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불교는 소유론적 진리를 격파한 존재론적 진리 / 김형효 교수
소유에서 존재로 사고방식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항상 소유와 탐욕의 전쟁에서 헤매
문명이 지능의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었다는 것은
지성의 지능이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불교가 한결같이 이 후천적이고 사회적인 지능의 힘을 멀리하고,
자연적이고 선천적인 본성의 힘인 본능을 중시하는 까닭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본성의 본능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갗추어져 있는 것인데,
인류가 사회생활의 활동 속에서 저 힘을 거의 무시하고
지능의 향상에만 모든 정력을 경주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생활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성인 본성의 본능을 멀리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회생활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인간으로 하여금 불성인 본성을 잊게 하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의 간략한 정답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사회생활의 본질이 ‘비사교적 사교성’(unsociable sociability)이라고 규정했다.
사회생활은 인간들 사이의 사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교적 사회성을 바탕으로 성립하고,
그러면서도 인간들 사이의 사회성이
적대적이고 비사교적인 투쟁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유지되지 않는
그런 역설적 이중성으로 짜여저 있음을 칸트가 통찰했다.
즉 사회생활은 서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서로 아귀다툼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그런 이중적 모습을 노정하고 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들은 서로 이기기 위하여 서로 같이 산다고 볼 수 있다.
사회생활을 통하여 인간의 지능이 향상되는 것은
오직 서로 상대방에게 이기기 위하여 애를 쓴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전쟁과 평화를 쉽게 말하고 기술하지만,
인류사를 통하여 전쟁과 평화는 늘 이런 이중성의 짜임새를 겪으면서 인간사에서 형성되어 왔다.
평화는 낭만주의자들의 공상과는 다르게 전쟁의 일시적 중단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전쟁은 평화의 안식에서 생기는 인간의 권태로움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이런 지성의 역사를 벗어나
인간이 망각한 자연의 본성적 역사를 되찾으려는 운동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마음의 고요를 되찾고 호흡의 박자를 다시 조정하려는 불교의 가르침은
자연적 본성의 본능을 생활의 주흐름으로 삼으려는 요구에 기인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지성사의 교육에 의하여 왜곡되어 본성의 본능을 오해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주 나쁘게 말하는 습관에 젖어 왔었다.
그래서 보통 본능은 인간 사회의 도덕윤리를 뒤틀어 놓는 주범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본능은 인간이 동물이하의 행동을 하는 원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이 본능의 소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주의의 세뇌이고 본능은 야만주의의 작품이라고만 여기는 계기를 주었다.
지성의 지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교육을 시켰다.
지성의 지능은 단적으로 좀 더 많은 소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길을 닦는 도구에 불과했다.
지성과 그 지능은 결국 소유를 위한 목적에 이바지 하는 유위적 목적론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회생활은
온통 이 목적의 쟁취를 획득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왔었다.
인류사가 이 길로 미친듯이 접어들어 왔었는데,
가장 먼저 제동을 건 분이 바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성적 지능의 소유론의 전쟁에서는
인간이 조금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최초의 분이시다.
그 분은 인간이 소유의 길에서 존재의 길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소유와 탐욕의 전쟁을 끝없이 하는 어리석음에 헤매게 된다는 것을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2011. 09. 20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