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비하면 너무 능력과 그릇이 작습니다. 이 글을 꼭 정독하십시오. 길어도! 국부를 음미할 시간, 한번쯤은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승만은 5월 31일에 개원한 제헌국회에서 재적의원 198명 가운데 188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의원들의 정당. 단체별 배경을 살펴보면, 무소속 85명, 독촉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기타 군소 정당. 단체 19명이었다. 그 당시 이승만은 ‘헌법 제정이 끝나 대통령 선거로 들어가게 되면 대통령으로 선거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후보자’로서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위망이 드높았기 때문에 제헌국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국회 개회식사를 통해 아래와 같이 제헌국회가 제정할 헌법의 윤곽과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국회의원들에게 헌법 제정을 서둘러 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래는 이승만의 국회개회식사다.
“이 국회의 최대한 목적은 이미 세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고 국방군을 조직하야 안녕 질서와 강토를 보장하며, 민생 곤란을 구하기 위하여 확고한 경제정책을 수립할 것과, 토지개혁을 공평히 실시할 것과, 개인의 평등권을 법률로 제정하야 보호할 것과, 해외에 거류하는 동포의 생명과 권리를 국제상 교섭으로 보호할 것과, 교육을 향상하며, 공업을 발전하며, 평등호혜의 조건으로 해외통상을 열 것과, 언론 ․출판 ․집회․ 종교 등 자유를 보장할 것과. 국제상 교의를 돈목하야 세계평화를 증진할 것과, 소련과 교제를 열어서 양국의 중대관계를 시정할 것과, 길이 열리는 대로 일본과 담판을 열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문제를 타정할 것 등이니 우리 국회의원들의 책임이 중대하고 긴박합니다. 시일이 긴박하니 만치 우리는 사소한 조리와 무익한 이론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는 형편이니 중대문제만을 차서(次序)로 계의결정하야 실행하기에만 주력할 것입니다.”
그 후 그는 6 월 3일부터 6 월 22일까지 제헌 작업의 제1단계로 헌법기초위원 회에서 헌법안을 마련하는 동안 서상일(1886~1962) 위원장을 통해 헌법안 기초작업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필요한 경우 기초위원회 회의장에 출석하여 소견을 피력, 헌법안 작성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다음 6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제2단계로 국회가 상정된 헌법안을 심의할 때 본회의의 사회자 혹은 평의원 자격으로 발언권을 행사, 헌법안의 수정에 한몫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본회의 사회를 부의장 신익희와 김동원에게 맡겼다가 7월 5일부터 직접 사회를 보았다.
그는 새 정부의 수립 ․ 선포일을 8월 15일로 예정하고 그 일정에 맞추어 헌법 제정을 7월 중순 내지 하순까지 끝낼 목적으로 본회의를 쾌속도로 진행시켰다. 그는 본회의 개최 초반(6.29)에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맡았을 때 위원들이 발언 시간을 5분으로 제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안 심의가 지체되자, 7월 1일 “지금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정부 수립을 지켜보고 있는데 의원들이 헌법을 가지고 논란을 해서 정부수립을 지연시킨다면 결과적으로 정부수립을 방해하는 공산당에 이익을 주는 결과가 되며 헌법이 잘못됐으면 나중에라도 고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발언하면서 헌법 심의를 재촉했다.
그 다음날(7.2)에 그는 다시 “내가 …듣건대 이 국회 안에 몇 구분이 있어서 이 헌법을 속히 통과하지 말고 이 방면 저 방면 천연(遷延)해서 나가기로… 몇 분들이 조용히 약속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에게 들려옵니다.…몇 분들이 장난을 이 속에 와서 해가지고 국회의 국사 방해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용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서도 헌법심의가 예정된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자 이승만은 7월5일에 직접 사회봉을 쥐고 “우리가 지금 헌법을 통과하는 것은 제일 긴요한 일이니까 다른 의사를 표시하지 말고 제일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은 헌법기초위원으로 하여금 전문위원들이 있어 가지고… 다 해놓은 것이니까 여기에 질의를 하고 토론하고 통과시키는데 조건을 하나를 가지고 수정안이 자꾸 나오면 한 조건 가지고 하루 이틀 열흘 걸린다 하면 이것은 백일 이상이 걸릴지 모릅니다. …우리는 빨리 빨리 나갑시다” 이렇게 다그쳤다.
그 결과, 다음 날에 무려 30여 건의 수정안이 한꺼번에 철회되면서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헌법안 심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유진오, 『회고록』, 93, 101쪽)
이승만은 국회의장으로서 이와 같이 제헌국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유진오안에 입각하여 마련한 헌법안 가운데 ①전문, ②국호 ③국회 단원제, ④대통령중심제 등 핵심적 부분을 자기의 의도에 맞게 수정함으로써 제헌헌법 제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아래에서 이승만이 이 부분들을 어떻게 수정하여 통과시켰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헌법 전문(前文)의 수정
이승만은 5월 31일 국회 개회식사에서 “우리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 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입니다…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오,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정 계승이니. .”라고 발언함으로써 앞으로 세워질 대한민국이 1919년의 한성임시정부(민국임정)를 계승한 정부라는 자기 나름의 법통계승론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헌법기초위원회가 마련한 헌법안 전문에는 그러한 취지의 문구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 점을 아쉽게 여긴 이승만은 7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헌법안 전문에 법통 계승 관련 문구를 첨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전문, 이것이 긴요한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우리 헌법에 작정할 생각이 있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 우리가 헌법 벽두의 전문에 더 써넣을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 ․ 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 재건을 하기로 함’ 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제의하는 바입니다. 무엇이라고 하든지 맨 꼭대기에 이런 의미의 문구를 넣어서 우리의 앞길이 이렇다 하는 것을 또 3 ․ 1혁명의 사실을 발표하여 역사상에 남기도록 하면….좋겠다,… 이것이 나의 요청이며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
국회는 이승만 의장의 이 요청을 받아들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 내용을 가다듬은 결과 7월7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있던 헌법안의 전문 서두를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 ․ 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바꾸어 통과시켰다.
이로써 역사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이승만은 남한에 세워지는 새로운 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한반도의 중앙정부라는 사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헌법 전문에서 확인하고 넘어간 것이다.
2.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채택
해방 후에 우후죽순같이 일어난 여러 정치단체들이 다투어 새 나라 건국을 매진할 때 새로 탄생시킬 나라의 명칭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예컨대, 신익희가 주도한 행정연구회가 1946년 3월에 작성한 헌법 초안에서는 국호를 ‘한국'이라고 정했고, 유진오가 1948년 5월에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헌법 초안에는 국호를 ‘조선민주공화국'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1948년 6 월에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유진오안에는 국호가 ‘한국'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밖에 한민당과 시국대책협의회(대표: 김규식 ․ 여운형)에서는 국호를 ‘고려공화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9월 이래 한민족의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불러온 이승만은 5월 31일 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의 자격으로 연설할 때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문을 엶으로써 앞으로 건설될 새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예시하고 있었다. 그 후 6월 17일에 그는 독촉의 성명서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으로 정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호문제는 헌법기초위원회 개회 벽두에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6월3일 기초위원회 회의에서는 독촉계 위원들의 ‘대한민국'안과 한민당의 ‘고려공화국'안 외에 ‘조선공화국'안, ‘한국'안 등 여러 대안을 놓고 논란을 벌인 끝에 표결한 결과, ‘대한민국'안이 17표, ‘고려공화국'안이 7표, ‘조선공화국'안이 2표, 그리고 ‘한국'안이 1표를 얻음으로써 ‘대한민국'안이 채택되었다.
7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호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때 이승만 의장은 “곧 국호문제 토론이 시작될 모양인데 국호가 잘 되지 않아서 독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니 3․1운동에 의하여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대로 대한민국으로 정하기로 하고 국호 개정을 위해서 토론으로 1분이라도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 라며 ‘대한민국'안 이외의 토론을 봉쇄하였다.
곧 이어서 실시된 표결에서 재석 188명 중 찬성 163표, 반대 2표로 ‘대한민국'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이승만의 영향 하에 신생 공화국의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무난히 결정되었던 것이다.
3. 단원제 국회 구성안 채택
새로 건설될 나라의 입법부(국회)를 단원제 구성하느냐 양원제로 구성하느냐 하는 것은 제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 중 하나였다. 유진오는 애당초 헌법안을 기초할 때 양원제안을 취하였다. 그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되는 민의원과 선출 방식을 달리해서 구성되는 참의원을 병설하여 ‘보수적'인 참의원이 민의원의 활동을 견제토록 할 심산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 소속 위원들 중에도 이 안에 동조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따라서 6월10일 기초위원회에서는 논란 끝에 표결에 부친 결과 12대 10이라는 적은 표 차로 양원제 안이 채택되었다.
이승만 의장은 하루빨리 정부를 세워야 하는 판국에 참의원 선거를 치를 겨를이 없으며, 참의원 신설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양원제를 반대하고 단원제를 주장했다. 그는 양원제는 정부 수립 후에 도입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승만 의장의 입장은 7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의 발언은 물론 1948년 12월18일 제 1회 국회 폐회식에서의 치사(致辭)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양원제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으며 조만간 그 제도를 도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6월7일 그는 기자회견에서 양원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처음으로 표시했다.
그러나 6 월 10일 헌법기초위원회가 자기의 의사를 무시하고 양원제를 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6 월 17일 독촉의 성명서를 통해 단원제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공표했다. 그러고 나서 6월 21일 그는 기초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나 대통령중심제 채택 주장을 펴기에 앞서 “우리같이 가난한 형편에서 나라 비용을 늘일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 상하 양원을 선출해 보아야 그 수준이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논리로 양원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한 헌법기초위원회는 결국 그의 의사를 받아드려 6월22일 오전 회의에서 양원제를 단원제로 번안 처리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일부 의원들 간에 국회에 상정된 단원제안을 양원제안으로 번안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승만 의장은 ‘정부를 수립한 뒤에 내일 모레라도 그것을 고쳐서 권리를 보호할 수 있으니 그것을 길게 토론하지 말고 하루바삐 통과시켜서 정부를 조직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 이어 치러진 표결에서 재석의원 176명 중 찬성 14표, 반대 119표로 양원제가 부결되고 단원제가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요컨대, 제헌국회는 이승만 의장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국회 단원제를 채택한 것이다.
4. 대통령중심제 채택
1948년 헌법 제정 과정에서 최대 쟁점은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정부 형태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정권이 누구에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 즉 이승만과 한민당간의 권력투쟁과 직결될 문제일 뿐 아니라 건국 후 대한민국의 발전방향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새로 건설되는 민주국가의 권력을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나누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입법부(국회)와 행정부(정부)간의 관계를 영국식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식 대통령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유진오는 ‘여러 해 동안 헌법학을 강의하고 연구한’ 결과 대통령제는 미국 특유의 정치제도로서 미국은 18세기 고립정책을 쓸 수 있었고, 19세기까지는 국내적으로 풍부한 예산으로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제가 가능했다고 전제하고 “국토 양단, 경제 파탄,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한 파괴 활동 등 생사의 문제를 산더미같이 떠안고 있는 대한민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해가지고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여 저물도록 옥신각신하고 앉아 있다면 나라를 망치기 아니면 독재국가화하기 꼭 알맞은 것”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내각책임제안의 채택을 적극 주장했다.
당시 남한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을 명목적인 국가원수로 받들고 행정의 실권을 스스로 차지하려던 한민당이 이 주장에 호응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유진오와 한민당계 기초위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안을 관철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의원내각제는 군주국에 알맞은 제도로서 독재화의 길을 터주는 비민주적 제도라고 보고 그러한 제도를 채택할 경우 ‘정당 끼리 싸우느라’ 국가 운영이 혼란에 빠질 것으로 인식한 반면, 대통령제야말로 민중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제도이며 건국 초에 산적한 국정을 신속히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제도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우여 곡절 끝에 헌법기초위원회와 국회 본회의에서 이승만의 주장이 관철됨으로써 대한민국의 헌법은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정부 형태를 채택하게 되었다. 아래에서 이승만이 어떻게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켰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승만은 국회의 소집 날짜가 공고된 직후 5월 26일에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제정될 헌법에서 규정될 정부형태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즉, 자신은 “새로 수립되는 정부조직에 관해서 추측이 많으나 국회에서 제정되는 헌법에 따를 생각”이라고 운을 뗀 다음 “나 개인으로는 미국식 삼권분립 제도와 대통령중심제를 찬성한다.”고 속내를 비쳤다.
그 후 6월 7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기초위원회가 채택하려는 내각책임제안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식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현재 기초 중인 헌법의 내각제는 국무총리를 둘 책임내각으로 되어 있으나 …나 개인으로는 미국식 삼권분립 대통령책임내각제를 찬성한다. 지금 영국이나 일본에서 하고 있는 제도가 책임 내각제라 할 것인데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군주정체로 뿌리가 깊이 박힌 나라일뿐만 아니라 갑자기 왕 제도를 없앨 수 없는 관계로 그러한 군주국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제도와 관념은 이미 없어지고 40여 년 전에 민주정 부를 수립할 것을 세계에 공포한 이상 우리는 민주정체로서 민주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국왕과 같이 신성불가침하게 앉혀 놓고 수상이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것은 비민주적 제도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과 같은 독재정치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를 음미해 보면, 이승만은 내각책임제를 군주제 전통이 강하게 살아남아있는 나라에서 부득이 채택하는 전근대적인 비민주적 제도이며 우리와 같이 일찍이 군주제를 청산하고 3․1운동 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은 제도라고 판단하였고 동시에 내각책임제는 독재정치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제도라고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이승만이 이와 같이 내각책임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11일 내각책임제 원안의 ‘내각’이라는 용어를 ‘국무원’으로 바꾸고, 국회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되 임기를 5년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이승만은 6 월 15일 기초위원회 회의에 출두하여 아래와 같이 내각책임제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하게 된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책임제로 기초위원들은 결의한 모양이나 그것은 안 될 일이다. 대통령은 간접선거이건 직접선거이건 인민이 선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한다 하더라도 의원은 역시 국민이 선출한 것이니 인민의 신임을 받은 대표가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은 곧 인민이 직접선거로 선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에게 행정 책임을 직접 지우는 것이 옳은 일이지 대통령을 왕처럼 불가침적 존재로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요컨대, 그는 헌법에 국무총리제와 대통령제를 함께 설정한다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에게 행정의 실권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써 그는 과거의 실권 있는 군왕들만큼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중심제의 채택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렇게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에 직접 나타나 간곡히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회의 대다수 위원들은 “인민의 직접선거라면 몰라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행정 책임까지 부여하면 그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지 2 이상의 득표자인 만큼 전제정치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주장을 도외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꼬이자 6월 17일 이승만은 독촉 명의로 성명을 내어 권력구조는 ‘대통령책임제’로 해야 한다고 또다시 강조했다.
그렇지만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내각책임제안을 번안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은 6월20일 이화장(梨花莊)을 방문한 서상일 위원장에 의하여 이승만에게 보고되었다. 이 보고를 접한 이승만은 그날 밤 ‘한잠도 못 잘 정도로’ 심각한 고민한 빠진 끝에 다음날 오후에 신익희 부의장을 대동하고 두 번째로 기초위원회 전체회의에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약 30분간에 걸쳐 지난번 보다 훨씬 더 격한 어조로 내각책임제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오늘날과 같은 혼란한 정치정세 속에서 내각책임제를 하면 권력의 안정이 안 될 것이며 아무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다음 “우리가 국권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싸워온 것은 백성에게 권리를 주자는 것이며 정당에게 권리를 주어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나라경영은 하기 어렵다.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그러한 헌법아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라고 선언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해버렸다.
이승만이 이렇게 두 번째로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나 ‘폭탄선언’을 하자 이에 당황한 기초위원 허정․ 김준연과 전문위원 유진오 ․권승렬. ․윤길중 등이 황급히 이화장을 방문하여 그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했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인 허정은 이승만에게 그동안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의 장단점을 충분히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인 만큼 원안을 승인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사람아,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나 대통령이 뒷방 영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야!”라고 한마디로 면박을 주었다.
그리고 김준연을 향해서는 “우리 역사를 보면 고려 고종 때 무관들이 정방이란 것을 만들어 임금을 한낱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최씨 일파가 마음대로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런 정방정치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어쨌든지 임금은 임금으로서 실권을 행사해야 하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말했다.
이화장 방문을 통하여 이승만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한 한민당 소속 기초위원 14명과 당 간부들은 그날 밤 계동 김성수 댁 사랑방에 모여 구수회의를 열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이승만의 뜻에 맞추어 헌법안을 대통령중심제로 번안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준연이 “지금 초안을 보아하니 대통령책임제로 고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오. 몇 군데 관계되는 조문만 삭제하고 앞뒤가 맞게 글귀를 고치면 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말에 고무된 김성수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김준연은 그 자리에서 “연필 한 자루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쉽사리 고쳐버렸다.”
김성수는 곧 유진오를 불러 김준연이 고친 초안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유진오는 “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해서 기초된 헌법을 대통령제로 바꾸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만약 적당히 몇 조문만을 ‘북북 그어 버리는 식으로’ 헌법안을 고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빔밥 헌법’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막상 김준연이 스스로 고친 초안을 내보이면서 “앞뒤 연락(連絡)은 되지요?”라고 다그쳐 묻자 “네, 연락은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유진오의 이 대답을 수정된 초안이 헌법으로서 체면이 설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수정안이 성급히 다듬어졌다.
그 다음 날(22일) 오전 10시에 헌법기초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위원들은 우선 양원제를 단원제로 고치는 번안을 처리한 다음 내각책임제 번안 문제를 논의했다. 대통령책임제로의 번안에 대해 조봉암 의원(무소속)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토론이 오후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결국 김준연, 조헌영 정도영 등 한민당 의원들의 번안 동의가 22대 1이라는 절대다수로 통과되었다.
번안의 이유는 “의원다수의 동향과 기초위원회의 다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이승만 의장의 주장을 용인하는 의미에서”고친다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이승만과 신익희가 국회의장과 부의장 자격으로 시종 방청했다.
헌법의 권력구조 조항은 워낙 중요한 사안인 데다 이승만의 고집 때문에 헌법 기초위원회에서 마련했던 내각책임제 안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대통령중심제안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다섯 차례의 제1독회 과정에서 무소속 이문원 ․조봉암 그리고 조선공화당 김약수(빨갱이), 조선민족청년단 강욱중, 대동청년단 원장길 등의 소속 의원들이 강력하게 반 대통령중심제 논리를 전개했다. 대통령제는 일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히틀러(AdolfHitler),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같은 독재자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대통령을 탄핵하기 쉬운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일반적 주장들과 함께 “남미 에서 정변이 잦은 것은 대통령제 때문”(김약수)이라거나 “행정부 우위의 미국식 대통령제보다는 행정 책임은 내각이 지는 프랑스식 대통령제가 우리나라 실정에 알맞다”(조봉암)는 매우 전문적인 지적도 있었다.
이같은 발언은 물론 국회에 제출된 대통령중심제 헌법안을 수정하는데 목표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론에 맞서서 대통령중심제를 옹호하는 의원들도 많았다. 그들의 논지를 살펴보면, “현시 우리나라 정치는 위대한 인물이 대통령중심제하에서 책임지고 강력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최봉식, 무소속), “정부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정되어 있어야 나라가 커지고 국민이 평안하게 된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정부가 안정되려면 내각제 보다 대통령제라야 합니다”(이원홍, 독립촉성국민회), “8․15 이후 심화된 당파 간의 파쟁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이항발 무소속), “다사다난한 현 단계에 있어서 내각책임제를 실시한다면 내각의 경질이 빈번할 것을 예상할 수 있으니… 민심은 불안해질 것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니… 우리 민족에 어떠한 불행한 사태가 가져올지 실로 예측키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여 연립내각을 세워 정국의 안정 세력을 가질 필요가 절대로 요청되는 바입니다”(조한상 무소속), “대통령제는 곧 독재를 초래한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나 헌법에 의하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입법기관이 엄존한 이상 대통령은 여하한 의미와 여하한 형태에서도 군주주의에서나 같은 전제 또는 독재를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는 미국의 실례가 입증하는 바이다”(진헌식 독촉) 등 여러 가지였다.
여하튼 국회 본회의의 대체 토론에서 대통령중심제를 옹호한 의원들의 수가 내각책임제를 지지하는 의원들의 수를 26대 17의 비율로 웃돌았다. 그 결과 대통령중심제 헌법안의 내각책임제안으로의 수정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이렇게 권력구조에 관련된 헌법조항이 대통령중심제로 낙착되자 내각책임제의 주창자 유진오는 진헌식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의 협조를 얻어 7월 6일 오전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되어 있는 헌법안 제68조를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수정하는 안을 제출통과시키려 했다.
유진오는 이렇게 국회의 권한을 증대시킴으로써 국무총리의 권위를 향상시켜 실제운영 면에서 헌정을 내각책임제처럼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진오와 일부 의원들의 수정 시도는 그 날 ‘12시 20분부터 오후 2시까지 1시간 40분 사이에 …정치가들 사이에 일종의 협상이 이루어’진 결과 유진오가 ‘초밥 먹는 사이에’ 속개된 오후 회의에서 국무총리 임명에 대해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제68조 제1항)은 수정안대로 통과되었지만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국무총리의 제청권(제2항)은 부결되었기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국무위원 임명은 국무총리의 개입 없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진오는 “이 결정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결정적으로 대통령제로 넘어가고 대통령의 전제독재의 길은 환하게 뚫려진 것이었다.”라고 단언하였다.
이상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대통령중심제를 특징으로 하는 헌법안이 7월12일 재석의원 163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 ․통과되었다. 이날 이승만 의장은 아래와 같은 인사말로써 헌법제정 작업을 끝마치는 자신의 감회를 드러냈다.
“지난 40년 동안에 남의 법률 밑에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때에 우리가 여기에 모여 가지고 3천만을 대표하는 민의를 받아 가지고 이 헌법을 우리의 손으로 정해서 우리가 만들어 놔서 이 국법으로 우리가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게 이렇게 제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헌법의 제정은 실로 해방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 많이 노력하시고 의견이 서로 같지 않은 것도 다 희생들 하시고서 오늘 이 성적이 있게 한 것은 여러분이 많이 노력해서 하신 것으로 대단히 의장으로서 앉아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한국인이 자율적으로 제정한 데 대한 민족적 자부심과 헌법제정과정에서 자기와 의견이 달랐던 국회의원들이 양보하고 협조해준 데 대한 감사의 정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제정된 헌법은 7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대한민국 헌법 공포식에서 이승만 의장에 의해 선포되었다. 이 공포식에서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연설함으로써 자기에게 부과된 역사적 임무를 끝마쳤다.
“지금부터는 우리 전민족이 고대전제나 압제정체를 다 타파하고 평등․자유의 공화적 복리를 누릴 것을 이 헌법이 담보하는 것이니 일반국민은 이 법률로써 자기 개인 신분상 자유와 생명 ․재산의 보호와 또는 국권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 이 헌법을 존중히 하며 복종하는 데서 생길 것을 각오하는 것이 필요하니 일반남녀가 각각 이 헌법에 대한 자기 직책을 다함으로 자기도 법을 위반하지 않으려니와 남들도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할 진대 우리 후세 자손이 같은 자유 ․복리를 누릴 것이니 이날 이때에 우리가 여기서 행하는 일이 영원한 기념일이 될 것을 증명하여 모든 인민이 각각 마음으로 선서하야 잊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이 때에 우리가 한 번 더 이북 동포들에게 눈물로써 고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리 아프고 쓰라린 중이라도 좀더 인내해서 하로 바삐 기회를 얻어서 남북이 동일한 공작으로 이 헌법의 보호를 동일히 받으며 이 헌법에 대한 직책을 우리가 다같이 분담해서 자유 활동에 부강증진을 같이 누리도록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축도합니다.”
요컨대, 이승만은 새로 제정된, 자유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헌법이 한국민에게 누대에 걸쳐 전대미문의 복리를 안겨다 줄 것을 장담하면서 온 국민이 이 헌법을 준수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가까운 장래에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이 대한민국의 헌법체제하에 통일됨으로써 온 겨레가 자유와 부강증진의 혜택을 함께 누릴 것을 기원하고 있었다.
맺음말
이 논문은 이승만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1. 이승만은 일찍이 1904년부터 헌법의 중요성을 간파한 지식인으로서 3․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와 서울 등지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된 다음 신대한의 헌법 제정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를 소집․개최하고 그 회의에서 「한국인이 목표와 열망」이라는 일종의 헌법대강을 채택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1919년 8월 김규식과 공동 명의로 「대한공화국 헌법요강」을 기안한 경력이 있다. 나아가 그는 1919년 9월 상하이 임정의 ‘임시대통령’직을 수임하고 상하이 임정이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법”을 받들어 1925년까지 임시대통령직을 수행한 경력도 있다.
2. 이승만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하고 여러 모로 헌법 제정 준비를 하였다. 그는 1944년 4월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과의 슬라이 교수에게 한국 헌법 기초를 의뢰한 바 있고, 해방 후 1946년 6월에는 일찍이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안했던 신익희로 하여금 행정연구회를 중심으로 헌법 제정 준비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나아가 그는 1948년 2월경 총선거를 앞두고 자기의 오랜 동지인 재미 정치학자 정한경을 서울로 초청하여 헌법 제정에 필요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러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그는 1948년 3월 신익희를 통해 유진오 교수에게 헌법안 기초를 의뢰하였다.
3. 이승만은 제헌국회 의장으로서의 헌법 제정에 다음과 같이 공헌하였다. 첫째, 그는 제헌국회의 의장으로서 국회의 개회식과 헌법 공포식 등 주요 행사를 품위 있게 진행시키고, 헌법기초위원과 전문위원의 선출 내지 위임을 총관하였으며, 나아가 제헌국회의 헌법 제정 작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제헌국회에 부과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였다. 특히 그는 국회 본회의의 사회자로서 입법의원들로 하여금 헌법안 심의를 쾌속도로 진행시키도록 독려한 결과 헌법 제정 작업을 예정된 일정에 맞추어 7월 12일까지 완료할 수 있었다.
둘째, 그는 헌법기초위원회에 압력을 가하거나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권을 행 사하면서 헌법의 내용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제헌헌법의 전문에 신생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취지의 문구를 첨가하고, 대한민국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나아가 그는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마련한 헌법안 가운데 양원제안과 내각책임제안을 단원제안과 대통령중심제안으로 각각 수정케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형성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외에도 그는 1946년 3월에 자기가 의장직을 맡은 민주의원을 통하여 평등권․기본권․참정권 등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에 필요한 정책안과 농지개혁 및 중요 기업의 국영 등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필요한 경제정책안을 내포한 「임시정책 대강」을 공포함으로써 2년 후 이러한 내용이 반영된 제헌헌법의 탄생에 근원적으로 기여하였다.
셋째, 그는 3․1운동 이후 한민족이 수립할 새로운 국가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여야 된다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헌법기초위원회의 위원들이 합의하여 만든 내각책임제안을 번복시키고 그 대신 대통령중심제안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국회 본회의에서 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중심제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자신의 초지를 관철시켰다.
학계 일각에서는 ‘대통령병 환자’였던 이승만 의장이 자기의 ‘권력욕'을 충족 시키기 위해 1948년 제헌과정에서 무리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게 만들었다고 지탄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1904년부터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세상에서 가장 선미한 제도’라고 찬양한바 있고 1919년 이후 한결같이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을 구상 내지 기안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1919년 필라델피아의 제1차 한인의회에 참가했던 100여 명의 애국지사들과 1948년 제헌국회 입법의원 중 다수가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병 환자'였기 때문에 그 제도의 채택을 강행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이승만 의장은 남보다 먼저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고,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과 전문위원을 선발하여 미리 짜여진 일정에 맞추어 헌법제정 작업을 완결시키는 등 제헌국회 의장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였으며 나아가 제헌헌법의 핵심내용을 자기의 뜻에 맞추어 형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 의장이야말로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의 주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