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이사장 자광 스님
격랑 속 흔들린 동국대 바로 세운 건
서릿발 같은 위법망구 정신
외로움·죽음 점철된, 고뇌 해결 위해 출가
경산 스님 비구 정신, 올곧이 물려받은 상좌
‘노벨 수상자’ 나온다면, 목탁 들고 전국사찰 순례
고려·티베트 대장경 품은, 동국대 일류대학 도약해야
동국대 이사장 자광 스님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면
목탁 들고 전국 사찰을 순례하며 지원하겠다” 한다.
세계대학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양복을 입으라니요?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양복 입을 일 없습니다.
저는 승려입니다!”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1962.4) 했지만
정화운동(1954) 이후 9년에 걸친 비구·대처 간의 분규 후유증은
도량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동국대도 그러했다.
1956년 7월 이후 동국대는 당연직 총장을 제외하면
‘임시·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는 동국대 자체운영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됐음을 방증한다.
불교재산관리법 공포(1962.5.30) 직후 유수의 사찰 대부분이
조계종으로 속속 등록됐지만
동국대는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어 녹록지 않았다.
불교계 인재양성 원력을 세웠던 선각자들의 혼이 담긴
동국대가 본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홀연히 뛰어든 장본인이
동국대 18대 이사장 경산 스님(1963∼1967)이었다.
이사장실에 처음 걸음한 그날, 학교 주요 관계자들은
“이사장이 된 이상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어야 한다”고 했다.
조계종 승려로서는 아연실색할 일이다.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음에도
끝내 재봉사가 줄자를 들고 다가오자 진노를 보였던 것이다.
경산 스님의 일언이 한 번 더 떨어졌다.
“승복 입고도 이사장직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비구가 된 제자는 스승의 위엄을 올곧이 지켜보았다.
53년 후, 2016년 6월 그 제자는
동국대 39대 이사장으로서 그 공간에 다시 들어섰다. 자광(慈光) 스님이다.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한국전쟁 때, 어머니는 9살에 돌아가셨다.
하여, 경찰이었던 형님 집에 머무르며 학교를 다녔다.
유년 때 생긴 외로움은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커져만 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엄습해왔다.
전쟁 때 보았던 주검들이 눈앞에 서성거렸다.
먹먹한 가슴앓이 홀로 삼켜가던 어느 날 전주에서
만행(萬行) 중인 한 스님을 만났다. 처음 본 스님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 터다.
3000명을 수용하는 호국 연무사를 세운 건 자광 스님이다.
“학생이 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 제자가 되는 길일세!”
“스님께서 은사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객승일세. 고찰에 가면 고매한 은사를 모실 수 있을 걸세.
지리산 화엄사로 가 보게!”
1957년, 화엄사 산문을 열었다. 자광 스님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부처님에 비해 나는 포기할 것이 별로 없었다.
부처님이 포기했던 아내며, 자식, 재산, 왕자란 지위도 없었다.
하물며 부모도 없었다. 내가 포기한 것이라고는
너무 일찍 찾아 온 시련으로 얻은 눈물 한 줄기,
고향 마을을 휘감아 돌던 싱그러운 바람 한 줄기뿐이었다.’(자광 스님 저 ‘멍텅구리 부처님’ 중에서)
종비생 1기로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 한 자광 스님은
군승 중위로 임관(1970)해 1995년 대령·국방부 군종실장을 끝으로
전역하기까지 25년 동안 군 포교에 매진했다.
군종실장 당시(1993) 군승법사 정원을 100여명으로 확대했다.
수계를 준 장병만도 4만6000명, 장병 상대 법회·설법이 4만6000회다.
군복을 벗고 승복을 다시 입어야 할 때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비구로서 결격사유가 없어야만 한다.
군에서 한 일들을 소상히 적어 총무원에 제출하고는
비구로서 하자가 있는지 여부를 심사해 달라고 자청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내가 종단에 복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면
조계종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스님이 직접 재삭발해 달라.”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은
영화사로 자광 스님을 초청하고는 정성을 다해 삭발해 주었다.
비구 자광의 길이 새롭게 열린 날이기도 하다.
2대 군종교구장을 역임한 자광 스님은 2016년 6월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이사장과 총장 선거를 둘러싼 내홍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신임 이사장 역할은 막중했다.
비판을 넘어 승가를 향한 비방마저 난무하던 때였으니
그 부담감은 목멱골 남산보다 무거웠을 터였다.
동국대의 현실을 통찰한 자광 스님은 취임 직후 진단과 해결책을 동시에 내놓았다.
“동국대는 지금 격랑에 휩싸인 나룻배와 같습니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난파하지 않고 순항할 수 있습니다.
동력은 정관과 학칙에 기반한 ‘원칙’에서 얻을 것입니다.”
올해 동국대에는 학교의 미래를 청명케 하는 두 개의 낭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영국 대학평가 기관인 QS(Quacquarelli Symonds)의
‘2018 세계대학평가’에서 세계 순위 432위, 국내 13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6월 전해졌다.
2013년 QS세계대학평가에 첫 참여한 이후 매년 순위가 상승해 지난해 471위를 기록했는데
올해는 무려 39계단을 뛰어 오르며 역대 가장 높은 성적을 낸 것이다.
2015년 전후로 1년 넘게 내홍이 일었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10월에는 ‘중앙일보 2018 대학평가’에서 종합순위 17위라는 보도가 나왔다.
종합순위는 전년도와 같지만 ‘평판도’ 순위가 20위였다.
2016년 기점으로 3년 연속 상승한 기록이다.
총장과 교수진, 교직원과 학생들의 ‘학문 열정’이 빚어낸 쾌거다.
그리고 동국대 이사회의 물심양명 지원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에 이사장 취임 직후 ‘원칙’을 천명한 자광 스님이 있다.
“삼독심으로 학교를 바라보는 순간 학내 갈등은 촉발됩니다.
동국대라 해서 예외일 리 없습니다. 규정은 학교를 올곧게 세우는 법입니다.
이 법에 준해 말하고 행동하면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규정집을 보라했습니다. 길이 보입니다.”
‘규정집’을 ‘활인검’으로 쓴 지혜가 돋보인다.
자광 스님은 취임 직후 동국대 전 임직원과 교수, 학생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조계종은 동국대를 설립한 주체다. 설립자의 위상을 흔들면 안 된다.’
학교에서 불거진 갈등을 종단으로 확산 시키는 것을 경계한 일언이기도 했지만
동국대에 서려있는 조계종의 원력을 허투루 보지 말라는 일침이었다.
“동국대는 사찰이 허리띠를 졸라 매고 세운 학교입니다.
학교재원 확보를 위해 조계종의 유수 사찰들은 소유하고 있던 땅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1960년 중반까지 기증한 것만도 1만7000여 정보였다고 합니다.
조계종 5차 중앙종회(1963.11)에서는
무상으로 기부한 사찰림을 학교법인 명의로 일괄 이전하자고 결의한 바 있습니다.”
중앙종회(1965.8)에서 언급한 사찰의 기부임야 가운데
1966년까지 4000여 정보의 임야가 학교법인으로 이전 등기됐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대가 유독 대규모(250만평) 학술림을 보유하고 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1960년대 당시 임야는 부동산 가치로서는 최고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자광 스님은 한때 서울 명문 사립대를 일컬을 때마다 ‘동성고’가 회자됐다고 전했다.
동국대, 성균관대, 고려대를 뜻하는데 성균·고려대보다 동국대가 한 수 위였음을 시사한다.
하루빨리 그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수님들을 만났을 때 작심하고 한마디 한 적이 있습니다.
‘동국대에 머무르는 이유가 밥을 먹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너무 궁색합니다.’
이 교정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면
저는 목탁 들고 전국 사찰을 순례하며 동국대를 지원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자광 스님의 호국 연무사 대작불사를 인지하고 있는 교수라면
이사장 스님의 공언을 허투루 들었을 리 없다.
정말이지 발이 닳도록 전국 사찰을 돌았더랬다. ‘사기’도 당했다.
몸은 야위어갔고 혈압은 높아져 갔다. 끝내 심장혈관 스탠스 수술을 받았다.
당뇨도 그 때 발병했다. 그러나 끝내 3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웅대한 법당을 세웠다.
한국 최고의 대학, 세계일류 대학으로 비약하려는 웅지를 품으라는 뜻일 터다.
이와 더불어 이사장 스님은 “우리 학교에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사실을
늘 가슴에 새겨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현존 세계 최고의 대장경인 고려대장경을 갖고 있다.
체재와 내용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대는 고려대장경과 더불어 북경판 일본 영인본 티베트 대장경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인도에서 건너온 티베트 대장경이다.
달라이 라마가 동국대에 보내온 것으로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망명갈 때 지고 간 그 대장경이다.
외무부와 뉴델리 총영사관의 협조 속에 인도에서 수송된
이 대장경의 봉수식(1967.9)은 동국대 중강당에서 봉행됐다.
그 법석에서 달라이라마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티베트 대장경을 연구하여 한국에서 동양 제일의 불교를 이룩해 주십시오.”
고려·티베트 대장경을 관통하는 건 ‘철학과 신앙’이다.
이사장 스님이 교수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돈독한 신심을 바탕으로 한
밀도 높은 연구업적을 토대로 ‘동양 제일의 불교’를 구축해 달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불교대학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세계인들이 공대 하면 MIT를 떠올리듯
불교 하면 동국대를 상기하는 날이 반드시 와야 합니다.
우리의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자광 스님은 ‘동국대 규정집’을 활인검으로 들었다.
궁금증 하나가 스쳤다. 한 전방 부대 소속의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생이
총기를 탈취해 막사로 들어가서는 기간 병들과 대치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광 스님이 현장으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했다.
총알이 난무하던 사선 한 가운데를 어찌 그리 홀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을까!
그 담담한 용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군 포교는 목숨 내놓고 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군종법사로 월남전에 파병되었을 때 베트콩에게 포로가 되었음에도
그들을 상대로 설법하고 풀려난 자광 스님이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표상 아닌가!
하여, 하나 더 여쭈어 보았다.
군법사에서 군승으로 돌아오지 않고 환속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승가로 돌아온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군법사 이전, 저는 화엄사로 출가 한 스님이었습니다.
군대에 소속 돼 있을 때도 저 자신이 군승임을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군인들이 가족을 염려하며 국방의무를 수행할 때
자광 스님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전방에 서 있는 내가 열심히 해야 후방의 스님들이 마음 놓고 수도한다.’
은사 경산 스님의 일화가 다시 떠올랐다.
“양복을 입으라니요?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양복 입을 일 없습니다.
저는 승려입니다!”
혼돈의 동국대가 단시일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위공망사(爲公忘私)를 품은 비구 자광 스님이 굳건히 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처럼 동국대 교정에 불심(佛心)이 흐르는 한
‘거룩한 삼보의 언덕 위에 한 줄기 눈부신 동국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계종 종립대학이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그 날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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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광 스님은
- 1957 지리산 화엄사로 입산
- 1963 해인사 강원 사집과 수료
- 1968 동국 인도철학과 종비생 1기로 졸업
- 1970 군승 중위 임관
- 1995 대령 예편
- 2009 2대 군종교구장 취임
- 2016 동국대학교 39대 이사장 취임
2018년 11월 14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