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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66) 2024. 5. 15
물을 떠 온 세 용사
사무엘하 23:13-17
지난 시간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큰 힘이 되어준 첫 ‘세 용사’의 이름과 그들의 용맹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용사는 ‘요셉밧세벳’입니다(8절). 그는 단번에 적군 800명을 단번에 죽였을 정도로 무예가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이 세 용사의 두목이었습니다.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9~10절). 그는 블레셋과 싸울 때에 얼마나 열심히 칼을 휘둘렀는지 나중에는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싸웠습니다(비유적 표현 - ‘손에 쥐가 날 정도로’).
세 번째 용사는 ‘삼마’입니다(11~12절). 블레셋이 다 익은 녹두밭을 약탈하려고 할 때, 삼마가 밭 한가운데 서서 그들이 그 밭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막아섰습니다. 홀로 그 밭을 지켜냈습니다.
이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입니다.
참된 주군을 알아보고 끝까지 충성한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명령한 사람들이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앞장서서 싸운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한 사람이라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모두 개인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그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들 배후에서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의 혼잣말>
이어서 다윗은 두 번째 세 용사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하23:13-15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하매.“
이 당시는 아직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이었습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유다와 이스라엘)이 되었으나 아직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 있었습니다(당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음, 훗날 다윗이 점령하여 수도로 삼음). 그 대신 아둘람 굴 근처에 산성을 짖고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다윗의 왕국이 강력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블레셋 군대가 끊임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그곳에 베들레헴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요새가 위치한 곳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먼저 생각되지만, 다윗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양 떼를 키우면서 뜨거운 햇볕에 목말랐던 때 마시던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의 향수가 있었습니다. 그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생수였습니다. 더구나 들판에서 양 떼들과 함께 온종일 뛰어놀다가 마시는 우물물의 맛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습니다(이 우물은 오늘날 ‘다윗의 우물’이라고 불리고 있음).
지금 다윗이 진 치고 있는 아둘람 굴 근처의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우물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친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15)
이 말은 너무 간절하여 무심코 뱉은 말입니다. 누군가 떠 오기를 바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물을 떠 온 세 용사>
그런데 이 혼잣말을 세 용사가 들었습니다.
16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이 세 용사가 그 말을 듣고 셋이 마음이 통합니다(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 – 18, 22절).
놀랍게도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 물을 떠 온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파했는지 기록이 되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생명을 걸고 다녀온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참 충성스러운 용사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세 용사는 이런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공통점)
첫째는, 다윗의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고 들었습니다.
다윗의 말은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명령한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는 것을 답답해하며 홀로 내뱉은 말입니다. 고향의 물을 마시고 싶은 작은 푸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용사는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왕상 19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낙심하여 호렙산의 한 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특히 이세벨)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굴 앞에 나와 서자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을 그 앞에 차례대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11, 12절)
왜 이 세 가지를 지나가게 하셨습니까? 이는 모두 하나님의 임재나 그 위엄하신 능력의 표현들로 간주되어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 임재하지 않으셨습니다. 뒤를 이어 세미한 소리가 엘리야에게 임하였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2절 하). 즉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 즉 아주 작은 소리로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무슨 특정한 현상으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임하시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하나님과의 교류를 강화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 생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종종 기도를 통해 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분의 뜻을 듣고자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하고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경 공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전달하는 주요한 매체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에 대해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공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반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그 행간에 숨겨진 세미한 음성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와 교제: 교회 예배와 성도들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하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예배와 교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상황과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마주하는 어려움과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더욱 분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전제 조건은 이 모든 프로그램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계시되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삶을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엡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둘째는, 자신들의 주군인 다윗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혼잣말을 들었어도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다윗의 공식적인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충성된 세 용사는 다윗의 소원을 알게 되자, 그 작은 소원이라도 이루어드려 그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역시 이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을 들어 보십시다.
고후5:8-9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의 소원이 생겨야 합니다(복음 성가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스리던 시절 그들은 소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사울 왕의 치하에서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 왕의 핍박을 받던 다윗이 ‘아둘람 동굴’로 피신하였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곳은 석회암과 사암 지대여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과 함께 사람이 인공으로 만든 동굴들도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워낙에 산지가 험하고 황량한 곳이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은신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삼상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환난 당한 자’는 사울의 학정으로 정치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빚진 모든 자”는 사울 왕국의 부당한 경제정책으로 압제를 당하여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는 사울 왕국의 비도덕적이고 하나님 중심이지 않은 통치로 인해서 심적, 영적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백 명에는 아이와 여자는 제외된 숫자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서 무엇을 보아서 달려왔을까요? 사울에게는 없고, 오직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통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의 시편 노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로 몰려든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은 도망자 입장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피신하려면 사람이 많으면 불리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보호받으려고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다윗이 득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그들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세심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골육지친처럼 대했습니다. 아마 이 세 명의 용사들도 그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지도력을 배우면서 함께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늘 빚진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 장수는 다윗을 위해 사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우리 모두 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를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늘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8:16)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에게 자신이 복음에 대한 빚진 자라는 의식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겠습니까? 로마 제국 내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겠습니까? 복음에 ‘빚진 자’라는 강렬한 자의식이 있었기에 돌에 맞을 것을 알고도, 감옥에 갇힐 것을 알고도, 심지어 순교할 것을 알고도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행20:23-24). 이러한 빚진 자 의식이 있었기에 바울로 인하여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결코 그가 지니고 있던 로마 시민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높은 학식과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복음에‘빚진 자’라는 강렬한 자의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고백이 먼저 터져 나와야 합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목숨 바쳐 충성할 우리의 왕이십니다(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셋째는, 동기가 선했습니다. 특별한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공적)를 통해 다윗으로부터 특별한 보상을 받기를 기대하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왕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는 이들의 마음도 이래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보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충성된 청지기들이 받을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5:21, 23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헌신해야 합니다.
<다윗의 반응>
그러면 세 장수가 목숨을 걸고 떠온 물을 받아 들은 다윗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6-17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은 감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물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면서 말합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17)
우리는 다윗의 이 모습에서 참 지도자의 모습을 봅니다.
부하의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희생시키는 것은 어떤 대의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물을 땅에 부어 주님께 바치는 순간, 그 장수들의 가슴에 감동이 찾아들었을 것입니다.
‘아, 우리를 이렇게도 아끼시는구나!’ 그들을 묶었던 연대의 끈이 더욱 튼실해졌을 것입니다.
<맺는 말씀>
오늘 우리는 세 용사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 용사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우리도 이 세 용사처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하나님은 보상을 주시지만, 우리의 충성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써 그 맡은 직분을 따라 충성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직분에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어렵습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 때에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주님의 오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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