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허세욱 선생>
사진 1 - 1인시위하는 모습
사진 2 - 시청앞 광장 집회에 참여한 모습
사진 3 - 정태인 강연회에 참여한 모습
사진 4 - 단식 중인 문성현 대표 지지방문
사진 5 - 분신 이틀 전 촛불시위 때 1인시위
1953년 경기 안성 출생
1994년 봉천6동 철거투쟁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독분회 조합원 (대의원)
1999년 참여연대 회원
2000년 민주노동당 입당
2002년 민주노동당 모범당원상 수상
2005년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대의원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
(사)관악사회복지 회원
관악주민연대 회원
2006년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대의원
2007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대의원
2007년 4월 1일, "한미FTA 반대"외치며 분신
2007년 4월 15일, 영면
내가 아는 허세욱 - cafe.daum.net/taxidriver53에서 퍼옴
<민노당 관악구위원회 당원의 글>
지난 25일 집회때 저는 집사람과 두 딸을 데리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우리 가족 바로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허세욱 동지는 자신이 드시려고
주머니에 넣어왔던 음료수를 우리 딸들에게 건네 주셨죠.
그때 동지의 얼굴에 피어나던 소탈한 미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제 병원 중환자실에서 신음하고 계시던 동지를
바깥에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강연회나 행사에 성실히 참여하고
분회 모임때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질문하던 동지.......
성실한 노동자로
애국적인 시민으로
겸손하고 진지하고 모범적인 당원으로......
그렇게 보낸 짧지않은 여정이..........
동지가 눈에 밟히는 숱한 우리들을 뒤로한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결심하셨을 때
나는........
동지, 제발 일어나십시요.
우리 유정이 소정이가 평등세상 통일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함께 웃으며 바라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의 글>
학생들, 시민들, 철거민들... 질문을 받고 인사를 하고, 동작구 위원장의 뒷풀이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교문을 나선다. 휘청... 몸이 잦아 드는데 택시가 스르르 와서 멈춘다.
끌리듯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정태인 선생님, 저 방금 강의 들었습니다” “저는 택시노련 아무개입니다” 꿈 결인듯, 차분하달까 어눌하달까 저음으로 사근 사근 말을 붙인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하얗게 센 머리... 그러나 다부진 몸의 그는 필경, '내내 수줍어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투사로 나타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한다.
FTA에 대한 질문에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덧 오목교를 건넜다. “아...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이렇게 강연을 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데요. 저 같은 사람도 인사는 할 수 있어야죠”
강연을 마치자 한 분이 질문을 하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심상정 의원은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서 FTA 얘기 많이 합니다” “그러지 말고 당원이 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웬지 집요해 보여서 말을 끊으려 농담을 한다. “그 뭐죠? **파가 없어지면 들어갈게요” (이 농담이 인터넷에서 ‘찻잔 속의 태풍’ 정도의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복지관 문을 나서니 한 분이 다가 선다. “오늘도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 그였다. “아니요. 오늘 근처에 약속이있어서요”
<민노당 관악위원회 부위원장 홍은광 님의 글>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눠왔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막걸리 배달일로 노동하는 삶을 시작했지요. 봉천동 달동네 단칸 셋방에서 살면서 그래도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 달동네에 철거가 들이닥쳤습니다. 왜 이렇게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쫓겨나야만 하는지 참으로 서러웠습니다. 가난한 이웃 사람들과 함께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막걸리 술기운에 힘겨움을 서로 털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불어닥친 철거는 집만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웃음까지도 철거해 버릴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좌절하지 않았지요. 끝까지 이웃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비록 집은 철거 당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웃음은 지켜내었습니다.
철거 투쟁을 하면서 알게 된 봉천 놀이 마당에서 풍물을 배웠지요. 풍물은 그냥 악기가 아니라, 사람들과 흥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동네에서 명절이나 행사 때면 풍물패 단원이 되어서 장구며 북을 쳤지요. 자신은 실력이 모자란다며 맨 뒷자리에만 서서도 가장 흥겹게 함께 했지요.
허세욱 동지는 늘 묵묵하게 함께 해왔습니다.
택시 기사 일을 시작한지도 꽤 되었군요. 하루 종일 많은 손님들을 만나죠. 만나는 손님 한 분한 분에게 환한 미소로 인사하였습니다. 동지의 택시 안에는 언제나 참여연대 소식지며, 각종 유인물이 있었습니다. 오시는 손님 한분 한분께 이런 저런 말씀 나누면서 꼭 한번 읽어 보라고 유인물을 건네주셨죠. 나이 드신 분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을라치면 꼭 집에까지 짐을 들어다 주시던 당신은 친절하고 다정한 택시기사입니다. 한독운수 노조에 가입한 후, 노조라면 노동자와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에 많이 고민하셨습니다. 기어이 한독운수 노조는 민주화되었지요.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기뻐하셨던 동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모범당원상도 받으셨지요. 당신이 받아야할 상이 아니라며 마지막까지 사양했지요.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 용산 미군기지 월례집회, 평택 미군기지 투쟁 현장에도 늘 함께 했습니다. 언제나 앞에 나서지 않고 뒷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관악주민연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관악 사회복지 회원이 되어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왔습니다.
동지는 언제나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집회장에서 받은 유인물 한 장은 꼭 간직해 두고 두고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올라치면 꼭 나중에 누구에게든 물어봐서 이해를 하려 노력하였지요. 신문을 보고 중요한 내용이 있으면 잘라서 보관하면서 읽고, 너무 많이 봐서 헤질까봐 문방구에서 코팅까지 해서 읽고 또 읽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요. 컴퓨터를 배우면 더 많이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저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 어려운 한미 FTA가 왜 문제인지 하나 하나 스스로 이해하고 깨우쳐 나가는 동지의 모습은 젊은 당원들을 소리 없이 추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번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한미 FTA 협상 중단 노숙 단식 농성 때였지요. 하루 종일 농성장을 지켰던 동지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얼마 전에는 손수 한미 FTA가 무엇이 문제인지 적어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계시더군요. 이렇듯 동지는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평통사 회원의 글>
허세욱 회원님께
평소에 부르던 대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허세욱 선생님..
저는 지금 선생님이 계시는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평통사 회원들과 선생님의 쾌유를 비는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의 아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저의 가슴 한 편이 아파옵니다.
4월 1일 이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선생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착각에 문득 놀라곤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선생님의 분신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 지금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만히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가장 최근에 선생님을 뵌 것은 3월 3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한미FTA반대 촛불문화제였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1인 시위 피켓을 몸에 매고 계셨습니다. 1인 시위 피켓은 큰 우드락에 한미 FTA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생님께서 직접 손으로 적으신 것이었어요. 직접 피켓까지 준비 해 오신 모습에 한미 FTA반대를 위한 촛불 문화제에 나오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선생님의 지난 활동사진들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부탁에 선생님의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2002년도 평통사가 여중생 투쟁에 앞장설 때부터 저희와 함께 하셨고 2004년도에 평통사에 가입하신 선생님의 사진을 찾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중생 추모집회, 김선일씨 추모집회,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 나서기 위해 했던 선전전을 비롯한 투쟁,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 모임을 비롯한 각종 회원행사....
참여를 많이 하셨는데도 사진이 많지가 않았습니다. 사진 속에서도 거의 뒤편에 계셔서 선생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진을 찾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결같이 뒤에 서 계셨다는 사실을...
평택에서 강제로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고 들판과 마을에 수많은 공권력이 쳐들어올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앞에 나서서 싸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작년 5월 4일,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그 아름다운 들녘에 철조망이 쳐질 때 평통사 회원들과 함께 싸우다가 연행까지 되셔서 고생을 하셨지요. 연행에서 풀려나오신 이 후에 괜찮으신지 전화를 드리니 몸을 다쳐서 한의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통사 월례집회나 투쟁 일정이 잡힐 때마다 전화연락을 드리는 제가 귀여우셨는지, 연락을 할 때마다 500원씩 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참여하실 때마다 500원 짜리 동전을 건네주셨어요. 그 동전을 받고 500원짜리 아르바이트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저를 보고 웃으시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택시운전을 하시다가 평통사 사무실 근처에 오시게 되면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선생님 얼굴도 떠오릅니다.
노동 분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시려고 노력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설사 모임을 하는 날이 택시 운전을 해야하는 날이어도 잠시 짬을 내어 들러서 인사를 건네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제게 선생님이 아니라 동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던 허세욱 선생님...
항상 성실하게 생활하시며 우리 회원들과 함께할 땐 조용히 뒷자리를 지키시고 투쟁의 현장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던 허세욱 선생님
꼭 일어나셔야합니다. 지금의 아픔과 고통 이겨내시고 다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선생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힘내세요. 허세욱 선생님.
2007년 4월 4일
<모금 계좌>
국민은행 794002-04-026736 이봉화 (민노당 관악지역위원장)
첫댓글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