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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공연히 있지 않는 허구로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계를 유포하고, 그것에 갇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화는 영화일 뿐이야, 영화는 영화로 끝나'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생각이라는 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반복적인 생각은 습관과 삶을 형성한다. 함부로 여길 수 없다.
그래서 공포영화의 양식을 확립하여 공포영화의 대가로 불리우는 히치콕의 영화를 예전에 몇 편 보았지만, 오히려 그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형식화한 히치콕의 대가다움과 내용 없음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그 뛰어날 스타일로 대책없는 불안물만 만들다니... 그것이 헐리우드의 한계라고 여겼다. 그 이후 히치콕의 대를 이은 많은 스릴러, 재난영화 들은 히치콕의 영역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못한 듯 했다.
헌데 어제 EBS에서 이 <새>를 다시 보여줬다. 염천의 여름인지라 스릴러물을 보고 시원해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는 새를 대단히 좋아한다. 그래서 한때 내 스스로 나를 '걸어다니는 새'라고 부르고, 그걸 연작 이미지로 그려보기도 했다. 물론 히치콕이 만들어낸 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아무튼 나는 <새>를 보며 새에 대한 내 상념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대학시절 보던 <새>와 다른 각도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영화적 기법이나 문법은 언급하지 않겠다.
히치콕의 <새>는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 공포를 만들어내는 양식은 밀어두자. 그는 일반적인 새의 이미지인 자유, 평화 등이 아닌, 잔인한 공격과 죽음의 이미지로 새를 사용하고 있다. 히치콕의 영화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새로 인해 유발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란 '잠재적 불안'이기도 하다. 도대체 새들이 왜 사람을 공격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전개되어가는 양상에 촛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어떤 공포영화가 이유 없는 공격과 불안을 다루고 있는가?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그 이유 있는 폭력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안에 만연한 이유없는 불안을 말한다. 그게 다른 감독과 히치콕의 차이일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현대 도시인의 불안을 영화적 배경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한편 이 영화에서 성인 여자들은 하나같이 심리적인 불안에 휩싸여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와 옛 여자친구 애니, 그리고 새 여자 친구 맬라니 모두 약간은 침울하고 고독하며, 히스테릭하다. 그것은 히치콕의 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주인공 여자 맬라니는 금발의 유난히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가 나오는 화면은 뿌옇고 신비롭게 처리했다. 옛 애인 애니는 검은 머리를 가진 평범한 교사로 나온다. 헌데 모두들 신경의 예민함과 불안에 노출된 듯 보인다. 히치콕은 여성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백인 금발의 여자에 대한 집착은 이상할 정도다. 백인 금발 여자에게서 우리가 지켜야할 행복과 가치의 이상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억지 논리를 펴봄직도 할 정도로... 아무튼 공포는 여자를 위해 존재하는 듯, 여자가 나와야 더 무서운 듯, 그리고 남자는 그 공포로부터 여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거기에 아이가 끼어 있고, 애완동물이 나온다.
하지만 2005년 7월 24일 EBS를 통해 보며, 나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새라는 미지 세계의 공격에 주인공은 '도대체 왜?'라고 질문을 하지만 도무지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 미국인의 모습같다. 많은 미국인과 영국인은 왜 아랍인들이 그들에게 자살폭탄 테러를 저지르는지 모른다. 단지 두려워하고 더 강한 폭력으로 자신을 방위하기를 희망한다. 물론 히치콕이 이 영화를 미국의 오만한 도취를 비판하고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아온 가족에게 찾아든 새의 공포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안락를 파괴한 알카에다 등의 테러의 상황과 일치한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왜 공격받는지 모르는 것은 이 영화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저 허둥거리고 모면하려고만 할 뿐이다.
다음주 일요일 2시엔 그 유명한 <싸이코>를 한다니, 공포영화의 전형이 어떻게 창출되었나 다시 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개인의 이상심리가 이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 미친 싸이코의 연쇄살인은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듯 하다. 그리고 살인범은 그야말로 미친놈으로 치부되고 단종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마녀사냥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정신이 왜곡되는 과정엔 좋지 않은 사회환경과 관계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싸이코 범죄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공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손쉽게 마녀만들기를 하고, 영화는 그것을 이용해 더욱 무서운 공포영화를 만든다. <싸이코>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화된 사회병리 현상의 영화적 은폐물로 선례를 남긴 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