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16)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사죄 받는 방법에 대하여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앞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유전에 따라 이 경우 심판을 받는다라는 좁은 의미의 형식주의에 대하여 주님께서 도덕적 율법이 갖는 내면적 의미까지 살피신 것을 보았습니다. 즉,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 비수를 꽂는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것(노(怒)하거나 라가라 하거나 또한 미련한 놈이라 하는 말) 조차도 심판과 정죄를 당할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도덕적 율법의 내면적 의미를 살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와 같은 말씀에 이어 형제와 화목케 하는 사죄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죄의 방법을 이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앞서 잘못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해석론을 타파하고 나아가 혹 형제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종교적인 형식주의가 우선이 아니라, 형제와의 관계 회복이 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하는 사죄의 방법임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라고 전제하신 후에, 이 경우 2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물은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실 “천천(千千)의 숫양이나 만만(萬萬)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미 6:7),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시 51:17). 종교적인 형식에 따른다면 외형상 예물을 들고 나아오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에서 볼 땐 거룩한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예물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종교적인 행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화목제를 위한 예물을 가져왔다고 봅시다. 그것도 매우 살찐 수송아지를 가져왔다고 봅시다. 이 경우 누군가는 비둘기도 한 마리 가져오질 못하고 있는데, 얼마나 멋지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상한 심령”을 더 원하시기에, 먼저 화해를 위한 용서를 빌고 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 구절들을 보고 명심할 것은, (1) 하나님께 사죄를 받으려면 먼저 형제 앞에서 해결해야 될 것은 해결하도록 힘쓸 것이고, (2) 그 문제 해결은 무엇보다 먼저 급히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 제물을 드리려 하다가도 형제에게 용서를 받을 일이 생각나면 즉시 그 일을 위하여 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3)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만 두면 인도주의(人道主義)의 사죄 곧,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사죄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와 용서는 형식이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 순서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한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