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8)
눈코 뜰 새 없는 시간 속으로/사촌 시동생
1982년에 막내 시뉘가 결혼해서 나가자, 고모가 쓰던 2층 작은 방은 아들 차지가 되었다.
1985년 어느 날, 지방에 살고 계신 넷째 숙모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2층으로 올라가시어 아버님 어머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신 작은어머님은 아래층으로 내려오시어 부탁할 것이 있다 하시며 내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당신 막내아드님이 고향에서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실력에 넘치는 학교를 지원하는 바람에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낙방을 했다. 다시 한 번 도전하기 위해 서울 입시학원에서 공부 해 볼 생각인데 그동안 질부가 데리고 있어주면 고맙겠다.'는 말씀이었다.
“질부, 우리 집 사정 잘 알잖아? 학원비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하숙시킬 형편이 못돼, 고민 끝에 찾아온 것이니 부탁을 들어줘.”
나는 그 말씀에 “지금까지 우리 집 다녀간 객식구들을 다 감당했는데 한 번 쯤 더 못하겠는가!” 생각하고
“네, 작은 어머님, 도련님 데리고 오세요.” 라고 흔쾌히 말씀 드렸다. 작은 어머님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안심하며 돌아가셨다.
그런데, 숙모님을 배웅해드리고 들어오시는 아버님 낯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웬일이신가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를 향해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아버님은 평소에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 한 말씀 안 하시던 분이셨다.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네가 된다고 하면 나는 뭐가 되느냐? 너만 좋은 사람 되고 나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냐?”
나는 당황해서 “전 그러신 줄 몰랐어요. 제가 경솔했나 봐요. 하지만 이미 허락했으니 어떻게 해요?”
“네가 하겠다고 했으니 나중에 힘들다는 말을 해도 난 모른다.” 하시며 아버님은 휑하고 2층으로 올라가셨다.
잠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난 희생 중독자인가?” 장점인지 단점인지 몰라도 거절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은 어려서부터 부모형제로부터 늘 지적받는 것이었다. 손해보고 양보해야 마음이 편하고, 모질지 못한 것이 바로 나니까 생겨 먹은 대로 살자 하고 사촌 시동생을 받아드렸다.
며칠 후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온 사촌 시동생을 2층 아들 방에 짐을 풀게 했다. 조부모님 옆방에 있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싱글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놓고 나면 요 하나 깔을 면적이 겨우 남는 곳이었다. 물탱크가 들어 있는 작은 다락방이 방안에 있어 잡동사니를 넣어둘 수 는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침대를 일곱 살 위인 당숙한테 양보하고 너는 요에 내려와서 자라고 말했다. ‘자기 집 떠나 낯선 친척 집에 온 당숙이 얼마나 어색하고 힘들겠느냐, 불편하더라도 우리가 참고 잘 해 주자.’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방을 점령당한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을 텐에 아들은 순순히 자리를 내 주었고, 있는 동안 당숙과 부딪치지 않고 함께 지냈다.
시동생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이었지만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형제의 사랑과 과보호 속에 자란 청년이었다. 작은 어머님은 다 자란 자식을 여전히 ‘우리 애기’라고 지칭 하실 정도였다.
외모도 희고 곱살한 것이 귀공자 타입이었고, 조용한 성품에 말이 없었다. 그런 성격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운 3수생이 큰 집에 머물면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까봐 조심조심하며 그를 대했다. 새벽밥을 해서 먼저 먹일 때도, 도시락을 두 개씩 쌀 때도, 늦게 귀가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식을 챙겨 줄 때도 싫은 내색 안하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친정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도 기억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은혜를 베풀었을 때 혜택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수가 되는 수도 있다. 준 사람이 받은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겸손해야 하고 큰 사랑을 담아야 하는 이치를 아버지께서 깨우쳐 주셨음에도 살아온 동안 나는 얼마나 이를 자주 잊고 많은 이의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시동생은 자기 점수에 맞는 대학교에 합격하여 우리 집을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댁 일가에 잔치가 있었을 때, 시부모님을 모시고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넷째 숙모님도 오셨다. 숙모님은 내게 오시어 손을 덥석 잡으시며 고마웠다고, 수고 많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님 어머님을 보시고는 밑도 끝도 없이 “아주버님, 형님, 섭섭합니다.” 하셔서 나를 당황케 하셨다. 아드님한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몰라도 철없는 소리로 치부하고 마실 것이지, 너무 하신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았다. 수험 생 조카 옆방에 두시고 TV도 마음 놓고 크게 못 트셨던 아버님이나 빨래해 주고 방 청소 해주셨던 어머님께 하실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험생 사촌 시동생과의 동거는 처음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 착하고 부모님은 나빴던 것으로 끝나 버린 것 같아 나름 최선을 다 했음에도 개운치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