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의 광릉은 왕릉은 아니고 광주이씨 시조묘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이있는 사람이 둔촌 이집 선생이어서 광주이씨들은 이집의 부친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광주이씨의 시조묘가 영천까지 내려와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광주이씨와 영천최씨(永川崔氏)사이에 얽힌 설화가 있었으니, 이는 다음과 같다. 고려말 공민왕의 스승이기도 하며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온 신돈이 득세, 권문세족들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당시 사간(司諫)을 지내던 최원도(崔元道)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오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원도와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 또한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화가 닥칠 것을 예상한 그는 어느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친구 최원도를 찾아 영천으로 향했다. 수개월 만에 도착한 영천 친구의 집, 공교롭게도 그날은 최원도의 생일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고 반갑게 맞이 할 줄 알았던 친구는 뜻밖에도 소리를 지르며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쫓아낸다. 이집은 그런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고 한밤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날이 어두어지자 이집을 찾아 나서는데... 마음이 통한 것인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친 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이후로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을 보내게 됐는데, 최원도는 이 사실을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의 '제비'라는 이름의 몸종이 밥을 고봉을 눌러 담게 하고 반찬의 양도 늘리게 하고도 그릇을 싹 비워내는 주인을 이상하다 여겨 문틈으로 엿보다가 이씨 부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몸종은 이를 최원도의 부인에게 알렸다. 연유를 묻는 부인에게 최원도는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며 가족과 몸종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할 것을 일렀다. 하지만 행여나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지화를 입을까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던 몸종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하고 만다.이 사실을 안 최원도는 애처로워하며 그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자기 어머니 묘 부근에 묻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의 부친 이당도 다락방에서 운명을 달리하게 되자 최원도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마냥 매우 슬퍼하며 자기의 수의까지 내줘 정성껏 염한다. 또 묏자리도 주이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의 어머니 묘 부근에 내어줬으니 이곳이 바로 이들의 우애에 하늘도 감복한 명이 됐다. 이로 인해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후손들간에는 이집과 최원도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