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몰락(沒落)
客有說春申君者曰
湯以七十里 文王百里 皆兼天下 一海內 今夫孫子者 天下之賢人也 君藉之百里之勢 臣竊以爲不便於君 若何 春申君曰 善 於是使人謝孫子 去而之趙 趙以爲上卿 客又說春申君曰 昔伊尹去夏之殷 殷王而夏亡 管仲去魯而入齊
魯弱而齊强 由是觀之
夫賢者之所在 其君未嘗不善 其國未嘗不安也 今孫子天下之賢人 何謂辭而去 春申君又云 善 於是使請孫子 孫子因爲喜謝之曰 鄙語曰 癘憐王 此不恭之語也 雖不可不審也 此比爲劫殺死亡之主者也 夫人主年少而放 無術法以知奸 即大臣以專斷圖私 以禁誅於己也
故捨賢長而立幼弱 廢正適而用不善 故春秋之志曰 楚王之子圍聘於鄭 未出境 聞王疾 返問疾 遂以冠纓絞王而殺之 因自立 齊崔杼之妻美 莊公通之 崔杼帥其黨而攻莊公 莊公請與分國
崔杼不許 欲自刃於廟 崔杼又不許 莊公走出 踰於外墻 射中其股 遂弑而立其弟景公 近世所見 李兌用趙 餓主父於沙丘 百日而殺之 淖齒用齊 擢閔王之筋而懸之於廟
宿昔而殺之 夫癘雖癰腫痂疵 上比遠世 未至絞頸射股也 下比近世 未至擢筋餓死也 夫劫殺死亡之主 心之憂勞 形之苦痛 必甚於癘矣 由此觀之 癘雖鄰王 可也 因爲賦曰 琁玉瑤珠不知珮 雜布與錦不知異 閭娵子都莫之媒 嫫母力父是之喜
以盲爲明 以聾爲聰 以是爲非 以吉爲凶 嗚呼上天 曷維其同 詩曰 上帝娥 無自瘵焉
飜譯
어떤 나그네가 춘신군에게
이렇게 설파하였다.
“탕임금은 칠십 리, 문왕은 백 리의 적은 땅밖에 없었지만 모두가 세상을 포용하고
온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였습니다. 지금 손자는 세상이 아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입니다. 임금께서는 백 리나 되는 땅을 다스리게 해놓고 계시니 제 생각으로는 임금님께 이롭지 못할 것이라 여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춘신군은 대답했다.
“맞는 말이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손자에게
사직하도록 하였다. 손자가 초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가자 조나라는 그를 상경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때 그 나그네가 다시 춘신군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옛날 이윤이 하나라를 버리고 은나라로 가자 은나라는 왕업을 이루었고 하나라는 망했습니다. 또 관중이 노나라는 떠나 제나라로 가버리자 노나라는 약해졌고 제나라는 강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어진 자가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그 나라 임금이 훌륭해지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그 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경우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금 손자는
세상이 다 아는 어진 사람입니다. 어찌 그를 그만두게 하여 초나라로 데려올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춘신군이 또 대답했다.
“맞소이다.”
그리고는 사신을 보내어 손자를
청해 데려오도록 하였다. 이에 손자는 거짓으로 기뻐하면서 그 청을 사양하며 말했다.
“미천한 속담에 ‘창질이 난 사람이 자신보다 임금을 불쌍히 여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손치 못한 말이지만 잘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는 말입니다. 창질 정도는 겁살이나 죽임을 당하는 군주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릇 임금이 나이가 어리고 방자하며, 간사한 자를 가려낼 법술도
갖지 못하면, 대신들은 사사로이 전횡과 독단을 일삼으며 자기와 다른 자를 감금하거나 죽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진 어른을 없애고 어리고 약한 이를 옹립하여 정직한 이를 내쫓고,
착하지 못한 이를 등용시킵니다. 춘추의 기록을 보면 초나라 왕자인 위가 정나라의 초청으로
가다가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왕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서는 병의 증세를 묻는 척
하면서 마침내 갓끈으로 왕을 목 졸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사건이 있습니다. 또 제나라 최저의 아내가
미인이었는데 장공은 그 여자와 사통하였지요. 최저가 이를 알고 무리를 이끌고 장공을 공격하자, 장공은 나라를 나누워 주겠다고 빌었지만 최저는 용서하지 않았고, 장공이
스스로 사당에서 자살하겠다고 했지만 최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장공이 바깥 담을 넘어
도망가자 그의 허벅지에 활을 쏘아 죽이고 장공의 동생인 경공을 옹립하였습니다. 최근의 일을 살펴보면
이태가 조나라의 권력을 잡고 주보를 사구에서 백일 동안 굶겨 죽인 일이 있고, 요치가 제나라의 권력을
잡고 민왕의 근육을 뽑아 사당의 대들보에 매달아 하룻밤이 지난 다음 죽인 일도 있습니다.
무릇 창질이란 악창, 종기, 옴, 허물이 생기는
끔찍한 병이지만 먼 옛날에 목이 졸리고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죽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근래에 있었던
근육이 뽑히거나 굶어 죽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무릇 겁살이나 죽임을 당하는 군주는 마음의 걱정이나
몸의 고통이 틀림없이 창질보다는 심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창질에 걸린 자가 비록 자신보다
왕을 더욱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지었다.
‘좋은 옥과 구슬이 있어도 이를 몸에 찰 줄을 모르고, 잡포와 비단을 놓고도
어떻게 다른 줄을 모른다네. 여취와 자도 같은 미남 미녀에게 중매 설 줄을 모르고, 모모와 역보 같은 추남 추녀를 오히려 좋게 여긴다네. 장님을 눈
밝은 자로 알고, 귀머거리를 총명한 줄 안다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길한 것을 흉하다고 한다네. 오호! 하늘이여! 내 어찌 그들과 함께 하리오!’
詩經에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하느님이 꾸짖으시니 아파도
어쩔 수 없네.’
紬繹
왕이 아들에게 살해 당하고, 바람 펴서 죽고, 굶어 죽고, 살점이
잘려 대들보에 매달려 죽고, 권력의 몰락(沒落)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저렇듯 비참한 죽임을 당하니
온 몸에 창질이 나서 고생하는 자가 어찌 권력 있는 자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는가(癘憐王)? 권력의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욕심 때문이고, 권력을 가진
자를 죽이는 것도 또한 욕심일 뿐이다. 권력(權力)은 욕심과 신념의 극치이다. 돈과 힘이 있을 때 욕심이 더하면 權力이
되고, 돈과 힘이 있을 때 욕심이 없으면 봉사(奉仕)가 된다. 국민을 위한다고 말한다면 곧 그것은 자기를 위한 권력욕일
뿐이고, 아무런 말 없이 행하면 그것은 모두를 위한 奉仕가 된다.
몰락(沒落)이란 재물이나 세력
따위가 쇠하여 보잘것없이 되는 것을 말한다. 왜 沒落하는가? 욕심에
욕심을 더하면 沒落하게 마련이다. 왜 沒落하는가? 지금보다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沒落하게 마련이다. 미래라는 것은 虛像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우리의 삶이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虛像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오로지 지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沒落할 수가 없다. 미래라는 虛像에서는 沒落이 있지만, 지금이라는
實體에서는 沒落이 있을 수 없다. 미래라는 것은 虛像이기 때문에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답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다. 만약에
미래에 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요행(僥倖)일
뿐이다. 미래는 지금이 쌓여져 만들어지는 또 다른 지금일 뿐인 것이다.
지금이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인류는 이상(理想)을 꿈꿔왔다. Utopia! 그러나 그 理想이 실현된 적이 있는가? 종교가 이상국가를
실현했는가? 사회주의가 이상국가를 실현했는가? 그 어떤 정치지도자가
이상국가를 만들었는가? 인류의 역사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진한 이름 모를 사람들에 의하여 지금의
찬란한 문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Utopia!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지명을 쓰고 있다. 즉, 유토피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세상인
외부를 향하면 유토피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내부를 향하면 우리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神을 만나 그때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다.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또는 국민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 놈은 미친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흐름이다.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은 沒落할 수 밖에 없다. 흐름은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위인들이 모두 沒落했다.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징기스칸과
히틀러 등이 그랬듯이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그들의 삶이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모순이고 따라서 沒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이 지금 이 순간에 맞추어져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기에 沒落하지 않고 그저 흘러간다. 유사이래 인류는 그렇게 흘러온 것이지, 그 어떤 영웅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 영웅이라고 칭송되는
자들은 모두 沒落한 자들이다.
지금 세상은 국가중심 구조에서 경제중심 구조로 서서히 흘러가고 있다. 국가중심
구조에서는 권력과 정치가 있을 수 있지만, 경제중심 구조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이 약해지기 때문에 권력과
정치 또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국가와 나라는 관계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세계와 나, 다른 표현으로 경제(돈)과 나의 관계는 점차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권력의 沒落은
사라지지만, 기업의 沒落 및 富의 沒落은 속출하게 될 것이다. 富가
몰락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富의 초점이 미래에 맞추어져 있으면 그것은 虛像에 초점을 맞추는 꼴이기
때문에 沒落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절대 沒落하지 않는다. 富를 창출하는 가치는 지금에 있는 것이지, 미래라는 虛像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이 쌓여서 미래가 만들어 지듯이, 지금의
가치가 쌓여서 미래에 큰 가치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지금과
신나게 노는 것이다. 가치는 無我之境으로 한바탕 신나게 놀 때 비로소 극대화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
沒落! 하고자 하는 마음이 많으면 沒落하게 마련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욕심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詩經의 소아 어조지습(小雅 魚藻之什)에 있는 울유(菀柳)라는 시를 감상해 보자.
有菀者柳 不尙息焉
무성한 저 버드나무 그
아래에 쉬지 마라
上帝娥 無自暱焉 하느님이
꾸짖으시니 가까이 갈 수 없네
俾予靖之 後予極焉 나에게
일 맡기면 뒤에 나는 비참해지리
有菀者柳 不尙愒焉 무성한 저 버드나무 그 아래서 놀지 마라
上帝娥 無自瘵焉 하느님이
꾸짖으시니 아파도 어쩔 수 없네
俾予靖之 後予邁焉 나에게
일 맡기면 뒤에 나는 떠나게 되리
有鳥高飛 亦傅于天 어떤
새가 높이 날아 하늘까지 오른다네
彼人之心 于何其臻 저
사람들 마음은 어디까지 오르겠는가
曷予靖之 居以凶矜 언제
내가 일 맡을까 흉한 일에 빠진다네
세상은 어지러워 누군가가 나서 세상을 구제하여야 하는데 뾰족한 방도가 없어 보인다. 내가
나서도 세상이 안정되기는 어려워 보이고, 그렇다고 나서지 않을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비의
마음을 그리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