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녀몽중(巫女夢中)
라혼은 익숙하지만 그러나 어색한 회색 공간을 홀로 걸었다. 말 그대로 꿈속을 거니는 라혼은 무섭고, 불안하고, 메스꺼운 공간의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무의식 공간에서 어느 순간 라혼은 마음속에서 울리는 하나의 의지를 느꼈다.
―누구냐?
그 어떤 존재의 물음은 소리로 들린 것이 아니라 그냥 느껴졌다. 라혼은 그 물음에 오히려 되물었다.
“넌 누구냐?”
―….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다시 그의 의지가 전해져왔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흐음, 이름 없는 존재로군.”
―그앙~!
라혼이 의사를 전달한 ‘존재’를 ‘이름 없는 존재’라 정의(定意)하자 그 존재는 분노와 괴로움, 그리고 강렬한 적의라 생각되는 감정을 내뿜었다. 그리고 ‘존재’는 형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어둡고 음습한 그리고 기괴한 검은 연기로 라혼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신(神)이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넌 신이다. 그러나 너는 이름을 갖지 못한 신이 아닌가?”
“….”
라혼의 비아냥에 그 존재는 무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던 검은 연기는 종국엔 하나의 작은 알처럼 변했고, 라혼은 손을 뻗어 그 알을 들었다. 그러자 알 속에 새겨진 기록이 라혼에게 전해졌다.
자신을 도라족이라 불린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모습부터 최초로 신기(神技)를 발휘해 그들을 도운 기억 그리고 최초의 무당과 인연을 맺은 기억도 보였다. 그러나 도라족은 존재에 대한 정의는 하지 않고 무녀의 예언 능력이나 신통한 능력만을 빌었다. 그리고 존재는 도라족의 위험을 무녀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존재는 무녀의 피를 따라 새로운 몸으로 옮겨왔으나 새로운 몸은 몸주인 ‘존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존재’는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괴롭혔다.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흥미롭군. 이봐!”
―우아아아아악~!
라혼이 알에 신성력(神聖力)을 주입하자 알로 변한 존재는 고통에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서히 라혼의 신성력에 잠식되어갔다.
―싫어, 싫어, 안 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다. 우아아아악~!
라혼의 신성력에 잠식되어 알을 점점 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알이 있던 자리에는 하얀 빛무리가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은 하얗게 공간을 채우더니 회색 공간을 순백의 공간으로 바꾸었다.
―확~!
“허억!”
“주인님? 괜찮으세요?”
라혼은 눈을 뜨고 현 상태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점혈되어 굳어 있는 두 명의 열지족 전사가 보였고, 라혼 자신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초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반각(1각 : 15분) 동안이나 기절하셨어요.”
“그래?”
라혼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메이를 일별하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미간(眉間)에 손을 댔다. 그러나 메이의 주변에 뭉쳐 있는 마나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꾼 꿈인가?”
“예?”
“아니다. 초초, 가서 구 참위와 모원을 불러와라!”
“예, 주인님.”
라혼은 메이로 인해 자신이 처한 바를 깨달았다. 메이라는 여인의 몸에 신(神)인지 귀(鬼)인지 모를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라혼은 그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을 신성력으로 정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스스로 소멸했지만 또다시 생성되었다. 라혼은 그 존재가 소멸하는 순간, 그 여파에 혼백이 잠시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동안 생각했던 방식으론 신계와 마계를 멸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했다. 아니, 원천적으로 싸움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라혼은 아직 메이의 중심에 뭉쳐 있는 마나를 보고 문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은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화를 내는 법이다.
“너 정도를 당하지 못한다면 어찌 뜻을 이룰 수 있을까? 흡성대법(吸性大法) 흡인결(吸引訣)!”
―구우우우우우웅~!
라혼은 이공간(異空間) 에텔 스페이스로 주변 공간을 장악하고 뭉쳐 있는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이의 몸에 붙어(?) 있던 마나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저항을 했지만 곧 흡인결로 인해 라혼에게 빨려 들어갔다. 에텔 스페이스로 빨려 들어간 기(氣)는 미미한 발악을 하더니 곧 소멸되어버렸다.
“이건?”
라혼은 너무도 어이없게 해결(?)된 메이의 몸을 잡고 있던 ‘존재’의 소멸을 보며 신과 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방법을 잃은 순간, 새로운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에텔 스페이스였다. 에텔 스페이스는 신(神)을 봉인(封印)하는 공간이기도 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에텔 스페이스의 모든 힘은 오직 라혼의 의지로만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것은 마력(魔力)이나 신성력(神聖力)으로 유지되는 정신체(精神體)인 마족과 신들을 상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란 뜻이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혼은 자신의 가진 힘에 대한 희열에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크크크크, 이것이었어. 이것이 내 힘이었군. 에텔 스페이스는 진짜 에텔 스페이스였어.”
에테르(Ether)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정의되지 않은 기본적인 힘이자 물질이다. 우주가 혼돈 속에 있을 때 그 혼돈을 이루던 물질이자 에너지다. 정기(精氣) 에테르는 모든 물질과 힘과 현상을 이루는 바탕이었으니 에테르는 바로 혼돈(混沌)이고, 창조(創造)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마법 중에 이공간(異空間)은 [디프 포켓츠Deep pockets : 깊은 주머니]란 비교적 2서클의 초급 주문이 있었다. 라혼은 그런 주문을 기본으로 만들어낸 무한에 가까운 새로운 공간 차원이 바로 에텔 스페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이용해 마나의 운용 폭이 넓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 공간의 에테르를 다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실이었다. 알고 사용하는 것과 모르고 사용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 존재하는 거대한 두 ‘존재’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Yggdrasil)와 영룡(永龍) 이터너디 드래곤(Eternity dragon)이 어떻게 에텔 스페이스에서 머물 수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며 각 차원의 창조주(創造主)이므로 라혼의 의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에텔 스페이스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創造主)란 스스로 의지만을 가질 뿐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며 권능(權能)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것은 라혼이 스승 지슈인드에게 배운 용언 마법(龍言魔法)의 내용이었다. 용(龍)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의 주인은 다름 아닌 드래곤들이었다. 영룡이 영룡인 이유는 라혼이 그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고, 세계수가 세계나무인 것도 라혼이 그렇게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혼에게 사명을 준 창조주 브라마(Brahma)도 사람들이 정의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라혼이 가지고 있던 인식에서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사명이란 창조주가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깨달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신(神)의 소명(召命)과 다름없었다. 자연이란 정체(停滯)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그러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어떤 그것과 라혼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세계를 신(神)으로부터 홀로 서게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었다.
“창조는 창조일 뿐, 그것은 신인가? 신이 아닌가?”
라혼은 그렇게 초초가 모원과 구만혁을 데려올 때까지 장고와 장고를 거듭했다. ‘그’ 도(道)를 도(道)라 말하면, 이미 ‘그 도(道)’가 아닌 것이다. 선도(仙道)를 배울 때 처음 배우는 바로 그것이 라혼이 결론내린 ‘바로 그것’이었다.
“주군, 찾으셨습니까?”
라혼이 생각을 정리할 무렵 방으로 들어선 구만혁이 물어왔다. 라혼은 점혈된 두 명의 열지족를 지풍(指風)으로 해혈하고 그들을 포박할 것을 명했다.
“구만혁, 저들을 포박해라!”
“존명!”
라혼의 명에 따라 구만혁은 항상 지니고 다니는 포승줄로 두 명의 열지족 전사를 묶기 시작했다. 그때 때마침 깨어난 메이가 자신을 호위한 전사들을 묶는 모습을 보고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따지려 했다.
“이게 무슨 짓….”
“….”
그러나 고개를 돌린 라혼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라혼은 애처롭게 떠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본장의 볼모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책임지고 풀어주겠다. 모원, 네가 책임지고 볼모를 감시해라!”
“예.”
“….”
메이가 라혼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녀에게 머물던 존재가 라혼을 보고 품은 두려움에 반응한 것이었다. 메이가 신병을 앓은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무녀(巫女)의 재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메이가 신병을 앓게 한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메이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예언하는 능력을 도라족이 숭배했기 때문이었다. 신(神)이란 사람들이 만들고, 거기에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