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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 길의 마지막 산길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벌써 4번째다.
돌이켜 보면 이 밤을 포함해 모든 루트에서 마지막 밤에는 잠을 설쳤다.
코골이와 무관한 루트에서도 그랬으므로 이탈리아노들 때문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 때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딱부러진 까닭도 없이 그랬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2011년 5월 23일 월요일, 아라곤 길 6일째로 마지막 날이다.
먼동이 트기 전에 마을을 벗어났다.
프랑스 길 초반부터 수시로 카미노의 엉터리 이정표를 비판해 왔는데 여기라고 모른척
지나갈 수 있겠는가.
지도에는 몬레알~티에바스를 13km에서 13.9km까지 제각각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몬레알에서 먼동이 틀 때까지 걸어왔는데도 카미노 표지석에는 티에바스까지
되레 더 먼 14km다.
이같은 이정표들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비롯해 전국의 산과 길의 것과 다를 것 없다.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관심과 열의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넓은 들의 농로와 숲길을 걷고 엘로르스 강의 목다리를 건넌 후 알라이스 산맥(Sierra
de Alaiz) 북쪽 이가 산기슭을 타고 가면 15명의 주민이 산다는 야르노스(Yarnoz)다.
작지만 잘 정돈된 이 마을의 압권은 13c에 건설되었다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교구교회
(Parroquia de la Natividad)다.
아라곤 길은 한동안 산자락을 휘돌며 하얗고 짙푸른 괴이쩍은 도로와 나란히 간다.
실은, 짙푸른 도로가 아니라 해발 500m대의 넓은 들을 위하여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서
건설한 관개용 수로다.
도로와 함께 들 한복판을 관통하는 인공강이 마치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처럼 보인다.
물 걱정 없는 나라지만 국지적인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인가.
고지대에 운하를 건설하고 분사형 살수시설을 설치하는 등 가뭄의 극복을 위한 준비가
철저한 나라의 영농자들은 행복하겠다.
우리의 표현으로는 강으로부터 먼 지대의 고원은 모두 천수답이다.
그러므로, 여기는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는 우리의 천수답에게 해법을 제공하는 곳이다.
이 운하의 공사를 위해 만들었던 듯한 레미콘 공장이 있는 오타노(Otano)와 에스페룬
(Ezperun)을 지나 절개지대를 돌아가는데 꽃으로 단장된 십자가가 눈을 끌었다.
주변에 돌담을 쌓고 공을 들였음이 역력하다.
그러나, 국적과 나이, 사망 연월일 등의 기록이 거의 기본으로 되어 있는 순례자 십자가
와 달리 'SAN FRANCISCO JAVIER' 한줄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긴, 이 길이 순례자의 독점로가 아니므로 순례와 무관한 마을 주민일 수도 있다.
백두대간과 정맥에서 무덤에 관해서는 별난 관심을 가졌던 습관이 사도 야고보의 길에
연장되었기 때문인지 빼놓지 않고 살펴보고 있다.
산을 도륙하는 티에바스의 채석장
아라곤 길의 마지막 산(山)길이 끝나가고 있을 때 북북서로 너른 들의 끝에 대형 마을이
아스라이 나타났다.
지도와 컴퍼스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직선거리 10km도 채되지 않는 곳, 다시 방문하기로 이미 마음 굳혔으며 내일은 그 곳에
있게 될 팜프로나다.
(육안에는 아스라하게나마 보이는데 디카에는 잡히지 않았다. 저가품이라 그런가?)
꿈도 꾸어본 적 없는 아라곤 길을 걷고, 그 결과로 저절로 다시 들르게 되는 곳이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 분은 미리 계획을 세우시고 그 길을 가게 하신 것이리라.
잠을 설친 아침에 느꼈던 피로감이 사라지고 무겁던 몸도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경쾌해진 걸음으로 게렌디아인(Guerendiain)을 통과했다.
옛 농기구들을 전시한 소공원부터 도처에 '비엔베니도스'(Bienvenidos/ welcome)를
새긴 돌비들이 순례자를 환영하는 알라이스 산맥 자락의 자그마한 전원마을이다.
26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아갈 것 같은 마을이다.
1시간쯤 후에 도착한 마을은 티에바스(Tiebas).
해발 579m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440여명인 나바라 주의 한 지자체 마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692km' 이정표가 붙어있는 마을 입구의 공원(쉼터)에서 아침
겸 점심이며 아라곤 길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새벽에 알베르게에서 구은 토스트에 딸기잼(jam)을 발라.
걸으면서 먹고 먹으면서 걷는 것이 산과 길에서 내 식습관인데 오늘은 특별했다.
아마, 어제 이스코에서 만났던 프랑스인과의 재회시간을 활용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거대한 티에바스 성은 13c(1253 ~1270)에 나바라의 왕 테오발도 2세(Teobaldo II)가
축성했다는데 동 시기에 건설한 다른 건물들에 비해 왜 참담하게 파괴되었을까.
마치 대규모 폭격을 맞은 것 처럼.
먼 데에서도 흉물처럼 보였는데 근접할 수록 더욱 흉칙하게 보이는 이 유적을 당국은
왜 방치하고 있을까.
정리할 계획(Proyecto de Consolidacion)이라니 다행이다.
나중에 본 자료에 의하면 카스티야와의 전쟁(1378년) 중에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독립전쟁(1808~1812) 기간에 복구 불능으로 파괴되었단다.
알베르게에 들러 스탬프를 받고 나왔을 때 로마니카 데 산타 에우페미아 교회(Iglesia
de Romanica de Santa Eufemia)의 종탑시계가 10시 45분을 가리켰다.
시속 4km여의 준족이라면 나는 역시 산(山)체질이다.
아라곤 길의 종점이며 프랑스 길과 합류하는 오바노스까지는 15km쯤 남았으므로 아주
여유로운 진행을 해도 된다.
티에바스에는 먼 데에서도 흉물로 보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뿌연 한숨을 토해내며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중인 마을 뒷산이다.
알라이스 산맥의 카라스칼 산(Carrascal?), 스페인의 자병산이다.
로카포르테의 펄프 공장을 아라곤 길의 옥의 티라 했는데 겨우 하루만에 수정해야겠다.
소소한 채석장은 도처에 있지만 이 거대한 돌 불가사리 채석장이야 말로 옥의 티다.
공장은 폐쇄하거나 이동하면 되지만 사라진 산은 복원할 길이 없다.
백두대간에서 사라져버린 자병산을 비롯해 하얀 뼈와 살을 드러내고 있는 산들을 지날
때마다 채석장에 대한 원망이 사무쳤는데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그리 될 줄이야.
에우나테 성모 마리아 교회
아라곤 길은 고속도로 밑을 통과하고 국도,지방도로가 복잡하게 얽힌 길을 조심스럽게
횡단하여 얼마쯤 가다가 지층 통로를 통해서 철도를 건너간다.
곧, 인구 236명인 무루아르테 데 레타(Muruarte de Reta)를 지나 직선 농로 끝에 있는
올코스(Olcoz)를 통과한다.
순례길 마크들이 마치 숨어버린 듯 눈에 띄지 않아 우왕좌왕하게 하는
작은 마을이다.
총26명인 주민도 함께 숨었는지 보이기는 커녕 문전에서 소리쳐 불러도 반응이 없어서
출구 찾느라 애먹은 기억 밖에 없는 마을이다.
넓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갈 때 누워있는 파란 물줄기와 마을이 함께 포착되었다.
관개용 운하와 인구 350여명의 에네리스(Eneriz)다.
(물이 풍부한 나라지만 국지적으로 부족한 지역을 위해 개설된 수로들이 샘날 정도로
부럽다.)
포도와 올리브, 무화과 밭들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도착하며 잘 가꾼 새 주택단지와
옛 마을이 공존하는 양지바른 산기슭 마을이며 나바라 주의 한 지자체다.
지자체가 자랑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나 시. 감각을 자극하는 관광상품은 없으나 안온한
마을이라는 느낌을 준다.
백두대간 탈 때의 버릇대로라면 자상하게 들여다보고 관심가졌을 법한 마을이다.
에네리스 이후에도 유사한 들길이 이어진다.
산자락 들판길의 한적한 곳에 외롭게 우뚝 서있는 한 옥타곤(octagon/팔각형) 건물이
나그네의 시선을 뺏어가고 있다.
12c말에 건설된 순례자 교회, 성모에게 봉헌되었다는 에우나테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
(Ermita de Santa Maria de Eunate)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진기한 전형 중 1로 알려진
이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프랑스 길 무르사발에서 우회루트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프랑스 길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55km쯤떨어진곳)를 지날 때 눈여겨 보았던
'성묘(聖墓)교회'(Iglesia de Santo Sepulcro)와 구조가 아주 흡사한 교회다.
비록, 텅빈 벌판에 외로이 서있지만 프랑스 길 초입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의
'성령의 교회'(Capilla de Sancti Spiritus), 토레스 델 리오의 '성묘교회' 와 함께 사도
야고보 길에 있는 나바라의 세 장의교회중 하나였단다.
템플 기사단의 교회인 예루살렘의 팔각형 성묘교회(Holy Sepulcro)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템플 기사단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단다.
교회 돌벽에는 "예배와 기도하는 집이므로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POR
FAVOR RESPETE ESTE LUGAR DE CULTO Y ORACION, MUCHAS GRACIAS)
'금연, 금식, 금동물' 표시도 함께 간곡한 부탁판이 붙어있다.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건만 아라곤 길의 순례자중 상당수는 시각장애인인가.
스페인어와 바스크어, 영어로 된 부탁판을 읽지 못하는지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다는 알베르게가 도나티보(donativo/기부금제)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키기 어려운 부탁일 것이다.
아라곤 길은 향기로운 생화(生花)의 길
에우나테는 프랑스 길에 합류하는 오바노스를 2.4km 남겨놓은 지점이다.
합류지점을 굳이 푸엔테 라 레이나로 미루려 한다면 2km쯤 더 가는 오바노스 우회로
를 택하면 된다.
프랑스 길을 걸을 때, 46일 전인 4월 7일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1박할 때였다.
길에 대한 관심이 유난한 나는 프랑스 길 외의 카미노를 발견하고 역(逆)코스로 얼마쯤
걸어보았는데 바로 그 길이다.(카미노 이야기 25번글 참조)
그러나, 내일 팜프로나로 갈 내게는 1박했던 푸엔테 라 레이나보다 프랑스 길 때 그냥
통과한데다 팜프로나가 조금이라도 가까운 오바노스에서 끊는 것이 최선이다.
인구 926명인 오바노스(Obanos)는 나바라 주의 지자체중 하나다.
14c에는 군주제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훈타 데 로스 인판소네스(Junta de los Infan
zones/나바라의 귀족회의)의 본부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들의 슬로건은"프로 리베르타테 파트리아 헨스 리베라 스타테"(Pro Libertate Patria
Gens Libera State/국민과 국가를 위한 자유)
프랑스 길을 걸을 때 "고도(古都)지만 건물과 길, 광장 등이 옹색한 데가 없고 여유로운
마을"이라는 이미지였는데 변함이 없다.
오바노스의 알베르게에 여장을 풂으로서 6일간의 카미노 아라고네스를 마쳤다.
아라곤 지방 100km와 나바라 주 70km, 대략 170km쯤 되는 거리와 마을과 주변 도로 등
약 200km를 걸었다.
해발 1.640m에서 414m까지 1.226m를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46일 만에 오바노스와의 감회 깊은 재회가 이루어졌다.
참으로 싫증 없고 신바람 나는 6일, 200km, 1.226m였다.
무릇, 살아 숨쉬는 길은 걷고 걸어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환산거리 1천여km를 4번이나 걸었어도 매번 새로운 느낌을 주는 백두대간처럼.
꽃에 비유하면 향기로운 생화의 길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는 아라곤 길이 이에 해당한다면 무수히 이사하고 성형을 거듭한
프랑스 길은 향기 없는 조화에 다름 아니다.
쉬이 싫증과 짜증이 날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루트인 마드리드 길을 걷기 위해 사아군까지 다시 걸어야 하는 긴 프랑스 길을
목전에 두고 걱정이 고개드는 이유다.)
그나저나, 36명을 수용하는 알베르게 안에 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여권에 세요(sello/stamp)를 찍어주던 관리인의 호들갑이 도화선이 되었다.
리셉숀(접수와 스탬프) 중에 내 크레덴셜(순례자여권)을 공개함으로서.
프랑스 길을 시작한지 며칠에 불과하므로 세요 수가 빈약한 것이 당연한데 자기네와 똑
같은 이른바 초짜 영감으로 알았던 그들이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내게로 모여든 것.
각 루트의 여권과 달리 내 대학인 순례자여권에는 프랑스 길 ~ 아라곤 길까지의 세요가
다 찍혀 있으므로 이미 100개가 넘었다.
그러므로 아직 1자리수 세요의 여권을 가진 그들이 프랑스 길은 물론 피스테라, 포르투,
아라곤 길까지 마친 영감에게 묻고 싶은 것이 당연히 많을 터.
가이드북을 통해 많은 것을 숙지하고 있다 해도 궁금한 점들이 왜 없겠는가.
특히 준비해온 프랑스 길 외의 루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내 나이를 물은 그들은 77세라는 대답에 경악했으며 사아군까지 프랑스 길을 다시
걷고, 사아군~마드리드 길을 걸어가 귀국비행기를 탈 것이라는 내 말에는 기겁을 했다.
취할 때는(촬영하기 위해) 이것이 바로 민간외교라는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나 자신도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는 밤이었다.
49일 전인 4월 7일 밤, 하룻길도 못되는 시수르 메노르의 일이 기억나 더욱 그랬다.
내가 최고령임을 안 나이든 순례자들이"피레네 산맥도 넘었으니 문제없이 잘 해내실 것"
이라고 나를 격려했는데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길을 돌고돌아 바로 그 옆에 와있으니.
아무튼, 내 서투른 영어와 왕초보 스페인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때(내가 처음 이곳을 통과하던때) 지금의 나와 유사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때의 나도
지금의 저 많은 이들의 감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프랑스 길을 출발점으로 해서 46일간 1.400여km를 걷고걸어 다시 프랑스 길에서 소동
아닌 소동의 주인공이 되어있다니 감개무량했다.
문 여는 시간 5시를 기다려 구멍가게에서 먹고 마실 것들을 구입했으나 오늘은 상기된
기분에 알맞게 혼자서 라도 그럴싸한 만찬을 즐기고 싶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는 바가지 좀 쓰면 어떠냐는 기분이었다.
깔끔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통역을 자임한 젊은 남녀의 호의로 맛좋은 치킨정식을 먹게
되었으나 청년은 실언 한마디로 인해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왜 경솔하게도 내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질문 '재퍼니스'였을까.
먹던 치킨에 와인이 쏟아진 것은 전혀 내 실수였다.
그런데도 새 와인과 함께 새로 한 상을 차려왔다.
맛있게 포식은 했으나 몹시 미안했다.
바가지를 쓰기는 커녕 바가지를 씌운 꼴이 되었다.
4개의 카미노 루트에서 유일하게 기억되는 레스타우란테 이바르베로아(Ibarberoa).
주방장이며 사장, 종업원인 초로(初老)의 두 에스파뇰이 아라곤 길을 향기로운 생화의
길로 굳히는데 마지막 일조했다.
(훗날 가이드북을 통해 오바노스의 이미지를 살리는 식당임을 알게 되었다.)
<아라곤 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