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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룻 1:11-22))
우리 시대의 황무지
일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을 맞고 있습니다 .
벚꽃, 개나리, 목련과 같은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자연에는 봄이 찾아왔지만,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채 60 년이 넘도록 여전히 겨울입니다.
가끔 봄바람이 불 때도 있었지만 얼음은 늘 녹지 않고 있고,
요즘은 상황이 더 나빠져 극심한 한파가 닥친 형국입니다.
요즘 경제 현실에도 좀처럼 봄 바람이 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세대간, 남남간의 갈등들이 존재하는 사회도 그러합니다.
그에 따라 개인의 마음도 무겁고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는 봄이 왔는데,
우리의 삶은 봄이 오지 않고 여전히 겨울이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일찍이 T.S. Eliot가 시로 표현했습니다.
당시 일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을 보면서
한때 풍미했던 인간성에 대한 낙관주의를 비웃듯 인간의 잔인성과 추함이
극도로 표현되고 만 당시의 유럽의 땅을 ‘황무지’, ‘겨울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연에는 4월이 왔지만 그 땅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봄이 오지 않았기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면서 황무지에 어떻게 싹이 나느냐고 어떻게 겨울의 땅에 봄이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정말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회가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여전히 우리들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매년 자연에는 어김 없이 봄이 오는데 우리의 삶에는 어떻게 봄이 오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말씀은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베들레헴에 겨울이 임하다
때는 사사시대 말엽, 장소는 베들레헴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룻기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기 1:1).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이름의 의미는 “벧(집) + 레헴 (떡)”이 합해진 ‘떡집’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떡집’에 ‘떡’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역설입니다.
말하자면 그 땅이 황무지가 되었고 또 겨울의 땅이 된 것입니다.
그때 그 땅에 임한 흉년은 흔히 올 수 있는 자연재해로 볼 수도 있지만
오늘 말씀은 이 흉년이 당시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약속의 땅에 사는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고 그 죄악이 누적되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주변국이 그들을 침공하게 함으로 심판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때로는 자연재해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흉년이 임한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찾아온 흉년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역사적 상황이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7-19 장에 두 사건이 기록됩니다.
하나는 유다 가문의 한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란 사설 제사장을 고용하는 일입니다.
종교의 타락, 신앙의 타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장에는 엽기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출신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는데
그 첩이 베냐민 지파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게 되어 죽자
그 첩의 시신을 토막 내어 다른 열한 지파에 증거로 보냅니다.
이에 분노한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합니다.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변질되고
타락되고 음란하며 폭력적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죄악이 심해지자 흉년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이 흉년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겨울이 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삶에 겨울이 임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봄을 기다려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봄을 기다리는 두 종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봄을 찾아서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 땅에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을 떠나기로 합니다.
한 해 더 기다려 볼 수도 있었을텐데 땅을 팔고 모압이란 땅으로 떠납니다.
이 사람은 결정을 빨리한 것 같습니다.
왜 떡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에 이런 흉년이 왔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경제적인 논리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희년제도 하에서 그에게 주어진 땅의 사용기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땅 값이 괜찮다고 여기고는 그냥 땅을 팔고 떠난 것입니다. 그의 동기는 매우 실리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문에 주신 약속의 땅이 지닌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직 경제적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약속의 땅을 팔고 그 재산을 가지고 이국 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방 땅에서 풍년과 성공의 봄을 기대했습니다.
더욱 심해진 겨울
그런데 이렇게 떠난 그 가정의 상황은 자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엘리멜렉은 그곳에서 가서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맙니다.
봄을 찾아 모압으로 떠났던 그 가정이 오히려 그 땅에서 더 심한 겨울을 만난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혼자 된 나오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고향으로 갈까, 이곳에 머물까를 고민하던 그녀는 모압땅에 머물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두 아들을 빨리 장가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방여인과 결혼시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모압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이 ‘말론’ 과 ‘기룐’인데, ‘약함’과 ‘쇠약’이란 이름처럼 약했던 모양입니다.
모압으로 이주한지 십 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두 아들이 다 죽고 맙니다.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경제적 봄을 찾아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 가정이
경제적 손해에 더해 가족을 다 잃어버리는 더 극심한 겨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남으로써 봄을 찾으려했던
엘리멜렉의 가정은 도피를 통해 겨울을 피하고 봄을 기다리려는 경우입니다.
귀향의 길
결국 두 며느리와 나오미만 남게 되었는데 당시 고대사회에서 과부로 산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가장 비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 여인은 앞으로 결코 봄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기 고향에 풍년이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실패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힘들었지만
그리고 모압 땅에서는 살 길이 없어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두 며느리가 시모를 따라 나서자 나오미는 아직도 너무나 젊은
두 며느리에게 이제 자기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고 권고합니다.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룻 1:11).
큰 며느리는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둘째 자부 룻은 끝까지 시모를 따라가겠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의 결심이 매우 굳음을 알고 나오미는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룻 1:18).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오미와 룻이 실패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큰 소리치고 베들레헴을 떠나더니, 저것 봐라, 완전히 망해서 돌아왔구나,’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힘든 10년의 세월을 그래도 버텼왔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고향으로 갑니다.
동기회 모임도 나름대로 성공했거나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 나오지 실패한 사람은 나가기 매우 힘듭니다.
나오미는 그런 따가운 동정과 비난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들어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향에 이르니 고향 사람들이 말합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룻 1:19).
그녀의 행색이 너무 초라하고, 십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얼굴은
수 십 년이 지난 것처럼 매우 상했기에 그들이 경악하며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얼마 전 동기 한 사람을 만났는데 저와 동갑인데도 열 살은 더 들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연을 들어보니 직장을 퇴직하고 식당도 크게 하여 잘 살았는데
형의 사업 보증을 섰다가 아파트, 식당, 재산 모두를 다 날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밥을 먹는데 그냥 이빨이 빠져버릴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윗 이빨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래 몇 개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사업이 망한 그 일년 세월이 십년의 세월보다 더 몸과 얼굴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경악과 동정심 어린 시선이 따갑게 나오미에게 쏟아지자 나오미가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 1:19-21).
‘나오미’는 행복,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고통스러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그래, 나 망했어, 정말 쫄딱 망했어.
그러니 그렇게 불러줘’, 속 울음을 삼키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들리는 봄 소식
이렇게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때가 마침 보리 추수 때라고 소개합니다.
이 가련한 두 여인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봄 소식이 들려 온 것입니다.
재산을 가지고 모압을 향했던 엘리멜렉의 길에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재산과 가족을 모두 다 잃어 버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나오미의 길은
뭔가 봄 소식이 임할 것 같음을 암시합니다. 실제 그녀에게 봄이 왔습니다.
이 구절은 그런 문학적 장치입니다. 사실 이때가 유월절의 시기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절기입니다. 이러한 때에 나오미가 모압을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출애굽을 기념하는 보리 추수의 시기에 나오미는 ‘출모압’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두 여인의 앞 날에 봄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쓰라린 고통을 품은 그들이지만 돌아오는 길에 봄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의 이야기는 어떻게 겨울의 땅에서 봄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단순히 피하는 것으로는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겨울의 땅에서 어떻게 봄을 기다려야 할까요?
도피는 답이 아니다
엘리멜렉은 흉년이 든 겨울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가서 그곳에서 봄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가장으로서 그 땅에 흉년이 들 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득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직장도 바꾸고 땅과 집을 팔고 경제적 이유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문화로 읽지 말고, 그 시대의 경제와
문화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주어진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땅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그 땅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힘들어도 그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움이 있으니 그냥 땅을 팔고 약속의 땅을 훌쩍 떠납니다.
계속 흉년이 들 때 그는 땅의 가치가 하락될 것을 예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 못했고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엘’은 하나님, ‘멜렉’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의 뜻처럼 그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고백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이방 땅에서라도 그냥 잘 먹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고백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그 이유를 묻고자 고민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어려움으로부터 떠나려고만 합니다.
내게 주신 소명이 있는데, 그 과정이 힘들다고
그냥 쉽게 포기해 버리면 내게 주어진 소명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약속은 인내하고 기다려야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포기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삶이 힘들어지면
바쁘다는 이유로 교회 나가는 것을 제일 먼저 내려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삶에 여유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또 자기 여유를 찾아야 한다면서
믿는 일을 제일 먼저 뒷전으로 밀쳐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흉년이 왔다면 왜 이런 흉년이 왔는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합니다.
자기 땅에 풍년이 왔다면 왜 이러한 풍년을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수적인 일로 여깁니다.
내가 어떤 곳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봄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는 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자 나오미와 룻은 결국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아마 두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나오미는 돌아가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떠밀려 갑니다.
그런데 그녀의 귀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
원래 그녀의 가족이 있어야 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아스란 사람의 도움으로 그녀의 가정에 주어진 기업을 되찾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녀의 가정에 임한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온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꿋꿋하게 설 때 봄이 오는 것입니다.
갈수록 기업하기 힘들고, 갈수록 직장에서 안정되이 살기가 힘들고,
갈수록 청년들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도 취업하기 힘듭니다.
갈수록 이 시대 문화에 젖은 청소년을 키우는 것이 힘듭니다.
이렇게 힘들 때는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습니다. 이민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 자리는 떠나고 옮길 수 있지만,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리를 떠나면 안됩니다.
겨울이 와도 겨울나무가 찬바람을 맞으면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를 더 지켜야 합니다.
때로 몸도 아프고 어려움도 생기더라도 엘리멜렉처럼
신앙의 자리를 떠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붙들어야 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붙들고,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고백을 끝까지 붙잡고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겨야 할 사람과의 관계에 충실한 것입니다.
힘이 들수록 더욱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서, 사원으로서,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자기 역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마땅한 관계에 충실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겨울의 땅에서 봄을 기다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의무 이상의 사랑으로 살라
겨울의 땅에서 봄을 기다리는 또 하나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의 베들레헴 상황은
극단적인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이 판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땅에는 물질적인 풍년이 온다고 해도,잔인함과 무자비로 인한 겨울의 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을 나와 귀향하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을 보십시오.
둘의 상황은 극심한 겨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 자비와 배려의 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시모로써 자부에게
나이든 자기 혼자의 몸으로 고향 땅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모 나오미는 자기가 어떻게 될지라도 자기보다 젊은 자부를 먼저 생각합니다.
룻은 며느리이지만 자기 고향땅으로 돌아가도 됩니다.
나오미의 백성과 룻의 백성인 모압은 적대 관계이기에 그녀는 거부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녀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모압으로 돌아가는 것은 며느리 도리를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상 그녀에게는 시모를 돌볼 책임이 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 그 이상의 배려와 친절을 베풉니다.
이러한 긍휼과 인애의 관계가 이미 봄 바람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불고 있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주일인데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만 행하고 그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에게 배려하고 관심을 보이는 자비가 있을 때 이 땅에 봄이 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는 것, 믿음의 고백을 떠나지 않 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의무 그 이상의 자비를 행하며 사는 것, 이것이 겨울의 땅에서 봄을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겨울의 땅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모두들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봄이 올까요? 아니면 더 추운 겨울이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누리지만 마음으로는 겨울을 사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경제적 풍요만으로는 진정한 봄이 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땅한 자리로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야 영혼의 땅에 봄이 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무관심하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봄이 없습니다.
의무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의 봄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봄이 오지 않겠습니까?
요즘 교회 환경이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자비의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잔인한 4월 , 여전히 겨울인 이 땅에 봄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고 VIP의 삶과 마음에 마음에 봄이 오기를 바랍니다.
- 서울영동교회 정현구 목사의 설교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