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지만,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역시 개봉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전문가로부터는 ‘대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은 블록버스터쯤으로 예측됐었다. 총 제작비 5억 달러를 무사히 건질 수 있을 것인가?
사실은 그의 전작 <타이타닉>도 개봉 전 딱 그 모양새였다. 1997년 <타이타닉>이 개봉될 때만 해도 당시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였던 20세기 폭스는 다가올 후폭풍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대규모 스튜디오인 폭스이긴 하지만 흥행 성적에 따라 자칫 문을 닫을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1980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만든 <천국의 문>이란 영화 한 편의 실패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와 파라마운트 등 스튜디오들이 잇달아 매각된 경험을 갖고 있다. <천국의 문>과 같은 흉측한 재난의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1986년 캐머런이 만든 해저SF영화 <어비스>에 대한 기억도, 이 감독이 뛰어난 재능만큼 사람들, 특히 영화 자본가들을 공포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사건이었다. <어비스>는 비록 걸작이었지만, 일명 저주받은 걸작이었다.
흥행 면에서는 대대적인 실패를 맛봤던 캐머런 감독은 이 일로 할리우드 유명 프로듀서이자 당시 부인이기도 했던 게일 앤 허드와 파경을 맞았다.
<타이타닉>도 그처럼 거대하게 침몰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총 3억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타이타닉>은 전 세계적으로 19억 달러, 약 2조원의 돈을 벌어들였다. <타이타닉>으로 다음해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세상의 왕이다.” 그건 극중 주인공 잭(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대사였지만 그날 시상식장에서 캐머런 감독이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임스 캐머런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3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도 러닝타임이지만 특수 입체 안경을 쓰고 봐야 하는 3D관 상영에 따라 입장료가 1.5~2배(국내에서는 평일 1만2000원, 아이맥스관은 1만6000원)나 된다는 점 등 흥행 조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 제작비는 지금껏 그 어느 블록버스터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아바타>로 이미 15억 달러 벌어
영화 <타이타닉> 이후 12년 만에 대작을 내놓은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 |
그러나 어쨌든 결과는 <타이타닉> 때처럼 180도 정반대로 나왔다.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던 평론가 및 전문가들의 뺨을 후려치듯 <아바타>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흥행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이미 15억 달러 가까이를 벌어들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당연히 <타이타닉> 성적은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서도 외화로서는 처음으로 꿈의 1000만 관객 고지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일부 3D관 혹은 아이맥스관은 1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찼으며 얼리어답터임을 자처하는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 3D영화를 가장 관람하기 좋다는 몇몇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인터넷 예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다.
여러 요소가 있지만 이 같은 <아바타>의 초특급 메가히트는 일단 세일 타깃을 정확하게 잡았다는 데에 있다. <아바타>에 열광하는 세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 30대 초중반에 이르는, 이른바 ‘G세대형(型)’ 인간들이다. G세대란 단순히 패션이나 유흥, 찰나적 대중문화에 앞서 있기보다 환경과 생태, 반전(反戰), 반핵(反核) 문제 등 국제정치적 어젠다에 밝은, 뚜렷한 미래지향적 가치관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들은 컴퓨터 이용에 능하다.
20대 새로운 젊은이들을 일컫는 용어지만 사람들에 따라 30대에서 40대까지 포괄할 수 있다. 캐머런은 영리하게도 <아바타>의 내용을 G세대형 관객에 부합시킴으로써 기존의 영화관람 주도 연령층, 그러니까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머물렀던 관객층을 30~40대까지 대폭 늘리는 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볼거리’ 플러스 ‘생각할 거리’를 주되 생각할 거리는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깊이를 다르게 느끼게끔 영화의 수위 조절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뜻이다. 이건 웬만큼 용의주도한 연출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제임스 캐머런은 바로 그 교차점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어쨌든 이렇게 관람 주도층이 두꺼워진 만큼 <아바타>의 흥행 가속성, 폭발성은 초반부터 몇 배, 몇십 배로 늘어난 셈이며 그 같은 전략은 현재 시장에서 적중돼 나타나고 있다.
할리우드 역사의 새 이정표
<아바타> 열혈 지지층들은 일단 10대와 20대 청년층에서 나온다. 이들은 이 3D영화의 기술력에 대한 칭찬에 침이 마를 줄 모른다. 실제로 <아바타>는 지금껏 나온 모든 특수효과 영화의 종합선물세트 판이다. 단순히 양적으로만 이것저것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아바타>는 할리우드 특수효과 영화가 이제는 양질 전환의 법칙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아바타 신도’들의 표현대로라면 특수효과 영화를 넘어 영화미학 자체의 신기원을 펼쳐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할리우드 테크놀로지 영화의 역사 혹은 할리우드 영화역사는 이제 <아바타>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설명될 것이다.
<아바타>는 단순히 볼거리를 선사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에 따른 시각적 쾌감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영화 속 가상의 판도라 행성을 묘사한 CG(컴퓨터 그래픽)의 세계는 ‘영화가 이제 실사여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야 하느냐’의 구분을 무색하게 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특수효과의 놀라운 기술 때문에 과연 어느 것이 리얼인지, 곧 영화가 리얼인지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있는 내가 리얼인지, 혼돈과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게다가 영화는 영화 속 장면들을 눈앞까지 끌어다 주는 3D 입체 영화다. 더욱 더 그런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파란 피부에 긴 꼬리, 날카로운 귀를 가진 3m 장신(長身)의 아바타들도 이제는 진화할 데까지 진화한, 더 이상은 갈 데가 없는, 최고의 모션 캡쳐 기술로 사람의 몸짓과 표정 그대로를 묘사해 낸다. 아니, 사람 그 자체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도에 불과했다면 <아바타>는 그저 ‘최고로 잘 빠진’ 특수효과 영화 가운데 하나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바타>가 이른바 컨템퍼러리(동시대적인)한 영화로서 장년층 관객까지 몰리게 하며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세우게 된 데는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 이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建國史 연상시키는 스토리
가상 세계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
<아바타> 줄거리의 핵심은 지구의 에너지원이 고갈됐다는 데서 시작된다. 지구인들은 판도라 행성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인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을 채굴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 나비족들을 없애려 한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번(샘 워딩튼)은 자신의 DNA로 만든 인조 생명체인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지구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판도라 행성에 잠입,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나비족 여성인 네이티리(조이 살다나)와 사랑에 빠지면서 점점 더 그들의 세계에 동화돼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바타>의 내용은 미국 관객들에게는 일종의 아메리카 건국사(建國史)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에서처럼 ‘지구=미국’은 ‘나비족=인디언 원주민’ 학살이라는 피의 역사를 통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나비족에 대한 지구인들의 대규모 공습 장면은 1960년대 후반의 통킹만 사건 등 베트남전을 연상케 한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문명화, 현대화, 민주주의화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지금의 수많은 전쟁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신(新)식민주의를 건설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쟁과 약탈·학살 대신 영화는 주인공 제이크를 통해 나비족과의 공존과 같은, 자연주의로의 회귀만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바로 그 같은 메시지야말로 이 영화 <아바타>를 성인관객들로 하여금 고담준론의 정치철학이 농축된 영화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는 셈이다.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앞세워진 작품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는 일부 관객들조차 <아바타>를 무조건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논쟁적이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바타>는 파면 팔수록 여러 가지의 철학적 질문을 파생케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그건 꼭 <매트릭스> 이후 나왔던 수많은 철학적 해석을 생각나게 한다.
<아바타> 역시 이전의 많은 SF영화처럼 ‘지각(知覺)’과 ‘실재(實在)’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곧 회의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각하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고도화된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의 감각과정에서 우리를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영화다. 현실세계는 컴퓨터가 구축한 가상의 세계이며 인간은 큰 통 속에서 잠자고 있는 커다란 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는 네오로 거듭나는 토머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얘기한다. 만약 그가 빨간 약을 고르면 매트릭스 밖, 곧 진실된 세상을 알게 될 것이고 파란 약을 고르게 되면 그때까지의 모든 일을 잊고 매트릭스로 돌아가 다시 거짓과 허상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莊子에서 데카르트까지 쏟아지는 철학 논쟁
모피어스는 ‘앤더슨=네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무도 현실같이 느껴지는 꿈을 꿔 본 적이 있나?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찌하겠나?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지?”
모피어스의 질문, 곧 데카르트적 회의론은 동양적 사고와 상당히 근접해 있는데, 예컨대 장자(莊子)의 유명한 일화 ‘호접지몽’(胡蝶之夢)과 흡사하다. 장자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큰 혼란에 빠진다. 제자들이 꿈에 대해 묻자 자신이 나비가 되는 것이었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가 당혹해 하는 건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꿈=가상’과 현실의 세계는 그 존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철학적으로는 지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바타>는 그러나 이 같은 데카르트적 회의론의 철학을 정면에서 비웃으며 지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차이를 보인다. 컴퓨터 가상세계는 이 세상의 수많은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처럼 ‘존재의 확실성’이 부여됐다는 것이다. 일상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날씨가 어떤지, 축구경기 결과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곧 진실이며 경험을 통해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들이다.
<아바타>가 흥미로운 것, 그리고 제임스 캐머런의 상상력이 남다른 것은 지금껏 우리가 경험치에 의해 가상으로 간주했던 아바타의 세계를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만들어 놓았다는 데 있다. 캐머런에게 있어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선택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에 따라 골라 먹으면 될 뿐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상상하는 ‘없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아바타는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존재다. 따라서 지각되는 것이 꼭 실재하는 것이냐는 회의론은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며 캐머런은 데카르트를 공격한다. 지각된다면 실재한다는 것이다. <아바타>를 사이에 두고 만만치 않은 난이도의 철학적 논쟁과 토론이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바타>는 일개 SF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얘기도 그 때문에 나온다. 상업영화가 대중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넘어 지식인 사회의 논쟁까지 불을 붙이면 종종 그 흥행력은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의 수준이 된다. <아바타>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서 파생된 작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원령공주>. |
일각에서는 <아바타>의 철학이 이른바 ‘루저(loser)들=소수자들=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어서 좋다고 얘기한다. 곧 계급적으로 올바른 영화라는 것이다. 이 같은 얘기는 주인공 제이크 설리번이 사실은 하반신 불구의 장애를 겪고 있는 데서 나온다. 제이크는 미래사회 권력의 중추인 군대 조직에서도 변방으로 밀려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세계로 넘어가면서 그는 3m가 넘는, 두 다리가 너무나 튼튼해서, 그 누구보다도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는 아바타로 거듭난다. 게다가 그는 나비족의 공주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곧바로 권력의 중앙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쯤 되면 <아바타>를 둘러싸고 갖가지 ‘해몽’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층적인 해석이야말로 컨템퍼러리한 영화의 특징이며 장기 흥행, 빅 히트작들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아바타>가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바타>가 영화 미학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아직은 다소 섣부른 감이 있다. <아바타>의 흥행은 분명 수많은 ‘아바타’, 곧 아류작들을 양산케 할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내는 ‘인공미학’이 영화문화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아바타> 자체가 그렇다. 여러 미학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수많은 아날로그 영화의 스토리를 여기저기서 가져와 조합한 흔적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지목된다. <아바타>의 줄거리는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에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원령공주> 등에서 나온 파생상품에 불과하다. 스토리의 원천에 있어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아바타>의 역설은, 오히려 그 이전에 나왔던 하야오 등 수많은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새삼 확인케 해 준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영화는 결국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바타>가 새로운 영화세계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독창적이진 않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아바타>는 영화미학의 미래인가. 그 답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