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1)
(명동성당∼가회동성당, 2023년 1월 12일)
瓦也 정유순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첫 순례지는 명동성당이다. 명동성당(明洞聖堂)은 사적 제258호(1977년 11월)로 지정되었으며,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며 총본산이다. 원래 이 터에는 판서(判書)를 지낸 참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이 되는 대형주택을 1883년에 대지를 사들여 처음에는 그대로 이용하였다. 1892년(고종 29) 8월 정초식을 거행하였으나 청일전쟁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위돌 박 신부에 의해 1898년 5월 축성식(祝聖式)이 거행, 완공되었다.
<명동성당>
성당 내부 정면 중앙 제대에는 성모 마리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의 작은 제대에는 예수 성심상과 분도 성인상이 있다. 왼쪽의 예수 성심상은 천주교 전파 초기에 온갖 박해와 시련을 이겨내며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오른쪽의 분도 성인상은 성당 건립 때부터 성당 건축공사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다양한 모습의 사도들 초상과 79성인화가 장식돼 있으며, 지하성당과 지하묘소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명동성당 내부(중앙)>
<명동성당 내부(좌)>
<명동성당 내부 (우)
명동성당은 성당이 지닌 종교적·건축적 가치와 함께 우리 현대사가 요동치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온 시대사적 의미 또한 높은 곳이다.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명례방(明禮坊)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가 유입된 이후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일 뿐 아니라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던 곳이다. 또 1830년(순조30) 이후에는 선교사들의 비밀 선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845년(헌종11)에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
명동성당을 나와 <김범우의 집터>로 가는 길목인 서울YWCA 건물 앞에는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가 있다. 이 집터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 등 그의 6형제들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명신(名臣)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들이다.
<우당 이회영 흉상과 집터 표지>
<서울YWCA>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부근에는 <김범우의 집터>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당시 이곳에 모인 신자들은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일신, 권철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등이었다. 또 김범우는 집주인으로서 신자들에게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교회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가 빌려주면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김범우의 집터>
<하나금융그룹>
1785년 봄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명례방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한다.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지방으로 도배(徒配)되어 그곳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중구 을지로 66, 하나금융그룹 앞 장악원 터 표석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김범우의 집터에 건립된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장악원 터 표지석>
한편 <김범우의 집터> 부근은 <나석주(羅錫疇)의사 의거 터>다. 나석주(1892∼1926)의사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 등을 거쳐 1924년까지 중국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투쟁을 하면서 1926년 12월 일제 경제적 착취의 대표기관인 동양척식회사에 투탄하고 일본경찰과 총격대치 하다가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어라!”고 절규하며 자결한 곳이다.
<나석주열사 동상>
청계천 장통교를 지나 <이벽의 집터>로 향한다. 원래의 장통교(長通橋)는 중구 장교동과 종로구 관철동 사이에 놓인 다리였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장창교(長倉橋)·장찻골다리,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어 종로구 관철동 71번지와 중구 수하동 37번지 사이를 잇고 옛 이름을 따서 장통교라고 하였다.
<청계천 장통교>
<이벽의 집터>는 조선 후기 천주교를 이끌었던 이벽이 살았던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다. 이벽의 집은 한국 최초로 세례식이 거행된 곳으로 최초의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집터를 추정하여 표지석을 세웠다. 이벽(李檗, 1754~1786)의 호는 광암, 자는 덕조이다. 1754년(영조 30)에 대대로 무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집안의 가풍을 잇지 않고 순수 학문에 뜻을 두고, 정약전·정약용 형제 및 이승훈 등과 함께 천진암에서 강학 모임을 가지며 학문을 연구했다.
<한국천주교창립터(이벽의 집터)>
1784년(정조 8) 겨울, 이벽의 권유에 따라 프랑스 출신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의 집에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이벽도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권일신, 정약용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에서 최초로 거행된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시초이자,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785년(정조 9), ‘추조적발사건’으로 신앙모임은 즉시 중단되었고 이벽은 자택에 감금당해 있다가 1785년(정조 9)에 사망하였다.
<명동성당의 김대건 신부 상>
<이벽의 집터> 부근에는 <전태일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2019년 4월 30일 개관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기념관(全泰壹記念館)으로, 한국 노동운동 역사를 보여주고 노동자를 지원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해 22살의 생을 마감했다.
<전태일기념관>
발걸음은 종로를 따라 좌포도청자리로 향한다. 가는 길목에는 1919년 3·1 독립만세의 출발지였던 탑골공원 옆으로 <송해 길>이 보이고 종로 큰길 뒷골목은 피맛골로 유명하다. 피맛골은 조선 시대에는 하급 관료나 서민들이 큰길을 가다가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했는데, 이런 일이 빈번하자 번거로웠던 서민들은 고관대작의 말(馬)을 피하기 위해 큰 길 양쪽 뒤편의 좁은 골목으로 피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피맛골은 종로1가부터 6가까지 이어지며 지금은 먹자골목으로 변하여 성황을 이룬다.
<탑골공원>
좌포도청자리는 종로구 묘동의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었던 단성사가 있던 자리다. 좌포도청은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에 위치하여 서울의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했다. 한성부의 치안을 포도청이 맡았다는 것은 왕권 보호를 우선으로 했음을 말한다. 포도청은 성종 때 좌·우 양변으로 조직되고, 중종 이후 포도청으로 존속하다가, 고종 31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로 우포도청 터는 현 광화문우체국 자리다.
<좌포도청 터>
포도청은 을묘박해의 계기가 된 북산사건(北山事件)으로 천주교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으며, 천주교신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곳이 좌·우포도청으로 순교의 터가 되었다. 1795년 을묘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첫 희생자가 탄생되었으며, 1866∼1880년 병인박해 때 마지막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북산사건은 1795년 북산(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우포도청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단성사 터 역사 표지물>
단성사(團成社)는 1907년 6월 4일 설립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이곳에서 개봉하며 한국 영화사의 뿌리가 되었으며, 1990년대 말 멀티플렉스의 보편화로 쇠퇴를 맞았었다. 2001년 건물 철거 후 2005년부터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장했으나 경영난으로 2008년 부도 처리되었고, 법원 경매로 주인이 바뀐 뒤로 2016년 8월에는 복합 귀금속 쇼핑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좌포도청 터(단성골드주얼리센터)>
https://blog.naver.com/waya555/222993180265
첫댓글 명동~~
성당~~
그립고 추억이 많은곳 입니다
서울에 살면서 명동에 대한 젊은 날의
추억은 하나 씩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더 힘찬 첫 걸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알렐루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