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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2016년 8월 3일(수) 오전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니 오늘의 날씨를 알려준다. 기상도를 보니 북대서양에서 발생하는 한랭기류와 지중해 쪽에서 올라오는 온난기류가 만나면서 프랑스 북서쪽은 비가 내리고 남동쪽은 맑은 날씨를 보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파리의 오늘 날씨는 비가 간간이 내리며, 최저기온 17°에서 최고기온 25°사이라고 한다. 생활하기 쾌적한 날씨인데, 지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시원한 날씨이다. 서안해양성 온대기후가 나타나는 이곳 서부 유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흐린 날씨가 많아 햇빛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연교차가 작은 기온으로 인해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으니, 연교차가 심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비하여 생활하기가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이런 기후는 분명 이곳에 사는 유럽인들의 심성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웃음이 묻어나고 걸음걸이를 바라보면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항상 경쟁에 쫒기며 치열하고 조급하게 살아가는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아침식사는 호텔식으로 먹게 되었다. 파리에서 먹는 빵은 당도가 높고 식감이 부드러웠다. 파리에서 빵을 먹으니 ‘파리바게트’인데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아재 개그라고 할 것 같다. 우리는 짧고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전세버스에 승차하였다. 오늘은 파리의 구 시가지를 둘러볼 예정이다. 파리를 안내해줄 미모의 여성 현지가이드가 승차하여 파리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해준다. 미인이 마이크를 잡으니 가이드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우리가 탄 버스는 파리의 외곽 순환도로를 이용하여 도심으로 이동하는데, 높은 산은 보이질 않고 낮은 구릉지만 볼 수 있었다. 분지(盆地) 지형에 조성된 도시답게 시내에서는 산이 없어 이를 조망하기 위한 특별한 시설이 필요했으니, 그게 바로 파리의 랜드 마크인 에펠(Eiffel) 탑이다. 지금은 파리 외곽에 현대식 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파리시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던 시절에는 파리를 한 눈에 조망하기 위해 반드시 에펠 탑과 같은 높은 전망대에 올라야만 했으리라. 어쩌면 에펠 탑이 각광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될 것이다.
나폴레옹과 관련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
오늘 일정 중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샤를드골 에투알’(Etoile) 광장의 개선문(Triumphal Arch)이다. 개선문이란 전쟁터에서 승리한 황제나 장군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로 원래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리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는데, 관광객들은 에투알 광장에 서있는 개선문이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이곳을 주로 찾게 된다. 셋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카르젤 개선문‘(L'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다. 루부르(Louvre) 박물관 안마당에서 튈르리(Tuileries) 공원 쪽으로 위치하며, 공원의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규모는 가장 작으며 3개의 아치(Arch) 문으로 되어있다. 나폴레옹이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과 싸워 이긴 오스테를리츠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여 1808년에 세웠다고 한다. 로마의 개선문을 모방하였으며, 기둥에 나폴레옹 승전을 묘사한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교황을 불러 대관식을 거행하고 자신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했음을 온 유럽에 알린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오스테를리츠 전투와 그 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카루젤 개선문과 에투알 개선문을 만들 것을 명했다. 두 개의 개선문은 1806년 동시에 설계되었고 크기가 작은 카루젤 개선문은 1808년에 완공되었지만, 그보다 두 배의 크기를 갖는 에투알 개선문(높이 49.54m, 폭 44.82m)은 30년 후인 1836년에 완성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이 개선문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또 하나의 ‘신(新)개선문’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1989년 완공된 높이 110m의 ‘그랑아르쉬’(Grande Arche)이다. 이 건축물은 사무실 용도로 쓰이는 개선문 스타일의 현대적 빌딩이며, 파리 외곽의 신도시 ‘라 데팡스’(La Défense)에 위치한다. 근·현대에 만들어진 이 세 개의 개선문은 2Km와 4km 간격으로 나란히 일직선상에 놓여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치된 모습이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개선문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에투알’(Etoile) 광장의 개선문이다. 파리의 모든 길이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12개의 방사선 도로가 퍼져 나가는 곳이다. 12개의 도로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12개 나라를 의미하며, 뻗어가는 모습이 마치 하늘의 별을 닮았다 하여 에투알 광장이라 붙였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제리제(Champs Elysees: 낙원의 뜰)거리는 그중의 하나이며,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거리로 유명하다. 고풍스런 석조 건물에 10차선 차도와 널찍한 인도, 거기에 노천카페가 있어 한층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도로이다.
오늘 마이크를 잡은 현지가이드는 차에서 내리기 직전 집시(gypsy) 경계령을 내린다. 그들은 피부색이 까무잡잡하여 일반적인 백인과 구별이 되는데,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차별과 배척을 받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요즘 이탈리아에 많던 집시들이 프랑스로 많이 이동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프랑스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 더 많아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순박해 보이는 관광객에게 떼거리로 접근하여 말을 걸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 다음 지갑 등을 훔쳐 달아난다. 대개 홀로 떨어진 관광객을 노리기 때문에 우리는 가이드가 강조한대로 양떼처럼 뭉쳐서 그들을 경계하였다. 경찰은 예방차원에서 활동하지 않고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출동하는 소극적 대응을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이런 경우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임시 파출소라도 설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집시(gypsy):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피부색은 짙은 편이다. 집시어를 쓰며, 계속적으로 이주하여 인도를 떠나 11세기 페르시아, 14세기 초 유럽 남동부, 15세기 서유럽에 거주하였고 20세기 후반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퍼져나갔다. 방랑 중 거주민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으며 특히 아리아인 보존 정책을 폈던 나치가 약 40만 명의 집시를 학살했다.
한 시간 가량의 자유시간을 즐긴 뒤 우리는 버스에 승차하였다. 집시들의 소매치기 행위를 눈앞에서 본 우리 일행은 귀중품 보호에 더욱 긴장을 하게 되었다. 에투알 광장에서 콩코르드(Concorde) 광장까지 이어지는 약 2km의 상젤리제(Champs Elysees) 거리를 버스로 달려간다. 이때 버스기사가 센스 있게 1968년에 작곡된 ‘오 상젤리제’라는 노래(샹송)를 들려준다. 반영구적인 화강석 블록으로 포장된 상제리제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비해 약간의 요철(凹凸)이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고풍스런 건물과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어울리고 낭만적인 샹송의 느낌이 더해지니, 그저 황홀한 느낌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마도 이런 짧지만 강렬한 황홀함을 맛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마치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 느끼는 쾌감처럼.
'오 상제리제' 노래감상하기
여행기를 쓰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되는데, 여행 중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미리 학습하지 못하고 현지가이드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알게 되니 그 재미가 쏠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자유여행이었다면 언제든 내 맘대로 경로를 변경할 수 있었으니까. 인터넷 자료를 통해 ‘에투알 개선문’ 에 대하여 더 알아보자. 건물 안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고 그곳에서 파리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는 파리시내의 전망은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성당에서 보는 것보다 느낌이 좋다고 한다. 직접 올라보지 않고 인터넷 사진으로만 바라보아도 상상이 된다. 12개의 방사상(放射狀) 도로가 이곳에서 시원하게 퍼져 나가는 모습이 장관(壯觀)일 것 같다.
현재의 파리의 모습은 1850년 이후 파리시장 오스망(Boulevard Haussman)에 의한 도시개조 사업으로 그 틀을 잡게 된다. 파리의 도로가 크게 확장되고 직선상·방사상으로 정비되었으며, 건물의 층수도 대개 7층 높이로 제한되니 파리의 스카이라인(Sky Line)은 이 무렵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상업용 간판은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1층으로만 제한을 하고, 전선은 보이지 않게 지하 하수관에 매설을 하게 되니 파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밤에는 형형색색 조명을 더하니 파리는 낮과 밤으로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대개의 한국 여행사들이 이곳 개선문 전망대를 코스에 넣지 않는 것은 여기보다 훨씬 높은 에펠탑에 올라 파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려면 돈을 내고 입장을 하게 되는데, 현지가이드는 개선문 전망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니, 여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유시간 동안 지하도를 통과하여 개선문에 접근하여 화려한 대리석 조각상을 감상하고 사진촬영에 몰두하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 보이는 개선문, 그리고 완벽한 예술작품이라 할 정도로 벽면을 아름답게 새긴 조각상에 그저 감탄하며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로마제국 시절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한다’는 말처럼 프랑스 파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었던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이자 독재자라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이 전 유럽에 번져간 것은 그의 공로(功勞)라 할 것이다.
에트왈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권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조형물이다. 이곳은 매년 국경일 축하 행사와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라고 한다. 고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형태를 본뜬 이 문의 표면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를 그린 그림과 600여 명의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4면에 설치된 부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샹젤리제 거리와 마주보는 면 오른쪽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프랑스 國歌)이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의용군의 출정을 나타낸 부조로 뤼드(Rude)의 작품이다. 개선문은 에펠탑과 함께 파리의 상징이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 전몰 무명 병사들의 기념비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로 말하자면 국가차원의 보훈(報勳) 시설인데 나폴레옹이 만든 건축물을 재활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이 개선문을 통과했으니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으리라.
샹젤리제 거리 중간쯤에서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드골의 동상도 볼 수 있었고, 콩코르드(Concorde) 광장에서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obelisk)도 볼 수 있었다. 이 광장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이른바 ‘공포 정치’ 시기에 수많은 귀족들의 머리가 단두대에 의해 잘려나갔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지금 이곳은 지극히 평화스러운 모습이어서 그때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파리시내에는 곳곳에 광장(place)이 만들어져있고 그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狀) 도로가 조성되어있다. 광장은 시민들에게 집회와 소통의 장소로 제공되기도 하지만 때로 혁명과 파업의 집결지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방사상 도로를 만든 목적중의 하나는 절대왕정 시기에 체제에 도전하는 비판세력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콩코르드(Concorde) 광장: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졌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르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혁명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이다.
파리시내에는 센 강(Seine River: 전체길이 751km)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36개가 있다고 하며, 그중에 폭이 가장 넓고 가장 장식이 아름다운 다리는 단연 ‘알렉산더 3세 다리’로 알려져 있다. 가장 넓은 곳의 폭이 300m 라고 한다. 강변에는 가로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대개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Marronnier: 나도 밤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공기를 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하여 유럽의 도시에서는 각광받는 가로수인데, 우리나라에도 한 때 가로수로 심어졌지만 꽃가루가 날린다고 하여 퇴출된 나무이다. 마로니에는 식물학 상 밤나무는 아니지만 밤나무를 닮았다하여 ‘나도 밤나무’라는 이름을 갖는다.
파리 시내를 관통하는 센 강을 중심으로 좌안(左岸)과 우안(右岸)으로 나뉜다고 한다. 아마도 센 강이 남북으로 통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우리나라 서울의 경우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듯이 말이다. 파리시의 면적과 인구는 서울의 5분의 1정도라고 하니, 프랑스는 우리나라처럼 대도시 집중현상이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역으로 말하면 도시와 농촌이 골고루 살만하다는 방증(傍證)일 것 같다. 프랑스 인구가 대략 6,500만 명 정도인데 비해 한 해 외국인 관광객 수는 8,300만 명(최근 통계)이라고 하니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는 가히 관광대국이라고 할 만하다. 지난번 테러사건 이후 관광객 수가 줄긴 하였지만. 요즘은 바캉스(휴가)기간이라 시내가 비교적 한산하고 오히려 관광객 수가 더 많은 것 같다.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기간(8월)을 이용하여 건물수리나 도로공사 등 도시내부의 필요한 공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다른 유럽이 그렇듯 이곳 프랑스도 우리나라에 비해 자동차도 소형 경차(輕車)가 주를 이룬다. 아마도 마차(馬車)를 사용하던 시대부터 만들어진 넓지 않은 도로에 서 자동차를 운행하려다보니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인 것 같다. 주차공간도 좁다보니 자동차를 주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범퍼의 흠집도 서로가 탓하지 않는 관행도 생겨났다고 한다.
파리의 건물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9세기 중반 ‘오스망’이라는 파리시장이 주도한 도시개조 사업에 의해 석조(石造)건물이 대개 7층 높이로 제한되어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게 되었다. 대개 1층은 상가, 2,3층은 사무실, 4~7층은 주거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거기에 창문마다 화분을 내어놓으니 밝은 색조의 건물과 잘 어울리며 도시미관이 한층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작품사진이 되는 것 같다. 19세기에 살았던 그들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런 작업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의 미적 감각이 발휘되어 오늘날 프랑스는 관광대국으로서 후손들이 그 축복을 누린다 하겠다.
파리의 시내 풍경은 어딜 보아도 그냥 그림이 된다.
우리는 점심을 한국음식점에서 육개장으로 먹었다. 고사리나물 대신에 녹두채를 사용하고 매운 맛이 덜하니 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에 먹는 빵 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밥을 먹으니 이제야 제대로 식사를 한 느낌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