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긴 속
곽 학 송
1
인지 반도(印支半島)에서 철수해 온 피난민 명단 속에서 권 혁(權赫)의 이름을 발견하였을 때 나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격해졌던 그러한 감정이 가라앉자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진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었다.
애초 베트남 난민을 태운 우리의 해군 함정이 부산항으로 들어온 것은 5월 l3일이었다. 그 때 그 배에 탄 1,335 명 속에 권 혁의 이름이 끼어 있었던들 나는 그닥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10일 후인 5월 23일에 입항한 화물선 트윈 드래곤 호에 권 혁은 타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 월남 땅에 영주하겠다던 그가 사이공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음은 십이분 짐작이 가는 일이었지만 그 고장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질 직전까지 버티고 있은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이대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C 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는 백 영호(白永浩)군을 찾아갔다.
으례 그러하듯 백 영호는 나를 근처에 있는 모밀 국수집으로 데리고 가서 마주 앉으며,
“뭘 들가서? 님잔 또 콩국수같디?”
하였다.
고향을 버린 지가 어언 30 년이 다 되었지만 백 영호는 평안도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점심은 먹고 왔네. 그보다 자네, 권 혁이 소식 못 들었나?”
“오늘 신문에 났두만. 월남 피난민 명단 속에서 봤디.”
“알고 있었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영호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식가인 그는 자기 몫인 모밀 국수 다섯 장을 시키고 나서 다시 한 번,
“덩심을 먹었어두 콩국수 한 그릇쯤 도티 않아?”
하였지만 내가 끝내 사양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모밀 국수만 주문하였다.
그도 나도 금주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만나는 시간은 으례 낮이었고, 그래서 자연 시간은 따분하기 마련이었다. 팔리지 않는 소설가로 20여 년간 근근히 명목을 이어온 나와는 달리 백 영호는 한때 민완 기자로, 또 명 사회 부장(名社會部長)으로 이름을 내외에 떨친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판문점(板門店)을 중심으로 한 취재 활동과 남북 접촉에 있어서의 그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남북 대화와 더불어 한반도 전체가 평화 분위기에 휩싸이고, 반공 이론(反共理論)이 금기처럼 되었을 때에 시사 문제에 관한 TV 대담에서,
“남북 회담이 단행된다고 해서 대한민국에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할 자유도 없는 줄 알다간 큰일납네다.”
하는 식으로 대담 상대자를 몰아 세우기 일쑤였다.
대개 정치학 교수나 그와 같은 종류의 직업을 가진 상대자는 대담을 토론으로 몰고 갔고 곧잘 브라운관 밖으로 연장시키지 않고는 못 배겨 냈다.
“백 선생 의견대로 하면 남북 대화가 필요치 않지 않습니까? 사담(私談)으로 얘길 좀 하십시다.”
녹화 방송 아닌 생방송에서 넉 아웃된 상대자가 스튜디오를 나오기가 바쁘게 물고 늘어지기가 예사였다.
“됴오습네다, 사담이라믄 얼마든지 합수다레.”
찻집이나 술집에서 백 영호의 평안도 사투리는 기염을 토했다.
“공산당하구는 간을 빼 주고 협상해라 한 것은 말이웨다, 그만치 조심하라는 그것 이웨다. 알가시오?”
“백 선생 논리대로 가면 결국 남북 대화는 필요치 않다는 것에 귀착될밖에 없는 것이지요.”
“기리틴 않디오. 김 교수님의 사고 방식은 디극히 위험한데요? 대화란 건 말이웨다. 산적(山賊), 난적(亂賊)과도 해야 할 경우가 있디요. 기리티오. 그 놈들 판문덤에서 뱀술〔蛇酒〕 내준 적 있디오? 놈들을 그저 산적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웨다, 하하……. ”
그런 식인 백 영호가 웬일인지 평양행 우리 대표단 수행 기자 속에 끼이지 못했었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후 급전하한 꼴이 되었다. 잠시 K 일보 편집국의 데스크를 보는가 하더니 C 일보의 논설위원, 그것도 비상임으로 전락한(?) 후 매스콤에서 그 이름이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리고 불과 1, 2 년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어버린 인상이었다.
백 영호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식욕이었다. 모밀 국수 다섯 장을 거뜬히 해 치우고 나서 두 장을 더 시키면서 그는 말했다.
“그 벌갱이 새끼 어디케 됐다는 거가?”
여전히 그는 ‘빨갱이 ’를 ‘벌갱이’로 발음하고 있었다.
2
권 혁, 백 영호, 나――셋은 평양 K 중학 졸업반에서 8·15 를 맞았다.
당시 서북 지방의 모든 학교가 그러했듯이 그들이 다닌 학교에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은 극소수였다. 열 명에 한 명 꼴도 채 안 되었다. 더우기 K 중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붉은 물이 든 자는 철저히 외면당했었다. 권 혁과 백 영호는 다 같이 기독교 가정에 태어났으니 두말 할 나위도 없었고, 농촌 출신인 나 역시 소련군과 적위대(赤衛隊 : 共産黨의 앞잡이)의 행패에 울분을 금치 못했었다. 강간은 점령군에게 으례 따르는 일시적 현상이라곤 하지만 8·15 후 두 달, 석 달이 경과하여도 소위 ‘붉은 군대 ’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평양의 청년 학생들은 곧잘 밤이 되면 ‘로스케 사냥’에 나섰다. 어둠 속을 혼자 걸어가는 소련병을 발견하면 날쌔게 달려들어 관서 지방 특유의 박치기로 때려 눕히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우리 주변에서의 주동은 으례 백 영호였다.
“어제께 밤, 보초 서던 그 얼간이 새끼 데깍 해티웠더니 돌아가서라므니 왼 주먹에 맞았기 망덩이디, 바른 주먹에 맞았더라면 죽었을 게라 했다디 않가서, 하하.”
박치기는 오른손으로 멱살을 움켜 쥠과 동시에 감행하기 때문에 그 로스케는 왼쪽 주먹에 얻어맞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로스케들은 차츰 겁을 먹고 여간 조심스러워하지 않았다. 거리를 혼자 다니지 않고 으례 둘이 나선다. 한 놈이 쓰러져도 다른 한 놈이 권총이나 ‘두루러기(소위 多發銃)’로 갈겨 버려 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렸다. 그리 되자 학생들도 조직적인 방법을 취하게시리 됐다. 여러 학교 학생 중에서도 K 중학이 가장 치열했다. 이유가 있었다. K 중학의 자매 학교인 K 국민학교 교사를 소련군이 몽땅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K 초등학교 교사는 K 중학교 교사와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그 길이 15도 이상의 경사였다. 로스케들은 교문을 나선 얼마 동안 보조를 맞추어 경사진 길을 내려간다. 그 보조가 흐트러지기 전에 노려야 했다.
서문통(西門通) 신양리(新陽里)로 통하는 언덕길 꼭대기에서 자전거 두 대에 두 학생이 쇠뭉치(포환 던지기 用)를 싼 타올을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전속력으로 달려내려 간다. 학생들 간에 기계화 부대로 불린 이 작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한쪽은 왼손잡이이어야만 했었다. 두 로스케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를 쏜살같이 통과하는 동시에 머리통을 내리쳐야 한다. 즉사하지 않더라도 동시에 쓰러졌던 두 로스케가 정신을 가다듬고 발사 자세를 취하였을 때는 이미 두 기계화 부대 대원은 부청(府廳) 앞 광장을 벗어나 유효 사거리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으례 백 영호가 솔선 지휘하는 이 기계화 부대 작전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알맞은 왼손잡이 학생과 백 영호가 짜는 경우 백 프로 성공이었다. 단 한 번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짝이 권 혁이었다.
혁은 선천적 인 왼손잡이였다. 그래서 영호와 짝을 짓기엔 안성마춤이었다. 헌데 자전거타기가 서툴렀는지 영호 쪽이 속력을 좀 늦추었는데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 권 혁이 헛치는 바람에 한 로스켁의 역습을 받았다. 부청 앞 광장에는 따발총 알이 난무하고 통행인들이 총상을 입었다. 위험 지대를 벗어나 자전거에서 내린 백 영호는 권 혁의 턱부터 갈기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네레 쟁고(自轉車) 못 타?”
“아, 아냐, 영호! 페달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랬어!”
“뭐이 어드레? 덤검(點檢)은 뭘 했디? 이 벌갱이 사춘(四寸) 같은 놈우 새끼!”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권 혁은 우리의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백 영호는 더욱 심한 사투리로 나에게 울분을 토로했었다.
“권 혁이 새끼, 벌갱이 된 거 아닌지 모르가서.”
“설 마…….”
“아니야, 새끼 노는 꼴이 신통티 않단 말야.”
“갸네 집안이 어떤데 그래.”
“벌갱이덜한테 넘어갔을까 봐 기리디.”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권 혁은 이른바 혁명 학원(革命學院)의 1기생으로 들어갔었다. 8·15 전 해에 별세한 권 혁의 부친은 교회 장로로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유지였었다. 평양 종로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던 그의 집에는 일정 때부터 민족 진영의 지도자인 조 만식(曹晩植) 선생도 출입했고, 국내 공산주의 두목이었던 현 준혁(玄俊爀)도 출입했었다고 한다. 소년 권 혁이 조 만식 선생과 현 준혁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기울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의 직계 비속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소위 혁명 학원의 1기생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백 영호의 말대로 그가 ‘벌갱이’가 된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1 년 반쯤 후 우리는 권 혁을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백 영호와 나는 조직적인 반공 학생 운동에 참여한 때문에 지명 수배되는 몸이 되어 이리저리 숨어다니다가 가까스로 38 선을 넘어섰다. 그 얼마 후였었다.
“동명이인 (同名異人)이갔다…….”
“권 혁이란 이름이 그리 흔하겠나?”
권 혁의 소식은 먼저 신문 지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당시 모든 신문은 권 혁의 이름을 주먹만큼씩한 활자로 다루었다. 김 일성의 비서 하나가 귀순 월남했다고.
백 영호는 물을 것도 없이 위장(僞裝) 귀순이라고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시 관서 지방의 사람들은 거의 해주(海州) 쪽의 해로(海路) 아니면 여현(勵峴), 개성(開城) 간의 산길을 택하였다. 그런데 권 혁은 철원(鐵原) 쪽의 38 선을 넘은 것이었다.
물론 권 혁은 수사 당국의 엄중한 조사를 받고 나서야 풀려 나오게 되었는데 백 영호는 그 조사의 소홀함을 내세워 털끝만치도 믿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 군정(美軍政) 시대로 모든 행정이 통역관을 통해서 수행되었을뿐더러 남한의 좌익 정당인 남로당마저 합법 정당인 시절이었다. 영호는 권 혁이 풀려 나올 때 마중가는 것부터를 한사코 반대했었다.
“경수, 너 와 기리네 ? 별갱이 새끼덜한테 수모받은 거 발쎄 니집비랬네?”
“혁이가 빨갱이라구 단정할 순 없지 않아?”
“뭐이 어드레? 그 놈의 혁명 학원이란 데 아무나 디리가는 줄 아네. 야! 두고 보라우. 권 혁이 새끼레 벌갱이 폭동 같은 거 니리키구야 말 테니까니.”
“우리 수사 기관이 그리 어수룩하리라고 생각되진 않아. 또 권 혁에게 미심쩍은 점이 있을수록 우린 감시할 의무도 있잖아.”
“좌우디간 경수 혼자 갈 테면 가 보라우. 난 안 가가서.”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권 혁을 맞기로 했다.
초가을의 태양은 찬란했지만 그 날따라 바람이 없었다. 마포 교도소 철문 위에 떠 있는 흰구름은 그림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3
권 혁은 약간 여윈 얼굴로 교도소의 철문을 나오고 있었다.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본 그는 눈부신 태양빛이 싫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펴며 다시 발을 떼었다. 그때, 말없이 다가간 나의 얼굴을 대하자 권 혁은 흠칫 놀라며,
“경수가·…·.”
하고는 달 끝을 맺지 못했다.
“……”
“혁이, 오래간만이군.”
교도소에서 5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린이 놀이터의 벤치에 나란히 앉은 후에도 권 혁은 퍽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상상조차 못했던 ‘나’라는 존재가 자기 눈앞에 나타났다는 단순한 의외성일 것이다. 나의 출현이 우정의 표시이든 그 반대이든 간에 권 혁으로서는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어서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리라. 그 다른 하나는 공포 같은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자기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던 사실을 백 영호와 더불어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의 출현은 어떤 의미에서든 두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더우기 그가 영호의 말대로 위장 귀순자일 경우, 치명적이 아닐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권 혁의 입에서 새어 나온 첫마디는 참으로 엉뚱하였다.
“삼팔선을 넘어올려구 서성리(西城里) 경수 집으로 갔더니 가족이 모두 떠난 뒤더군.”
“……”
“기림리(箕林里) 영호 집에두 갔었지. 영호 아버님은 내부서원에게 붙잡혀 가고 자당께서 혼자 계시더군.”
이번에는 내 편에서 말문이 막혔다. 자기 스스로의 사정은 모르지만 권 혁의 말은 사실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라곤 홀어머니와 여동생 하나뿐이었던 나와는 달리 기림리 토박이었던 영호네는 온 가족이 집단 월남할 수가 없었다. 한약국으로 유명하였던 영호의 아버지는 죽어도 기림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고집 불통의 노인이었다. 영호 아버지의 수난은 있을 법한 일이며 따라서 권 혁은 엄청난 소식을 전해 준 셈이었다.
“고마운 일이로군. 자네가 우리 집과 영호네 집을 찾아 주었다니…….”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나의 대꾸는 저절로 빈정거림이 되었다기보다 권 혁의 귀에 그렇게 들린 모양으로,
“믿지 않는군, 경수! 자네 역시 쉽게 내 말을 믿지 않는군!”
하고 울상을 지었다.
나는 섣불리 대꾸를 말아야겠다고 내켜 조심스러워졌다. 권 혁에게 십 이분 지껄이게 함으로써 그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는 속셈을 했다.
“경수가 못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난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 일기생 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하나로 내가 벌갱이가 되었다고 경수는 그렇게 생각하나? 공산주의가 뭔지 마르크스주의가 뭔지 모르긴 나도 자네나 영호와 마찬가지였어. 나는 현 준혁 영감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야. 조 만식 선생이야 어디 근엄하셔서 가까이 갈 수 있었나? 현 준혁 영감은 달랐어. 현 영감은 나를 혁명 유자녀 학원에 넣어 주는 것이 옛 친구 즉 내 부친의 우정에 대한 보답으로 여겼었지. 그리고 현 준혁 자신은 장 시우(張時雨 : 金日成의 下手人)란 자에게 암살당했지 않았나? 그 사건은 자네와 영호가 평양에 있을 때였으니까 알고 있을 테지…….”
권 혁이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장황히 늘어놓는 것인지 처음 나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변명 같은 것이리라.―― 소꿉 친구들 간의 우정을 배신하고 외딴 길을 걸었던 과거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리라고 여겼던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었다.
권 혁은 나를 통해서 일종의 항변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놈의 학원으로 들어간 것은 열 아홉 살 때였으니까 아직 미성년이었지. 그래서 나의 추천인이 현 준혁이었다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았어. 아니, 실은 문제된 것 인지도 몰라. 소정의 교육을 마치자 평양 태생인 나를 북강원도(北江原道)에 배치했으니까……·우리 일 기생 열 두 명의 역할이 뭔지 경수 알겠나? 각 도당 위원장(各道黨委員長)의 스물 네 시간을 낱낱이 보고하는 바로 그것 이었어. 용변 시간 횟수까지 말이네…….”
소위 도당 위원장이라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들인데 그 감시자가 만 20 세도 못 된 애송이들이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나는 비로소 권 혁의 귀순 월남에 관한 신문 보도를 납득할 수가 있었다.
“내가 경수네 집과 영호네 집에 들른 것은 배치를 받고 부임 까지 이틀간의 여가를 이용해서였었네. 자네들의 뒤를 따라 월남 탈출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물론 결심을 굳힌 상태는 아니었지만 말이네.”
“……”
나는 권 혁의 표정을 주시했다. 진위(眞僞)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 믿어지나, 경수?”
“좌우간 내 집으로 가세. 당장 갈 곳두 막연하지 않나?”
“아니네. 대전에서 외삼촌이 의사 노릇을 하고 있어. 그리로 가야지. 내가 경수 집에서 묵는 것은 자네에게 폐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는지도 모르니까…….”
권 혁은 또 한 번 서쪽으로 훨씬 기울어진 태양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라고 해서 나를 어린 시절의 궉 혁으로 대해 주겠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는 여기 수사 기관을 거친 신분 아닌가! 오늘 하룻밤이라도 내 집에서 자야 하네.”
나는 억지로 권 혁을 집으로 데려갔었다.
4
“경수는 내가 대한민국 당국의 수사 기관을 거친 신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 비록 수사 기관에서는 나를 믿게 되었다치더라도 남한 사회가 나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말이네. 그러니까 남한 사회의 중추 구성 분자라고 할 수 있는 자네나 영호가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이건 무슨 감정론이 아니야. 내 마음과 육체가 뼈저리게 체험한 엄연한 현실이네. 내가 38 선을 넘어선 것은 신문에 나기 시작한 열흘 전이 아니야. 나는 석 달 전에 이미 북쪽의 철원을 거쳐 포천 땅을 밟았었던 거네.”
그 때만 해도 호주가로 불리던 나는 술상을 마련하고 권 혁에게 술을 권하노라 연거푸 혼자 두여 잔을 마셨지만 그는 술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뇌까리는 것이었다.
“삼팔선을 넘어서자 나는 많은 월남자들과 함께 경찰 지서로 찾아갔었네. 삼팔 이남 땅에서 떳떳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였지. 그래서 나는 과거 삼팔 이북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솔직히 말했어. 자네들과 함께 소련군을 때려 눕히던 일에서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 일 기생으로 들어갔다가 월남을 결심하고 감행할 때까지의 내 심정까지 말이네. 물론 경찰에서는 나의 솔직한 진술을 대부분은 받아들이긴 했었네. 경수, 영호와 함께 강탈, 강간하는 로스케들을 때려 눕힌 사실과 월남을 결심한 사실들까지도. 그러나 내가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의 일 기생으로 북강원도 도당 위원장의 감시역이었다는 사실만은 어쩔 수가 없었어. 참, 경수부터가 내가 월남한 결심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것부터 설명해야겠군…….”
“한 잔 들면서 말하세.”
권 혁이 간격을 두기에 나는 세 잔째를 마시며 권하였지,만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 내가 월남을 결심한 동기를 말하기 전에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으로 들어가기로 한 동기부터를 말해야겠군. 현 준혁 영감과의 관계는 아까 낮에 말했었지만, 그 영감에게 속아 넘어가게 된 계기는 영호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네. 그 아픔 때문이 아니라 내가 로스케를 때려 눕히는 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영호는 분명히 말했어. 이 빨갱이 사촌 같은 놈이라코 말이네…….”
“……”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 혁의 심경이야 이해가 되지만 성인이 다 된 나이에 그만 일로 스스로의 인생관, 사회관을 바꿀 정도로 어리석은 사내였단 말인가.
자네, 영호의 대쪽 같은 성격을 몰랐던가! 하고, 겨우 던질 말을 골라 냈는데 권 혁이 먼저 말을 잇기에 나는 도로 놓는 쪽이 되었다.
“영호가 그런 말만 하지 않고 내 턱을 열 번, 백 번 갈겼던들 나는 감수했을 거야. 한데 영호는 내 턱을 한 번 갈기고 아픈 데를 찌른 거네. 빨갱이 사촌 같은 놈이라고 말이네.
나는 영호에게만이 아니라 경수에 대해서도 심한 열등 의식을 품고 있었네. 그것은 박치기로 로스케를 때려 눕힐 때 나는 단 한 대에 로스케를 쓰러뜨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때문이네. 아니지, 학교 성적부터가 그랬어. 영호와 자네는 학년마다 수석을 다투었지만 나는 10등 안에 들기가 고작이 아니었나? 경수, 듣고 있나?”
“어서 말하게.”
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을 감고 었었던 것이었다.
“월남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동기, 동기라기보다 그 경위를 말할 차례군.”
권 혁은 침착을 차리고 있었다. 내가 두 눈을 감고 있은 것은 자기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어서가 아니요. 그 바대였음을 알아차린 때문인 듯 싶었다. 실제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중(鎭重)치 못하였던 권 혁의 마음가짐이 못마땅하면 할수록 그만치 연민의 정이 치솟아서였다.
부러울 것 없는 가정(권 혁희 집안이 平壤에서는 上流層에 속하였다)의 외아들로 태어나 제멋대로 자라난 그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의 성품을 지닌 귀공자였다. 그것이 소학교까지는 통하였다. 중학교는 달랐다. 학업 성적으로도 완력으로도 으뜸이었던 백 영호는 그러한 권 혁을 결핏하면 후려치곤 했었다. 그럴 경우 권 혁이 의지한 것은 나였다. 나는 영호와 변두리 소학교까지 동창이어서 각별히 친했기 때문에 둘의 사이를 무마할 수가 있었다. 8. 15까지 셋의 우정이 지속된 이유였다. 지금, 권 혁은 어린 시절의 일들을 되새기며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삼팔선을 넘기로 결심한 것은 소위 도당 위원장의 용변 횟수, 시간까지를 보고하라는 비인도적인 사명에 모멸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네. 나는 사냥개가 아닌가…… 북조선 공산당의 사냥개…… 그러나 원인은,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남조선 공산당 간부의 아들로 월북해 온 원생의 남한 정세 보고를 들은 후였지. 소위 남조선 인민을 위해 투쟁하다가 죽었다는 자의 아들은 우리 또래였어. 그 자가 김 구 선생과 이 승만 박사를 살인귀라고 말하지 않겠나. 살인귀……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받은 충겨을 경수, 짐작 안 되나?”
권 혁은 잠시 말을 끊었었다. 나의 공명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그 때의 일을 가슴 속에 되새기는 얼굴빛으로서였다.
나는 권 혁의 심경만은 이해가 되었다. 그는 현 준혁의 쟤담에 현혹되어 있긴 했어도 조 만식 선생을 존경했었다. 그 조 만식 선생은 서울의 김 구 선생, 이 승만 박사 등과 연락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공산당의 우두머리였던 현 준혁 역시 서울의 요인들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동족으로서 유대를 꾀하였었다. 북쪽의 대부분의 청소년이 그러했던 것처럼 권 혁 역시 서울의 요인들을 조 만식 선생보다 더 웃어른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삼팔선을 넘기로 결심한 것은 경수네 집과 영호네 집을 찾아갔을 때였네.
자네들은 모두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갔다지 않겠나, 더구나 경수는 가족까지 데리고 말이네. 가족이라곤 출가한 누이 하나뿐이었던 내 심정을 경수는 이해 못하겠나? 나는 영영 탈락해 버리는 절망 의식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어. 소위 북강원도 도당부로 부임하는 기회를 이용, 철원 쪽 삼팔선을 넘어섰던 거네. 경수, 안 믿어지나?”
권 혁의 말은 결코 위장 귀순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소꿉 친구 간의 우정과 고독―-ㅡ그 때문에 월남을 결심했다치더라도 권 혁의 신분은 엄연히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 일기생임에는 틀림없지만 영호와 나에게서 영영 탈락해 버리는 것 같은 절망 의식이 솟았다는 그 자체가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고, 내켰기 때문이었다.
“삼팔선 이남의 지서로 자진 찾아간 이야기는 낮에 했었지 ? 다른 월남자들은 한 두 시간의 조사 끝에 방면되었지만 나는 사흘간을 붙들려 있었네. 피난민으로 가장한 간첩인지도 모른다면서 고백하라는 거야. 내가 뭣을 더 고백해야 된단 말인가?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 일 기생으로 도당 위원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었다는 그 이상의 무엇을 나는 고백했어야 되나. 사흘간을 갇혀 있으면서 나는 정말 고백할 것이 더 있었으면 했었네. 경찰관들의 노력은 도로(徒勞)였었지. 그래서 사흘 후에 나는 방면됐지. 참으로 나는 하늘에라도 올라갈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네. 하나 그것은 다음 지서까지의 한나절에 지나지 않았어. 나는 두 번째 지서에서 또 사흘을 묶였었지. 세 번째, 네 번째 지서에서도 마찬가지였네. 서울까지 오는데 석 달이 걸리더군. 그리고 서울에서는 미군들이 직접 취조하더군. 일 주일 가까이 말이네.”
“결과 혁은 자유의 몸이 되지 않았나?”
“경수는 진정 그렇게 생각하나? 하긴, 몸서리쳐지는 절망 의식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자위하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
권 혁의 두 눈은 몹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내켜 번개처럼 떠오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영호와 나도 삼팔선을 넘어서자 곧 경찰 지서로 갔었지. 가족을 데리고 있은 나에게는 친절했지만 그 때 경찰관이 영호에게 던진 첫마디가 무엇인지 알겠나? 너 몇 호야? 하는 것이었어. 간첩 몇 호냐? 그런 뜻이었지. 반공 학생 운동의 지휘자인 백 영호에게 말이네.”
그러니 권 혁을, 경찰이나 미군 수사 기관에서 일단 의심해 보는 것은 당연하며 영호보다 자네에게 더 심한 것 역시 당연하지 않느냐는 그런 뜻이 나의 말 속에는 포함되어 있었고, 권 혁 역시 납득이 된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던 것이었다.
5
지난날의 회상에 잠겼던 나는, 백 영호가 모밀 국수 일곱 장을 모두 들이키고 젓갈을 놓기를 기다려 말하였다.
“영호, 부산에 있는 월남 피난민 수용소에 한 번 안 가려나?”
“그 벌갱이 새끼 만나러 말인가?”
“권 혁이가 삼팔선을 넘어온 후에도 빨갱이 짓을 했다는 증거는 없지 않나?”
“경수, 너 딘정으로 그런 말 하는 거가? 눅이오 때 새끼 노는 꼴 보구서두?"
백 영호의 장담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나든 무작정 공명할 수 없어 저절로 입이 붙어 버렸다.
6. 25 가 일어나자 권 혁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군문에 자원하였다. 전선(戰線)이 현재의 휴전선으로 교착될 때까지 일 년여 동안 충실한 국군 사병이었다. 영호 일등 중사로 승진할 때까지 권 혁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사에 그쳤을지언정 성실 국군의 일원이었다. 문제는 ‘펀치볼 고지’ 쟁달전 때 일어났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 셋은 북괴군 수류탄 파편에 맞아 부상병이 되어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영호와 나는 허벅다리와 왼쪽 어깨에 파편이 스쳤을 뿐이었지만 권 혁은 한쪽 구석이긴 하나 복부(腹部)에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내장은 다치지 않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그 해 따라 잔서(殘暑)가 심하여 혁의 복부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는 듯했다. 부상병 이 구름 떼처럼 밀려들 때여서 언제 후방 병원으로 옮겨 갈는지 막연했었다.
천막 속의 야전 병원에서는 중상자들의 비명이 합창이 되어 그칠 사이 없이 흘렀고 하룻밤 사이에 십여 명이 죽어 나갈 적도 있었다. 권 혁의 눈치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왈칵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잔서도 어지간히 시들해진 어느 날 밤 권 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사흘 후 영호와 나는 후방 병원으로 호송되었고, 석 달 후 전상자로서 명예 제대가 되었다. 권 혁은 그 사흘을 넘기지 못하여 탈영병 신세가 되어 숨어 다닌 꼴이 되었던 것이었다.
“육이오 때 혁도 우리처럼 경상자였던들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르네.”
탈영병과 빨갱이를 혼동하는 영호의 태도가 마땅치 않아 건넨 나의 말을 그는 한 마디로 부정했다.
“그럼 경수는 내가 갸아터럼 뱃대기에 파편을 맞았디레믄 도망뎄다, 그 말이가?”
“극단론은 접어 두게.”
“극단론이라니 ? 기 새끼레 벌갱이 사상이 남아 있어서라무니 도망틴 게웨. 벌갱이덜하구 사생 결단을 내는 판국에 뱃대기레 썩어 문드려딜디언덩 도망을 테?
그 새끼레 아니라 그 누구라두 난 용서할 수 없음메.”
나는 권 혁의 탈영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겨 왔었다. 이치로 따진다면 영호의 견해가 옳지만 그 문제에 있어서만은 권 혁이 오히려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보다 나는 탈영 후의 권 혁이 수상했었다.
제대한 지 몇 해 후에야 나는 대전에 들른 일이 있어 권 혁의 행방을 알아보았었다. 의원(醫院)을 경영 한다던 그의 외삼촌의 이름이 윤 성삼(尹成三)이란 것을 들은 바 있어 전화 번호부를 뒤졌었지만 허사였다.
권 혁이 거짓말을 했던가 싶어 약간은 울분을 느끼며 그대로 돌아서려다 말고 '윤성삼 의원’이 소재하였던 선화동(宣化洞)의 아무 의원에나 들러 물었더니 그 의원의 원장인 임 모 의사는 나의 얼굴부터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반문하였더니 윤 성삼은 북괴군이 침입하였을 때 소위 인민 병원 원장이 되었다가 월북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소에. 물린 것 같은 기분으로 되돌아섰었다. 대전역으로 향하는 나의 발길은 철근같이 무거웠다. 기차 시간까지는 시간이 있어 역전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가 마악 자리에 앉으려는데 어깨를 특 치는 사나이가 있었다.
“경수!”
그가 바로 권 혁이었다.
그는 중대가리가 되어 있었지만 사지는 말짱했었다. 복부의 상처는 의외로 빨리 치유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윤 성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자네 외삼촌은 육이오 때 이상하게 되었더군.”
하였더니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권 혁은 얼굴이 파리해지면서 설명 아닌 변명을 가하는 것이었다.
실은 변명 아닌 설명이었지만 권 혁의 말투가 변명조였던 것이었다. 그의 설명이 내가 임 모 의원에서 알아본 사실과 부합되므로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으며, 머리를 빡빡 깎아 버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외삼촌이 그 꼴이 되었으니 하늘이 무너져 나가는 것 같았네. 탈영한 것이 얼마나 후회되었는지 몰라……. 그렇지. 평양에서 소위 혁명 유자녀 학원에 들어간 것만치 후회스러웠네. 그러나 야전 병원에 그대로 있다가는 꼭 죽을 것만 같았으니 어쩌겠나? 실제 죽었을는지도 모르고·…….”
“그건 아닐쎄. 나와 영호는 자네가 탈영한 사흘 후에 서울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네.”
“뭣?”
“영호와 나 같은 경상자도 후송되었으니 자네야 물을 것도 없었지.”
“……”
나의 말은 권 혁에게 잔인하였을지도 모르지만 진상은 알려 주어야겠기에 한 말인데 그는 한참 말없이 긴 한숨만 짓는 것이었다.
“그런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되풀이하지 말자구. 그보다 경수가 알고 싶은 건 내가 어떻게 살아났고, 또 앞흐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ㅡ 하는 것 것 아니겠어? 어차피 팔자 소관대로 살아가게 마련일 테지만 말야, 허히허.”
권 혁의 웃음소리는 별나게 쓸쓸하게 느껴졌었다.
탈영 직후 대전으로 외삼촌 윤 성삼을 찾아갔다가 허탕을 친 권 혁은 자살을 결심했었다는 것이었다. 야전 병원에서 응급 치료만 받은 상처의 아픔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동란 중 가장 많이 파괴된 도시의 하나인 대전은 폐허 그대로였다. 전선이 교착되었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은 태반이 피난지에서 돌아오지 않았었다. 어디 비를 피할 처마 밑을 찾기도 어려웠다. 권 혁은 죽음을 의식할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무너진 집터에 엎드려 하룻밤을 보냈다. 쥐란 놈들이 권 혁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줄치며 넘나들고 있었다. 상처의 피 냄새를 맡았거나 자기를 시체로 여겼던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권 혁은 또 그 별난 웃음을 지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네. 쥐새끼들도 살려고 저렇게 발버둥치는데, 죽음을 의식 한 나는 그 쥐새끼들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네. 기다시피 하여 무작정 인기척이 있는 건물을 찾아 들어갔지. 그 곳이 바로 태권도 도장이었어. 상이 군인이 운영하는……. 물론 그 사람은 나와 같은 탈영병이 아니고 떳떳한 명예 제대 군인이었네. 나는 탈영병임을 솔직히 털어 놓고 구원을 요청했었지. 김 문도(金艾道)라는 그 장교 출신 상이 군인은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 내 상처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심부름꾼 겸 수습생으로 그 집에 살게 됐지. 이젠 단(段)두 따고 남을 가르칠 정도가 됐네. 김 문도 씨는 지금 대만으로 건너가서 도장을 내겠다고 서둘고 있으며 나를 데려간다는군.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 볼 수밖에……. 내가 한 번 더 태어난 조국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날이 있겠지. 허허허.”
그 후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두 번 다시 권 혁을 만나지 못했다.
두 통의 편지를 받았을 뿐이었다. 하나는 발신처가 대만으로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월남 사이공에서 띄운 것이었다. 사이공에서의 편지는 국군의 월남 파병이 있은 일 년쯤 후에 보낸 것으로 이제는 단독으로 도장을 내어 월남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영병인 권 혁이 어떻게 수속을 밟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는지, 또 모국에는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사이공에서의 편지를 받은 며칠 후 회신을 보냈지만 월여 후에 수취인 부재라는 낙인이 찍혀 되돌아왔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권 혁의 기억이 나의 머릿속에서 흐지부지 사라질 즈음에 이번 사태에 이른 것이었다.
모밀 국수 집에서 다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백 영호는 권 혁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화제를 바꾸었다.
“경수, 님자 요샌 낚시질 소설만 쓰두만. 반공 문학은 팬텐나(버렸나)? 하기야 공산당 놈덜은 민물 낚시를 못 하게 하니까니 기게 반공이디.”
그랬던 백 영호가 며칠 후 전화를 걸어 왔다. 여행 채비를 가지고 급히 C 일보사로 나와 달라는 것 이었다.
6
백 영호는 이미 여장을 갗추고 C 일보 논설 위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하군. 내 의사는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욘가?”
“기리케 됐음메. 날레 가 봐야가서.”
“어디루 ?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몰라서 묻네? 권 혁이 갸아 부산 피난민 수용소서 미테 버렸테디 않가서.”
“……”
나는 쇠망치보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부산행 고속 버스가 서울의 도심을 벗어난 후에야 영호는 시선을 차창 밖에 둔 채 속삭이듯 말했다.
“부산 지사의 기자가 수용소를 취재한 기사를 보내 왔는데 말이디, 권 혁 이가 발광했다디 뭐가서. 기리구 내게 편지를 따루 보내 왔는데 경수 이름하구 내 이름을 연달아 불러 댄다디 않가서 ?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구·…….”
“어쩌다가 정신 이상까지·…·.”
“원테 좀 돈 녀석이였디 뭐가……. 월남에서 태권도 교관하구 있은 건 알디?”
“영호도 알고 있었군.”
“응, 눅십 칠 년도에 처음 월남 갔을 때 만났디. 제법 큰 도장에서 월남인 상대루 ‘얏!’ ‘엇!’ 하구 있디 않가서. 그 때 베트공 출몰 디구보 더 깊숙이 디리가면 돈을 더 벌 수 있다구 하더니, 두 번째 갔을 땐 없어뎄두만. 기게 칠십 일년돈디 이 년돈디 잘 모르갔구맏.”
영호의 말투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듣고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의 짐작과는 달리 영호가 권 혁을, 그것도 멀리 월남 땅에서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또 나에게는 한 마디도 없었다는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 영호는 권 혁에게 욕설을 않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전에 권 혁이 새끼 어쩌구 하면서도 밑바탕에는 소꿉 시절의 우정이 깔려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메칠 전부터 멘회가 시작되디 않았가서. 권 혁이 녀석 환장했다두만. 이층 열한 교실에는 한국 사람 삼백 열 여덟 명과 그들의 가족 육백 쉰 아흡 명이 들어있는데 거의가 멘회를 왔는데 권 혁이만 외토리라디 뭐가서. 녀석·…….”
“한국인이 많이도 남아 있었군. 외국인은 얼마나 되는고?”
권 혁에 대한 영호의 달라진 태토에 나는 왜 그런지 울음이 치솟아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일차로 온 천 삼백 서른 다섯 명, 둥에도 월남인 삼백 스물 여덟 명, 둥국인 수물 여덟 명 필리핀인 백 명이구, 이차에 온 투윈 드래곤 혼가, 기리티, 권 혁이 타고 온 배디. 거기에두 이백 열 다섯 명이 타구 왔는데 그치들 모두 외국으로 가구파 한다누만. 백 아흔 세 명이 미국, 열 다섯 명이 프랑스, 열 명이 호주, 대만과 일본에 각 두 명이 가길 원하구, 홍콩에 한 명, 우리 한국 테류 희망자는 단 두 사람뿐이 라누만.”
“일종의 배은 망덕이군. 처음 남지나 해에서 구출해 가지고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에 내려놓으려고 했을 때 받아 주지 않았다지 않나? ”
“기리게 말이웨…… ·하긴 우리 한국두 자유 월남터럼 될까 봐 기리갔디. 흥, 어림두 없다, 없어! 흥!”
휴게소에서 두어 번 쉬었을 뿐 우리를 태운 버스는 경부 고속 도로 노면을 날 듯 달렸다.
수용소에 당도한 것은 해질 무렵 이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어 마치 월남 땅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따이한 까먼 (한국 고맙습니다).”
마악 저녁 식사를 끝내고 운동장을 산책하고 있던 월남인들은 우리를 보자 한결 같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행여 무슨 희소식이라도 갗고 온 사람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영호와 나는 관리 직원의 안내를 받아 권 혁이 들어 있는 방으로 갔다. 발광하자 수용소에서는 권 혁을 자그마한 방으로 격리시킨 것이었다.
다섯 평 남짓한 방 한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 침대에 있던 권 혁은 우리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더니,
“태권도 준비!”
하고는 혼자서 손짓 발짓하면서 구령을 붙이는 것이었다.
“얏!”
“엇!”
어제. 저녁부터 증세가 더욱 악화된 권 혁은 관리 직원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만 들어서면 태권도 구령을 건다는 것이었다.
“권 혁이! 정신 차리라우!”
영호는 그의 두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 대는 것이었지만 권 혁은 그저 태권도 구령만 연발하는 것이었다.
“야, 인마! 경수하구 영호하구 왔어, 널 만나레 왔단 말이다! 야, 인마! 정신 차리라우!”
권 혁은 끝내 영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하부(下釜)는 무의미하진 않았다. 그 날 밤으로 권 혁은 정신 병원으로 이감되는 것이었다.
황혼이 짙어지자 구급차가 왔다. 마침 오락 시간인 모양으로 강당에서는 월남 노래와 월남인이 부르는 ‘아리랑’, ‘도라지’ 등의 서툰 목소리가 새어 나와 어둠이 깔린 운동장에 널렸다.
권 혁을 구급차에 태우고 나서 영호와 나는 관리 직원과 더불어 수용소의 승용차에 올랐다.
“어래서〔幼) 한 번 꾸게딘 마음 속은 페디디 않누만.”
영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려서 구겨진 마음 속…˙. 영호는 무엇을 두고 한 말일까.
현 준혁에게 속아 소위 혁명 학원에 들어간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펀치볼 고지’ 쟁탈전 때 전상을 입고 탈영한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일까. 아니다. 권 혁의 마음이 구겨진 것은 평양에서 로스케를 때려 눕힐 때 실수를 해서 영호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호는 그 옛일을 되새기며 미안감에서 한 말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강당 쪽에서는 계속 월남민들의 서툰 노래 소리가 새어 나오고 구급차에서는 권 혁이 또 발작한 모양으로, ‘얏!’, ‘엇!’ 하는 태권도의 구령이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 ◈
작가 연보
郭 鶴 松
1927 평북 정주 출생.
1950 서라벌 예술 학원(서라벌 예술 대학 前身) 문예 창작과 수료.
1951 「대전일보」 현상 소설 모집 에 〈마음의 애꾸눈〉 당선.
1952 「대한신문」 신춘 문예에 단편 〈聖鐘) 이 당선.
1953 「문예」지에 단편 〈眠藥〉으로 1 회 추천 받고, 〈獨本橋〉로써 추천 완료.
1955 장편 〈鐵路〉 (교통) 연재. 단편 〈綠焰〉 〈석 양〉 〈持ιK、戰〉 〈歸還後〉 〈유성〉 발표. 장편 〈바윗골〉 (중앙일보.) 연재. 창작집 「獨木橋」 간행.
1956 단편 〈마음〉 〈장례식 날〉 〈백치의 꿈〉 〈연속선〉 〈黃昏後〉 〈공상 일기〉 발표. 장편 〈밀고자〉 (동아일보) 〈화원〉 (대구 매일신문) 연재. 장편 「鐵路」 간행.
1957 단편 〈난맥〉 (현대문학) 〈허세〉 (신태양) 〈更生女〉 (여원) 발표. 장편 〈꽃은 지고 피고〉 (민주신보) 연재 후 「다시 만날 때까지」로 改題, 간행.
1958 단편 〈新聞〉 (자유문학) 〈밀서〉 (현 대문학) 〈완충지대〉 (현대) 발표.
1961 전기 「춘원 이 광수」 간행.
1963 장편 〈백 색 의 공포〉 (조선일보) 연재.
1964 단편 〈金과 李〉 〈태아〉, 장편 〈그 여자는 알고 있다〉 발표.
1965 장편 〈검은 해협〉 (대한일보) 연재.
1969 단편 〈해후군〉 (월간문학) 발표. 제 1 회 도의 문화 저작상 수상
1970 중편 〈두 緯度線〉, 단편 〈反哺之孝〉 (현대문학) 발표.
1엇73 〈두 釣友〉 (현대문학) 〈道) (신동아) 발표.
1974 〈背族〉 (한국문학) 〈의 병〉 〈老釣士〉 (현 대문학) 〈晋'|1陷城〉 (신동아) 발표.
l976 〈放魚〉 (현대문학) 발표. 창작집 「ηk魚」 간행.
1‘I77 〈釣道는 달라졌는가〉 (조선일보 연재) 등 수필 58편 발표.
1978 단편 〈被面會人〉, 중편 〈낯설은 골짜기〉 (월간문학) 〈눈 오는 밤에〉 (소설문예) 발표. 자 전 소설 〈흔적〉 (현대문학) 연재. 〈낯설은 골짜기〉로 제 3 회 반공 문학상 수상. 수필집 「문학 속에 낚시 속에」 간행.
1980 단편 〈拘泥〉 〈낚시와 전쟁〉 (월간문학) 발표. 장편 「흔적」 간행. 서울시 문화상 문학 부 문 수상.
1981 장편 〈遁走路) 1 부(현대문학) 2 부(월간문학) 연재.
198,4 중편 〈인간 관계〉 (현대문학) 발표.
1985 단편 〈양재천 邊〉 〈죽음의 삼각 관계) (한국문학) 〈異質化〉 (소설문학), 장편 〈망향보류〉 발표. 문화 훈장 보관장 받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