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이봐라, 이것 좀 주울래!" 등하굣길이나 학교 일과 중에 과자 껍질 등의 쓰레기가 눈에 띌 때면 아이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내 이 주문에는 쓰레기가 나뒹구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져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대체로 학생들의 눈에는 쓰레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쓰레기를 줍자는 내 주문은, 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을 때 다시 한 번 우리가 처리해야 할 대상이 여기 있고, 그것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주문과 바람에 대한 대답은 늘 재미없는 것이다.
"내가 왜 주워야 돼요!" 라는 항변이 되돌아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항변 속에는 '나는 청소당번이 아니다'와 '나는 쓰레기를 주울 만큼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주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쓰레기가 보여도 전혀 불편해지지 않는 익숙함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 쓰레기가 있어도 아이들에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쓰레기 있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고, 그 풍경에 익숙해진 결과 그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익숙해지면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해짐으로 해서 좋지 못한 점도 있다. 익숙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자주 대하다 보니 그것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쓰레기에 대한 이런 익숙함이 결국 쓰레기에 대한 무감각으로, 그래서 쓰레기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익숙함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진다.
바람직하지 않은 익숙함의 하나가 '좋은 게 좋다!'라는 사고방식이 아닐까. 이 사고방식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좋다'라고 넘어감으로써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부교재업자와 교사 사이의 채택료 관행은 둘만 좋았지, 학생들은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교육 자체에 큰 상처를 남길 뿐이라는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수학여행이나 야영수련 행사와 관련하여 업자들이 내미는 촌지도 그렇고,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는 사설모의고사 리베이트가 그렇다.
익숙하지 않아야 하는데, 곧장 익숙해지는 문제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장학지도'라 할 수 있겠다. 교사들이 수업을 잘 하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방문 및 공개수업 참관이 아니다. 또 장학 실적을 위한 사전 수업지도안 제출을 요구할 것이 아니고, 학생들이 점수가 아니라 공부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만드는 것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점수 따는 공부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해 세상의 법칙과 존재의 의미를 깨쳐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권한 밖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하다. 차라리 '내 관심사는 주어진 업무성과를 잘 내는 일이라서 그런 건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장학지도를 하려면 수업시수를 줄이고, 불필요한 공문처리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해서 교사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모든 교사들이 갖고 있는 '좋은 교사가 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아니라면 장학지도는 차라리 안하는 것이 훨씬 낫다.
교육 발전위해 개선돼야
편안해도 좋을 익숙함과 편안해지지 말아야 할 익숙함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고, 편안해지지 말아야 할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교육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익숙함을 거부하는 것은 얼마간의 피곤함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얼마간의 피곤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불편함에 무감각해지지 않을 수 있다.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다.
/양태인(마산 해운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