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만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궁중 밖의 민속악(民俗樂)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에 쓰던 당악 ·향악 ·아악 등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본디 ‘아악’은 정아(正雅)한 음악’이란 뜻에서 나온 말로,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l105년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대성아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한국에는 1116년(고려 예종 11)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등가(登歌) ·헌가(軒架)에 딸린 아악기 일습 및 아악에 수반되는 문무(文舞) ·무무(武舞) 등의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 ·적(翟) ·간(干) ·과(戈) 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 ·무의(舞衣) ·악복(樂服) ·의물(儀物) 등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냄으로써 아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대성아악》은 원구(圜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孔子廟)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악공(樂工)을 명나라에 유학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文廟)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정리되었다. 세종은 악리학자(樂理學者)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궁중아악을 정비케 하면서 악장(樂章) ·악보와 악기를 일일이 흠정하는 등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될 큰 사업을 벌였다.
박연은 12율관(律管)과 편경(編磬)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으면서도 아악을 주(周)나라의 것에 가장 가까운 아악으로 복원하여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제악(制樂)의 임무를 전관하게 된 박연은 많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朝會) ·제사 등의 아악보(雅樂譜)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은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회례연(會禮宴) 등에도 기악(妓樂)이 등장하여 아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는 동안 악인(樂人)과 악기가 산실되어 아악은 그 복구가 극히 어려운 형편에 놓였으나 1647년(인조 25) 이후에야 겨우 종묘 ·사직 ·문묘 기타 다른 제향에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다.
숙종 ·영조 ·정조 등도 쇠미하여 가는 아악을 되살리려고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세종 때의 아악은 끝내 되찾지 못하고 위축일로의 길을 밟아 근근이 그 명맥만 유지하여 왔다. 더구나 1910년의 국권피탈로 원구 ·사직 ·선농 ·산천 등 제향이 폐지되어 여기에 쓰이던 아악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공자의 제향이 존속되어 거기에 쓰이는 문묘제례악 중 석전악(釋奠樂)의 일부와 팔일무(八佾舞)가 연주되고 있는 정도이다.
5. 발명한 과학기기
이천, 장영실 등을 시켜 과학기구를 발명하게 함
*발명한 과학기기
창경궁 자격루
보루각 자격루(국보 229호)
서울시 중구 정동 덕수궁의 광명문에 전시, 조선시대 중종때 만든 물시계로 덕수궁과는 관계없는 유물이다.
서울시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자격루(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
1434년 세종16년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 이다.
옥루 : 1438년(세종20)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 이다.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인형이 북, 종, 징을 쳐서 시각과 경을 알렸다. 모든 기관은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으로 이뤄졌다. 1438년 1월 완성되어 경복궁 흠경각 안에 설치하였다. 그 구조를 보면 흠경각 안에 호지로 높이 7자 가량의 종이산을 만들고 거기에 태양의 모형을 비롯해 옥녀, 사신, 사진, 무사, 종인, 고인, 징인, 십이신 등의 인형을 배치하고 옥류의 기륜을 설치하여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기륜이 회전하면서 시각과 경 등을 알리게 하였다.
혼천의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 구실을 하였던 기구, 선기옥형, 혼의, 혼의기 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기록상으로는 1433(세종15) 정초, 정인지 등이 고전을 조사하여 이천, 장영실 등이 제작을 감독하였다. 이로부터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소선시대 천문역법의 표준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되어 1657년(효종8)에는 최유지가, 1669년(현종10) 이민철과 송이영이 각각 만들었다. 이 중 송이영의 것은 서양식 자명좡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펴 추를 시계 장치의 동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혼천의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로 선기옥형, 혼의, 혼의기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성정시의
조선시대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데 사용한 의기
1437년(세종19) 4개를 만들어 만춘전, 서운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두었고, 지름 68cm로 구리로 만들었다. 구조는 원형의 의기를 세겹의 원으로 갈라 맨 가의 원에는 주천도분환, 가운데 원에는 일구백각환 그리고 맨 안쪽에는 성구백각환을 배치하였다. 주천도분활은 매 도를 4분으로 나누어 주천도를 새겨 천체의 공전을 재었고,
일구와 성구의 백각환은 매 각을 6분으로 하여 백각)12시)을 새겨 일구는 낮, 성구는 밤시간을 재도록 하였다. 이 밖에 소정시의 라는 휴대용 일성정시의도 만들었다.
일성정시의 (조선시대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데 쓰던 의기)
일성정시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
간의 : 구리로 된 북극을 정확힐 잴 수 있는 의표
처음부터 구리로 만든것이 아니라 나무로 모형을 만들어 실제로 북극을 재어 본 결과, 정확하게 측정이 되어 구리고 만든 것이다. 또 사람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간의도 만들도록 하였다.
간의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 관측의기)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관측의기,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 한 것이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에 있는 간의
고도와 방위, 낮밤의 시각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구
소간의(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
간의보다 크기가 작고 이동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