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 알렌, 현대 한국의 여명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21년을 머문 셈이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2) 알렌은 한국에 오고 싶어서 왔던가
첫 상륙 中서 마음고생… 동료 권유로 한국행 한국을 스쳐간 알렌 이전의 선교사들 알렌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계속하도록 처음 길을 튼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다. 그런데 그 이전에 우리나라를 스쳐간 서양 선교사들은 꽤 많았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영국 웨일스의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있다. 1866년 초가을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했는데,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칼을 들어 쳤다고 북한에서 떠드는 그런 사람이다. 토마스 목사가 자라고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영국 웨일스 하노버 교회 담임을 한국인 유재연 목사가 맡았다는 국민일보의 최근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네덜란드인 귀츨라프도 있었다. 1832년 여름 제주도를 거쳐 흑산도 앞바다까지 왔다가 제주도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삼을 만하다고 장담하고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홍콩에 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홍콩은 그의 말대로 세계 무역의 중심 허브가 됐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윌리엄슨도 있다. 그는 청나라에서 로버트 토마스에게 성경책을 전해주며 한국으로 보낸 성서공회 소속 선교사였다. 그는 압록강을 건넌 적은 없지만 한국에 대해 견문을 넓히더니 이런 말을 그의 책에 남겼다.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중국인, 일본인보다 훨씬 지적이며 총기가 넘치고 인품이 드높다.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나 지하자원도 풍부해 세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다. 다만 없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기독교만 있으면 세계적 국가가 된다는 말이 아니었던가. 오늘날 우리는 실제 그렇게 되었다. 한국의 위상 : 그때와 지금 알렌은 본래 중국 파송 선교사였다. 1883년 늦가을 난징에 첫발을 디뎠다. 서양에서는 ‘동양’ 하면 그저 중국이요 인도요 일본이 전부였다. 그중 중국을 가장 중요시했다.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국에 가겠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인 호레이스 언더우드도 처음에는 인도로 가기 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이나 한국 기독교가 아시아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는 세계적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 아닌가. 미국의 대표적 경제전문 통신사인 블룸버그가 지난달 발표한 ‘세계 혁신국가 순위’에서 한국을 1위로 지목한 데에 까닭이 없었겠는가. 기구했던 알렌의 중국 의료선교 알렌은 중국에서 신고(辛苦)의 나날을 보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양귀(洋鬼)”라며 중국인들이 벽돌을 던져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현지 주민들과 정부 관리들이 하도 무섭게 구는 바람에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알렌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보는 이들 중에는 심지어 미국 학자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미시간대 역사학 교수 해링턴이다. 그는 ‘하나님, 돈, 일본인’이라는 냉소적인 제목의 책을 써서 알렌을 공격했다. 그의 책에는 알렌의 성격에 대해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칼뱅주의 신조에 대한 확신과 청교도적인 엄격한 사명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정력,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친 자신감, 성급한 기질과 독설,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준엄한 성격….’ 알렌이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질이 알렌을 살린 일화가 있다. 한번은 청나라 군인이 큰 상처를 입고 알렌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청나라 치안판사가 나서서 알렌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려 했다. 하지만 알렌은 오히려 역공으로 치고나왔다. “치료비 45달러를 먼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넘겼다. 그가 중국에서 당한 황당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루는 어떤 환자에게 약 처방을 해주면서 약병에 새겨진 눈금 한 칸씩 하루에 세 번 복용하라고 일러줬다. 하지만 환자는 한 눈금씩 먹어서 좋아진다면 한꺼번에 먹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며 단번에 마셔버렸다. 다행히 입원해 완쾌됐지만 큰일날 뻔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의사’ 알렌 경험이 일천한 26세 청년 의사로서는 이런 일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미국인 의사 친구들이 “한국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외국인이 꽤 있으니 의사로 개업하면 생업으로 전망이 밝다는 그런 권유였다. 친구들은 “수입 면에서도 유리하다”는 권고를 숨기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에는 조정에서 세관·외교·경제·산업·군사 등 여러 면에서 막강한 권세를 부리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알렌의 친구는 그에게 소개장을 써줄 터이니 한국에 가보라고 권했다. 알렌은 ‘의사’라는 직함을 지닌 채 미지의 나라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1909년 선교 25주년을 기념할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한국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축전을 보내며 솔직하게 고백한다. “의사로 한국에 가보라는 말이 마음에 꼭 들어 한국에 가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만일 상부의 허락이 나지 않았더라면 사직을 하고 어딘가 딴 데로 떠났을 것입니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3) 알렌이 입국하던 날
인천서 조랑말 타고 9시간 걸려 서울에… 서울은 미국인들을 그렇게 환영하고 있었다. 미국 북장로교선교부는 알렌을 의료선교사역자로 한국에 파송했다.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영세한 호텔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알렌은 타월로 감싼 베개를 베고 당구대 위에서 밤잠을 겨우 잤다. 아침 요기는 숯불로 구운 닭고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조랑말을 타고 떠나 오후 5시에 한강변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청계천 언저리의 오막살이집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알렌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인사하려고 미국공관을 찾아갔다. 신기하게도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고 손을 내밀며 놀라울 정도로 알렌을 반겨줬다. 당시 미국 군함 트렌톤 호가 민영익이 속한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장안에 자자했고, 서울에 머무는 해군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도처에 걸리는 등 장안이 축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알렌은 미국공사관에서 뜻밖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중국에서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일을 겪었던 알렌으로서는 천당에 온 것 같았다. 그의 인생은 새로운 여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미국공사 푸트는 나이가 많아 병약했고, 그의 부인 역시 심하게 병을 앓아 밤낮 누워 있었다. 뜻밖에 본국인 의사를 만나게 된 공사 부부는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듯 알렌을 반겼다. 고종도 알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종은 푸트에게 사람을 보내 혹시 그가 선교사가 아닌지 물었다고 한다. 푸트는 당연히 선교사가 아니고 ‘의사’라고 답했다. 이후 알렌은 미국공사관뿐만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 공사관, 심지어 일본공사관의 공의(公醫)라는 직함을 갖고 한국 활동을 시작한다. 알렌은 이제 살 것 같았다. 한국선교의 시작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1885년 4월로 보느냐, 알렌이 들어온 날짜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오래도록 결론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알렌이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선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함께 들어온 서양문명 알렌의 입국이 근대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물론 한·미와 한·일 관계의 중심에 항상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 한국의 국제적 거점이었다. 알렌이 입국할 때에 서울에는 외국인들이 꽤 많았다. 각 외국공관에 그 나라 군인들도 많이 상주하고 있었다. 뫼렌돌프라고 하는 독일인은 현재로 치면 외교통상부의 차관급으로 상당한 권세까지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미미하다. 알렌이 다시 중국에 가서 아내와 가구들을 챙겨서 오려고 떠나던 그해 10월 11일, 함께 연락선에 탄 서양 사람들이 있었다. 실업가 두 사람, 교수 한 사람, 그리고 창녀 한 사람이었다. 서양의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었다. 서양의 비즈니스, 서양의 교육문화, 서양의 퇴폐문화 그리고 기독교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탄 것이다. 그런데 비즈니스와 교육, 그리고 퇴폐문화는 한국을 떠나고 있었다. 반면 알렌은 한국에 자리를 굳게 잡고, 정착하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한국 근대화에서 만일 기독교가 이처럼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접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미묘한 관계 알렌이 처음 한국에서 살게 된 집은 원래 감리교 선교사 매크레이가 푸트 공사를 통해 고종에게 허락을 받고 산 집이었다. 당시 매크레이는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파 김옥균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그의 위치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고종은 매크레이에게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렌이 살게 됐을 당시 그 집은 흉가로 변해 있었다. 1882년 초여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친일 개화파들을 몰살하고 일본공사관을 습격해 일본인들을 축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목숨의 위험을 느낀 명성황후도 변장을 하고 멀리 충주까지 피난가야 했다. 임오군란 이후 그 집은 비어 있게 됐고, 결국 흉가가 돼버렸다. 푸트 공사는 머물 곳을 찾던 알렌에게 그 집을 넘겨줬고, 알렌은 본격적으로 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감리교로서는 속 편할 리 없는 처사였다. 푸트 공사는 한국이 아직 기독교 선교를 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공사관 가까운 곳에 알렌이 있어야 좋다고 판단해서 그 집을 넘긴 것이다. 하지만 감리교 입장에서는 소속 선교사 매크레이가 한국에 감리교 선교를 위해 힘들여 사놓았던 집을 장로교의 알렌이 쓰게 됐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4) 한국근대사 전면에 등장한 알렌
최고 권력자 민영익 살려 ‘명의’ 입소문 갑신정변 발생 알렌은 1884년 9월 서울에 도착해 외국 공사관들의 공의로 임명됐다. 집도 미국공사관 옆에 얻었고, 생활은 순탄했다. 하지만 그해 알렌은 인생을 바꿀 큰일을 겪으며 일약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다. 사건은 겨울밤에 일어났다. 친일 개화파들은 청나라 중심의 인물과 보수파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들은 근대식 우정국 건물이 박동(현재 종로구 견지동)에 세워지는 12월 4일 일대 정변을 일으켰다. 그 유명한 갑신정변이다. 당시 개화파들은 친일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개화기의 거물 윤치호 역시 청국과의 지긋지긋한 예속관계를 지탄하며 일본을 모델로 한 개화를 하자는 데 동조할 정도였다. 개화파는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성공한 모범 케이스라고 여겨 이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그날 저녁 독일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열린 축하연회에는 보수파의 거물 민영익 민병석 한규직과 일본인 몇 사람 그리고 푸트 미국공사 등 외국 공사들이 참석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개인 문제를 이유로 불참했다. 참 묘한 일이었다. 여기서 연회에 음모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화파는 자객들을 미리 숨어 있게 한 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근처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나오는 보수파들을 다 척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밤 10시쯤 우정국 북창 밖에서 돌연 “불이야”라는 소리가 났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황한 참석자들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들이 피신하는 혼란을 타서 자객들은 보수파의 거두 민영익을 집중 공격했다. 얼마 후 민영익은 온 몸에 심한 자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됐다. 민영익은 몸의 여러 곳에 동맥이 끊어졌고, 머리 등 일곱 군데를 칼로 깊이 찔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묄렌도르프와 푸트 공사는 죽어가는 민영익을 우선 안채로 급히 데리고 들어갔다. 아주 과감하고 용감한 결정이었다. 자칫하면 개화파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급히 알렌을 불렀다. 개화파는 난을 일으키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운궁으로 이거시키고 있었고, 윤치호가 달려갔더니 고종은 잔뜩 겁에 질려 미국 호위병들만 찾고 있었다. 알렌의 극적인 등장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것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당시 민영익은 조선에서 왕 다음의 권력자였다. 알렌은 새 집을 말끔히 단장하고 편안한 밤을 맞으려 준비하던 중 갑자기 호출을 받았다. 미국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새벽 한 시쯤 도착했을 때는 한의사 10여명이 이미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혈하기 위해 시커먼 송진을 상처 여기저기에 쑤셔넣고 있었다. 알렌이 들어서자 그들은 당장 적대감을 드러냈다. 생전 접해보지 못한 서양의 의사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하지만 민영익의 상태는 매우 위독했고, 알력다툼을 하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묄렌도르프는 집사를 시켜 한의사들을 완력으로 몰아냈다. 묄렌도르프는 알렌을 위해 한의사들을 내보냈지만 실상 알렌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는 속으로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잘 고치기를 바랐다. 만약 자신이 외과 수술을 했는데도 민영익이 죽는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로 절벽 위에 밀려 세워진 것 같았다. 만일 수술이 실패한다면 그가 대표하고 있는 기독교는 한국 땅에서 뿌리박기 힘들 것이고 미국의 국가 이미지도 실추될 것이다. 당장 그의 가족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알렌은 걱정이 앞섰다. 수술 집도 중에 민영익이 죽게 되면 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고민은 잠시뿐 알렌은 결단을 내렸다. 알렌의 증조부는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이었다. 그런 용기와 결단력이 알렌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전능자 하나님께 손 모아 기도하고는 수술가방을 열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수술이 성공하고 기독교와 미국이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복음이 전파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 수술을 시작했다. 칼로 찔린 상처 스물일곱 군데를 꿰맸다. 혈관 한 군데는 심을 박았다.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거즈와 붕대를 감았다. 장시간의 수술이었다. 온몸을 붕대로 감은 민영익은 마치 미라 같았다. 수술은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손을 뗀 알렌은 격해 흐느꼈다. 수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민영익을 완쾌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고, 그 감동이 벅찼기 때문이다. 알렌은 감사기도를 드렸다. 한국에서 몇 천년을 이어오던 한방의술 말고 전혀 새로운 서양의술이 시험대에 오른 그 결정적 순간에 알렌은 무사히 시험을 치렀고, 인정을 받았다. 민영익이 패혈증의 위험을 이기고 완쾌하기까지 만 3개월이 걸렸다. 그 어간 가끔 열이 막 올라 위험할 때도 있었다. 알고 보니 민영익의 지인들이 몸에 좋다는 생각에 알렌 몰래 가끔 인삼과 개고기탕을 먹였기 때문이었다. 알렌이 용하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져갔고 마침내 고종에게까지 들어갔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5) ‘만능 의사’였던 알렌
고장 난 시계 들고와 “수술해 달라” 갑자기 바빠진 알렌 알렌이 민영익을 고쳤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면서 알렌은 밤낮 없이 일에 쫓겼다. 우선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청국과 일본의 군인 수백명을 치료하느라 고된 나날을 보냈다. 청국 군인들은 상처 난 곳에 방금 죽은 개의 가죽을 감싸고 찜질하는 구식 치료법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자 알렌에게로 떼 지어 몰려왔다. 일반 국민들도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왔다. 구경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습관도 한몫하면서 이래저래 알렌 집 앞은 연일 문전성시였다. 너무 바빠 하루도 온전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는 총알이 박힌 안구를 절개해 도려내는 수술을 했다. 구경꾼들은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연히 알렌의 집에 들른 한 영국인 선장이 의치를 빼서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에 다들 아연실색했다. 구경꾼 사이에는 신체의 일부를 뗐다 붙였다 하는 서양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하게 일었다. 악의 없는 친근감 그리고 경외심마저 얹히기 시작했다. 만병통치 알렌의 의료 솜씨가 용하다고 소문이 나자 별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가령 눈 한쪽을 완전히 실명한 어떤 할머니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야단을 벌였고, 어떤 관리는 당시 비싸게 산 자명종 시계가 고장 났다며 수술로 고쳐달라고 애걸했다. 처음 한국을 찾은 알렌은 기록을 잘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후세에 남겨 두기 위해 이런 재미난 이야기들을 잘 기록해 뒀다. 이 기록들은 실제 근대사 연구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일기도 거의 매일 써서 남겼다. 근현대사 초기 한국의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피부로 체감할 수 있게 해준 생생한 기록이다. 알렌은 후에 그 소중한 자료들을 미국 뉴욕시립도서관에 다 기증했다. 그곳에 가면 언제든 그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알렌이 가지고 온 의료기기와 약품 알렌은 한국에 올 때 서양 식품들을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왔다. 한국 음식이 입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마련한 집에는 창고를 커다랗게 짓고,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서양 식품을 대량 사가지고 와서 창고에 비축해 놓았다. 얼마나 많이 가져다 놓았는지 후에 알렌은 스스로 보기에도 미국 시골의 식료품 상점 정도는 됐다고 회고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음식 문제로 아주 힘들어했다. 약품도 그랬다. 알렌은 될수록 많은 약품을 가지고 오려 했다. 그러나 구하기가 어려웠고 값도 비쌌다. 그는 상하이에서 키니네(금계랍-학질특효약)를 사서 커다란 약병에 잔득 담고, 또 요요드포름(포비돈)도 커다란 약병에 가득 담아 한국에 가지고 왔다.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간 의료도구들과 커다란 약 두병. 이것이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서양 의사가 가진 의료기구와 약품 전부였었다. 그러니 밀려드는 환자들을 고치는 데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양약들을 전혀 써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어디를 아파하든 ‘키니네’만 쓰면 환자들은 다 나았다. 심지어 치질도 나았다. 흙에도 치료력이 있다 마침내 가지고 온 약들이 다 떨어졌다. 하필 그때 청국 군인 한 사람이 도끼에 팔이 찍혀 뼈가 다 드러나는 외상을 입고 알렌을 찾아왔다. 알렌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날은 그냥 돌려보내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논두렁에 주저앉아 가슴을 조이며 기도했다. 이미 조선팔도에는 알렌이 못 고치는 병은 없다고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명성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는데 만약 병을 못 고친다면 또 무슨 변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 중 불현듯 눈앞 논두렁의 흙이 눈에 꽉 차 왔다. 이상했다. 무언가 계시를 보는 듯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그 흙덩어리를 한 삼태기 떠서 서둘러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절절 끓는 온돌방 아랫목에 놓아두었다. 아침이 되자 흙덩어리는 바짝 말라 있었다. 알렌은 흙덩어리를 고아서 밀가루처럼 만들어 약병에 가득 넣었다. 약병 겉에 ‘테라 피르마’라고 약명을 써 붙였다. 라틴어로 썼으니 주변에 누구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의사들은 이렇게 가끔 남이 알아보지 못할 말과 글씨를 쓴다. 하지만 그 라틴어의 뜻은 간단했다. 바로 ‘단단한 흙’이다. 그걸 그렇게 요란한 묘약처럼 써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 청국 군인이 예약 시간에 맞춰 왔다. 알렌은 그 흙가루를 묘약처럼 아주 귀하게 다루면서 상처에 뿌리고 바른 뒤 유지(기름종이)와 한지로 잘 동여 쌓았다. 그리고는 사흘 후에 오라고 했다. 사흘 후 그 청국 군인이 왔다. 그리고 알렌은 그 유지와 한지를 살살 풀었다. 그랬더니 고름이 쪽 빠지고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알렌은 속으로 감격해 울고 울었다. 나중에 미국 친구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렌은 거만하게 눈을 높이 뜨고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6) 한국과 일본, 그리고 알렌
청나라 군인들 ‘예수 박사’라 부르며 큰절 알렌, 한국에 자리를 잡다 알렌이 한국에 와서 처음 겪은 시련, 즉 갑신정변과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그가 한국에서 자리 잡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됐다. 민영익의 치료 현장에서 알렌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한의사들은 후에 알렌을 만나 반가워하며 그때의 수고를 칭찬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알렌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알렌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가 쓴 일기나 회고의 글에는 “한국인은 천성이 양반 같고, 인정이 자상하며 성실하다”는 표현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청국의 군인들도 알렌을 ‘예수박사’라 부르면서 알렌의 희생적 의료 봉사에 감사해 했다. 만나면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기까지 했다. 청국공사관의 공의로까지 초빙된 것을 보면 알렌의 인기가 국제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조정과 온 백성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받은 것이다. 선교사로서 이런 알렌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고로 선교를 하려는 사람이면 선교지에서 이 정도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와 개혁, 동양과 서양, 귀천·상하의 관통 당시 한국에는 기독교를 금기시 하는 문화가 만연했다. 한미수호조약에는 기독교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미국 푸트 공사는 혹 알렌이 고초를 겪을까 두려워 그가 선교사인 것을 고종에게 숨겼다. 하지만 고종은 처음부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종에게 서양문명과 근대화의 핵심과 생명력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절묘한 타이밍으로 당시 고종이 뫼렌돌프가 쓴 ‘조선략기’란 책을 읽게 된 상황 또한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뫼렌돌프는 책에서 고종에 대해 “청국황제의 유명무실한 종복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다. 당시 청국은 강력한 반기독교 실체였다. 또한 청국을 배경으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던 뫼렌돌프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했다. 고종이 뫼렌돌프와 청국에 반감이 생긴 상황에서 기독교가 고종의 인정을 받기위해서는 촉매제 역할을 할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됐다. 그것이 갑신정변이고, 느닷없는 알렌의 등장이다. 뫼렌돌프가 알렌을 급히 부른 것도 오묘한 우연이랄까. 기독교와 의료, 그리고 미국이라는 요소들의 톱니바퀴가 절묘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이후 알렌은 고종과 막역한 사이가 됐다. 명성황후와도 친해져 지체 높으신 어르신들 옥체에 손을 대 진찰도 하고 치료도 하게 된다. 세상에 이런 급변이 어디 있을까. 또 하루에도 백여명씩 몰려드는 백성들은 물론 청국 군인, 일본 군인도 치료해줬다. 실로 알렌을 통해 보수와 개화파, 일본과 청국, 궁정과 평민, 동서양, 기독교와 반기독교 등 대립해 있는 양편에 다리가 놓아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역동적 에너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기독교가 아니고는 찾아보기 힘든 에너지다. 일본의 마수 알렌이 들어왔을 당시 한국은 극동의 거대 국가들 틈에 움츠려 있던 나라였다. 강대국 러시아와 중국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알렌이 머무는 사이에 일본은 1894∼1895년 청일전쟁과 1904∼1905년 노일전쟁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국토가 넓고 역사가 오래된 청국과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광대한 백인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각각 단 1년 만에 패전시켰다. 이전에는 세계의 벽지로 여겨졌던 아시아가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 각광을 받던 격동의 시대였다. 더러는 일본의 등장을 두고 ‘아시아에서 서구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때 일본은 한국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배경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공격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일본 군인들이 변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개입은 분명했다. 당시 공격 암호도 일본어로 작성됐다. 일본은 갑신정변이 끝난 후 한국 조정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1885년 정월 초 한성조약을 맺어 11만원의 배상금을 받아낸다. 일본의 득세가 진행된다. 알렌 전(前) 시대와 알렌 후(後) 시대 이 격동기에 알렌이 등장했다. 그는 미국인으로 기독교인이며 개화파와 일본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보수파 민영익을 살리면서 보수파와 기맥이 통하고 조정 및 왕실과도 연결이 되고, 뜻밖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세계 역사에 거친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알렌이 한국에서 중량급 존재감을 보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묘미다. 알렌이 1884년 12월 4일 깊은 밤 서울에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한국 근대사를 알렌 등장 전 시대와 알렌 등장 후 시대로 나누지 않고는 우리 근대사의 굴곡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연례보고서에는 ‘그때 만일 알렌이 아니었다면…’이라는 기념비적 글귀가 적혀 있다. 그때 만일 알렌의 수술이 실패했다면 그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7) 알렌과 첫 기독교인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 4일,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민영익뿐 아니라 ‘노도사’로 불리던 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본래 이름은 노춘경이다. 따뜻한 밥그릇에 봄날의 화사한 경치가 담겼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처음 기독교인이 된 사람으로 이름의 의미가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한국에 따사로운 기독교의 봄날이 오는데 그것은 마치 이제 우리들에게 차려놓은 밥상과 같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알렌은 한국에 입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중국인 집사를 본국에 돌려보냈다. 대신 나이가 지긋한 점잖은 선비 노도사를 어학선생 겸 집사로 채용했다. 노도사는 일과 중 틈틈이 알렌 집 서가에 꽂혀 있는 두꺼운 한자 신약성서를 읽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그날 오후 알렌은 노도사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성경책을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노도사는 그 성경책을 마치 금덩어리인 것처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던 그때 뫼렌돌프 집에서 운명의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노도사가 성경을 읽다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속으로 서약한 시간은 알렌이 민영익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도했을 시간이었다. 한국근대사에 중요한 두 사건이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민족의 일대 사건과 함께 꼭 같은 시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한국 최초 기독교인은 장로교? 감리교?
한국 교회사 ( 한국 최초의 노춘경 세례 )
1884년 알렌(Allen) 의사가 한국에 들어왔고 그 이듬해부터는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면서, 그들은 주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한국민 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을 공식적으로 전하는 기회가 쉽게 이르지아니하여 그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1882년 한미조약이체결되어 미국인의 국내거주권이 인정되고 또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종래의 배외 범령은그대로 발효중이어서 기독교 선교는 계속 금지된 상태에 있었다.
선교사들은 지난달의 천주교 신부들이 하던것처럼 상복을 입는 변장으로 비밀히 전도하거나 또는 정부나 민중으로부터 반감을 사면서까지 전도를 강행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유로히 합법 적으로 전도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조심스럽게 제반사를 준비하고 있 었다.
그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언도우드 (Underwood) 목사는 한국어를좀 말할 수 있게되자 서서히 전도하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한국말을 좀알게되 자 나무밑이나 약수터 근처에 나가 책을 꺼내들고 읽었다. 그러면하나씩 둘 씩 사람들이 모여들어 질문을 하였다. 나는 이 책은 어떤 것이며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애썼다. 이러한 노방전도는차츰 확대되어 예배 처소 (Street Chapel)로 발전하였다. (H.G.Underwood,The Call of Korea PP.106-107)
언더우드 목사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는 마침내 한 열매를 맺게하였다. 그것은 한국 국내에서의 최초의 구도자인 노춘경이가 1886년 7월 11일 언더우 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다. 노춘경은 한문서적을 읽다가 기독교는 무부 무군의 교라 하여 비난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그것이 무엇이지 알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어났다.
알렌 의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노춘경 (노도사라고도 함) 은 알렌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눈길이 멎었다. 그것은 중국 만주에서 로쓰목사가 백홍준을 비롯한 의주의 청년들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이었다.
노춘경은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그책을 옷소매속에 감춰넣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는 밤새도록 단숨에 독파하였다. 다음날 그는 언덕우드목사를 방문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였다. 그의 눈초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는 마침내 기독교가 무천 난윤의 잡풍을 유발하는 나쁜종교가 아니고 유교보다 훨씬 우수한 진리가 있다고 발견하였다.
노춘경은 언더우드 목사가 주는 한문 복음서를 계속하여 받아 읽었으며 또 성당 수위 심령의 구원, 예수교 교리 등의 교리서를유심히 살폈다. (Mr Underwood's Letter from Seoul, October 1886sus).
그러하던 어느날 그는 언더우드목사는 심히 놀라면서도 한편 너무나 큰 기쁨을 금할길이 없었고, 이 나라의 국법이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는사실 을 알고있는가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신중히 고려해야한다고 당부하였 다. 노춘경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러한 상황은 다알고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예수를 잘 믿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노춘경은 신앙고백은 완전히 자의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언더우드 목사가 묻는 모든 질문에 분명한 말로 대답하여 세례문답 에 합격하였다.이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기독교인 박해의 사건이 아직도사람 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시기에 노춘경은 진리를 깨달아구원의
길로 용감하게 들어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노춘경은 [내가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된 유일한 길은 복음서를 읽은데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벅찬 감격을 누르지 못한채 한국에 들어온지 2년만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노도사에 대해서는 갖은 소문이 만발하다. 그가 읽은 성경책을 알렌이 준 것이 아니라 노도사가 훔쳐간 것이라던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페이지만 훔쳐갔다든가, 복음서 한 권만 가져갔다든가 하는 내용 등이다. 아마도 최초의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싶어 꾸며낸 이야기인 듯싶다. 다른 하나는 노도사가 장로교인인지 아니면 감리교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노도사는 1886년 7월 18일 장로교 선교사 헤론의 사저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사회로 진행된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당시 노도사는 감리교 스크랜튼 선교사의 어학선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때문에 알렌은 일기에 노도사가 감리교인으로 입교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노도사는 당당하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조정은 기독교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헤론의 개인 집에서 세례식을 거행한 이유가 그것이다. 행여 발각될까봐 세례식을 진행하면서 밖에 사람을 세워 망을 보게 했다. 때로는 감시를 피해 일명 ‘요단강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89년 4월 27일 당시 평안도 지방에는 세례를 받고 싶다는 사람이 33명이나 됐다. 언더우드가 가서 세례를 베푸는데 국법에 어긋나는지라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 단둥에서 세례식을 거행했고, 이를 요단강 세례라 불렀다. 선교가 우리 국법을 어긴 일은 없다. 노도사가 감리교인인지 장로교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일 것이다. 1885년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함께 인천에 도착했을 때 누가 먼저 내렸느냐에 대해서도 여러 말이 있다. 누가 먼저 상륙하느냐에 따라 처음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장로교인지 감리교인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교사들이 두 선교사의 이름에서 착안해 만들어낸 우스개가 있다. 아펜젤러가 계속 ‘앞에 서려’고 해서 먼저 상륙했다는 이야기와 언더우드가 ‘언더워터’, 즉 물에 뛰어들어 물속을 헤엄쳐 먼저 상륙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에게 노도사가 어느 교단 신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도사는 알렌의 집에서 일하다가 책장의 성경책을 보고 그 성경을 집에 가지고 가서 기독교인이 됐다. 그렇다면 알렌이 장로교 선교사이니만큼 노도사가 장로교인이라고 주장할 만하지만 알렌은 오히려 노도사가 감리교인으로 세례 받았다고 기록했다. 언더우드 역시 자신이 세례를 베풀었고 헤론도 자신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장로교인이라 주장할 법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신자는 당신들 교회에 먼저 갔소’라고 말하던 초대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선교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알렌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를 선교사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공사 푸트 역시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 정책에 충실하고자 선교 문제에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더구나 친일적인 개화파가 기독교 수용을 주장한 사실은 당시 정세에는 그렇게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국 군인들이 알렌을 만나면 ‘예수박사’라고 부르며 반겼다는 말은 알렌이 기독교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독교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8)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 설립 준비
민영익, 의형제 제안해 ‘왕족’될 뻔 한국 근대화의 시작과 알렌의 위상 진단학회에서 편찬 간행한 한국사 총서에서 이선근 박사는 “우정국 문턱에서 저격당한 민영익의 생명을 구해주게 된 것은 한·미 양국의 우호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만든 이상한 인연이 되었다”며 “이때부터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사라면 왕실부터 호의를 갖고 특별히 돌봐주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때부터 미국에서 전래된 기독교는 단시일에 장족의 발전을 보이게 됐고, 나아가 그들의 부대사업으로 시작한 교육, 의료, 학술의 모든 시설은 진실로 이 나라의 근대문화를 소개하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겨레가 자유와 민주를 알고 평등과 사랑을 알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으니 한국 근대화에 미국적인 요소가 뿌리 깊게 박힌 것은 결코 심상한 인연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이 책에는 한국 근대화의 시작이나 그 진행이 기독교 없이 불가능하였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명시하고 있다. 알렌, 어느 위치까지 올라갔나 24세의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조카로 당시 한국의 실권자였다는 것이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다. 그런 사람의 생명을 살려냈으니 알렌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26세의 젊은 의사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모든 영광이 그에게 밀려온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형제의 의를 맺자고 제안한다. 알렌은 왕족이 될 뻔했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가의 백자도 선물한다. 알렌은 백자의 가치를 알고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 백자의 가치가 이때부터 세계를 매료시켰다. 알렌이 공식적으로 고종 임금의 어의, 곧 고종의 개인의사로 발탁된 것은 1885년 5월이다.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지고 한 달 후의 일이다. 알렌은 궁정에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알렌이 명성황후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 거처 안방까지 드나든다는 소문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보통 국민은 물론이고, 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렇게 해서 알렌은 고종 임금이나 명성황후 그리고 왕세자와도 마주앉는 일이 아주 잦았다. 그의 영향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알렌이 외국 사람들이나 특히 선교사들에게서조차 경원시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가파른 신분상승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부상한 영광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알렌 알렌은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위상이 올라간 기회를 통해 알게 된 모든 내외국 고위급 인사들의 성격이나 역할 및 공적들을 다 수집해 체계화했다. 후에 선교에 유용한 자료들로 작성한 것이다. 이런 성격과 꼼꼼함은 알렌이 선교 초기 최적의 인재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한동안 화제가 됐던 선교사들이 후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후에도 알렌이 우리 곁에 기념비적 존재로 남아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길이 남는다. 알렌과 함께 동역한 포크 총애를 받던 알렌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없었다. 그때 등장한 동료가 바로 미국 대리공사 포크였다. 푸트는 1885년 초에 사임하고 없었다. 포크는 당시 고종 임금의 신임을 이미 받고 있었다. 고종의 비밀 사명을 받아 일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잠시 일본에 근무하면서 일본어를 마스터했고, 더불어 중국어와 한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문장력도 탁월했다. 그래서 한미수호조약 이후 미국에 파견된 한국사절단을 미국에서 영접하는 역할을 맡았을 정도였다. 알렌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포크를 백만명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알렌에게 당시 이런 인재와 함께 동역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역사는 신화가 아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각각 그들의 특성과 사명을 가지고 사는 현장이다. 큰일을 이루는 데는 이런 사람들의 복합적인 화합이 필요한 것이다. 가시적인 기독교 기관의 의미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맺을 때 한국이 조약문 속에 꼭 넣기를 고집한 문구가 있었다. 바로 ‘불립교당’, 즉 교회당을 세우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한국 조정이 당시 대단한 신학적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세워져 기독교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알렌은 기독교의 보이는 실체를 세워야겠다고 확신했다. 믿음과 사랑의 실체, 그것을 가시적으로 역사 안에 세워놓고 당당하게 그 실상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알렌은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결단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라고도 한다. 역사 안에 예수님도 보이게 오셨다. 기독교는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근대 초기에 서울에는 서양식 건물로 YMCA와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명동성당, 이런 거대건물들이 남북으로 하늘 높이 뻗어 솟아 있었다. 다들 거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 그 상징이 개신교의 세브란스병원과 YMCA, 그리고 구교의 명동 성당이었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9) 광혜원의 설립 과정
실세 민영익 후원… 신청 한 달 만에 허가 알렌은 병원 설립 인가요청을 혼자 하지 않았다 민영익 치료로 알렌은 위상이 높아지면서 당시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병원을 설립하는 데는 반대가 많았다. 알렌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병원을 세우는 데 혼자 이름으로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고종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미국 대리공사 포크와 함께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알렌이 미국인임에도 미 공사관을 통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게 주제넘어 보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알렌의 사리 판단은 정확했다. 알렌은 또 병원을 세우는 데 한국 조정이 자주독립의 명분을 세울 수 있도록 힘썼다. 병원 이름을 기독교나 미국 선교사의 병원이 아니고 ‘한국정부의 병원’이라고 명명하겠다고 했다. 당시 병원 설립을 방해하는 복병이 있었다. 바로 야심찬 세력가 뫼렌돌프였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병원 설립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렌은 뫼렌돌프에게 간곡하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병원 설립이 결국 뫼렌돌프가 오래 품어온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존대가 넘친 글이었다. 알렌의 절묘한 경륜을 볼 수 있다. 알렌이 1885년 1월27일 민영익을 통해 조정에 제출한 병원 설치 건의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선 민영익 치료 이후 그야말로 떼를 이뤄 밀려든 불쌍한 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다 돌보기는 현재 머무는 작은 집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알렌 자신은 한국인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끝까지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한국 청년들에게 탁월한 서양 의료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것, 병원 운영을 할 때 책임자인 알렌 자신은 나라의 봉록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것, 다만 병원의 운영비나 약재는 나라가 예산을 지급하고, 조정은 공기가 잘 통하고 깨끗한 커다란 집 한 채를 장만해 주는 것, 그러면 미국에서 곧 유능한 의사들을 더 초청하겠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미국과 기독교가 대세가 된다면 병원을 짓는 데 반대한 것은 독일공사관 부르터였다. 병원이 선교기관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정이 종교에 관계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실이었다. 실제로 병원 설립을 진행하던 1885년 봄 미국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선교사 여럿이 입국해 그 세력이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한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나라 특히 일본이나 중국, 독일, 러시아 등이 있음에도 세력 균형이 미국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통적인 의료기관 혜민서나 활인서의 관리들이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서양식 병원 설립에 반대가 있었다. 광혜원의 설립 그 시기 고종이 먼저 알렌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권유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권세가인 민영익의 후원은 끝이 없었다. 마침내 조정은 1885년 2월 29일자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부)을 통해 병원 설립을 허가한다. 신청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조정은 병원 건물로 재동에 위치한 홍영식의 옛 고대광실 집을 마련해 주었다, 홍영식은 우정국의 총판으로 개화파의 거두인데 갑신정변 때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참혹하게 육살당했다. 그의 집은 온 집구석이 핏자국으로 흥건했다. 그렇게 흉가로 남아 있던 집을 조정이 몰수했다가 거기에 알렌이 병원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흉가가 기독교 덕분에 희망과 사랑의 집으로 바뀐다. 고종실록에 보면 그 병원의 설립일자는 1885년 4월 14일이고, 그때 조정이 지어준 이름은 ‘광혜원’이다. 넓게 혜택을 준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 우리는 4월 14일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한국에 기독교 기관이 조정과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세워진 날이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의 입국이 같은 해 4월 5일이었으니 그해 4월은 한국 기독교에 참으로 역사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광혜원 첫해의 업적 홍영식의 집은 비록 흉가가 되었어도 고관대작의 집이었기에 규모가 방대했다. 병원으로 개조해 쓰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병원은 외래진료실 환자실 수술실 약국조제실 일반병실 외과병실 여자병실 특등실을 갖추었다. 병상 수는 430상이었다. 여기서 ‘병원’이라 하지 않고 ‘광혜원’이라 한 데 주목해야 한다. ‘병’자를 안 쓴 것이다. 생각을 깊이 한 것이 보인다. 광혜원의 첫 공식 영어 명칭은 ‘로열 하스피털(Royal Hospital)’ 곧 왕립병원이었다. 그러나 설치 허가공문에는 확실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 박사의 주관’이란 글귀가 있다. 고종 임금은 광혜원 개원 후 12일이 지난 4월 26일 광혜원을 ‘제중원’이라 개칭했다. 여러 민중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제중원에서 첫해에 치료한 환자는 외과수술 환자 150명, 외래 치료 394명 등 총 1만460명이다. 알렌 혼자서 다 한 것이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0) 제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나
여성 위해 ‘기녀’ 데려다 간호사로 처음 선교사들은 다 제중원에서 일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5년 4월부터다. 그들이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바로 제중원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렌은 교파의 차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들을 모두 제중원에서 일하게 했다. 제중원이 세워진 후 의료교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이 다 가르치는 일에 동원됐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알렌은 선교사들을 병원에서 일하게 하면서도 꼭 조정에 미리 알려 허가를 얻는 법적 절차를 밟았다. 초기 선교사로서 알렌이 얼마나 조심성이 있고 또 준법정신이 투철했는지 머리가 숙여질 정도다. 알렌 덕에 선교사들이 비로소 한국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었다. 선교에도 거쳐야 할 이 세상의 법도와 규범이 있다는 그런 자세가 바탕이 됐기에 기독교가 한국에서 그렇게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알렌, 한국 전래의 치병방법과 한방 인정 알렌의 일생을 살펴보면 초기선교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갑신정변 직후 수십 명의 한의사가 먼저 달려가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을 때, 알렌은 정말 그들의 치료가 효험이 있기를 바랐다. 그 방법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약이나 뜸, 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후원을 다했다. 효험이 크다고도 말한 일이 있다. 심지어 알렌은 무당의 굿을 보면서도 그것을 미신이라고 무조건 타박하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 해도 처음부터 무조건 비판하지 않았다. 일단은 존중했다. 알렌의 강직한 인품과 성격을 알 수 있다. 알렌이 의료수가를 받은 이유 제중원과 관련해 한 가지 꼭 말해야 할 것은 알렌은 환자들에게 대개 정확한 유료진료를 원칙으로 했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약품이나 시설비로 당시 매년 약 3200달러의 경비를 받았다. 지원을 받았음에도 요금을 받은 것은 수익 목적이 절대 아니고, 다만 밀려드는 환자 수를 제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구경하기를 좋아해서 거짓으로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찾아드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정작 위급한 환자들을 돌보기 어려워서 그랬다는 것이다. 예산 때문에 알렌이 힘들어한 점도 있다. 병원시설의 관리·운영비와 인건비는 조정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견된 관리들이 처음엔 8명이었으나 나중에는 그 수가 배 이상 불어 조정의 지원금을 금세 다 써버리게 됐다. 중요한 것은 그 늘어난 관리들은 당초 파견하기로 약속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관료사회의 부패상을 여기서도 적나라하게 불 수 있다. 또 알렌이 놀란 것은 한국인들은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고 수술을 하고, 치료비를 낼 때에 그 의료행위에 대한 수가가 아니라, 의사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생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었는지 짐작이 간다. 여자 환자들과 기생 간호사 근대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 의사의 진찰이나 수술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을 찾아왔더라도 멀찌감치 앉아 통역을 통해 소리소리 지르면서 진찰을 받았으니 환자와 의사, 피차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알렌의 일기에는 어떤 나이 든 여성이 남자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다며 우겨 결국 집에서 앓다가 그대로 숨진 이야기를 통분한 마음으로 써 놓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평안도와 황해도 감영에 통지해 제중원에서 일할 13세에서 16세 사이의 총명한 기녀를 선발해서 보내라고 공문을 보냈다. 결국 기녀 다섯 명이 차출돼 제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일한 기간은 보름밖에 안 된다. 여론이 나빠서 곧 해직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녀들을 왜 하필 서북지방에서 차출했을까. 남남북녀란 말이 사실이던가. 기왕이면 예쁜 여자 간호사를 차출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나이도 13∼16세라면 너무 어리다. 조정의 고충도 심했을 것이다. 아무나 데려다가 쓸 수도 없고, 그래도 사회적으로 활동을 한 여성을 차출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 최초의 공적 기관에서 일한 여성에 대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 기녀라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한국 최초의 대학 세브란스의 최초 한국인 교수도 백정 출신이었다. 누구든지 어떤 신분이든지 사회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우리 기독교다. 제중원 여자부의 설치 남자 의사를 불편해하는 것은 궁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명성황후 역시 알렌 말고 여자 어의가 자신을 진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결국 북장로선교부는 애니 앨러스라는 유능한 여의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1886년 7월 입국해 곧 제중원의 여의사로 활동을 시작하고 명성황후의 어의가 된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1) 제중원에서 1년 동안 한 일 일반환자 대부분 ‘가난病’에 신음 최초 1년 동안의 의료활동 보고서 처음 서울 재동 홍영식의 집터에 자리 잡았던 제중원은 1886년 가을에 구리개(현 서울 을지로2가 인근)로 이전한다. 재동의 제중원 건물은 6·25전쟁까지 존재했다. 제중원이 1년 동안 의료활동을 펼친 내용은 모두 첫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이런 보고서나 자료를 체계적으로 편집 및 보관했다는 것만으로도 제중원의 공헌은 막중하다. 미국 필라델피아 역사관이나 프린스턴대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개인 편지, 메모조차도 완벽하게 보관돼 있다. 자료 수집과 작성 및 그 보관에서 선교사들은 눈부신 공헌을 남긴 셈이다. 그 자료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생활과 선교, 그리고 한국 사회 상황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숨 쉬고 있다. 제중원, 한국의 전통 의료활동을 폄하하지 않아 제중원의 보고서를 보면 제중원은 옛날부터 있어온 한국의 전통의원 곧 혜민서나 전래의 진료방법을 절대로 폄하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대해 가졌던 아주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는 대상이 되는 사회의 재래문화나 생활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처음 광혜원을 개원하던 날에도 요란한 의식이나 행사를 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반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의 전래 치료법 물론 한국 전래의 치료방법 중에는 알렌이 때때로 ‘넌더리나서 말도 못할’ 것이라고 했던 것들도 몇 있었다. 소독하지도, 닦지도 않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침술은 매우 위험했다. 한번은 환자의 목에 침을 잘못 놓아 골수까지 뚫는 바람에 즉사하게 한 일도 알렌은 직접 목도했다. 공수병(광견병)을 치료한다며 호랑이 두개골 가루를 타 먹고, 상처 난 곳에 마늘을 갈아서 바르고 천을 감고 있기도 했다. 종기에는 암소의 배설물을 짓이겨 상처에 발랐고, 기관지염에 송충을 짓이긴 것을,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쓰는 일도 목격됐다. 가끔 어린아이들 가슴에 뜸을 뜨기도 했다. 염병에 걸리면 역신의 침입이라 해서 환자를 메 동네 밖에 내버리고, 거기서 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렌이 이런 전통방법들을 폄하한 일은 없다. 오히려 희랍의 히포크라테스가 한국의 옛 의원들과 대담을 했다면 편했을 것이라고 점잖게 머리를 끄덕인 적은 있었다. 치료는 상하 계급 관통 알렌의 의료활동 대상이 위로 고종 임금이나 고관들부터, 아래로 걸인이나 나환자들에까지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 찡하다. 이는 한국 사회 혁신의 첫 상징이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참 모습이 이런 데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났다면 알렌의 공헌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교회가 처음으로 나병원을 대구에 설립했다. 당시 일왕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나병치료에 끼친 공로를 큰 상패로 치하한 일이 있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앓은 병 제중원 보고서에는 당시 한국인에게 어떤 질병이 많이 있었는지 나와 있다. 한국인의 위생상태가 엉망이었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가령 우물은 큰 돌로 쌓아 내렸지만 바로 옆이 시궁창이었다. 걸레를 빨고 요강의 배설물을 버리면 그 오물이 다 우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쥐들이 밤새 천장에서 뜀박질하며 다니는 상황이었으니 질병이 만연했고 종류도 많았다. 당시 가장 많이 앓던 질병은 학질이었다. 진료한 사람들의 10%가량이 이 병에 시달린 것으로 돼 있다. 다음이 위장계의 질병이다. 가난한 백성들은 배고픔에 뭐든지 먹으려 했고, 기회가 닿으면 폭식했기 때문이다. 매독과 성병도 가공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폐쇄된 사회인데도 성병이 만연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결핵 환자도 많아 제중원에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결핵 환자 탓에 결핵부를 따로 두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 밖에 구순구개열, 그리고 탈장이라 해서 변 볼 때에 내장이 항문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병, 머리 부스럼과 각종 피부병, 기생충, 안질, 백내장 그리고 나병 등이 흔했다고 한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오는 질환들이었다. 천연두는 ‘마마’ 정말 치사율이 높은 질병은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아주 흔해서 어린이들 대부분이 걸렸고, 그 병을 앓지 않은 어린이들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 병을 앓고 나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 사망률의 절반가량이 천연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치사율이 높았다. 성인 대부분이 천연두 자국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누구나 한번은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데 당시 천연두는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상감처럼 모셔졌다. 당시 백성들은 마마를 ‘마마님’처럼 여겨 무당의 굿을 통해서 잘 모시고 대접해야 병이 떠난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제중원에도 잘 찾아오지 않았다. 실제 보고서에는 알렌이 1년 동안 천연두 환자를 단 2명만 진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2) 미국과 고종, 그리고 알렌
종2품 ‘가선대부’ 벼슬 받은 알렌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때 미국이 오늘과 같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은 1840년에서 1890년, 그 반세기 만의 일이다. 50년 사이에 미국의 공장 생산고는 무려 7배 늘었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그런 비약적 발전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이시다”라는 함성이 전국에 가득했다. 당시 그들은 찬송가를 많이 작곡하고, 불렀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미국계 찬송가는 다 이 어간에 지어진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 전 국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며 대각성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선교운동을 전개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온 것도 그 때의 일이다. 한국 최초 국립학교 교사들 고종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 같은 미션학교들이 들어서자 국립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종은 1886년 여름 육영공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미국 대통령에게 3명의 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미국 대통령은 당시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다니던 유능한 학생 셋을 선발해 보냈다. 헐버트, 번커, 길모아 이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로 한국에 남아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미국 대통령은 왜 하필 신학교 출신들을 보냈을까. 미국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 그 첫날에 기독교를 그 교육의 근간으로 하려던 생각이 놀랍고 고맙다. 하지만 2∼3년이 지나 육영공원이 폐쇄됐다. 이들 세 사람은 한국에 남아서 선교사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이 한국 근대교육 초기의 교사로 선발된 배후에는 알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헐버트는 후에 해아(헤이그)밀사와 동행해 초행인 한국대표들을 위해 온갖 큰 역할을 다 한다. 한국은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 1909년 미국 국무성의 문서에는 한국이 ‘세계기독교의 기수국가’라고 하는 글귀가 있다. 여기서 기수라는 표현은 한국이 세계 기독교의 대표이자 상징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엄청난 평가는 알렌이 계속 미국 국무성에 보낸 서신을 근거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알렌은 1908년 “지금 한국에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입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고종과 알렌의 우정 고종은 알렌과 인간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알렌은 당시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술 외에도 대부분의 국내외 문제에 대해 고종과 논의하고, 마치 자문위원 같은 역할을 한다. 알렌은 이런 말까지 남겼다. “마침내 나는 이 지구상에서 왕족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라는 말에 주목하자. 미국선교본부도 이 특별한 총애를 줄줄이 기록으로 남기기 바빴다. 다들 혀를 차는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선교사 입국 1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독교와 근대과학과 미국, 이 세 가지의 승리였다. 얼마 후 청국에서 오래 유폐생활을 하던 대원군조차도 귀국해서 곧 알렌을 찾아와 악수까지 하였다고 한다. 궁궐 안에서의 알렌 고종은 알렌에게 궁궐 안에 사무실을 하나 내주었다. 그리고 1886년 여름에는 벼슬도 내린다. 처음에는 정3품 당상급의 ‘통정대부’라는 벼슬이었다. 반년 후에는 종2품의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그만큼 알렌이 고종에게 환심을 샀고, 고종은 알렌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종과 민비가 얼마나 외로웠기에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사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겨간 이유도 근처 미국공관 옆에 있고 싶어서였다. 만일 알렌이 미국의 명문 대학 출신 그리고 명문가 출신이 아니고, 또 그렇게 유능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면 두렵다. 한국근대사는 전혀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니 알렌 그 한 사람이 우리 근대사에 끼친 공적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궁궐에서 알렌을 그렇게 대접한 이유 왕족들도 알렌을 수시로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밤낮으로 알렌을 불러댔다. 신기한 치료방식도 보고 알렌과 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궁중에 밤새도록 남아서 정사를 보고 새벽녘에야 퇴청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러니 알렌이 왕족에게 불려가는 시간은 대개 밤중, 그들이 일하는 시간이었고, 알렌에게는 잘 시간이었다. 알렌이 궁궐에 가면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시종들이 “담배를 피우라” “샴페인을 마셔라” “사탕과 과자를 먹어라” “커피를 마시라” 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알렌이 사양을 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알렌은 시종들이 그렇게 권하는 이유를 알았다. 당시 관리들에게 그런 서양의 식품은 신기한 것이었고, 이를 대접하는 것이 예우를 갖추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시종이 가져온 담배나 사탕, 과자 등을 그 자리에서 다 피우거나 먹지 않고 관복의 커다란 소매 자락에 집어넣고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3) 초기선교사들의 인간적인 고초
동료 헤론과 잦은 ‘충돌’ 마음고생 초기선교사들의 어려움 1880년대 중반에 한국에 찾아온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고충이 심했다. 그 당시 한국은 유난히 가난했다. 집이라고는 한옥 초가집이 대부분이고, 음식도 소금국에 잡곡밥을 먹기가 일쑤였다. 여름엔 모기 빈대 벼룩, 겨울에는 이, 더위와 추위는 참기가 힘들 정도였다. 추위와 더위를 겪고 나면 다들 탈진할 정도였다. 위생 상태도 심각했다. 우물물은 도랑에 버린 물이 다 스며드는 오물이었다. 실제 호주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물을 먹고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사흘 만에 죽은 일도 있었다. 알렌 말로는 그 낯선 환경이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더구나 낯선 이방나라에 살면서 긴장한 탓에 늘 가슴이 조였고, 여가거리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선교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 수밖에 없는 형편에 성격차이가 그대로 나타났다. 여자 선교사들은 그 수가 아주 적어서 인간관계를 맺기가 힘들었다. 벽지에서 혼자 살던 선교사도 있었다. 더러는 자살도 했고, 정신이상으로 본국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초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어느날 평양에 가면서 말 여덟 마리에 일상 생활필수품들을 가득 싣고 간 일이 있다. 프라이팬, 장화, 우산, 주전자, 이동식 침대, 변기, 과자, 스푼, 포크 등을 싣고 갔는데. 사람들에게 서양문명의 전시효과도 노렸겠지만 그만큼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초기선교사들은 본국에 있을 때에는 버터에 고기를 먹고,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기며 냉난방 잘된 집에서 살던 중산층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가난하고 낯선 한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을 이겨내고, 한국을 세계기독교의 기수 국가로 만들었다. 알렌과 헤론의 불화 알렌은 유난히 키가 컸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은 꼭 알렌이 계단 2∼3칸 정도 내려와 포즈를 취한 것이 보인다. 외국공사들과 찍은 사진을 봐도 그가 유독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렌은 유난히 말 수가 적고 늘 점잖았다. 하지만 그런 알렌도 화를 참지 못하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만든 일이 있다. 초기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알렌이나 스크랜턴 및 헤론은 이미 의학박사들이었고, 미국에서 교수 경력이 있는 이들도 많았다. 그중 헤론은 유난히 똑똑했고 자존심이 셌다. 그가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에 문제가 생겼다. 알렌은 헤론이 좋은 사람이지만 예의가 없다고 본부에 편지를 낸다. 이런 기록은 오래도록 남는다. 한번은 궁중에 함께 초대를 받았는데 헤론은 고종임금과 민비가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늦게 나타났다. 화가난 알렌은 헤론이 투기심이 많아,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고 격분하였고, 반대로 헤론의 부인은 알렌 면전에서 “당신은 한국에 돈 벌려 왔고, 따라서 딴 일을 하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스크랜턴은 알렌이 보기 싫다고 나가서 다른 진료소를 개설한다. 초기 선교사들 사이에도 갈등은 있었다. 알렌은 마침내 선교분부에 이렇게 투기심이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고, 부산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거기 가서 일하면서 선사들의 갈등 관계를 연구하겠다고 했다. 알렌은 1908년 ‘조선견문기’라는 책을 쓴다. 거기에 초기선교사들의 인간적인 문제들과 실상을 솔직하게 쓰고 있다. 변명이 아닌 진실을 쓰고 있다. 선교사들도 인간이었다 알렌은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잘 알고 있다. 알렌은 그 부흥운동을 통해 선교사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땅을 치며 회개하게 하였으며 그로인해 본국에 돌아간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알렌은 의미있는 말을 남긴다. 선교사들은 대개 생각하듯이 초인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정도의 높은 이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기대도 하고 있기에 부담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놓고도 많이 다퉜다. 알렌은 신앙인의 모습에 대해 실로 놀라운 식견을 제시한다. 신앙인이 세상 사람과 특별히 다르다고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요 시민이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에게는 남과 구분지어 군림하고 자신감 지나쳐 독단적이지 말라는 간곡한 호소를 했다. 알렌의 고백 알렌은 가까웠던 한 선교사에게 이런 글을 남긴다. “곧 우리는 다들 잘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선한 일을 찾아서 헤맸고 충실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빛나는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파쟁과 갈등에 때로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늘처럼 쳐다보던 이들의 가슴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고 속에서 살아간 초기 선교사들의 애환과 고민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4) 알렌, 한국 외교관으로
한국공사관 서기 발탁… 선교부와 이별 --------------------------
1872년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 목사가 미국의 조그만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열흘 동안 400명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무디 부흥’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선교의 열정을 갖고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로 흩어졌다. 그 중에 아시아는 최대의 선교 대상지였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은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교지였다1). ‘무디 부흥’과는 별도로 1873년 조선 선교에 뜻을 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로스(John Ross)와 그의 매제인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는 청국과 조선 간의 국경이자 합법적인 교역 관문인 만주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에서 조선 상인들을 만나 한문 성경을 팔며 전도에 나섰다. 조선 상인들은 성경엔 관심이 없고 이들이 입은 영국산 면제품인 ‘양복’에만 관심을 보여 이들을 실망시켰지만, 나중에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남자 상인 한 명이 찾아와 신약성경을 받아갔다. 이 상인은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된 백홍준(白鴻俊, 1848~1893) 장로의 아버지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자 로스는 다시 만주를 방문하여 의주 상인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을 만나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 번역에 손을 댔다. 이 4명은 1879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최초의 한국 교회를 출발시켰으며, 1881년엔 최초의 한글성경 [예수성교누가복음젼셔]를 간행했다. 이들은 한글로 번역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들고 1884년 고향인 황해도 장연 소래(松川, 솔내)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에 나섰다. 훗날 백낙준은 소래를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 불렀다2). 한편 무디가 촉발시킨 선교 붐을 타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 S. MacLay)는 주일 미국공사 빙햄(John A. Bingham)과 주조선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8일까지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때 김옥균을 통해 한국에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고종 황제에게 허락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884년 인천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들어선 선교사 알렌.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이유로 그는 미국 공사관 공의 자격으로 입국했다. 고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명 안연(安連), 1858~1932)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 22일 서울에 들어섰다. 이미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알렌은 한국 선교사로 파송될 때에 주한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했다. 알렌은 천주교가 조선 사회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걸 반면교사로 삼아 포교에 신중을 기했다. 장석만은 개신교가 천주교와 구별되는 포교 전략으로 사용한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말한다. “첫째, 천주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데 비해 개신교는 절대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천주교가 마리아 숭배 등 우상숭배를 하는 데 비해 개신교는 오직 유일신만을 믿는다는 것, 셋째, 천주교가 프랑스의 종교인 데 비해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라는 것이다. 첫째와 셋째 방식은 서로 연관되어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가 조선에서 호의적으로 수용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개인의 종교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가 ‘우리의 당연함’으로 자리잡는 데 기반이 되었다3).” 알렌 이후 들어오는 선교사들도 무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들은 타교파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으나 신학적 자유주의나 성경 비판은 단호히 배격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들은 성경 비판이나 자유주의는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한다. 미국이나 영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대부분 보수파든 자유파든 평화롭게 공존하며 공동으로 일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장로교회에 더욱 짙음을 본다4).”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 시 수구파의 실력자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칼을 맞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이때 민영익의 치료를 맡은 사람이 바로 의료 선교사 알렌이었다. 알렌은 여기서 실패하는 날에는 한국의 선교가 영원히 끝장날 수도 있다는 압박을 받고 기도하면서 민영익을 수술했다5). 민경배는 ‘이 극적인 장면’을 ‘과학과 기독교, 그리고 미국의 이상이 한국에 그 피와 골수 속에서 새 활력을 환기시키는 역사의 동력으로 환영받기 시작한 때의 모습’으로 보면서, 한국 근대사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묵시록적 의미’를 부여하였다6). 그 의미는 근대사를 넘어서 먼 훗날에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이 때가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알렌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민영익은 점차 회복하여, 그 다음 해인 1885년 3월 완전히 건강을 찾게 되었다. 알렌은 정부로부터 1000량의 사례금까지 받았다. 또 그는 시의(侍醫, 궁중에서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 자격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기회를 이용, 고종 황제에게 병원 설립을 요청해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원이 바로 1885년 4월 10일에 문을 연 광혜원(廣惠院)이다. 광혜원은 그해 4월 26일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제중원(濟衆院,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오늘날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뿌리가 되었다7). 제중원. 1885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알렌에 이어 1885년 4월 5월,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일본 상선 비쓰비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에 상륙했다. 당시 서울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미국 대리공사 포크(George C. Foulk, 1856~1893)는 이들이 서울로 들어가는 걸 만류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아펜젤러 부인이 만삭인지라 당분간 제물포에 머물다 4월 13일 일본 나가사키로 잠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혼자였기에 이틀을 지낸 후 포크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입성했으며,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알렌의 사역장인 광혜원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곧 알렌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알렌은 조선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여 의사는 진료 활동, 교사는 교육 활동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초기 선교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언더우드는 가능한 한 비밀리에라도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8). 조선의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교사들이 속속 서울로 입국했다. 1885년 5월 3일 미 감리교회의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이 입국했으며, 6월 26일에는 아펜젤러 부부가 재입국하고 스크랜턴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Mary S. Scranton, 1832~1909)이 입국하였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언더우드와 같이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던 미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John W. Heron, 1856~1890)도 이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9). 선교사 아펜젤러. 그가 마련한 정동예배처는 한국 감리교의 태동지가 되었다. 1885년 이른 여름에 주일예배가 시작되었고, 10월에는 알렌의 집에서 처음으로 개신교 성찬의식이 거행되었다.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의 조선인 집을 사들여 내실 한 방을 지성소로 꾸며 첫 예배처로 삼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정동예배처’로 나중에 한국 감리교와 정동제일교회의 태동지가 되었다. 또 이곳에서 한국선교회가 창시됐으며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1885년 10월 11일, 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예배가 드려졌는데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창립일로 지키고 있다10). 세례 의식은 1886년 4월 25일 부활절에 이루어졌다. 하나는 알렌의 딸 앨리스로서, 몇 개월 만에 알렌이 받은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아이였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며칠 뒤에 태어난 스크랜턴 박사의 아이, 세 번째는 아펜젤러가 일본에서 개종시킨 사람으로서 그 당시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관의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의식은 한미조약에 의해 예배를 볼 권리가 주어진 외국인들만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이었고,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은밀하게 전개되었다. 1886년 7월 18일에는 조선인 최초로 알렌의 어학 선생인 노춘경이 언더우드의 집례하에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11). 1887년 9월 24일 언더우드는 서울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황해도 장연 서해안에 위치한 소래 마을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교회가 설립된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 출신들이 정동교회 설립 시 주축이 되었다. 1888년 3월 아펜젤러는 정동교회에서 한용경과 과부 박씨의 결혼식을 주례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신식 결혼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예배당 결혼’으로도 불렸다. 목사가 신랑 신부 앞에서 결혼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읽고 결혼 증빙 서류에 결혼 당사자, 친권자, 주례, 증인의 도장을 찍는 등의 절차를 거쳤다12).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ㆍ출간한 [신약마가복음서언해](1884년)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그러나 이수정의 번역에 오역이 많고 문체와 맞춤법도 바르지 못해, 이들은 1887년 [신약전서 마가복음서 언해]를 간행하였다. 또 이때에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성서위원회와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번역ㆍ출판 활동에 돌입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성서공회의 출발이다. 신약 번역은 1900년, 구약 번역은 1910년에 완료되는데, 전택부는 “한글 성경은 한국 국어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3). 선교와 함께 찬송가가 전파되었기에 1885년이 한국 양악(洋樂)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양악(洋樂)의 시작에 대해선 1885년설 이외에 여러 설이 있다. 두 번째 설은 1900년 12월 19일 군악대(양악대)가 창설되고, 1901년 2월 독일의 지휘자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도착과 함께 양악이 본격 등장했다는 것이다. 세번째 설은 1860년대 가톨릭의 전래와 함께 종교 음악도 들어왔으리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네 번째 설은 370년 전 서양음악 이론이 수입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섯 번째 설은 1810년을 기점으로 본다14). 조선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20대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었기에, 이들 사이의 치열한 갈등과 싸움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각자의 선교관도 달랐고, 조선 정치권과 연계되는 바람에 그쪽의 정파 싸움이 그대로 선교사들 내부에 옮겨온 점도 있었다15). 그런 복합적 요인이 겹쳐 이들은 서로 없는 곳에서 지독한 욕들을 퍼부어대곤 했다. 알렌 부부는 헤론 부인을 ‘교활하고 엉큼한 거짓말쟁이’, 언더우드는 ‘위선자요, 수다쟁이’라고 욕했고, 반면 헤론 부인은 알렌을 ‘선교사로서 부적합한 인물’로 보았다. 실제로 알렌의 잘못을 알리는 지독한 편지가 수없이 태평양을 건너 선교 본부에 우송되었다16). 게다가 선교사들은 모두 청교도적인 인물들이었다. 때마침 선교사들이 미국을 떠나기 직전 미국에서는 ‘청교도 정신의 회복’이라는 입장에서 흡연을 쾌락에의 탐닉으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금연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지독한 골초로 보고 금연을 강조했다. 아니 금연을 아예 교리화했다17). 미국 북장로교 외지 선교회 총무로 있던 브라운은 188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이렇게 평했다. “나라를 개방한 이후 처음 25년간의 전형적 선교사는 퓨리턴(Purttan)형이었다. 이 퓨리턴형 선교사는 안식을 지키되 우리 뉴잉글랜드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하던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18).” 그러니 그들 자신들도 낯선 환경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놀이 자체를 죄악시했으니, 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서로의 사생활을 들춰내며 비난하는 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취미로 삼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1860년 외국인 묘지로 조성되었다. 호러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를 비롯해 한국에 부임하여 공헌한 서양 선교사들 500여 명이 잠든 곳이다. <출처: (cc) Matthew smith 254 at en.wikipedia.org> 일부 선교사는 조선에 대해 사랑과 경멸의 모순된 감정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1887년 9월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 바 있고, 1890년 7월 이질에 걸려 사망한 미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이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헤론은 “한국의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신념을 갖고 임했”지만,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서 워싱턴 신문에 “한국의 왕은 3백의 후궁을 거느리고 있는 색마요, 그 나라의 멸망은 지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9). 조선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랬던 걸까? 사실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대해 그런 이중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그들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오늘날의 사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렌과 관련된, ‘상상할 수도 없는 묵시록적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조선이 개신교와 미국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었을까? 그 무엇이건 훗날 조선, 아니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면에서 미국을 닮은 나라가 된다. 미국과 한국은 개신교의 세계 선교 규모에서 늘 1, 2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강한 근로 의욕과 노동 강도, 그리고 경쟁과 성공의 미덕을 예찬하고 숭배함에 있어서 한국은 유럽보다는 미국에 훨씬 더 가까운 나라가 된다
...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 주석이었고, 둘째 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새문안 과 언더우드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2번지에 규모, 연건평 500평인 새문안 교회는 1885년 4월 5일 입국한 우리나라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가 정동 (貞洞)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으며, 현대 교육과 의료기관을 세우기 위하여 1886년 5월에는 교회내에 경신학교(儆新學敎)의 전신인 고아학교,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가 이며 민족지도자인 송순명, 안창호, 김규식 등을 배출하였다.
1887년 9월 27일 14명의 신자가 모여 2명의 장로를 선임,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최초의 조직교회가 되었으며, 명칭은 광화문 서편의 돈의문(敦義門), 새문안<新門內>에 있다고 하여 새문안교회라고 하였다. 1888년 말 신자수는 5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891~1893년에는 목사 마펫(S.A.Moffett)이 당회장으로 있었다.
1895년 지금의 피어선 빌딩 자리에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세웠다. 1904년 10월 손순명(孫順命)이 장로로 장립(將立)되면서 한국교회 최초의 당회(堂會)가 구성되었으며, 1910년 5월 29일에는 현 위치에 예배당을 신축, 이전하였다. 이때 최초의 한국인 목사 서경조(徐景祚)가 협동목사로 있었다. 1916년 10월 12일 언더우드의 사망으로 목사 쿤스(E.W.Koons)가 뒤를 이어 5년간 당회장으로 시무하였으며, 이 기간에는 서울 인근지역에 대한 전도사업을 추진하였다. 1920년 12월 차재명(車載明)이 3대 목사로 부임함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당회장 목사가 되었다. 6·25전쟁중에는 1944년 부임한 5대 당회장인 목사 김영주(金英珠)가 납북되었으며, 1953년 9월 6일 부산에서 환도하였다. 6·25전쟁 후 강태국(康泰國)에 이었으며 1955년 강신명(姜信明)이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제1회 새문안 보육생이 졸업하였다. 1957년 새문안교회 보이스카우트 발대식을 가졌으며 1960년 처음으로《새문안지》를 발간하였다. 1966년 7월 7일 멕시코 선교사로 목사 우상범을 파견하였으며, 1967년 9월 27일 언더우드기념관을 준공, 현재까지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7년 대학생회가 창립되어 농촌근로 봉사활동과 도시 야학운동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972년 새문안교회 청년성가대를 처음 발족하고, 1972년 11월 26일 현 위치에 연건평 500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73년 4월 20일《새문안교회85년사》를 발간하였고, 1981년 김동익(金東益)이 목사로 부임하였다. 1987년 9월 교회창립100주년을 맞아 《새문안교회 문헌사료집》발간 《사진으로 본 새문안 100년》·《새문안 교회 1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8년 3월 13일 교회음악교육원이 언더우드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원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서울노회 소속이며, 부설기관으로는 수양관·어린이집·교회 음악교육원·동작이수사회복지관이 있다. 국내선교·,해외선교,·북한선교,·의료선교, 등의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며,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간행물로는 《새문안지》가 있고, 127년 역사속에 새문안교회는 현재 종로구신문로 1가 42번지, 광화문 사거리에 미래에 희망의 빛을 비추며 년 건평 9,000평에 사회복지관, 교육관, 예배당, 역사관, 일부 상가해서 3년후 준공을 하기위해 현대식 신축건물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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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木鷄之德) 원문보기 글쓴이: 諸行無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