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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교들을 포함하여 인류의 모든 위대한 가르침들은
모두 우리에게 그 나름의 깨우침을 주곤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 동양인들의 사고를 오랫 동안 지배해왔던
유교 혹은 유가사상은 왠지 고리타분한 이미지로 인식되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그 초창기 자이언트들의 가르침이 오랜 기간 교조적으로 해석되면서,
실제로도 고리타분하게 실천됐던 역사도 결코 짧지 않았음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유가 사상에는
다른 종교전통들이나 고전적 사상들이 갖지 못한 매우 강렬한 특징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가르침을 읽는 자로 하여금,
"읽은 순간에" 즉시로 부끄러움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에도 위대한 진리들이 들어 있지만,
"즉시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드는 표현적 위력에 있어서는
과히 유가의 경전들만한 고전들도 참으로 드물다고 생각됩니다.
공자 님의 말씀을 담아놓은 <논어>(論語)는
인간의 참다운 본성이자, 수양을 쌓으려는 자가 지향해야 할 덕목인
'인'(仁: 어질다, 어짐)에 대한 수많은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저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는 구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자왈(子曰),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이라.
[직역] 공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어진 자'(仁者)만이 타인을 좋아할 수도 있고, 타인을 미워할 수도 있다" 하셨다. |
이 부분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 사람, 즉 어진 사람만이 아무런 사심없이
타인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아직 어질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을 미워하거나 좋아함에 있어서
사심이 개입하거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올바른 마음의 토대 위에서 타인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심"이나 "사리사욕"이
반드시 거창한 금전적 이권 같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내 마음에 탐탁한 것에 대한 심리적 요소일 수도 있다는
매우 넓은 의미의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미워함"에 있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본성에 대한 숙연함이 없다면
온통 "적개심"에만 물들게 되어, 올바른 판단이 없어지기에
실은 타인을 미워하는 동안 스스로를 파멸케 하게 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보면,
유가에서 말하는 참다운 "어짐"(仁)이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과 실은 아주 동일한 토대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은 여러 종교에 나타난 기본적 윤리를 "황금률"이란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디만..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들 중 죄없는 자들만이 돌을 던지라"라는 말도
아마도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불교의 경전들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심오함을 느끼게" 만들며,
기독교의 성경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들고
유가의 경전들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스스로를 반성케 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러한 유가의 가르침이 가진 표현력은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는듯 합니다.
그래서 유가의 경전들은 마치 심심풀이 땅콩을 먹는 것처럼,
항시 손닿는 데 두고서, 가끔씩 한 구절만 읽어보는 것도 참 좋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20세기 말에 한국사회는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한
강력한 "투쟁"의 시기를 보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적개심"을 치유하는 과정도 없었고,
혹은 그러한 적개심이 하나의 "병"(病)이나 문제임을 자각하는 이들도
아직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청산에 대한 인식은 존재했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진
심리적 장애의 치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아주 불행하게도...
백골단의 몽둥이와 다련장 최루탄 발사 차량과 불과 수십 미터 앞에서 대치하거나
혹은 때로는 여러가지 일을 당하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아스팔트 위에서 보냈던,
저 같은 사람이... 고 노무현 대통령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문화를
결코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현상도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노무현 시대의 긍정적 측면도 많았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억이 된 긍정적인 것을 논하기보다는
현실적 장애가 된 부정적 부분에 대한 반성이 참으로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그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주제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부라도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여기"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동일한 문제에 처하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이 더욱 더 강력한 것이 되려면
우리가 "사심없이", 즉 적개심 없이
인류의 보편적 정의와 인간의 기본적 본성 위에서
주장을 펼쳐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적개심이나,
혹은 조금 더 나아가서 민족주의적 열정만으로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장한다면
그들을 "논리적으로" 이길 수는 있을지언정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설복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반성하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역지사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에서 최고의 영웅들은
아마도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일 것입니다.
이 분들의 정신은 당시로서는 아주 보편타당한 의로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기에
단순한 "테러리스트"의 수준을 넘어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 분들을 존경하며,
매년 그 제사에 참여하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정신대 할머니들을 찾아와
진심으로 무릎꿇고 사죄하는 일본인들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디만,
만일 한국과 일본이 근대사의 과정에서
그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인 후손들이 일본인 후손들에게 과연 어떠한 자세를 보였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우리 각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한 후,
각자가 느끼는 바가 바로 스스로가 알게 될 진실일 것이란 점입니다.
어찌되었든, 근현대사에서 일본인 중에도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 하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에 앞장섰던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 변호사로우리 정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유일한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우선 그에 대한 기사를 한편 소개합니다.
(출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발행 격월간 웹진 "민족화해" 2004/11/12 (통권 제11호)
조선 독립운동의 동지, 일본인 쉰들러 ‘후세 다츠지’의 현재성
남기정 (일본 도호쿠대학 법학연구과 교수)
필자가 재직하는 도호쿠대학(東北大學)은 일본 동북지방의 중심인 센다이시(仙臺市)에 소재한다. 이 센다이시에서 동북쪽으로 30분 차를 달리면 일본 3대 경관의 하나라는 마츠시마(松島) 해안에 다다르게 되고,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30분 차를 달리면, 이시노마키시(石卷市)라는 인구 약 12만의 마을에 이르게 된다. 에도시대에는 센다이번(仙臺藩)의 쌀 집적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지난 10월 12일, 한국정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한 고(故)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변호사가 바로 이 이시노마키시 출신이다.
(사진)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일본인 고(故) 후세 다츠지.
한국에서는 지난 2000년 한국문화방송의 특집방송을 통해 일본인 쉰들러라는 별칭으로 소개된 바 있으며, 그를 기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보시진치(그의 한자성명 넉자를 한국식으로 부른 이름)로 알려진 그가 한국정부가 내린 결단을 계기로 일본에서 다시 일반인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이시노마키시가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온 후세 다츠지 알리기 운동이 크게 활력을 얻고 있다. 일본인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그 배경에는 적지 않은 반대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재조명 운동이 일본에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자신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난 10월 13일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보도를 통해서였다. 여태 그를 몰랐던데 대한 부끄러움을 가누는 한편, 그가 센다이에 인접한 낯익은 도시 출신이라는 데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그의 삶과 행적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과 사상적 배경
후세 다츠지는 1880년 11월상 13일, 미야기현 헤비타무라(宮城縣蛇田村, 현 이시노마키시[石卷市])에서 태어났다. 다츠지의 부친 에이지로(布施榮次郞)는 평범한 농가의 가장이면서도 농삿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독서와 음주로 시간을 보내며, 책에서 얻은 지식과 설익은 철학을 마을사람들에게 피력하는 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당대의 일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저술을 통해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 접하여 자유민권주의를 지지하게 된 반면, 후쿠자와의 권력적인 국가관과 유교 비판에는 적대적 대결의식을 감추지 않았다. 에이지로는 다츠지가 소학교를 졸업한 뒤 소학교 고등과 대신 동네의 한학숙(漢學塾, 서당과 같은 곳)에 보내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을 받게 했다. 이러한 부친의 가르침 속에서 소년 다츠지의 마음에는 치부와 입신출세는 악덕의 결과이며 이를 바라는 것은 천박한 짓이라는 생각이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나이가 들면서 부국강병의 메이지 국가 예찬으로 들 떠 있는 마을의 동년배들과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낀 후세 다츠지는 도쿄에 나가 철학을 학문할 결심을 하고 상경하게 되었다. 1899년에 상경한 뒤로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의 기독교 사상에 접하는 한편,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등 초기 사회주의의 영향 속에서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반전론 비전론을 주장하며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에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또한 헤이민신문(平民新聞)의 독자였던 다츠지는 지면을 통해 당시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아나키스트 혹은 마르크시스트와도 교류하며 계급운동에 경도되고 반제 민족운동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후에 수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약자를 변호하겠다는 사명에서 성장한 자연발생적인 해방운동가로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검토하고 파악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호랑을 위한 직업을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다
철학하는 사람을 꿈꿨던 그가 법조인이 된 것은 그의 유학생활을 지원한 친족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 때문이었다. 그의 친족은 청년 다츠지가 대정치가를 지망하여, 이에 상응한 학교에 다닐 것을 생활비와 학비 지원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런 저런 잡일을 하면서도 겨우 생활비를 대는 데 급급했던 다츠지는 학비를 얻기 위해 법률을 전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친족의 바램대로 메이지법률학교 (明治法律學校, 현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진학했으며, 1902년 졸업과 동시에 판검사등용시험(현재의 사법시험)에 합격, 1903년 4월에는 검사대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사임하고 만다. 사임 이유는 동반자살에 실패한 뒤 자수해 온 모친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사법제도가 도입한 서구적 합리주의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으며,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기보다는 약자 위에 군림하는 삶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세는 이 때 계관을 사함(桂冠の辭)이라는 글을 발표, 당대의 판검사직을 호랑(虎狼, 탐욕스럽고 잔인한 사람을 비유한 말)을 위한 직업으로 비유하고 이를 사임하겠다고 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는 소년 다츠지가 부친으로부터 이어 받은 전통적 유교적 윤리인 인(仁)의 정신의 발로였으며, 근대화의 음지에 내팽개쳐진 민중들을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감싸 안고자 했던 행동이었다. 이후 그는 1953년 9월 13일 생을 마감하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권파 운동권 재야변호사로서 활약하며, 부국강병의 패권적 국가건설 대열에 서기를 거부하고, 그러한 근대화의 대열에서 낙오되거나 이탈한 소외계층을 위해 권부에 도전하는 반골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관철했다.
투쟁하는 변호사
일본에서 대중운동을 이야기 할 때, 메이지 초기(1870-80년대)는 자유민권운동의 시대, 메이지 후기(20세기 초)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시대, 다이쇼 시기(1910년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시대, 다이쇼 말기(1920년대)부터 쇼와기 전기에 걸쳐서는 일본공산당의 지도하에 전개된 계급 운동의 시대로 구분한다. 후세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전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갔다. 1933년 후세는 지난 30년 간의 변호사 활동을 세 시기로 나누어 회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변호사 활동을 개시한 1903년부터 1912년까지의 제1기에 대해 후세 자신은 지극히 순진한 감정에 불타는 인도주의자로서 부약좌강(扶弱挫强, 약자를 도와 강자를 무릎꿇게 함)의 정신에 입각한 변호활동을 전개한 시기로 회고했다. 제2기는 1913년부터 1922년까지의 시기로 각종 반권력 투쟁에 대한 변호활동에 분주했던 시기이다. 제3기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로 확고한 계급의식에 입각한 변호활동의 시기로 정리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합당한 1910년대, 그가 순진한 휴머니스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호활동을 통한 반권력 투쟁을 지향하게 되고, 1920년대 후반 일본 국내의 모든 개량적 민주주의 운동이 차단당하는 시점에 이르러 계급 투쟁에 입각한 활동을 자각적으로 지향했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같은 개량적 점진적 자치확대주의자와 다른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공공연히 조선의 독립에 지지를 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후세는 1931년 일본공산당 탄압 사건의 법정 공방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권력 핵심인 당시의 사법부를 통렬히 비판, 193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1933년에는 금고 3개월, 1939년에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변호사 자격을 회복, 전후의 각종 대중운동 탄압 사건과 조선인학교 폐교반대 투쟁 사건 등에서 변호활동을 전개했으나, 1953년 5월 내장암 발병으로 병상에 누워 그해 9월 13일 74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
후세가 조선 독립운동과 직접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변호사 인생의 제2기에 접어들어 있던 1919년의 일이었다.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2·8 독립선언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것이 그 계기였다. 약 600명의 재일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집회는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단원 10명이 체포 구속되었다. 후세는 1심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실형을 언도 받은 최팔용, 송계백 등 독립단 단원들을 변호하여 결국 무죄를 이끌어냈다.
1923년 7월, 후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 사건 재판의 피고들을 변호하기 위해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부산에 도착해서는 조선인 아나키스트 계열의 집회에 초청되어 총독부의 탄압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24년 1월의 니쥬바시(二重橋) 폭탄투척 사건에서도 의열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아 사형의 부당성을 호소, 무기징역으로의 감형을 이끌어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의 조선인 학살에 접해서는 그 잔혹성에 분개하며, 일본인으로서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했다. 관동대지진 피해동포 추도회에서는 연단에 나서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잔혹한 비극이라며 살해당한 조선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조선인에 대한 사죄원고를 직접 작성, 조선의 신문사에 투고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터진 박열 대역죄사건에서 후세는 피고인 박열(朴烈)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위해 정렬적인 변호활동을 전개했다. 후세는 이 사건을 조선인 학살의 정당화와 책임 회피를 위해 날조된 사건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최고권부인 대심원을 상대로 하여 재판의 부당성과 피고들의 무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3월, 결국 대심원은 이들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하지만, 그로부터 1주일 후 천황의 은사(恩赦)라는 명목하에 무기징역으로 감면되었다. 1928년 가네코는 수감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나, 박열은 일본의 패전이후 출옥하여 초기 재일 한인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갔다. 한편 후세는 일본 패망직후인 1946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변함 없는 지지와 건국의 기대감을 담아 운명의 승리자 박열(運命の勝利者, 朴烈)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26년 3월 후세는 두 번째 조선 방문길에 나섰다. 동척토지 회수투쟁에 나선 전남 궁삼면의 농민 편에 서서 약 1700정보의 경지 소유권 확인 소송을 준비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후세는 총독부의 방해공작으로 예정된 활동은 벌이지 못했지만, 후세의 개입에 긴장한 총독부는 비록 실효성은 없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조정안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9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경성을 방문했다. 그는 변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사건의 성격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전 조선의 민중이 이 재판을 주시하고 있다. 피고들의 활동에 민족의 희망이 결려 있기 때문이다. (중략) 재판부는 양심의 귀를 기울여 조선민중의 비통한 소리를 경청해 주기 바란다.’ 이 재판정에 선 피고 가운데 한 명이 박헌영이었다. 뒤에 후세는 병상에서 박헌영의 숙청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후세 다츠지와 한일 공명의 정신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과 조선 독립운동의 전개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후세 다츠지에 대한 일본 내의 평가는 일부 진보적 법조인 사이에서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행적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는 점인데(2004년 현재, 목록으로 정리된 건수만 해도 633건), 이러한 자료의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결코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아들이 남긴 두 권의 평전과 현재 그의 전기를 준비중인 모리 다다시(森正)의 몇 건의 연구가 있을 뿐이다.
그의 고향인 이시노마키시 시민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그 업적을 기리는 운동이 잠시 일기도 했지만, 이시노마키 문화센터가 후세의 방대한 자료를 그 유족으로부터 물려받고, 1993년 그의 기념비가 건립된 것으로 일단락되어 휴면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3년의 사후 50주년 기념집회를 계기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1999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에서의 후세 기념사업의 전개가 하나의 촉발제였다. 200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후세 선생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일본인 연구자가 참가하여 한일 공동의 재조명작업이 개시되었고, 전술한데로 한국문화방송이 그의 일생을 특집으로 제작해 방영했던 것이 일본으로 역수입되어 비디오 상영운동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전개 속에서 일본의 후세 연구자들은 후세 사상의 탈국경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한국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의 후세 정신 기리기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될 것이 기대된다. 예전에 없이 일본의 전통으로의 회귀 목소리와 국가주의적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지금, 후세 정신이 되 살아나 균형을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한국인들이 2000년대 초반에 후세 다츠지 선생의 추모사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이후 매년 제사에 참석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는듯 합니다.
더구나 이번에 발생한 일본의 동북대지진으로
이시노마키가 거의 폐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디만,
후세 다츠지 선생의 자료들이 있는 이시노마키 문화센터도
피해를 입었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디만,
아직까지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저의 결론은 사람 사는 세상은 똑 같다는 것입니다.
나쁜 자들이 있으면, 좋은 사람들도 존재하는 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독도 문제와 같은 일종의 영토분쟁은
우리가 "쁘레아위히어 사원" 문제에서 보듯이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책은 우리가 "영원히" 실효지배하는 것 뿐입니다.
이 최선책을 위해서는 과감하고 논리적인 돌파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안과 별개로,
이웃 동네의 사람과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선 "인간을 그냥 인간으로 보는 것"이 바로 그 출발점일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는 실은 일본인들에 대해서만 국한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인간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캄보디아의 정치인들이나 태국의 정치인들을...
마치 한국의 정치인들처럼 정교하고 사심없이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후지 다츠지 선생과 같은 일본인은 단 한명이 아닙니다.
시간이 나실 때 이수경 선생이 편집한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리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보도) 서울문화투데이 2010-4-15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보는 한국의 미래
이수경 교수, <한국과 일본의 교류의 기억> 한국서 출판
한일강제병합 100년, 무조건 반일 친일만 외칠텐가. 일본은 혐한만 외칠 것인가. 역사를 바로 알고 미래를 개척하는 것만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시점에서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발간된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학술정보사에서 출판한 <한국과 일본의 교류의 기억(이하 한일 교류의 기억)>은 도쿄 가쿠게이대학교 교육학부 이수경 교수가 일본에서 20여년을 살며 한일관계 청산을 위한 과거사 진상을 풀뿌리적 측면에서 조사하며 알아낸 시민들의 우호 교류를 한일 전문가들과 함께 적은 책이다.
(사진) 편저자 이수경 교수.
책을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이나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신문을 만드는데 기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와 명성황후 암살을 사주한 이노우에 가오루와의 견원사이, 명성황후 등의 역사를 밝힌 사학자의 집요함, 베를린 올림픽에서 기적을 일으킨 한국 축구선수들, 한국의 대학생들이 대마도(츠시마) 청소를 통해 풀뿌리 교류를 한 움직임 등의 다양한 내용을 소개했다.
정지선 기자 press@sctoday.co.kr
편저자 : 이수경
<목차>
제1부 일본 사회에 영향을 준 한국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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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이해 (1) : 지리적 관점에서"(2011-4-8) |
첫댓글 리차드가 워낙 촌놈이라 어릴적 국민학교(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소재 도산국민학교)에 입학하기전
이태동안 할아버지 손을 잡고, 때론 당시 머슴이라했지요? 아제비의 등에 업혀 시골서당에 다녔습니다.
대부분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 논어정도까지 어른께서 4남4년 팔남매중 세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까지
공부를시킨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동생 셋은 어리거나 대구로 이사를 하면서 수학할 기회가 없었지요!
모처럼 윗글을 읽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방콕시각 02시 40분...
새로운 감회가 아스라히.... 머리속을 윙윙 날아 다니네요!!
동몽선습: 첫머리가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니라..> '아이..할배요 왜 사람만 최고라 카니껴?' 이래 물었다가 핀찬 받은 생각이나는군요.. 명심보감: 첫머리 <자왈 위선자는 천'報之' 이복하고..위부선자는 ..>이데.. 여기서 '報之' 말이 나와서 킥킥 웃다가..뒈지게 혼난 기억이.. 역시 맞으면서 배운건 반세기가 지나도 잊지 않는 군요..
아! 아샤아샤님도...저는 신안면 청현부락 웃동네 서당을 댕겼는데,
대구로 이사오고 몇년뒤 가보니 새마을 사업한답시고, 다 뜯어내고...
무신 스레트지붕에...시멘트블럭 담벽에...너무너무 가슴아팠던 어린시절이었습니다!
저희집은 사랑채를 지나야 안채에 갈수있는 대분이 5개가 넘었는데, 아마 사라호 태풍때..
강변의 농막에서 여름농사일을 하는 머슴아제들 뒷바라지한다고 식모들과 어머니,
우리 형제들까지 여름을 지냈는데... 둑이 터지고..우리 가족, 식솔들 30여명이 끊겨나간
둑과 둑사이에 고립되었을때.. 100수를 넘기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지혜로 대문 3장을 뜯어내어
뗏목을 만들고 우리 식솔을 구했다는 어머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