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일 수요일 “왕상 18:1~19” <한판 대결을 신청하다 > 찬송370, 542
지금 이스라엘에는 3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으로 인해 사람들은 굼주림에 지쳐있습니다. 우리가 보드래도 사르밧 과부와 같은 사람들은 마지못해 살면서 죽기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3년 전, 엘리야는 이합 왕을 향하여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가뭄의 선포는 도전이요, 바알의 우상을 섬기는 아합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심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우상에 빠져 나라와 백성을 죄악의 길에 서게 한 아합 왕의 잘못 때문임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하며 바알을 섬기는 자신에게 가뭄을 선포하고 도전하는 엘리야가 건방지고 미웠습니다. 기근은 사마리아 북이스라엘의 수도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아합의 우상숭배는 결국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1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도 농부들은 애를 태웁니다.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생명이 부지하였으니 사는 것이지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상18: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지금 다급해진 아합 왕은 왕궁에서 편히 있을 상황이 못 됩니다. 오바댜와 함께 물을 찾으러 다녀야합니다.
그런데 왕이 물을 찾는 첫 번째 원인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물의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과 노새들을 살리기 위한 먹을 물과 꼴을 구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백성들은 아합 왕의 말을 믿고 바알이 농경의 신으로 비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알고 믿게 하였는데 이제 봉기가 일어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뿐 아니라 아합 왕도 한계에 도달하였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참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풀어 엘리야의 소재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해 다니고 멀리 이방 사르밧까지 도망을 온 엘리야가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서듯 이제 담대하게 아합을 만나러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폐를 아시고 백성들도 이제는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이제 더 이상 가뭄이 아닌 비를 내리시려하는 겁니다.
(왕상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가뭄이 시작 된지 3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내용은 비를 내리시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비가 오지 않음은 누구때문인가?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계시는 일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오지 않는 그 비를 다시 내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비를 주관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고 계심입니다.
오바댜는 왕궁의 재무를 담당하는 관리입니다. 지금의 재무부장관입니다. 아합 왕의 측근입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왕궁에서 아합 왕의 처 이세벨왕비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려는 기밀을 미리알고 백 명의 선지자를 몰래 동굴 두 곳에 50명씩 나누어 숨겨주고 물과 음식을 공급하여 준 사람입니다. 목숨을 건 이적행위를 한 것입니다.
아합과 오바댜는 함께 물을 찾아 나섰다가 이제는 서로 방향을 달리해 나누어서 물을 찾으려 한사람은 이 길로 한사람은 저 길로 향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아합은 우상의 길을 가지만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때 오바댜는 엘리야를 만나게 되는데 우연이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나게 하심으로 한눈에 엘리야선지자 임을 알아보고 그를 ‘주’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지금까지 잘 도망 다니던 엘리야 선지자가 갑자기 아합 왕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라는 겁니다. 이제 아합 왕과 단판을 지으려는 엘리야의 투지가 보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미 분명이 전했었고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비를 내리게 하실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바댜의 생각은 다른데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목숨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혹시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노라 전했는데 아합 왕을 데리고 왔다가 하나님이 엘리야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움직이게 하시면 거짓보고를 한 것으로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합 왕은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이웃 나라에 까지 지금의 인터폴을 통해 범죄인 인도 요청을 이미 한 상태입니다. 10절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아합이 사람을 보내어 방방곡곡에 수배령을 내려 뒤졌고 이웃나라들이 엘리야를 보호하면서 거짓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맹세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야의 행적을 찾지 못한 것은 분명 하나님이 그를 숨기셨기 때문임을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오바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엘리야가 사르밧과부에게 떡 한 덩이를 대접하라 할 때 의심했던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오바댜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려 할 때에 100명의 선지자들을 피신시키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나를 어려운 상황으로 이끌어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를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아합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오바댜의 보고를 통해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엘리야더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오바댜가 엘리야에게 주라고 호칭한 것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아합의 말에 엘리야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이렇게 응수합니다. 18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가뭄의 분명한 이유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시므리를 죽이고 왕이 되면서 바알의 우상을 따랐고 백성들에게도 바알을 섬기도록 하여 나라와 백성들과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악의 온상이 되도록 통치하였습니다.
아합 왕도 아버지의 우상을 똑같이 답습하였고 그의 아내 이세벨역시 시동에서 이스라엘에 시집을 오면서 혼수로 자기나라의 우상을 들여와 국가의 종교가 되게 하고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온통 우상의 나라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이세벨은 우상숭배뿐 아니라 바알의 선지자를 먹이고 섬겼으나 여호와의 선지자는 죽이고 탄압하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같이 탐욕과 표독한 여인이 이세벨입니다.
제가 태국을 다녀왔는데 이 나라가 온통 우상덩어리입니다. 불교의 나라답게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려 저공 비행을 할 때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산중에 세워진 커다란 부처상이었습니다. 공항에 입국하면서 밖으로 나오며 가장 먼저 누워있는 와상의 부처가 입국인 들을 반깁니다. 거리의 빌딩 앞에는 작은 산당이 있습니다. 가정집마다 우상단지를 만들어 놓고 향을 피우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분명한 것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 모두는 잘사는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작은 나라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너무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너무 풍요로움으로 인하여 축복을 너무 받으니 감사를 모르고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사랑하는 맘몬사상에 빠져있습니다. 못사는 나라는 우상숭배 때문에 잘 살게 되니까 이제 타락의 늪으로 빠지는 인간의 죄악들을 보게 합니다.
이제 우상에게 빠져있는 아합 왕에게 선포합니다. 갈멜 산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자고 엘리야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850명의 우상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한 사람, 850:1의 대결을 신청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승산 있는 대결이 될 수 있을 까요? 기드온의 300용사를 보게 하는 대결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몇 가지를 보게 합니다. 먼저 숨어 지내고 도망을 다니던 엘리야의 담대함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좆아 어디든 갑니다. 엘리야의 순종은 목숨을 담보하는 순종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사명을 그대로 실천하고 순종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가 말씀하시면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부르시고 바로에게 가라! 하실 때에 모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자신 없음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믿음으로 순종하고 돌파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순종해야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교훈합니다. 상황에 따라 유익을 따라 움직이는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순종입니다. 핑계가 없습니다. 다른 구실을 찾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인 오바댜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저들이 숨어 있을 곳과 먹고 살아가야 하는 음식과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섬김을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쫓겨야 하고 숨어 지내야 한다면 그 세상, 그 나라는 북한과 같이 자유하지 못고 억압을 받는 나라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평생이 쫓겨야 했고, 죽임을 당할 뻔 했고, 대적들뿐인 어려움의 상황들이었음을 보게 합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합니다. 악이 선을 지배하고 권력이 무력한 자를 압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의인이 잘되고 의인이 승리하면 그 나라는 좋은 나라입니다. 진 것이 진 게 아니고, 죽은 것이 죽은 것이 아닌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선 자들에게 있음을 분명 보게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풍요와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