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설국 태백산에 오르다(2)
오후 5시 45분, 예정된 시간에 태백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해마다 이맘때쯤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곳이지만 역 앞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제까지 내렸다는 눈이 길가에 수북이 쌓이고 따뜻해진 날씨에 길이 질퍽질퍽해서 더욱 그렇다.
우리 일행은 회장이 예약한 동화모텔을 찾아갔다. 작년에도 머문 여관이어서 마음 편히 들어갔으나, 여관 안주인의 엉뚱한 소리에 잠시 모두들 기분이 약간 상했으나 좋은 마음으로 머물기로 한다. 몇 해 전 이 근처 어느 모텔에 머물렀을 때 상냥하고 교양 있던 안주인의 태도와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을 보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장을 풀어 놓고 택시로 황지천 건너에 있는 <태백산 한우촌>이라는 대형 고깃집으로 갔다. 이미 차려 놓은 상 위에는 온갖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회장이 서빙하러 들어온 아가씨에게 팁을 주며 수고하라고 한다.
주문한 생고기를 석쇠에 구워 입 안에 넣으니 살살 녹는 맛은 횡성한우가 울고 갈 만하다. 더구나 여기에 만상이 집에서 가져온 조니워커의 알싸한 향기가 입안을 휘저으면서 기분이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듯하다.
저녁을 다하고 택시를 불러 모텔로 향했다. 들어오자마자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TV를 켜고 오늘의 핫게임인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를 본다. 11시 30분 드디어 이상화가 스피드스케이트 5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메달이다. 나는 금메달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일의 등산을 위해 잠을 청했다.
12일, 새벽 5시에 기상하기로 했는데 모두들 4시부터 일어나 부스럭거린다. 노인들이 잠이 올 리가 없다. 모텔 바로 앞에 있는 해장국 아주머니가 끓여 주는 북엇국을 맛있게 먹고는 택시를 불러 타고 유일사 입구에 닿았다. 이 때가 7시 10분, 각자가 가져온 아이젠, 스페치, 장갑, 지팡이 등 등산 장비들을 완벽하게 챙겼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향산이 몸의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며 모텔에 그냥 남기로 한 것이다. 이따가 목욕탕에서 만나자고 하고 그냥 온 것이 못내 마음에 남는다.
7시 30분, 드디어 그리도 고대하던 태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현재의 기온은 영하 14도, 날씨는 쾌청하다. 매표원의 말로는 정상의 기온이 영하 19도가 될 것이란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앞에 갑자기 펼쳐진 순백의 설경!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며 천천히 걷는다. 어제까지 내린 눈의 양이 120cm라는데 선행객들이 밟아 만들어 놓은 산길은 탄탄대로가 되어 걷는 데에 조금도 거치는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눈꽃 잔치를 완상하기 위해서 유일사길을 마다하고 큰길을 택하기로 했다. 천제단 가는 삼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부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와! 저것 좀 보게나. 이 나무도, 아니, 저 나무도...”
나뭇가지마다에 얹혀 있는 눈송이들은 목화솜을 가져다가 장식해 놓은 것 같고, 혹은 하이얀 떡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다. 인간이 아무리 잘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라 해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우리 열 명의 친구들은 모두가 이 장엄한 눈의 잔치에 매료되어 멈춘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나무란 나무 - 소나무, 자작나무, 상수리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들이 우리가 걷는 길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경건히 예를 표하고 있다. 얼마나 겸허한 나무들인지...... 세상에 어떠한 인간이 이보다 더 겸손할 수가 있을까?
옛날 영문학자이면서 수필가였던 이양하 선생이 쓴 “나무”란 수필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나무는 덕(德)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물 쪽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나무는 이처럼 자기 분수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남의 것을 탐하거나 깔보지 아니하고, 반면에 부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겸손할 줄 안다. 그런 나무들이 우리 앞에서 마치 열병식하듯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두들 새악시처럼 하얀 면사포를 쓰고, 영국의 어느 백작처럼 순백의 턱시도를 입고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