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봉기의 한 비록
– 황용주 선생의 이야기
[얼마 전 총선 시국을 맞아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난 일로 「정수장학회」 문제가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인 신직수가 김지태를 협박할 때 그 재단의 이사였다는 사실만 가지고 황용주 선생이 그 협박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등 사실과 다른 말이 무책임하게 나오고 있어서 매우 황당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우연히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기자였던 정운현 씨가 <대한매일 기자커뮤니티>에 쓴 글을 읽고, 그 내용과 내가 고향 사람으로 언론인으로서 존경했던 황용주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보태어 이 글을 씁니다.
해마다 4.19가 돌아오면 그때까지 대학이라는 상아탑에 안주하고만 있던 나를 잠 깨워준 내보다 일고여덟 살 아래 청소년들의 어린 영령들이 생각나고, 이어 또 4.19봉기의 불씨를 지펴준 황용주 선생이 생각납니다.
이리하여 황용주 선생에 관한 4.19봉기의 비록을 세상에 이야기하여 황용주와 박정희 군사정권과의 관계를 그릇 알고, 황용주 선생을 욕되게 하는 말이 다시는 회자되지 않도록 바라며 박정희가 얼마나 신의 없는 자인가를 마음을 담아 전합니다.
이 글이 이정희 선생의 일에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이정희 선생, 건투하시기를 빕니다.]
0.
황용주, 그는 군사유신깡패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이기에, 그리고 5.16군사쿠데타의 핵심성원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도 정권도둑질의 일당이라는 것으로 반역의 무리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알고 만난 일은 꼭 한번밖에 없지만 그가 나의 고향사람으로 그리고 소학교 동기동창의 삼촌으로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2.7구국투쟁」 때 고향의 학생봉기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가 교장으로 있는 「밀양고등공민학교」에 위장 입학한 인연으로 자연히 그에 대해 관심을 남다르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기자였던 정운현 씨가 황용주 선생의 부음을 듣고 쓴 <대한매일 기자커뮤니티>에 쓴 글을 보고 황용주 선생의 진면모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 후 4.19혁명으로 발전한 그 봉기의 불씨를 지핀 비사의 주인공으로서의 황용주 선생을 알게 되었고, 또 미제의 앞잡이로 4.19혁명을 짓밟은 자,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선의의 동조자로서의 그의 갈등과 그로 인한 배신감으로 모대기다가, 그의 역사적 자취마저 짓밟혔고, 끝내 옥고까지 겪어 절망 속에 여생을 보낸 한 지식인의 애환을 그리며, 그리고 올바른 지식인으로 살아야 할 반면교사로서의 그의 인생을 되짚어 본다.
1.
황용주(黃龍珠), 1919년생. 전 MBC 사장, 경남 밀양 출신. 1932년 「대구사범」 4기생으로 입학, 중퇴. 1944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 졸업.
1946-55년 밀양 「세종중・고등학교」 교장, 1955-58년 부산대학교 불문과 교수, 1960년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1962년 「부산일보」 사장, 1963년-64년 「부산문화방송」 사장, 「문화방송」 사장.
여기까지가 1974년판 「합동연감」 부록 <한국인명사전>에 나온 기록에 의한 것이다.
아버지는 일제 관리(당시 마산부청 근무), 8.15해방 이후 군정청에 복무해서 밀양군에서 면장, 일제의 고급관리로서 능히 지주.
1932년에 「대구사범」에 입학하여 33년에 「독서회사건」으로 퇴학.
당시 「독서회」는 대구에 계셨던 현준혁(玄俊爀)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 「공산당선언」, 「자본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와가마 하자무-河上肇 저「貧乏物語」) 등을 읽고, 그 영향으로 자기 집의 소작인에 대해 매우 동정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1947년 「밀양중학교」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을 동정하여, 그 학교에서 학생들의 입장을 옹호하다가 해임된 손기용 선생과 더불어 그 학생들을 위하여 사립중학교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당시 학생운동으로 애를 먹고 있던 군정청 당국은 설립인가조건을 어렵게 만들어 규제하므로, 일단 먼저 하기 쉬운 당시 밀양읍 내이동의 동사무소 회관을 빌려 성인교육기관으로 허가를 받아, 「밀양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그 교장이 되었다.
내가 황용주 선생을 단지 나의 소학교 같은 반의 동무인 황종진(전 대구 MBC PD)의 삼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고 황 선생도 조카의 단짝인 것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이 학교에 남조선단독선거(5.10선거) 반대투쟁으로서의 2.7구국투쟁에서 학생봉기를 위하여 1948년 1월 말에 입학할 때 만나 인사할 당시 나는 16살의 소년이었다. 그때 황용주 선생은 나의 손을 잡고 내가 밀양중학교에서 퇴학당한 일을 두고 나를 위로하면서 말씀하신 말이 기억난다. 그것은 「맹자」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이 황 선생의 말소리와 더불어 지금도 때때로 회상한다.
“하늘은 장차 크게 쓰려는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어 단련하신다.”
황용주 선생은 이 학교를 발전시켜 「세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그 교장으로 되었으나, 학교법인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교내분쟁이 일어나자 교장을 그만두고 「부산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
여기까지는 밀양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황용주 선생은 8.15 직후에는 좌, 우의 여러 정당・사회단체 양쪽에서 다 동참을 권유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지식인의 사상으로서 계급의식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그 의식은 투쟁 속에서 단련된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으로는 간직될 수는 있을지라도 투쟁의 전선에 동참할 의식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한 것 같은, 그러한 지식인이 일반적으로 가진 나약성으로 하여 투쟁의 대열에 나서지 못한 것 같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반동적인 단체에 참여하기에는 그가 독서회 등에서 의식화된 사상의 양심으로는 허용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진보적인 사상의 틀 속에 들어박혀 그런대로 가진 양심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밀양중학교 학생운동사건으로 학교로부터 추방당한 학생들이, 더구나 장래성을 가진 많은 학생들이 그처럼 당해 학업의 길이 막히게 되자, 그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양심이 발동하게 되고, 이들을 위해 사립중학교의 설립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정은 새로운 식민지적 교육정책으로 중학교 설립의 길을 어렵게 하여 사립중학교 설립이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 그래서 우선 성인교육기관으로서 중학교과정의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많은 고등공민학교의 설립은 수많은 중학교 설립 요구에 대한 우회적으로 회피하는 군정 교육정책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밀양읍의 내이동 동 회관을 빌려 「밀양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고 나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총파업투쟁으로서의 「2.7투쟁」에서 학생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그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황용주 선생과는 아주 순간이라 할 만큼 짧은 인연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황용주 선생이 목적한 중학교 설립은 이 고등공민학교를 토대로 해서 「세종중・고등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이루어졌으나 이미 역사는 벽혁운동에서 중학교 학생운동이 차지할 시대는 지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대신 중・고등학교는 지방 향신계층의 치부의 수단으로 되어가고 있는 시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립 중・고등학교의 경영을 두고 내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것 역시 자본의 논리로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황용주 선생의 「세종중・고등학교」도 그러한 분규로 휘말리게 되자 선생의 양심이 교육을 두고 그 경영에서 이해관계를 가지고 파벌이 생기고 그것이 분쟁으로까지 휘말린다는 것은 그의 양심으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며, 마침내 교육자로서의 그 의의마저도 상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학교를 내던지고 고향 밀양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황용주 선생의 입장으로서는 이때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라든가, 학문연구라든가 하는 것 따위는 이러한 분쟁으로 해서 그에게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부산대학교」 교수로 취임한 것, 그것 역시 교육에 뜻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다만 생활의 방편으로 취임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황용주 선생의 이러한 입장에 관한 이야기는 김기화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김기화 선생님은 한때 내가 밀양중학교에서 퇴학을 달하기 전 그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신데 「세종중・고등학교」가 설립되자 그곳으로 가셨다. 황용주 선생이 밀양을 떠나시고 한참 지난 후 내가 김기화 선생을 만나, 술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을 따라 술집에 갔을 때 황용주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 황용주 선생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었고 황영주 선생의 그러한 입장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2.
황용주 선생이 부산대학교 교수시절에 「부산일보」에 게재한 〈지식인의 저항정신〉이라는 칼럼이 화제가 되어 이로써 「부산일보」 측의 요청으로 비상임 논설위원이 되었고, 1957년에는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아주 옮기게 되었고, 거기에서 전문 언론인으로서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논설에서 특히 유명한 것으로〈조봉암 진보당사건〉에 대한 사설이었다. 조봉암이 붙잡혀 간첩으로 조작되어, 1959년 2월에 상고심에서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을 때, 다른 신문들은 모두 입 닫고 있었는데 오직 황용주 선생만 「부산일보」 사설을 통해 ‘부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이승만의 자유당정권 아래에 여간한 용기를 안 가지고서는 그런 주장을 개진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4.19민중봉기의 계기가 된 김주열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것도 황용주 선생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자유당정권이 선거마다 부정선거를 했고 그 체제에 방해가 되는 인사들은 항상 방첩대 또는 경찰 사찰기관 등 탄압기관으로부터의 위협 속에 있었던 세월이었다. 기사의 전파, 전달은 극도로 차단당하고 있던 때라 이 뉴스를 중앙언론에 송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거니와 위험하기도 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AP통신 부산지사」를 통하여 본사에 ‘모르스’ 통신으로 무전을 쳐 송고하도록 하고, 이를 일본에서 받아 역으로 국내 통신으로 보내도록 해서 전국에 알려지도록 만들었다.
또 그 이튿날 마산에 파견한 허종이라는 한 기자가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사진'을 찍어오자 그 사진을 20여장을 뽑아 「부산일보」 단독의 특종기사로만 하지 않고 서울의 각 신문사로 보냈는데, 사진기사 송고로 보내지 않고 기자를 출장으로 직접 보내어 보도되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4.19혁명의 도화선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황용주 선생의 용기 있는 처신이 없었다면 4월 18일 김주열의 처참한 학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로부터 격분해서 일어난 고려대학교 학생의 시위가 있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4월 19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용주 선생은 4.19 봉기의 불씨를 지핀 바로 그 당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황용주 선생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민간인으로서 참여한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할 때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하는 박정희를 자주 만나 박정희의 혁명이라는 이름의 쿠데타 계획에 오직 정의감으로만 참여했다. 박정희가 혁명이 성공하면 원대 복귀하겠다는 이른바 「혁명공약」의 6항을 철석같이 믿고 참여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정의감은 배반당하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둘 사이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인 신직수가 박정희에게 「부산일보」와「부산 MBC」의 사장 김지태(金知泰)으로부터 「부산일보」와 「부산 MBC」그리고 그가 경영하고 있는 장학재단인 「부일장학재단」을 모두걸이로 함께 해서 빼앗아 바치려고 탁자에 권총을 올려놓고 공갈하여 양도서류에 서명날인하게 하여 받을 때, 황용주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그는 어디에 출장 중이라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이미 박정희에게 그 여부를 챙겨 말할 처지는 아닌 사이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박정희의 정권강도 계획에 그 본 의도와는 다르게 참여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그 처신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그가 정권의 시녀 노릇은 하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정권 초기에 수없이 굴러다니고 있는 감투하나 챙겨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쿠데타 시기의 동지로서의 박정희는 그때 이미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와세다’ 동문이고 야당(신민당)의 3선 의원인 한건수(韓建洙)가 공화당에서 한 자리하려는 엽관운동으로 그를 여러 번 찾아와 박정희에게 한 자리를 얻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는데, 황용주 선생은 야당하는 사람이 여당으로 입장을 달리하겠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해버렸다.
이 부탁을 거절한 보복으로, 그가 「세대」 잡지 64년 11월호에 게재한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민족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방향》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는 ‘북한’도 하나의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했고, 소수의 유엔경찰 감시하의 ‘남북’ 총선이나 연방제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등 주장한 내용이 김일성의 자주통일론에 동조 했다고 한건수는 문제 삼았다.
한건수는 이를 당시 신민당 당수 유진산에게 알려 국회에서 문제 삼게 되었고, 검찰이 황용주 선생을 반공법으로 구속기소했다. 이때 박정희는 그것이 '자기의 민족적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만 했고, 그때는 이미 박정희는 모른 채 하고 외면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황용주 선생은 이때 감옥을 1년 살게 되었다.
황용주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양심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긴 하나 우리 사회문제의 그 본질을 탐구하여 민중운동으로 발전시켜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려 하지 않고, 본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현상에만 매달리다보니 박정희와 같은 민족을 반역했던 자의 혁명이라는 달콤한 말에 도취하여 그 본질적 의도를 파악함이 없이 동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의는 박정희에게 이용당하기만 했고 나중에는 필화사건으로 고난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이다.
필화사건으로 한동안 고생을 하다가 석방된 후로는 일체 사회문제, 민족문제와 그 현상에는 관심을 접었고 조용히 지내다가 2001년 8월 말에 돌아가셨다.
첫댓글 소중한 역사입니다.
역사학자란 것들이 식민지근대화를 지끄리지 않나, 어디 돈생기는 데를 찾아 도둑놈집을 애국자집으로 만들어주지를 않나, 이런 놈들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이랍니다. 이런 놈들이 역사를 만드는 세상이니 자라나는 후대들 보기가 민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