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과 방정환.hwp
조봉암(曺奉岩)의 명언과 생애
1. 명언
1)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한 말 : 무죄 아니면 죽음을 달라.
2) 명언 :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냐.(묘소 주변에 쓰인 글)
2. 생애(1899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
조봉암(曺奉岩, 1899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
방정환(方定煥)의 명언과 생애
1. 명언
1) 유언 :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오.'(간호사에게 남긴 말)
2) 명언 :
가.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 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나. 어린이의 얼굴을 보라.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그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 고요하고 평화롭다.(아이 마음은 신선과 같다(童心如仙))
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입니다. 어른들은 미래의 희망이요, 주인공이 될 우리 어린이 들을 사랑하고 존경합시다!
2. 생애 (1899.11.9.~1931.7.23.)
방정환은 서울 유복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한문을 배웠지만, 7세에 신식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이 몰락하자 그 역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에 가입한 부친 덕에 방정환은 토론 연설 모임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고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그의 적성에는 맞지 않아 자퇴하고, 17세의 나이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필사를 맡아 일하며 독학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방정환은 그를 눈 여겨 보던 독립운동가 권병덕의 소개로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고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했고,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석방된 방정환은 천도교 잡지인 개벽의 도교 특파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평소 관심이 많던 아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청강생으로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 등을 연구했습니다. 이후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에 뛰어듭니다.
방정환은 소년운동의 일환으로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아동을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아동을 위해 활발히 운동을 진행하던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기도 했으며, 1928년 세계 20여 개 나라에서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방정환은 아동문학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방정환은 개작과 번안은 물론 이거니와 앞서 말했던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통해 아동문학가의 발굴과 육성에 힘썼고, 어린이의 동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3. 기타 (어린이날 제정)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될 때는 1922년 5월 1일이었으나,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 월요일로 바뀌어 치르게 됐고, 1939년 어린이날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본 일제에 의해 중단된 뒤, 광복 후인 1946년 5월 5일로 정해졌으며,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