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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나한전 내부의 7나한상, 당시
7명의 도적들이 혜소국사의 법력으로 감화를 받아 불제자가 됐고, 아라한의 위치에 오른 이들은 칠장사의 쇠락을 예견하고, 나한상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알루미늄 덧집이 붙여져있어, 예전과 같은 운치는 없지만 많은 기도객들이 찾고
있다. | 혜소국사 7나한 설화 전해지는 도량 어사 박문수 나한기도로 과거 급제 입시철이면
학부모 기도행렬 이어져 임꺽정·궁예 등 역사 얽힌 설화 많아
“뱉어낸 듯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려 있고 기러기는 자로 잰 듯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지네. 나루를 찾는 나그네 발걸음은
응당 급히 재촉하고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네. 초원에서 풀 뜯는 소 허리 가운데 그림자 띠 둘렀고 댓돌 위에 서방
기다리는 아낙의 쪽진 머리 뒤로 처지네. 고목으로 저녁 짓는 남쪽 마을에 푸른 연기가 올라가고 나무하는 초동은 즐거운 듯 풀피리를 불고
있다.”
안성 칠장사에서 하룻밤 묵은 인연으로 장원급제한 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에서 써냈던 ‘몽중등과시’다. 수차례 과거 낙방 이후 마지막이란
각오로 과거시험을 치르고자 길을 떠났던 어사 박문수, 한양행을 앞두고 나한기도를 올린 박문수의 꿈에 ‘나한’이 나타나 일러준 이 시 문구에
박문수는 마지막 싯구를 더해 써냈고, 장원으로 급제한다. 안성 칠장사는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입시를 앞둔 학부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찾는
나한기도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기도를 올리는 이들로 번잡할 듯하지만 굽이굽이 칠현산 속에 자리잡은 칠장사는 다른 기도도량에 비해 아담하고 고요하다. 아직 입시철이
아니어서 일까.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가깝다 보니 여타 절에서 볼 수 있는 시끌벅적함이 없다. 기도를 올리는 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조용함이
길손을 맞는다. 인적이 닿지 않았던 칠장사에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것이 불과 몇 십년 전이었다니 칠장사의 고즈녁함을 느끼며 또 다른 감회에
젖는다.
사실 어느 사찰이든 설화가 없겠냐만은 칠장사에는 특히 많이 전해진다. 앞서 암행어사 박문수와 함께 혜소국사, 궁예, 임꺽정, 왜장 가등청정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런 역사성에 사찰 자체가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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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 전경. 칠장사에는 임꺽정,
궁예 등 역사 속 인물에 얽힌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 7명의 도적들이 7명의 현자로
변해
칠장사의 나한설화는 ‘칠장’(七長)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7명의 나한’과 혜소국사의 인연에서부터 출발한다. 서기 636년(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칠장사는 고려 초기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근처에 살던 포악한 일곱 도적을 교화하여 현인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물던 고려시대, 인근의 도적 7명 중 한명이 칠장사의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던 중 바가지가 황금으로 변한 것을 보고
몰래 품에 감춰 소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황금인지 알고 가져온 그 바가지가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해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에는 다른 도적이 또한 이와 같은 일을 겪고 그 다음날은 다른 도적이 똑같은 일을 겪고, 이리하여 도적 7명 모두가 같은 경험을 다
겪고서야, 이들은 이 같은 일이 혜소국사의 도력으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깨닫는다. 이들은 혜소국사를 찾아가 제자가 될 것을 청하고, 이들이 곧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절의 이름이 칠장사, 뒷산을 칠현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 혜소국사가 열반에 들자 7명의 나한들은 앞날을 내다보았다. 7명의 나한들이 신통력을 발휘해 보니, 500여년 후에는
칠장사가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여서 ‘우리가 칠장사의 쇠락을 막아보자’며 의논했다. 이들 나한이 홀연히 사라지고, 이들의 모습은 나한상으로 남았다고
한다.
사찰 곳곳에 설화의 흔적이, ‘역사 속 사찰’
이러한 설화의 면면을 사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있는 노천약수의 어린 동자상이 일곱 나한의 탐심을 상징하는 표주박을
들고 약수물을 흘리고 있다. 동자상 앞에 서면 7나한이 깨달음을 얻었듯 마음 속의 욕심이 함께 흘러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발길을 돌려 나한전이 있는 뒷언덕으로 향하면 앞서 설명한 7명의 나한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은 전각이 있다. 유과 공양을 올린 박문수의
설화로 입시철만 되면 나한전에는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학부모들의 과자공양이 끊이질 않는다. 수북히 쌓인 과자로 미뤄 그 인기가 대구 팔공산
못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찰 곳곳에 남겨진 각종 문화재도 칠장사의 깊은 내력을 느끼게 한다. 나한전 옆에는 혜소국사의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에 얽힌 설화도
흥미롭다. 임진왜란 당시 칠장사에 들어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한 노승이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자 화가 나서 이 비석을 칼로 쳤는데 노승은 간 데
없고 비석만 갈라지면서 피를 흘렸다. 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혼비백산해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비석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쪼개진 것을
복원해 놓은 상태다.
이와 함께 칠장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임꺽정이다.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대사가 열반에 든 곳으로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출신이었던 병해대사는 이곳에서 백정 신분의 임꺽정에게 무술과 글을 가르치며 ‘단순한 절도범을 넘어 나라를 훔치라’는 대의명분을 알려주었다. 또한
궁예가 유년기 칠장사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활터 또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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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각 모습, 칠현산 기운을 담은 산신을 모신 곳으로 많은 기도객들이 찾는
곳이다. | 고려시대 중요사찰, 주변 폐사문화재도 많아
칠장사에는 현재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응향각, 천왕문, 요사채 등이 있다. 특징은 여러곳의 문화재를 모아놓은 것이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역조실록>(高麗歷朝實錄)을 이곳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기도처의 역할 뿐만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소실된 여러 사찰의 문화재도 옮겨온 상태다. 칠장사 대웅전 앞 마당의 죽산리 삼층석탑은 원래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의
한 목장에서 관리해오다 2005년 11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옆에는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이 있는데 보물 제 983호인 이 석불입상 역시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1980년 칠장사로 옮긴
것이다. 비록 파주 용미리의 석불입상처럼 거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경기 남부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아들 영창대군의 죽음을 서러워하며 내린 5불회 괘불과 7언시를 담은 친필 족자 등도
칠장사의 역사를 증언한다. 7언시는 선조의 계비로 광해군 즉위 후 유폐된 인목대비가 그 시련의 날 중 칠장사에 몸을 피한 뒤 억울하게 죽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생각하며 직접 쓴 시다.
1997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나한전 뒤의 노송은 고려 고승 나옹선사가 심었다고도 전해진다. 속세를 떠나 다시 현세로 돌아가는
길, 일주문 바깥에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크고 작은 돌탑들이 눈에 띈다. 칠장사의 유구한 역사 속에 수많은 기도객들의 간절함을 쌓은
듯하다.
주변 둘러볼만한 곳 ▲ 석남사
서운산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그
너머 동북쪽 기슭에 석남사가 있다. 안성시내에서 마둔저수지 너머 진천방향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호젓한 계곡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올라가면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수했다. 이후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 죽주산성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본성은
1.7㎞이고, 외성 1.5㎞, 내성 270m로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 있고 보전상태가 좋다.
죽주산성은 특히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왜군에게 내주고 말았던 죽주산성을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포루가 만들어진 산정에
올라서면 안성벌, 이천ㆍ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충청,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전략적인 요새였던 이곳을
아군의 기지로 삼으려는 시도는 나라마다, 전시마다 치열하였다.
▲ 금광호수 65년 9월에 준공된 금광호수는 V자 계곡형 호수로서 물낚시와 얼음낚시가 잘 돼 겨울철 빙어
낚시터로 많이 찾는 곳이다.
금광호수 주변에는 소문난 맛집들이 즐비하며 호수를 끼고 산림이 우거진 도로변을 따라 진천방향으로 향하는
드라이브 코스도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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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칠장사는 용주사 말사입니다.
다음주 30날 사찰탐방 및 봉사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