소로 인도하는 다리를 만난다. 다리의 난간에는 심청 설화의 그림이 주조되어 있다. 강변은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했다. 올해는 봄이 급작이 찾아와 꽃들도 순서 없이 피는 듯하다. 곡성에는 심청 설화의 원형이 실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곡성 땅에 장님 아버지를 둔 효녀가 절에 시주되었다. 효녀는 섬진강 뱃길로 중국 양자강 어귀 보타 섬에 있는 좋은 집에 시집가 귀인이 되었다. 이 효녀의 공덕으로 아버지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다.
5. 풀리지 않는 의문: 충무공이 내륙으로 간 이유?
잠시 후 보이는 옥과초등학교는 운동장을 인조잔디로 잘 꾸몄는데 어느 도시 학교 못지않았다. 옥과 읍내는 매우 조그만 마을로서 한가했다. 그러나 상점들은 상호의 글자를 오색으로 멋지게 꾸미고 있었다.
이 조그만 고을에 충무공은 왜 들렀을까? 출발할 때부터 품은 의문이다. 나는 이 의문을 풀어 보려고 가설을 설정했다. “이순신은 삼도 수군통제사를 다시 제수 받고 고민했다. 함선과 수병이 없는 해군의 참모총장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빨리 수군을 재건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병사를 모을 만한 고장을 가야 한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궤멸되어 경상도 쪽 전라도 남해안은 일본군이 석권했다. 갈 곳은 내륙이다. 내륙도 여러 곳인데 어디를 먼저 갈까? 그곳은 곡성이다. 왜냐하면 곡성은 구례에서 가깝고 임진년에 의병이 일어 난 고장이므로 주민들의 호응이 클 것이다.”
충무공은 이런 생각으로 우선 곡성에 갔을 것이란 가설을 설정했다. 나의 생각을 들은 김 사장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중국어 교관을 3년간 했기에 충무공에 대해 과문하지는 않은 편이다.
“글쎄, 이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야.”
“옥과면소에 가면 월파관이라고 있데. 여기서 월파 유팽로가 의병을 일으켰어. 이 사실을 충무공이 알지 않았을까?”
6. 의병의 고을
유팽로(柳彭老 1554-1592)는 합강리(옥과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생으로 외눈이다. 성균관 박사로서 왜란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3회 올리고, 권력 비리를 폭로하는 직언을 자주하여 미움을 사 학유로 좌천되었다. 임란 발발로 낙향해 곡성, 담양, 순창에서 의병을 모았다. 당시 순창에는 고을을 점령해 일본에 항복하려던 기병 200, 보병 300 규모의 반란 토적단이 있었다. 유팽로는 책사다. 그는 그들을 감화, 설득, 교화하여 의병으로 만들었다. 임란 최초의병(1592.4.20.)이다. 옥과에서 전라도 최초로(4.25) 창의 격문을 발했다. 그는 양대박, 안영 등과 담양에 집결해,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임진년 7월10일 2차 금산전투에서 순절(29)했다. 충마가 장군머리 물고 3백리 밤길을 달려 합강리까지 가서 부인에게 건네주고 죽었다. 부인 원주김씨와 마을 사람이 말을 송전리에 묻으니 그 무덤을 의마총이라 한다.
청계 양대박(梁大撲 1544-159 2)은 유팽로와 이종 간이다. 그는 사수곡(사 시암골, 율사골, 묵방골) 생이다. 지금의 곡성 청계동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6월25일 호남 첫 전투(임실 운암전투)에서 왜군 1,200을 섬멸했으나 과로로 진중에서 병사했다.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은 1558에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임란이 발발했다. 60 노구로 고향인 전남 장흥과 담양 등에서 의병 7,000여명을 규합했다. 7월9일 방어사 곽영과 좌우익이 되어 금산성 5리 밖에서 진을 치고 기병 수백으로 토성을 공격했다. 석양에 기술자 30명이 성문을 파괴하고, 활과 진천뢰로 성중의 창고와 야적장을 태웠다. 7월10일 추촌 앞산에 결진하여 기병 800으로 서문을 공격했다. 곽영은 사직당 뒷산에 결진하고 관군은 북문을 공격했다. 일본군(고바야카와)은 북문의 관군이 허술함을 집중 공격하니 선봉장 영암군수 김상헌이 도주했다. 뒤이어 방어사 곽영도 도망했다. 관군 패전 소식에 의병들이 동요하니 고경명이 격려, 독전하다가 차남 인후(32)와 함께 순절했다. 좌부장 유팽로에게 “나는 말을 잘 못 타니, 달려가라.” 하니 유팽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가겠습니까?”하고 싸우다 안영(28)과 함께 순절했다. 안영은 남원 생으로 양자징의 사위이다. 양자징은 양산보(소쇄원 건립)의 아들, 김인후의 사위이다. 전쟁이 나자 서울 친정에 계신 모친을 찾아가다 길이 막혀 유팽로와 의병을 도모하고 고경명의 종사관이 되었다. 담양 고경명, 곡성 유팽로, 나주 김천일(또는 김덕령, 양대박)을 호남 삼창의(湖南 三倡儀)라 칭한다.
7. 충무공이 옥과에 간 진짜 이유
옥과면소에 도착한 선두는 주민에게 갈만한 식당을 물었다. 전화로 안내 받은 답사자들은 도착하는 대로 하나 둘씩 <풍성식당>에 모였다(14:50). 스마트폰으로 상경하는 기차 시간을 조회하니 곡성에서 무궁화 16시53분발이 있다. 2 시간의 여유가 있다. 식사하고 버스타고 가면 된다.
김 사장은 금오랑이 제기한 의문을 풀고 싶었다. 그는 상경하여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답을 찾아 금오랑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래는 메일의 내용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받고, 옥과를 들른 이유는 임진년 초기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당시의 지휘부를 다시 규합하고자 함이야. 충무공은 노를 젓는 격군과 싸울 병사를 모으고 군량미와 탄약을 구해야 했어. 왕은 이순신에게 의무만 주고 쌀 한 톨 지원하지 못했지. 이순신은 수임 당시 현지에서 따르는 9명의 군관과 함께 출발했지. 옥과현에 들어 갈 때 옛 부하 이기남을 만났어. 현에서 정사준, 정사립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도 만났던 거야.>
금오랑은 이 편지를 받고 의문이 상당히 풀렸다. ‘통제사를 수임한 이순신은 우선 자기의 옛 부하들의 소재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다행히 몇몇의 현황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기남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기남(李奇男)은 전라좌수영 선소(船所)에서 만든 거북선(左水營龜船)을 타고 처음으로 출격한 돌격장(突擊將)이다. 그는 도승지 이사관의 아들로서 광산 사람인데 순천에서 살았다. 한산도 견내량 해전에서 왜선 1척을 깨뜨리고 수급 일곱을 베었다.
송대립은 여산 사람으로 증참판 송관의 아들이다. 대립, 희립, 정립 삼형제가 의병을 모았다. 정유년 3월 이순신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일본 합대 수십 척과 보성 땅 예진에 침범하니, 최대성, 전방삭, 김덕방과 함께 싸워 크게 이겼다.
정사준은 선전관 증판관 정승복의 아들이다. 경주 사람으로 임진년 이후 이순신의 휘하에서 조총보다 우수한 총통을 제작했다. 송대립은 여산 사람으로 증참판 송관의 아들이다.
통제사 수임 후 진도 벽파진까지 가는 8월의 행적을 보자.
8월 5일(일기), 압록강원에 도착하여 말을 먹이고,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을 인수받았다.
8월 6일(일기), 옥과에 들어서니 구례가 점령되었다는 소문에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현에 들어 갈 때 옛 부하 이기남을 만났다. 현에 이르니 정사준, 정사립 형제가 마중했다. 송대립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일기에 없는 내용)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났다.
8월 7일(일기),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했다. 순천으로 향하던 중 선전관 원집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들었다.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말 세필과 활과 화살을 빼앗아 왔다.
8월 8일(일기), 새벽에 강정을 떠나 부유창(순천 주암면 창촌리)에서 이침밥을 먹었다. 병사가 불 지른 곳이다. 광양 현감 구덕령, 나주 판관 원종의가 이순신의 도착을 알고 피했다. 이순신이 전령을 보내 데려왔다. 저녁에 순천성에 이르니 중 혜화가 알현하므로 의병장으로 임명했다.
(일기에 없는 내용) 옥구 군수 김희온을 만났다. 관리를 만남은 곧 병력을 모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과 같다.
8월 9일(일기), 순천을 일찍 떠나 낙안으로 가니 백성들이 환영하면서 병마사가 관청과 창고를 태우고 물러가서 백성들도 흩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에 길을 떠나니 길가에 늙은이들이 술을 가지고 다투어 바쳤다. 받지 않으면 울면서 권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되어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일기에 없는 내용) 낙안에 이르니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등이 가담했다. 빈손으로 시작한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사,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전투 장비를 거두어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8월 18일(일기) 회령포(회진)에 갔다.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와 보지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장계), 이순신은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우었다.
8월 19일(일기), 배설이 교서에 숙배하지 않아 대신 그 영리를 곤장 쳤다.
8월 20일(일기), 회령포구 앞이 좁아 이진(해남군 북평면 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4일(일기), 도괘 땅에서 아침밥을 먹고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겼다. 바다 위에서 잤다.
8월 26일(일기), 임준영이 말을 타고 와서 “적병이 이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8월 28일(일기), 적선 8척이 들어와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들러 물리쳤다. 갈두(해남군 송지면)까지 갔다가 회항해 진을 노루섬(장도)으로 옮겼다.
8월 29일(일기), 벽파진(진도군 고군면)에 대었다.
(참고 1) 그 밖의 의병
1.1 김덕령(1567-1596)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92년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高敬命)과 연합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의 권유에 따라 귀향했다. 1593년 다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떨쳤다. 1594년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남원에 머물다가 진주로 옮겼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여,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固城)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서울에 압송되어 옥사했다. 1661년(현종 2) 신원(伸寃)되었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도 석거촌에서 충효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681년 병조판서가 더해졌다.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2 조헌(趙憲, 1544~1592)
6월 28일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이며, 자는 여식(汝式), 호는 후율(後栗) 또는 도원(陶原)이라 하였다. 널리 알려진 중봉(重峯)이란 호는 만년에 지은 것이다.
선조와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충북 옥천에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헌은 1,6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의병단을 구성하고, 왜적에 당당히 맞섰다. 6월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우고 8월 금산전투에서 칠백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중봉(重峯)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뒷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 중봉은 질정관(質正官)의 신분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왕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올려, 중국의 문물을 보고서 우리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
이 글은 조선후기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북학의(北學議)에 쓴 서문이다. 조헌에 대한 존경심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북학을 시대정신으로 강조했던 박제가가 자신보다 200년을 앞서 살았던 조헌을 높이 평가했다.
조헌은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될 무렵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 여러 차례의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했다. 특히 중국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토지, 교육, 군제(軍制), 공물, 서얼 차별의 폐지 등을 구체적으로 상소했다.
(참고2) 금산전투와 700의총
1592년 8월 18일 충청도 금산에서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이다. 조헌의 의병은 8월 1일에 청주성을 수복하고 온양에 이르렀다. 여기서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小早隆景]의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들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았다. 8월 16일 조헌은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금산에서 패하여 후퇴하면서 일본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조헌을 만류하였다. 조헌은 전라도 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에게 협공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저하자 영규(靈圭)의 승병과 합해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에 진을 치고 관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관군의 지원이 없음을 알고 복병을 내어 공격했다. 조헌은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군의 3차례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져서, 육박전으로 대응하여 모두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도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호남·호서 지방을 공격하려던 일본군의 목적이 좌절되었다. 이해 9월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이들의 유골을 모아 합장했으며, 후대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했다.
(참고3) 정해박해 (1827년)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곡성에 교우들로만 이루어진 도자기 제조소에서 1827년 2월 증축개업 축하잔치가 벌어졌는데 유명한 순교자 한 토마스의 아들 한백겸이 술주정을 부리다가 신입교우인 술집 주인과 그 아내를 폭행하자 그 집주인이 분개하여 종교서를 가지고 곡성 관헌에 갖다 바치며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교우가 잡혔고 그들의 취조로 다른 군에까지 수색의 손이 뻗히어 마침내 전라도 전체로 퍼졌다. 전주 감옥에 240여명이 붙잡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상민 계급 사람들이었고, 즉시 사형을 시키지 않고 될 수 있는 데로 배교하도록 유도하였으며, 말을 듣지 않는 자는 귀양 보내거나 계속 감옥에 가두어 두고 굶어 죽게 하였으므로 배교자의 수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 정해교난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8명의 교우로는 이 막달레나, 김도명(안드레아), 이성지(세례자 요한), 이성삼(요한), 정만보(바오로), 이일언(요버), 김대권(베드로), 이선화(베드로) 등이다.
이 전라도 교난으로 박해의 불똥은 경상도, 충청도 및 서울에까지도 미치게 되었다.
정해박해는 지방관헌의 사사로운 욕심과 민중들의 사적인 감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4개월)에 끝났고 검거 된 교우 수가 500명을 넘었으나 사형에 처해진 자는 10여명에 불과 하였다. 이 교난에서 배교를 선언한 자들이 가장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예비자였기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신부를 만나서 성사를 받은 자는 4~5명 밖에 되지 않으므로 15~16명의 꿋꿋한 순교자를 내었다는 것이 도리어 기적적인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신태보(베드로)의 순교
신태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경기도 용인군의 교우 다섯 집 사람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로 숨어서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그 후 경상도 상주에 살다가 1827년에 붙잡혀 온갖 고문과 굶주림으로 13년 간 옥중 생활을 하다 1839년에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그는 샤스땅 신부의 요구로 옥중에 있으면서 그가 겪은 고문과 재판의 경과를 자세히 적어 자료로 남겨두었다. 정해년에 경상도에서 순교한 교우들로는 박경화(베드로), 안군심(리샤르), 박사심(안드레아), 이종일(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김은우(암브로시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