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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부안 50코스
부안군청-신석정고택-고마저수지-장등마을-동진대교-석천휴게소
20230524
1.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2주일이 지나 부안군청 앞에 다시 왔다. 2주 전에는 오전 11시 30분 부안군청 앞에서 서해랑길 49코스를 마쳤다. 이번에는 새벽 3시 40분 서해랑길 50코스 탐방을 위해 부안군청 앞에 왔다.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빛나는 부안군청 앞에서 군청 뒤쪽에 있는 서해랑길 50코스 안내도 앞으로 가서 기념 사진을 찍고 출발한다. 2주전에는 군청 뒤뜰의 수목 정리를 하느라 안내도를 철거해 옆에 방치했는데, 식재 정리가 끝났는지 이번에는 안내도를 원래 위치에 바로 세워 두었다. 길손의 생각에는, 서해랑길 50코스 시작점 표지가 있는 군청 앞 가로등 옆으로 이 안내도를 옮기거나 시작점 표지를 이곳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를 같은 위치에 설치하는 것이 탐방객을 낯설게 하거나 어리둥절하게 하지 않는다. 안내도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 엉뚱한 곳에 시작점 표지를 설치하여 탐방객은 이 위치를 확인하는 어려움과 혼란을 겪는다. 지리에 어두운 낯선 곳에서 시작점 표지와 안내도를 찾느라 탐방길 종착지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이 많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를 같은 곳에 설치하기를 서해랑길 관계자에게 진심으로 부탁한다.
부안군청 앞길은 당산로라고 명명되어 있다. 2주 전 49코스를 마치고 군청 서쪽 가까이에 있는 서문안 당산을 잠깐 살폈는데, 아마도 서문안 당산 때문에 군청 앞길을 당산로라고 명명한 듯 싶다. 군청 앞에는 부안 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2020년에 설립된 부안 역사문화관을 관람하지 못하고 지나치는데, 그 옆 공공용게시대에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음을 축하하는 알림막이 세로로 펼쳐져 있다. '4.19혁명 기록물' 1019점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를 다시 이곳에서 확인한다. '4.19혁명 기록물'은 1960년대 세계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 세계사적 중요성을, 또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권력층이 아닌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노력했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2023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처가 워낙 커서 그 이야기를 가슴으로 품고만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즈음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비롯한 각 학계에서 동학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가치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올바르게 평가 받게 되었다. 그 즈음(1994년)부터 이 지역민들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분명하게 자리잡았으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고 길손은 생각한다.
서해랑길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정읍시 고부 지역을 비껴간다. 대신에 동학 제2차 봉기가 일어난 고창군 무장 지역과 부안 지역을 이어가면서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으로 탐방객들을 끌어들인다. 조선왕조 말기의 사회적 격변의 소용돌이가 이 지역에서 일어나 수많은 농민이 죽었다. 그 원혼들이 서린 곳을 기억하며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라는 탐방 안내문과 안내도를 서해랑길 고창 지역과 부안 지역에서 보았다. 부안 역사문화회관 옆 알림막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가치가 인정받았음을 지역민의 자랑으로 알리며 대한민국 역사의 도도한 물길의 흐름을 탐방객에게 알리고 있다. 정읍에서의 고부 농민 봉기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가 현재의 고창군 공음면에서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선언하면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는데,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살기를 맹세한다." 이 기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렇다면 부안에서의 어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까? 길손은 동학기록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부안 출신의 사족(士族) 기행현(奇幸鉉)이 1866년부터 1911년까지 45년간 쓴 개인 일기 <홍재일기(鴻齋日記)>가 발굴되어 부안의 백산 대회와 동학농민혁명 전후의 부안과 인근 지역의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고 한다. 과연 <홍재일기>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까?
남문안길 부안교육문화회관 끝에 남문안 당산이 있다고 하는데,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일행을 뒤좇아 잰걸음으로 내달린다. 어디서 향긋한 꽃향이 날아와 코를 간지럽힌다. 무엇이지? 가로수를 살피니 멀구슬나무가 연보랏빛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향긋한 내음을 새벽 공기 속에 날리고 있다. 멀구슬나무 꽃은 라일락꽃 향내인 듯 찔레꽃 향내인 듯 그윽하게 향기롭다. 햇빛 밝은 날 멀리서 보고 있으면 꼭 오동나무 연보랏빛 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빛깔은 다르지만 꽃잎이 이팝나무 꽃잎처럼 갈라져서 아주 비슷하다. 지난해 5월 고흥 지역에서 처음 알게 된 멀구슬나무 추억이 솟아오른다. 그 지역민들은 이 나무를 고롱나무라고 부른다. 고롱나무의 본 이름이 멀구슬나무, 초록빛 열매가 가을에 노랗게 익어서, 겨울에도 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멀구슬나무가 흰눈을 이고 고행의 수행자처럼 서 있다. 고롱나무 사계절 풍경들이 부안 군청삼거리 키 큰 멀구슬나무 연보랏빛 꽃으로 피어올랐다.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는 고롱나무에 헤드랜턴 불빛을 쏘이니 꽃은 연보랏빛으로 더 밝게 반짝이며 은은한 향기로 길손을 반긴다. 멀구슬 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되고 보리타작이 시작되는 시기임을, 다산 정약용은 1803년 유배지 강진 땅에서 '농가의 늦봄(田家晚春)'이라는 4수의 한시로 읊었다.
雨歇陂池勒小涼(우헐피지륵소량) 비 그쳐 방죽에 서늘한 기운이 깔리고
楝花風定日初長(연화풍정일초장) 멀구슬 꽃 바람 잦아들자 해가 점점 길어진다.
麥芒一夜都抽了(맥망일야도추료) 하룻밤 사이 보리 이삭이 모두 뽑혀
減却平原草綠光(감각평원초록광) 평원의 푸른 빛이 줄었구나.
-정약용(丁若鏞)의 '전가만춘(田家晚春, 농가의 늦봄)' 중에서
군청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가로등 불밝힌 석정로를 따라간다. 부안읍 동중리 구영마을 앞을 지나간다. 동쪽 망월산 서쪽에 동중리 구영마을과 선은리 선은마을이 자리하여 구릉지로 이어져 있다고 하지만 새벽의 어둠 속에서 구릉의 연결을 살피지 못하였다. 동문안삼거리에서 동문안 당산을 살폈다. 오일뱅크 주요소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돌솟대, 북쪽에 돌장승 한쌍이 떨어져 있는데 돌솟대와 돌장승을 아울러 동문안 당산이라 이른다. 서문안 당산에 비해 동문안 당산의 조각상이 더 정제되어 보였다. 특히 동문안 당산의 석장승 한쌍이 돋보였다. 퉁방울 눈과 두툼한 코, 입술을 벌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듯 화내는 듯한 모습, 벙거지를 쓴 모습 등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조각된 해학적 모습이 길손을 미소짓게 하였다.
동문안 당산을 지나면 부안읍 동중리에서 선은리로 넘어간다. 선은리(仙隱里)라는 지명을 풀어 읽으면 '신선이 숨어사는 마을'이다. 길가에 신선마을 가는 방향을 표시한 표석이 세워져 있어 길손이 신선마을로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신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선은리라는 지명에 어울리듯 신선처럼 이곳에 은거한 시인이 신석정 시인이다. 그래서 길가에는 신석정 시인의 시를 적은 전시판이 세워져 있다.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중략 // 석양에 빛나는 가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化石이 되고 싶어') "따뜻한 햇볕 물우에 미끄러지고/ 흰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덧 놀고 싶은 날이네// 중략 //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어/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이 전시판들을 읽으며 선은삼거리로 나갔다. 선은 버스정류소 건너편에 신석정 고택과 그 맞은편에 석정문학관이 자리한다.
15년 전 동문안 당산과 신석정 고택을 답사한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요란하지 않았고, 신석정 고택(辛錫正故宅) ‘청구원(靑丘園)’은 한가한 전원 풍경을 이루었으며, 석정문학관도 없었다. 신석정 고택 가는 입구에 '단장곡(斷腸曲)'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내용은 금방 읽힌다. 이승만 독재 정권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애가 타는 가슴을 노래했다. 새벽의 어둠 속에 청구원과 석정문학관, 그 위의 선은경로당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 청구원'문이 닫혀 있어 고택 안을 살필 수 없다. 맞은편 석정문학관으로 가는 길이며 동시에 고택 입구에는 '기우는 해'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해는 기울고요/ 울던 물새도 잠자코 있습니다./ 탁탁 푹푹 흰 언덕에 가벼이/ 부딪치던/ 푸른 물결도 잔잔합니다.// 해는 기울고요/ 끝없는 바닷가에/ 해는 기울어집니다./ 오! 내가 美術家였다면/ 기우는 저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 해는 기울고요/ 밟은 북새만을/ 남기고 갑니다./ 다정한 친구끼리 이별하듯/ 말없이 시름없이/ 가버립니다" 이 시가 신석정 시인의 문단 데뷔 작품으로 1924년 11월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고 한다.
석정문학관 앞에서 문학관 전경 사진만 찍었다.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식석정(辛錫正, 1907~1974) 시인의 호는 석정(夕汀)이다. 그의 시세계와 관련하여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학창시절에 그의 대표 작품 몇 편을 읽었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작은 짐승' 등, 그 중에서도 '꽃덤불' 작품을 길손은 가장 좋아한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신석정의 '꽃덤불' 중에서, 1946.6) 시인은 해방정국에서 일제 36년을 돌아보며 해방을 맞이한 환희에 젖지 못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겨울밤 찬 달빛으로 노래했다. 그리고 남북이 하나가 되는 그날을 꽃덤불이라 표현했다. 그 꽃덤불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뒹구는 세상을 염원했지만 남과 북은 분단되었다.
신석정 시인의 평생의 좌우명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이며, 이 내용은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자연에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석정문학관을 답사한 분의 인터넷글을 살피니 이 내용을 상세히 풀이한 전시실 게시물이 있어 그 내용을 옮긴다. "신석정은 '한정소언불모영리(閒情少言不慕榮利)' 즉 '한가롭고 고요하여 말이 적고 영화와 이익을 사모하지 않는다.'라는 도연명의 경지를 그리면서 속된 것을 멀리했다. 그러므로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는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기개를 보인다. 그는 <산의 서곡>의 에피그라프(epigraph, 제사題辭)로 '침묵은 산의 얼굴이니라. 숭고는 산의 마음이니라. 나 또한 산을 닮아보리라.'라고 썼다. 침묵과 숭고가 곧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의 의미이다."(석정문학관 전시실 게시물) 석정 시인은 목가시인, 전원시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의 시세계는 부정적 현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해방과 이후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올곧은 소리를 쏟아냈다. 그 종합편이 1967년 회갑 기념으로 출판한 제4 시집 <산의 서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집에서 '산은 알고 있다' 작품 전문을 읽어 본다.
"산은 어찌 보면 운무(雲霧)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하는 것 같지만 오래오래 겪어온 피 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록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髑髏)가 뒹구는 저 능선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부르는 노랫소리와 철쭉꽃 나리꽃과 나리꽃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개에 사운대는 바람과 바람결에 묻혀 가는 꿈과 생시를 산은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은 우리들이 내일을 믿고 살아가듯 언제나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벌린 채 피 묻은 역사의 기록을 외우면서 손을 들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이여!/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산은 알고 있다' 전문)
석정문학관 위 선은경로당을 지나면 선은1길과 선은2길 갈림목이 나온다. 서해랑길은 선은2길을 따라가는데 왼쪽 선은1길 벽에 '문정공 유허비 120m'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아, 문정공(文貞公) 김구 선생의 유허비라니. 서해랑길 47코스에서 알게 된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 선생의 유허비가 부안읍 선은리에 있구나. 그의 묘소는 변산면 운산리에 있는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듯 깝죽거리고 일행을 뒤따른다. 부안 출신의 인물을 이야기할 때는 고려의 김구, 조선의 매창, 근대의 신석정, 이렇게 3인을 꼽는다고 한다. 49코스에서 매창, 지금 50코스에서 석정을 만났는데, 바로 근처가 김구 선생의 출생지로구나. "그는 최씨 무인 집권기부터 원 간섭기 초에 활동한 학자 관료이다. 뛰어난 시문 능력으로 외교 문서 작성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고려 후기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1258년 김준(金俊) 등에 의해 최의가 제거되고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김구는 대몽 관계에 수반되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며 국왕의 신임을 얻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당시 역관들이 간계를 부려 통역을 사실대로 하지 않고 사리를 꾀하였다. 이에 왕에게 의견을 올려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궁중의 학관(學官) 가운데 젊은 참외(參外)[칠품 이하의 하급 관리]들로 하여금 한어(漢語)를 습득하게 하였다. 김구는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 일을 잘 처리하여 고려의 국왕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만년에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의 지지포에 내려와서 후진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1278년(충렬왕 4)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김구의 시호는문정(文貞)으로, 1910년 부안읍 선은리에 '문정공 김구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은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길을 재촉한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무엇을 찾으려고 안달하며 허겁지겁 일행을 뒤따라간다. 길은 덤불이 무성하게 우거진 구릉지 언덕길로 이어진다. 소리쟁이 풀들이 보인다. 길손을 만나는 기쁨의 소리인지 어둠 속에 고요히 쉬는 자신들을 흔들어댄다고 투정하는 소리인지 그들의 소리가 헤드랜턴 불빛 속에서 웅얼거린다. 언덕에는 찔레꽃들이 하얗게 피어 맑은 향기를 흘려 보낸다. 부안읍 선은리에서 동진면 내기리로 넘어오는 언덕길 끝에 파평 윤씨 재령공파 재령공 신도비와 사당 '풍은재(風隱齋)'가 있다. 혈통이 미천한 길손은 이런 시설물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가문의 자랑을 꼭 이런 식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의심한다. 내기상리(內基上里)길을 따라 국도 30호선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봉황교차로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국도 제30호선이 국도 23호선으로 이어지는 접속도로 옆으로 이어간다. 잠시 길을 잘못 들었지만 상리마을로 가는 내기상리(內基上里)길로 접어들었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인 듯. 아닐까? 자동차 달리는 소리일까? 새벽의 어둠을 뚫고 새들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이 새들이 쉼없이 꽤액거린다. 무슨 새들이길래 새벽에 저렇게 울어댈까? 뻐꾸기 또한 새벽을 깨우는 구슬픈 소리를 울려보낸다.
상리마을을 거쳐 상리마을 들녘을 가로질렀다. 상리들녘 왼쪽에 심씨 선산이 있어 '심성저수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있으며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내기평야라고 이르는 것 같다. 이미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있는가 하면 물만 대논 논들도 꽤 있다. 들녘을 가로질러 농로를 걸어가는데 어둠 속에 숲의 실루엣이 보인다. 쉼없이 울어대는 새들은 상리마을 앞 저 숲에 살고 있군. 수많은 새들이 푸드득푸드득 날갯짓하며 꽤객꽤객 울어댄다. 서해랑길은 그 숲 옆길로 이어진다. 길에서 솔숲의 소나무를 올려보니 엄청난 수의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으며 날개를 파닥거리며 울고 있다. 무슨 새들일까? 어둠 속에서 새들을 올려보니 잿빛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왜가리가 맞겠지. 알아본 결과 수천 마리의 백로 떼 등이 솔숲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고 한다. 부안뉴스에서 취재한 기사를 정리해 옮긴다. "철새 떼가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14년경, 처음엔 10여 마리 정도가 날아와 서식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 등 여름철새들 수천 마리가 이 솔숲에 둥지를 틀고 있다. 다만 철새배설물로 인해 소나무들이 말라죽고 있으며 철새들이 둥지를 튼 숲 바로 옆에 있는 논경지가 피해를 입는 것으로 파악됐다. 상리 마을 한 주민은 “소나무가 죽어서 아쉽고 새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럽기도 하지만 보기는 좋다”며 “마을사람들은 길조로 여긴다”고 말했다."
솔숲의 새들을 올려보다가 그들이 선물한 묽은 똥을 손등에 받았다. 하, 어둠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면서 길손의 탐방을 반겨 물똥을 내려주다니 고마운지고. 왜가리일 것이라 판단한 그 새에게 감사하고 숲길을 나와 동진남로와 만났다. 동진남로는 동진면 봉황리(鳳凰里) 제내(提內)마을, 내기리 신흥마을과 신리마을, 장등리 궁월마을을 동서로 잇는 주요한 도로인 것 같다. 동진남로 신흥마을 입구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동이 트며 새벽노을이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드넓게 펼쳐진 대기평야와 그 너머 동진면 봉황리 일대를 가늠하였다. 오봉마을 입구 쌍구 버스정류소에서 동진남로와 헤어져 오봉길을 따라 고마저수지 방향으로 들어갔다. 오봉길에는 매실나무에 매실이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고 있으며 길 왼쪽의 그윽한 솔숲을 거쳐 고마저수지로 나갔다.
고마저수지의 '고마'는 무슨 뜻일까? 한자로는 '雇馬'라고 적지만 고마의 소리(音)를 가차한 것 같아 뜻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물론 길손의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마의 뜻이 무엇일까? 부안문화원에서 이것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지난 번에 다른 것을 문의하니 모른다, 모른다만 계속하여 이번에는 문의하지 않았다. 고마저수지는 1955년 1월에 착공하여 1958년 12월 30일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제부터 서해랑길은 고마저수지 둘레에 조성한 고마지구 농촌테마공원을 따라가는 길이다. 연꽃군락지, 샤스타데이지 꽃밭을 거쳐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고마장터를 지나 못줄다리 출입구 고마정 앞으로 갔다. 서해랑길 48코스 부안마실길 1구간 입구의 꽃동산에서 샤스타데이지 하얀 꽃을 새벽에 만났었다. 동트는 새벽 이슬을 머금은 샤스타데이지 흰꽃은 순결하게 빛났다. 이번 코스 고마저수지에서 그때보다 더 밝은 시각에 샤스타데이지 흰꽃 물결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동이 트고 동쪽 하늘에 아침노을이 붉게 물드는 시각 샤스타데이지는 순결한 흰빛을 더 빛나게 반짝인다. 샤스타 데이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 늘 눈이 쌓여 있는 샤스타 산에서 딴 것이다. 샤스타 데이지의 깨끗한 흰색 꽃잎이 눈을 연상시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5월 하순 고마저수지 둘레길은 흰눈보다 더 순결한 샤스타 데이지 꽃이 하얗게 피어 환상적이다. 그 길에 샤스타 데이지 흰 꽃잎이 흰눈처럼 소복하게 덮여 있다.
고마정에 올라서 고마저수지를 살피고 못줄다리를 건넌다. 못줄은 모내기할 때 양끝에서 못줄을 잡은 사람이 못줄을 당기면 모내는 농군들이 못줄에 맞추어 모를 낸다. 그 줄의 모를 다내면 못줄잡이가 못줄을 다음 줄로 끌어 옮긴다. 못줄다리 설명안내판에 "모내기 철에 볼 수 있었던 농경문화의 상징인 못줄을 표현한 '못줄다리'는 못줄을 당기고 끄는 정다운 농부들의 여름 노랫가락을 못줄 위에 한 줄 한 줄 표현한 조형 시설물."이라고 적혀 있다. 못줄다리 양끝에 높이 솟아 있는 조형물은 무엇일까? 못줄잡이가 양끝에서 잡고 옮기는 기둥으로 못줄을 풀었다가 사리는 못줄감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감개 모양은 이 지역의 특산품인 누에고치 모양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예쁘다. 못줄다리를 건너는데 농군의 노랫가락이 울려온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말을 들어보소/ 저건네야 갈미봉은 비가 잔뜩 몰아온다/ 우장을 두르고 삿갓을 써라 - 떠들어 오네 떠들어 온다/ 점심 바구니가 떠들어 온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못줄다리를 건너 은사시나무 군락지를 지나는데 고마저수지 너머 동쪽하늘에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해돋이의 장관을 고마저수지에서 감상한다. 저수지 물이 붉게 물들고 팔뚝만한 잉어들이 물 위로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빛과 소리가 혼합된 환각을 연출한다. 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물 위에 솟대다리가 떠있으며 물고기솟대 조형물이 솟대다리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 조형물은 잉어들이 뛰어오르듯 다양한 모양의 물고기가 저수지에서 뛰어올라 솟대에 앉아 있는 모양 같다. 팔팔한 물고기들이 햇빛을 받아 팔딱거리고 있다. 솟대에 꼭 오리 등의 조류만 앉아 있어야 하는가? 물고기가 동적으로 형상화된 물고기솟대가 아침 기분을 싱싱하게 하였다. 솟대다리를 건너 둘레를 걸어온 고마저수지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호수가 고요하다. 해오라기가 날아가고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고요를 깨는 잉어의 뛰어오름. 평화로운 정경이다. 무릉도원의 이상향 같다.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은 망월산일 것이며 그 뒤가 어둠 속에 걸었던 부안읍 선은리 지역으로 신석정 고택과 석정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석정이 노래한 '그 먼 나라'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는 것 같다. 고마저수지가 곧 신석정의 이상향처럼 생각되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시렵니까?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전문)
솟대다리를 건너 뽕나무에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먹으며 동심이 되었다. 한 알 두 알, 검붉은 오딧물이 손가락 끝에 물들었다. 고마저수지 제방을 너머 동진남로로 나갔다. 동트는 새벽 시각 4시 42분 내기리 오봉마을 입구에서 동진남로와 헤어졌다가 붉은 해가 솟아오른 5시 52분 장등리 궁월마을 핀아드레 카페 앞에서 동진남로와 재회하였다. 1시간 10분 동안 고마제 둘레(제각쉼터→핀아드레 카페)를 돌았다. 고마지구 농촌테마공원 고마제 둘레 전체 거리는 약 5.4km, 산책 시간은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치지 못한 구간 핀아드레 카페→제각쉼터 구간은 얼마되지 않는 것 같다. 서해랑길 고마저수지 둘레길은 고마제 둘레길 핵심을 탐방한 것이라 생각한다.
핀안드레 카페에서 동남진로를 따라 조금 이동하여 곧바로 궁월마을로 진입하였다. 단정하게 자리한 궁월마을에 영신교회가 있다. 영신교회 방향으로 궁월길을 따라가면 길가에 탱자나무가 시푸른 탱자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지난 4월 12일 서해랑길 44코스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후포마을에서 새하얀 탱자꽃을 새벽의 어둠 속에서 만났었다. 탱자꽃은 언제나 지난 시절의 대중가요 '이사가던 날'을 웅얼거리게 한다. 그날도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탱자나무 꽃잎만 흔들었다네"를 소리내었다. 시푸른 탱자가 가을날 노랗게 익으면 탱자를 구경하러 어디로 갈까? 노란 은행잎이 날리고 노란 탱자가 가시 사이에서 유혹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궁월마을 동북쪽에 청운(靑雲)의 푸른 꿈을 안고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선비들이 머물고 가던 동진원(東津院)이 있는 청운(靑雲)마을이 자리한다. 청운마을 아래 들녘에는 고구마 모종을 낸 이랑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고구마 밭, 푸른 밀밭과 누런 보리밭이 드넓게 펼쳐져 이 또한 '그 먼 나라'의 풍경 같다. 그 나라에서 아낙 농군이 아침부터 고구마밭을 손질하고 있다. 일하는 고통의 모습일까? 바라보는 자의 평화일까? 궁월마을 서쪽에 어둠 속에서 가늠한 대기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어둠 속 내기리 지역의 신리마을, 신흥마을, 상리마을, 그리고 백로 서식지 솔숲이 모두 가늠된다. 서쪽 조금 더 멀리 망월산과 상소산 그리고 석불산이 방금 걸어온 곳처럼 정다운 눈길을 보낸다. 북쪽에는 들녘을 가로지르는 국도 23호선 '부안로' 건너편 동진면 봉황리 일대와 그 뒤 계화도의 계화산도 파악된다. 새벽의 어둠 속에 무작정 걸었던 그곳을 아침 햇빛 속에 실체를 드러낸 풍경을 보면서 어둠 속 그곳을 가늠하고 확인하며 길손은 대낮처럼 밝은 풍요로움에 감격한다.
동진면 장등리 들녘으로 나갔다. 장등리 들녘이 드넓다. 앞쪽에 장등마을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그 뒤쪽 변산로 너머에 동진면 동전리 장신마을을 어림한다. 장등마을 쉼터정자 앞에 마을 유래와 고사목에 대한 설명안내판이 있다. "망기산으로부터 산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동 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 하여 길 장(長), 오를 등(登) 자를 쓰는 장등마을. 주염나무 고목은 분재와 같은 아름다운 수형으로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이다." 설명안내판의 망기산을 아무리 찾아도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 지역민들은 망월산을 망기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또 주염나무는 흔히 주엽나무 또는 쥐엄나무라고 불리며, 까막가시나무라고도 불리는데 성경에 나오는 상록수 쥐엄나무와는 다른 활엽수라고 한다. 남도 지역에서는 대체적으로 마을의 당산나무를 주로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정했고, 일부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신 마을이 있지만 쥐엄나무를 당산나무로 삼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장등마을에서는 주엽나무를 당산나무로 삼은 것 같고 말라죽은 주염나무도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으니 이 주엽나무는 신령스러운 나무임을 알 수 있다. 그 특별한 이유가 무엇일까?
동진면 장등리에서 동전리(銅田里)로 넘어와 동진강(東津江)의 동진대교를 건너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로 넘어간다. 동진(東津)은 옛 부안 고을의 동쪽에 있던 동진 나루를 뜻한다. 동진 나루는 부안의 으뜸 관문으로서 역사의 현장이다. 동진 나루에 오는 경로를 알아보면 부안읍 동문(東門)인 청원루 성문거리를 나서서 혜성병원 앞 언덕백이 장승백이를 넘어 고마제 남쪽 동진장터(장기마을), 동진원(東津院)(청운마을)을 거쳐 동진 나루에 이른다. 걸어온 서해랑길 50코스를 탐방하며 주의를 기울이면 그 경로가 짐작된다. 이 역사의 현장 동진 나루는 사라지고 그곳에 동진대교(東津大橋)가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동진강 이남 지역의 미곡이 군산항이 아닌 줄포항으로 반출되어 군산 상권에 타격을 입자 군산 지역의 지주 세력이 동진교 건설을 통해 군산의 영향력을 동진강 이남으로 확대하고자 동진교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좌초되었다. 해방 후에도 정치 공약으로 동진대교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미진하였고 결국 1978년 8월 15일 동진대교가 준공되었다. 이후 국도 제23호선의 교통량 증가로 2004년 4차로로 새로 확장하여 현재에 이르며 구 동진대교는 폐기되었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동진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특이한 강이다. 동진대교를 걸으며 동진강 남쪽 상류 지역을 가늠한다. 오른쪽 뒤 서쪽에서 흘러오는 고부천이 왼쪽의 동진강에 합류하여 동진강은 몸집이 커졌다. 동진강 북쪽 하류 지역을 가늠한다. 동진강은 서쪽으로 휘감아 흘러 부안군 계화면과 김제시 진봉면 사이를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동진강 하류 포구길을 어림한다. 동진대교에서 2km 하류에 문포(文浦)가 있고, 그로부터 4km 거리에 있던 새포(鳥浦)는 사라졌다고 한다. 새포에서 계화도까지 6km, 계화도가 1968년 간척되어 육지가 되었는데, 2006년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서 계화도는 바다와 격리된 내륙이 되고 해안선은 고군산군도까지 뒤로 물러났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벽해맥전(碧海桑麥田)이 되었다. 동진강 서쪽 동진면 동전리(銅田里)는 동전평야가 드넓은데 모두 간척지라고 한다. 1930년 8월 일본 미에 농장(三重農場)과 1933년 11월 일본인 마츠오카가 2번에 걸쳐 13만 7천여평을 간척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동진강 제방 아래 자리한 마을을 간척마을이라 이른다.
헐레벌떡 11.14km 거리를 2시간 53분이 걸렸다. 너무 빠르게 걸었을까? 너무 늦게 걸은 걸까? 각자의 목적과 탐방관에 따라 판단은 다를 것이다. 길손은 너무 빨리 도착하였다고 생각한다. 부안의 중심 거리를 새벽의 어둠과 여명, 해돋이와 아침 햇빛 속에서 통과했다. "어머니, 그 먼 나라에서 나와 함께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시렵니까?" 그런데 '그 먼 나라'에서 능금을 따지 않고 막무가내로 달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 먼 나라'를 거쳐왔다는 것에 감사하며 행복하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1.14km
전체 소요 시간 : 2시간 53분
부안군청 뒤 서해랑길 부안 50코스 안내도 앞에서 서해랑길 50코스를 출발한다.
거리 11.1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난도 쉬움. 부안군청, 석정문학관, 고마제를 거쳐 동진강 석천휴게소에서 마친다.
서해랑길 50코스를 출발하며 기념한다.
부안군청 앞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50코스 시작점 표지가 달려 있다.
서해랑길 50코스 시작점 표지를 확인하고 부안군청 앞 당산로를 따라 간다. 오른쪽 건물은 부안역사문화관이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음을 축하하는 알림막이 왼쪽 공공용게시대에 펼쳐져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은 2020년 현재 부안 역사 문화관 설립, 동학 농민 혁명 백산 대회 역사 공원 조성, 부안 백산성(白山城)[사적 제409호] 성지화, 우금산성(禹金山城)[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활성화, 생활 문화 센터 조성·운영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서림공원길, 오른쪽은 남문안길이다. 서해랑길은 당산로를 따라 군청삼거리로 이어간다.
남문안길 부안교육문화회관 끝에 남문안 당산이 있다고 한다. 잠깐 들러보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일행을 뒤좇아간다.
"부안군 남문안 당산은 부풍현 남문인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 성문 안쪽에세워진 것으로 동문, 서문, 남문 당산 중 하나이다. 현재는 부안교육문화회관 입구 왼편에 있다. 서문안 당산에 기록된 연대로 보아 1689년 무렵에 함께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8월16일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은은한 향기가 날려서 가로수를 살피니 멀구슬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군청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석정로를 따라간다.
지난 해 봄 고흥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멀구슬나무, 그때 이 나무 이름을 알게 되었다. 꽃내음이 향기롭다.
군청삼거리 앞 당산로 가로수는 멀구슬나무로 조성되어 있다. 향기가 은은히 코 끝을 스쳐간다.
부안읍 동중리 구영마을 앞 석정로를 따라간다.
"동중리(東中里)는 중심 마을인 동중마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부안읍성(扶安邑城)의 동문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동문안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부안현(扶安縣)의 중심지였으며,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동도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령면 동중리로 개설하였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부안읍 동중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동문안[동중리], 구영물[웃거테, 아랫거태], 웃장터[상장기], 아랫장터[하장기], 서답바우[숙후리, 휴석리], 남바끄[남문외], 매살메[매후리], 구장터[구장기], 성기태, 숙후리 등이 있었다. 북쪽은 상소산[114.9m]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의 구영마을은 구릉 지대이고 서쪽과 남쪽은 평탄한 지역이다. 마을 안에 매산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동문안 당산의 돌 짐대 당산이 있고, 오일뱅크 주요소 건너편에 거리를 두고 동문안 당산 돌장승 한쌍이 있다.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세운 마을 공동체 신앙물. 부안 동문안 당산은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혀 놓은 돌 짐대[당산]와 돌 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민간 신앙 유적이다.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솟대의 일종이다. 부안 동문안 당산은 본래 부풍현의 동쪽 문인 청원루(淸遠樓) 안쪽에 있었다. 현재는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면서 부안읍을 진입할 때 오른편 으뜸 오일 뱅크를 사이에 두고, 돌 짐대와 한 쌍의 장승이 자리한다. 2003년 돌 짐대 위에 올려진 돌 오리가 없어졌으나 2019년 찾아서 2021년 다시 올려서 복원하였다. 동문안 돌 짐대는 사각 석주로 되어 있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그리고 맨 위에 돌 오리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홈이 파인 상태이다. 돌 짐대 위에 올려진 돌 오리는 머리가 서북쪽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부안 동문안 당산은 부풍현 동문에 건립된 것으로 서문, 남문 당산 중 하나이다. 서문안 당산에 기록된 연대로 보아 1689년 무렵에 동시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기둥과 돌 장승 모두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 신앙을 보여주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1970년 5월 20일 국가 민속 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석장승과 솟대당산은 조선 숙종 15년 1689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를 이 지역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당산 하나씨', '짐대 하나씨'라고도 부르는 솟대당산에는 머리를 바다 쪽을 향하고 있는 오리가 앉아 있다. 이는 이 마을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한 쌍의 석장승 가운데 '하원당장군'이 여신상이고, '상원주장군'이 남신상이다. 상원주장군은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도 하는데 벙거지를 쓴 모습이 제주도 돌하루방과 흡사하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줄다리기를 한 후 당산에 새 옷을 입히고 제상을 차리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설명안내판)
부안읍 동중리에 부안읍 선은리로 넘어왔다. '신선마을' 방향 안내 표석 옆에 식석정 시인의 '化石이 되고 싶어' 시 작품 전시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신석정의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전시판도 세워져 있다.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느린 구름 무엇을 노려보듯 가지 않고/ 먼 강물은 소리 없이 혼자 가네/ 뽑아 올린 듯 밋밋한 산봉우리 곡선이 또렷하고/ 명랑한 날이면 낮달이 더욱 희고나// 석양에 빛나는 가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化石이 되고 싶어')
"따뜻한 햇볕 물우에 미끄러지고/ 흰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덧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른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염소 그림자 물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자졌다...... 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어/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한국전력 부안지사 옆에 부안 문화의전당과 부안 중국교육문화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선은삼거리를 건너 선은 버스정류소 앞에서 오른쪽 신석정 고택으로 이어간다.
"선은리(仙隱里)는 동쪽의 망월산을 중심으로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고, 서쪽은 상소산의 동편 자락과 동중리 구영마을의 구릉지와 연결되어 있다. 동서 구릉지 사이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소하천이 흐르고 주변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선은산과 망월산, 송학재가 있다. 선은리의 동쪽은 동진면 내기리, 서쪽과 남쪽은 부안읍 동중리와 봉덕리, 북쪽은 동진면 봉황리와 접한다. 선은리의 서남부는 부안읍 시가지의 일부를 이룬다. 2020년 12월 31일 선은리·선은1리·선은2리·선은3리·용계리·덕촌리·신선리의 7개 행정리에, 199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된 신석정 고택과 2011년 조성된 석정 문학관, 이갑수 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은 버스정류소 맞은편에 신석정 고택과 석정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신석정 고택 가는 입구에 '단장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추워 지친 하늘/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동아일보 1960.3. 글씨 : 산민 이용
"신석정 고택은 부안군 부안읍 석정로 63[선은리 560번지]에 있다. 고택 주변에는 석정 문학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본래 초가 3칸이었으나, 현재는 수리하여 4칸으로 증축한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남부 지방 양식인 ‘一’ 자형 평면으로, 본래 초가 3칸이었으나 4칸의 목조집으로 개수하여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공간은 부엌과 안방, 윗방,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의 전면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좌측 방은 전면에 유리창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근대풍을 엿볼 수 있다. 구조는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방형으로 약간 다듬은 덤벙 주초를 놓고, 방형 기둥을 세운 다음 도리와 결구하였다. 지붕은 홑처마에 우진각 초가지붕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살림집이면서 근대적인 양식도 가미하였다. 신석정 고택은 1993년 8월 31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관리는 송덕녀가 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석정은 1907년(순종 1)에 현재의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나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향리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며 지내던 중 1930년에 상경하여 개운사(開運寺)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승려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시 문학(詩文學)』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귀향하였다. 이후 현재 신석정 고택(辛錫正故宅)이라 불리는 집을 마련하여 분가하였으며, 스스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지었다. 1952년 전주시 노송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신석정 거주 당시에는 ‘청구원’이라는 이름대로 앞뜰에는 은행나무와 벽오동나무, 자귀나무, 측백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큰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집 서편에는 우거진 신우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신석정 고택은 1993년 8월 31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집은 우리 나라 현대시의 큰 맥을 이은 신석정이 살던 곳이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청구원(靑丘園)으로 불리는 이 집의 정원은 측백나무로 울타리가 둘려 있고 그 안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시누대, 등나무 등이 심겨져 있다. 신석정의 목가적인 전원시집인 『촛불」, 「슬픈목가』 등은 바로 이곳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석정 문학관(夕汀文學館)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크게 기여한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거장 신석정(辛夕汀)[1907~1974] 시인의 유품과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문학관이다. 시인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5권의 대표 시집, 유고 시집, 친필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석정 문학관은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설립하고, 석정문학회가 위탁 받아 운영하고 있다. 석정문학회는 신석정 시인의 추천을 통해 등단한 5명의 문인이 주축이 되어 1984년 발족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신석정 시인이 작고한 지 30년이 되던 2004년부터 전국의 문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석정 추모 문학제를 치르고, 신석정 시인의 대표 시에 대한 평설과 논문 등이 들어 있는 추모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전라북도 부안군이 2006년에 건립 사업을 시작하여 2011년 10월 29일에 개관하였다. 석정 문학관은 부지 면적 1만 6870㎡에 연면적 1,573㎡ 규모의 2층으로 된 문학관 건물, 시비 공원, 주차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시인의 원고, 작품집, 총 5,000여 점의 유품을 전시해 놓은 상설 전시장과 시인의 저항 정신을 엿볼 수 있도록 평소 지인들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 액자에 담아 걸어둔 사진 등이 나열된 기획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 전시장은 ‘저 의연한 산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마음을 배우자’는 시인의 친필 좌우명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걸려 있다. 자연 속에서 지조의 삶을 발견한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목이다. 시인에게 영향을 준 이들과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다. 박한영, 이익상(李益相), 이병기(李秉岐),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박용철(朴龍喆)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교류했던 사진이나 문집도 만나볼 수 있다. 시인의 대표 시집인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에 이어,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과 유고 수필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 등의 친필 원고와 시집들도 전시되어 있어 둘러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석정 문학관 앞에는 신석정 시인이 26세에 낙향하여 지어 살았던 고택 청구원(靑丘圓)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이 살던 당시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심어 무성한 수목원을 연상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2년 9월에 가볼만 한 곳’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 있는 선은리(仙隱里)는 중심 마을인 선은마을[선은동]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선은동은 부안읍성 동문 밖 북쪽에 있는 선은산에서 따왔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동도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동도면의 선은마을, 책상마을, 송학마을, 신덕마을, 용계마을, 남정마을, 수봉마을과 상동면 운곡마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병합하고 부령면 선은리로 개설하였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부안읍 선은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선은동, 용계동[죽내리], 덕더리[덕촌], 송산골[송학동], 신덕리, 책상골, 산당 등이 있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은2길을 따라가는데 문정공 유허비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다. 문정공(文貞公)은 고려시대의 문인 지포(止浦) 김구(金坵)이다.
"김구(金坵)[1211~1278]는 고려 시대 전라도 부령현[전라북도 부안군의 옛 이름] 출신으로 최씨 무인 집권기부터 원 간섭기 초에 활동한 학자 관료이다. 뛰어난 시문 능력으로 외교 문서 작성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만년에 부안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고려 후기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김구의 본관은 부안(扶安)[부령(扶寧)이라고도 함]이며, 초명은 김백일(金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부안 김씨[부령 김씨]는 경순왕의 11세손이 부령군에 봉해졌다는 설과 8세손 김작신(金作辛)이 내려왔다는 설이 있다. 김구의 아버지 김의(金宜)는 1204년(신종 7)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김구는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때 일을 잘 처리하여 고려의 국왕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만년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의 지지포에 내려와서 후진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1278년(충렬왕 4)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1534년(중종 2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구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 기슭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않았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로 169-120[운산리 3]에 있는 부안 김씨 재실인 경지재(敬止齋)에서 김구를 배향하고 있으며, 재실 좌측에는 1792년에 세워진 문정공 김구 신도비가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79-1에는 1910년에 세워진 문정공 김구 유허비가 있다. 이 비문은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가 지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리쟁이가 늘어서 있고 찔레꽃 향기 날리는 언덕길을 넘어 부안읍 선은리에서 동진면 내기리로 들어간다.
파평 윤씨 재령공파 비조 재령공 신도비와 문중 봉안당이 있는 것 같다. 이 아래 '풍은재(風隱齋)' 사당이 있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재령공파, 현감공파 문중의 사당 '풍은재(風隱齋)'를 지나 국도 30호선 변산바다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내기상리길을 따라 국도 30호선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왼쪽으로 올라간다.
봉황교차로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국도 제30호선이 국도 23호선으로 이어지는 접속도로 옆 내기상리길을 따라 올라간다.
오른쪽으로 꺾어 상리마을 방향으로 진입하여 내기상리길을 따라 이어간다.
내기상리(內基上里)길을 따라 상리마을을 거쳐 상리마을 들녘을 가로지른다.
상리들녘 왼쪽에 심성저수지가 있으며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심씨 선산이 있어 '심성저수지'라 불린다고 한다.
"고마저수지 북쪽으로 동진남로가 통과하면서 상리, 신흥리, 신리 등의 마을을 이어준다. 이곳에 넓은 내기평야가 있어 농산물의 생산량이 많다. 상리마을 앞 심성저수지[심성제]는 좌우에 심씨들의 선산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내기평, 장등평, 동전평 일부에까지 물을 대었으나 고마저수지가 확장, 조성됨에 따라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리마을 앞 솔숲에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 등 여름철새 수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집단 서식하고 있다.
동진면 내기리 상리마을을 지나 들녘을 가로지르고 여름철새 집단서식지를 거쳐 동진남로로 나왔다. 종점 7.7km 거리이다.
동진남로는 동진면 봉황리(鳳凰里) 제내(提內)마을, 내기리 신흥마을과 신리마을, 장등리 궁월마을을 동서로 잇는다.
신흥경로당 뒤쪽으로 신흥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고마저수지 북쪽으로 동진남로가 통과하면서 상리(上里), 신흥리(新興里), 신리 등의 마을을 이어 준다. 이곳에 넓은 내기평야가 있어 농산물의 생산량이 많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면 내기리 동진남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오봉길로 진입한다.
"내기리는 부안군 동진면에 있는 법정리. 봉황리 동쪽 산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터 또는 내기(內基)라고 하였다. 내기리는 동쪽의 오봉리와 신리, 북쪽의 상리, 서북쪽의 신흥리 등 위치에 따라 지명이 형성된 특징을 가진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상동면(上東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상동면의 신후리(新后里), 금구동(金龜洞), 중리(中里), 건지산(乾之山), 오봉(五峯), 신흥(新興), 상리(上里)와 복성(福星), 운곡(雲谷), 장기(場基), 익상(益上), 제내리(提內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동진면 내기리로 개설하였다. 중앙에 동전평야와 내기평야가 있으며, 남서쪽에 심성제와 쌍구제, 남동쪽에는 고마저수지[고마제(雇馬堤), 고마지, 동고 저수지]가 있다. 내기리의 동쪽은 동진면 장등리, 남쪽은 부안읍의 선은리와 신운리, 서쪽과 북쪽은 동진면의 봉황리, 동전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상리·신흥리·신리의 3개 행정리에, 남쪽에서 북서쪽으로 국도 제30호선이 지나가고, 북서쪽에서 북쪽으로 국도 제23호선이 통과하며 내리상리길, 내리신흥길과 연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남로를 따라가다가 북쪽을 바라보니 내기평야가 드넓다. 불빛 반짝이는 도로는 국도 23호선 '부안로'일 것이다.
동진남로 쌍구 버스정류장에서 오봉(五峯)길로 진입하여, 앞쪽 두 갈래길에서 오른쪽 오봉마을 가는 오봉길이 아니라 왼쪽 솔숲길 방향의 오봉길을 따라간다. 쌍구는 무슨 뜻일까? 오봉마을 앞에 쌍구저수지가 있다.
오봉마을 입구에서 왼쪽 솔숲길을 따라가면 매실나무에 매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오봉길 왼쪽으로 솔숲이 그윽하다. 곧바로 나가면 고마제윗길과 고마저수지가 나온다.
오봉길에서 고마제윗길로 나가 고마저수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왼쪽 뒤에 오봉마을과 쌍구저수지가 있고, 오른쪽에 솔숲이 있으며, 그 사이의 오봉길을 따라 고마제윗길로 나왔다.
고마저수지 북쪽에서 건너편 남서쪽 고마광장 방향을 바라보았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돌아 농촌테마공원길을 따라간다.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 고마저수지는 부안군 동진면의 주 수원공이며, 고마 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저수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1955년 1월에 착공하여 1958년 12월 30일에 준공하였다. 사업 시행자는 부안토지개량조합이었고, 주 설치 재원은 국고 보조금이었다. 본래는 구릉지를 집수역(集水域)으로 하는 산간 저수지 방식의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58년에 확장되어 양수 저수지가 되었다. 제방 형식은 필 댐(fill dam)[존형]이며, 제방 체적은 6만 5281㎥, 제방 연장은 746m, 제방 높이는 8.5m, 제방 표고는 7.74El.m이다. 제정폭은 4m이며, 사면 보호공은 상류는 사석, 하류는 떼로 구성되어 있다. 총 저수량은 333만 8200㎥이며, 1종 시설로 구분된다. 단위 저수량은 278㎜이다. 취수 시설의 형식은 시통형이며, 한발 빈도는 10년, 홍수 빈도 10년이다. 취수 능력은 2.41㎥/sec, 사통 연장은 5m이다. 복통의 형식은 박스형이며, 연장 50m, 최대 통수량은 2.41㎥/sec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각쉼터 옆에서 고마저수지 동남쪽 동진면 장등리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수지 둘레를 따라 농촌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마저수지는 2020년 6월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마제, 고마지, 동고지라고도 불린다. 주로 농업 관개용으로 사용되고, 홍수 조절 기능은 갖고 있지 않다. 동진강(東津江) 도수로의 용수를 저장했다가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와 동전리의 관개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수계는 국가 하천인 동진강이며, 수심이 얕아 겨울 철새 등이 찾고 있다. 저수지 주변에 농촌 관광농원, 녹지 공원, 수변 테마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마저수지에 연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 연은 노랑어리연인 것 같다.
연꽃은 연못, 습지 등 얕은 물 속에서 자라며 6월말~8월 중순에 개화한다. 꽃말은 순결, 군자이며, 연밥은 다산과 부귀를 상징한다. 잎은 수렴제, 지혈제로 사용하며, 연의 거의 모든 부분이 약용된다. 뿌리는 연근이라 하며 비타민과 미네랄의 함량이 높아 요리에 이용한다.(설명안내판)
고마광장에서 고마지구 농촌테마공원 방죽쉼터 방향으로 이어간다.
방죽쉼터 가는 길 넓은 터에 샤스타데이지 꽃들이 환상적이다.
'고마제윗길'을 따라 '고마제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고마저수지 뒤 동쪽 하늘에 아침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고마저수지는 1958년 12월 완공된 늪지형 저수지로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하는데, 바닥 지형이 완만하여 수심이 고르고 붕어와 잉어 등이 많이 서식하는 데다 주변에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마제윗길'에서 '고마제로'로 나가 왼쪽 김제 방향으로 진행하여 고마주차장과 고마장터로 이어간다.
'고마제로' 고마주차장과 고마장터에서 고마정과 못줄다리 가는 길로 이어간다.
고마저수지 테마공원길에 샤스타데이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분류 : 국화과, 학명 : Leucanthemum xsuperbum
여러해살이풀로 5~7월에 두상화가 가지 끝과 줄기에 1개씩 달린다. 두상화는 가장자리에 흰색의 설상화가 있으며 가운데에 노란 색의 관상화가 있다. 샤스타 데이지란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위치한 늘 눈이 쌓여 있는 샤스타 산에서 딴 것이다. 샤스타데이지의 깨끗한 흰색 꽃잎이 눈을 연상시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추위에 강하고, 별이 잘 들고 배수가 잘 되는 곳이면 토양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번식은 종자를 심거나 포기나누기로 한다.(설명안내판)
샤스타데이지 꽃밭에 고마저수지 못줄다리를 배경하여 포토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고 너 가는 데 나 가고'
고마정에 올라서 고마저수지와 못줄다리를 살피고 내려온다.
못줄을 양끝에서 잡고 옮기는 기둥으로 못줄을 풀었다가 사리는 감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여린 초록의 노래를 담은 못줄다리 - 고마제 주변 모내기 철에 볼 수 있었던 농경문화의 상징인 못줄을 표현한 '못줄다리'는 못줄을 당기고 끄는 정다운 농부들의 여름 노랫가락을 못줄 위에 한 줄 한 줄 표현한다. 이 다리 위에 서 있는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 못줄다리 조형 시설물에 예술의 작업을 완성해 나가는 흥겨운 퍼포먼스 몸짓을 연출한다. 이 몸짓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감사함을 담아 낼 때, 서로의 온정만이 초록의 그리움으로 따스한 사랑이 넘치는 핫 플레이스가 된다.(설명안내판)
오른쪽 건너편 오봉길로 나와 고마지구 농촌테마공원길을 따라 고마저수지를 빙 돌아왔다.
못줄다리를 건너 은사시나무 군락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못줄다리를 건너와서 아침빛에 물드는 고마저수지를 뒤돌아 보았다.
중앙 뒤에 농촌테마공원 주차장과 특산물 판매점 고마장터가 있으며 고마장터에서 고마정 앞으로 와서 못줄다리를 건넜다.
고마저수지 너머 동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고마저수지 물이 붉게 물든다.
고마저수지 너머 동쪽 하늘에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붉게 물드는 고마저수지 위를 솟대다리가 가로지른다.
동진면 장등리 솟대다리 옆 저수지 물 위에 물고기솟대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건너편의 은사시나무군락지부터는 동진면 장등리인 듯. 물고기솟대 조형물이 솟대다리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
중앙 뒤에 보이는 마을은 동진면 장등리(長登里) 장기(場基)마을이다. 조선 철종(哲宗) 때 부안 민란(扶安民亂)이 일어났던 장기마을은 부안과 김제, 전주,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로서 예전에 동진장이 열려서 장터마을로 부르다 시장이 폐쇄된 이후 다시 장기(場基)로 바꾸어 부른다고 한다. 솟대에 대한 설명안내판 글과 벽송대사 소개글을 옮긴다.
부안 군민의 정서를 비추어 주는 솟대 - 고마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만곡선(彎曲線)은 농부의 참거리를 이고 가는 우리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과 넉넉한 부안 군민의 마음을 담은 듯하다. 이 위 물결 위로 피어난 솟대는 벽송대사의 구부러진 지팡이를 모티브로 연출되어지고 그 위 물고기 조형물은 생명력 있는 역사적 숨결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자연의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하였다. 이 다리 위를 걷는 우리는 벽송대사의 성정(性情)을 담은 솟대에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사랑을 저수지 위의 고즈넉한 빛으로 성취되어 피어나길 기도해 본다.(설명안내판)
"벽송대사(碧松大師) -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고승인 지엄(智儼)[1464~1534]의 속성은 송씨(宋氏), 법호는 야로(埜老, 野老), 당호는 벽송(碧松). 아버지는 송복생(宋福生)이며,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지엄(智儼)은 1464년(세조10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지엄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를 좋아하였다. 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28세가 되던 1491년(성종22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하자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휘하에서 장수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참상을 느낀 후, 속세를 버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곧바로 충청도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의 조계 대사(祖溪大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1508년(중종3년)에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다. 1520년(중종15년) 3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암에 머물며 수행하고 벽송사(碧松寺)를 중창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의 정심선사(正心禪師)를 찾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엄은 1534년(중종29년) 겨울 나이 70세, 법랍 44세로 입적할 때까지 승려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헌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리산에서 불법 연구에 몰두하고, 문인 영관(靈觀)·원오(圓悟)·일선(一禪) 등 60여 명에게 대승경론(大乘經論)과 선(禪)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碧松集)』 1권이 있다. 「함양 벽송사 벽송당 지엄 진영(咸陽碧松寺碧松堂智儼眞影)」이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합천 해인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중앙 지점 제각쉼터 지점에서 시작하여 고마저수지 테마공원길을 빙 돌아 이곳으로 왔다. 왼쪽 뒤에 보이는 산은 망월산일 것이며 그 뒤가 어둠 속에 걸었던 부안읍 선은리 지역으로 신석정 고택과 석정문학관이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 뒤쪽의 산봉은 부안의 진산이며 주산인 상소산인 것 같다. 맨 오른쪽 제방에서 고마저수지와 헤어져 '동진남로'로 나간다.
고마저수지를 빠져나와 알땅 카페 앞에서, 오봉마을 입구에서 헤어졌던 동진남로와 재회한다. 찜질방은 철거하는 것 같다.
소나무 뒤쪽 고마저수지 테마공원길에서 동진남로 핀아드레 카페 앞으로 빠져나왔다.
동진남로 궁월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궁원길을 따라 궁월마을로 들어간다.
"궁월마을은 초기에는 지형이 ‘활 궁(弓)’ 자처럼 생겨서 궁상마을로 불렀으나 후에 마을 형태가 달같이 변했다고 하여 ‘달 월(月)’ 자를 써 궁월(弓月)로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궁월마을 입구 궁월 버스정류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궁월길로 들어왔다.
지난 4월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후포마을에서 탱자꽃을 보았는데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궁월마을에서 탱자를 만난다.
궁월길을 따라 영신교회 앞을 거쳐 장등리 드넓은 들녘으로 나간다.
궁월길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던 청운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마 모종을 낸 고구마밭이 예쁘다.
"청운마을은 옛날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이곳 마을 東津院에서 숙박을 하고 가야 했는데 청운(靑雲)의 푸른 꿈을 가슴에 담고 지나간다고 해서 청운동(靑雲洞)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궁월길을 따라 장등리 북쪽, 중앙 뒤에 보이는 장등마을로 향한다.
궁월길을 따라 영신교회 앞을 거쳐 왔다.
맨 왼쪽에 동진면 장등리 궁월마을, 들녘 건너 중앙에 내기리 신리마을, 오른쪽에 내기리 신흥마을, 그 뒤에 내기리 상리마을, 맨 오른쪽 뒤에 석불산, 중앙에 상소산, 그 앞 왼쪽에 망월산, 이렇게 가늠한다.
동진면 내기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왼쪽에 내기리 신흥마을, 중앙 왼쪽 맨 뒤에 석불산, 중앙 오른쪽 맨 뒤에 계화도의 계화산, 중앙 뒤쪽이 동진면 면소재지 봉황리 일대라고 가늠한다.
동진면 장등리 들녘이 드넓다. 들녘을 가로지르는 국도 23호선 '부안로' 건너편은 동진면 봉황리(왼쪽)와 동전리(오른쪽) 지역이라고 가늠한다. 서해랑길은 중앙 궁월길의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 장등마을로 이어진다.
이정목의 50코스 종점 날개가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날개 반대 방향으로 장등마을로 이어간다.
궁월마을 영신교회 앞을 거쳐 삼거리에서 이곳으로 꺾어 왔다. 이정목의 50코스 종점 날개 방향은 오른쪽으로 되어 있다.
맨 왼쪽에 동진면 내기리 신흥마을, 그 뒤 솔숲이 백로와 왜가리 집단 서식지, 신흥마을 오른쪽 구릉 뒤에 내기리 상리마을이 가늠된다. 어둠 속에 걸어온 길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중앙 맨 뒤에 석불산, 오른쪽 뒤에 흐릿한 계화도의 계화산, 중앙 '변산로' 뒤의 지역은 동진면 봉황리 면소재지 지역일 것이다.
앞쪽에 장등마을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오른쪽 길로 들어가 맨 앞의 쉼터정자와 장등경로당으로 이어간다.
주염나무는 주엽나무, 쥐엄나무라고 불린다. 당산나무로 모시던 주염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망기산으로부터 산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동 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 하여 길 장(長), 오를 등(登) 자를 쓰는 장등마을 주염나무 고목은 분재와 같은 아름다운 수형으로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이다.(설명안내판)
쉼터정자 앞에 주염나무 고목이 있다. 오른쪽 뒤에 부안읍 시가지 건물이 살짝 보인다.
"장등리 동쪽으로 고부천이 흐르고, 남서쪽으로 고마저수지의 일부가 걸쳐 있다. 중앙에 내기평야가 분포하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장등리의 동쪽은 백산면 금판리, 남쪽은 동진면 하장리와 부안읍 신운리, 서쪽은 동진면 내기리, 북쪽은 동진면 동전리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장기리·궁월리·청운리·장등리의 4개 행정리가 있다. 동진남로가 동서 방향으로, 고마제로가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진남로 아래에 고마저수지가 있고, 고마제로 변에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가 자리하고 동진남로 변에는 궁월마을이 있다. 고마제로의 남쪽부터 북쪽으로 각각 장기마을, 청운마을, 장등마을 등이 자리한다. 장등마을에 김제, 전주, 서울 등지에서 부안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동진 나루가 있었으며, 청운마을은 동진 나루 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에 출장 온 관원들을 위한 국영 숙식 시설의 일종인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다. 장기마을은 부안과 김제, 전주,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로 동진장 터가 있었으며, 조선 철종(哲宗) 때 부안 민란(扶安民亂)이 일어났던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장등마을은 망기산의 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고 하여 ‘긴 장(長)’, ‘오를 등(登)’ 자를 써서 장등(長登)이라 하였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상동면(上東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청운동, 운후리(雲后里), 궁을리(弓乙里), 궁월리(弓月里), 궁상리(弓上里), 원리(院里), 교동리(喬洞里), 봉덕리(鳳德里), 장기리(場基里), 복성리(福星里), 장후리(長后里), 동신리(東新里)와 이도면(二道面)의 신복리(新福里), 장신리(長新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동진면 장등리(長登里)로 개설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장등마을 앞 '부안로'가 달린다. 건너편은 동진면 동전리 장신마을이다. 변산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간다.
동진면 장등리에서 동전리(銅田里)로 넘어와 국도 23호선 '변산로' 오른쪽 아래 농로(장등마을 앞 농로)를 따라간다.
지하통로를 통과한 뒤 오른쪽으로 오르다가 '고마제로' 아래의 지하통로를 통하여 동진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 '고마제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간척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이곳은 동진면 동전리 지역이다.
간척길에서 국도 23호선 '부안로'로 올라와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동진대교를 건너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로 넘어간다. 동진대교 서단 오른쪽(남쪽) 아래가 동진나루가 있었던 곳이라고 어림한다.
오른쪽 뒤에서 흘러오는 고부천이 동진강에 합류한다.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동진면, 계화면을 흐르는 국가 하천 및 지방 하천이다. 동진강(東津江)이라는 명칭에서 동진(東津)은 옛 부안 고을의 동쪽에 있던 동진 나루를 뜻한다. 동진의 별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부안]에 언급된 통진(通津)은 황해로 통하는 나루터를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부안군과 정읍시와 김제시를 흐르며 호남평야를 이루는 하천으로, 정읍시 산외면에서 시작하여 남서쪽으로 향하다가 칠보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전환하여 정읍시를 흐른 후 덕천천 합류부에서부터 부안군으로 유입한다.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서부터 동진면, 계화면을 차례로 지나며 북서쪽으로 흘러 계화면 양산리에서 새만금으로 유입한다. 동진강은 연안의 간척과 용수 확보를 위해 직강화(直江化), 제방 축조, 관개 수로 개설로 인공 하천으로 바뀌었다. 부안군을 흐르는 부분은 하류 지역으로, 거의 직선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진강 제수문(制水門) 이후로는 하도 내에 충적층이 넓게 형성되어 유로가 좁아지고 하도 내에서 살짝 곡류하는 편이다. 이는 새만금 방조제 완공 이전 감조(感潮)로 인한 염해 방지와 주변 경지 용수 확보를 위해 동진강 제수문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강은 왼쪽으로 휘감아 흘러 부안군 계화면과 김제시 진봉면 사이를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동진강은 유로 연장 46.0㎞, 유역 면적 1,129.3㎢이다. 만경강과 함께 드넓은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하천으로 물 자원 이용량의 대부분이 농업용수이다. 현재는 직강화되어 쭉 뻗은 하도를 흐르지만 행정 구역 경계를 통해 과거 자유 곡류의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동진강은 부안군과 정읍시·김제시의 경계에서 직선 하도를 이루며 흐르는데, 부안군으로 유입하는 백산면 대수리에서 금판리에 이르는 구간에서 정읍시·김제시와의 경계가 동진강 하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심하게 구불구불한 모양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구의 부안군 계화면 인근 지역은 새만금 방조제 건설 이후 빠르게 육지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차츰 유로가 연장되어 새만금 방조제 가력 배수 갑문을 통해 황해로 유입될 예정이다. 동진강은 과거에 유량이 많지 않은 소규모 하천이었으며 간척 이전에는 유로 연장도 현재에 비해 많이 짧았다. 부족한 유량으로 인근의 넓은 농경지를 적시기는 부족하였기에 예로부터 벽골제와 같은 수리 시설이 발달하였다. 근대 이후로 하류가 지속적으로 간척되어 유로가 길어졌으며 간척지에 필요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섬진강 상류에 옥정호를 조성하고 이 물을 유역 변경시켜 동진강으로 끌어 들이면서 유량이 풍부해졌다. 부안군 계화면·하서면에 있는 청호 저수지는 섬진강에서 동진강으로 유역 변경한 유량 중 일부를 동진강 도수로를 통해 공급받아 채워진 인공 저수지로 계화 간척지의 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면 동전리 동전평야가 드넓다. 왼쪽 맨 뒤 계화도의 계화산, 오른쪽 맨 뒤는 김제시 광활면과 진봉면 일대라고 가늠한다.
"동진강 유역의 들 옆에 자리하여 동전(東田)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동전(銅田)으로 표기하고 있다. 매잔마을의 진입로인 매화길은 예전부터 매화꽃이 만발한다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이도면(二道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이도면의 송상리와 장각 일부를 병합하고 동진면 동전리로 개설하였다. 동전리 일대는 부안군에서 조성된 간척지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지역이다. 1930년 8월 일본 미에현에 본사를 둔 미에 농장[三重農場]이 약 0.287㎢[8만 6859평]를 간척한 데 이어 1933년 11월 일본인 마츠오카가 약 0.168㎢[5만 1025평]를 간척하였다. 간척마을은 동진강 제방 아래 자리 잡은 마을로 1956년 간척마을과 신척마을로 나뉘었으나 현재는 간척마을로 통칭하여 부른다.
동전리 중앙에 동전평야가 분포하여 대부분 주민이 벼농사를 짓는다. 동쪽으로 동진강이 흐르고, 동진방조제가 설치되어 있다. 동전리의 동쪽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남쪽과 서쪽, 북쪽은 동진면의 장등리와 본덕리, 봉황리, 안성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신농리·매잔리·동전리·장신리·간척리·신척리·농원리의 7개 행정리에 277가구, 467명[남 254명/여 21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문포로[지방도 제705호선의 일부]에서 동서로 연결된 동전길의 중간 지점에 동전마을이 있고, 동전길이 간척길과 만나는 곳에서부터 북쪽으로 간척마을, 농원마을, 신척마을 등이 자리한다. 간척길을 따라 늘어선 이 마을들은 가옥들의 배치가 도로를 따라 거의 일렬로 늘어선 노촌(路村)의 형태를 띠며, 반면에 동전마을은 전형적인 집촌(集村)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1997년 3월 24일 국가 무형 문화재 제74호 대목장으로 지정된 고택영(高澤永)이 동전리 매잔(梅棧)마을 출신이다. 고택영 대목장은 1954년쯤부터 113개나 되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및 보물급 사찰과 문화재의 보수와 신축에 참여하였다. 장신(長信)마을에는 용당기(龍塘旗)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진대교 동단 북쪽(왼쪽)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석천휴게소 앞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동진강 둑방길 서포5길 입구, 석천휴게소 앞에 서해랑길 51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부안로 석천휴게소는 폐점된 것 같다.
전체 탐방거리 11.14km, 전체 소요시간 2시간 53분이 걸렸다. 안내도에 소개한 3시간 30분보다 30여 분 빨리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