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원 화성 연혁 1) 수원화성의 사회적 배경 조선 후기 경제 사회의 변화상은 대동미제도의 실시와 상평통보의 발행은 이를 촉진시켰으며 교환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은 일반 미술품뿐만이 아니라 민속품까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상업의 발달은 수공업을 발달시킨다. 이렇게 생산력이 향상되자 의학이 발달되어 인구가 증가했을 뿐 아니라 당시 발달된 중국의 과학기술이 도입된다. 우선 농토를 넓히기 위한 개간의 방법으로써 토목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측량 기술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이런 것들이 이미 예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측량 기계의 개량으로 말미암아 장거리의 삼각 측량 기술이 진보한다. 이같은 필요성은 1441년 창안된 자동측정기계인 기리고차,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측량기구인 규형, 인지의와 같은 것들이 도입됨으로써 건설물의 양적 관계를 정확히 계산하고 건설 사업을 보다 세밀히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제고되었으며 정확한 도면의 제작을 요구했다. 동시에 각종 새로운 도법이 시도되었다. 원근법, 투상도법 등이 두 가지를 적절히 섞는 방법, 축적법, 시점을 옮겨가면서 양면을 볼 수 있게 만든다던가(측시, 사시)혹은 뒤에 있는 물체가 더욱 크게 보이게 한다던가 하는 방법(역원근법)들이 시도되었다. 이와 같이 18세기는 생산력의 증대에 힘입어 신분제도가 무너지고(실제적으로는 양반 계급의 확대로 나타난다)서민 문화가 발달한다. 곧 예술에 있어 봉건적 고전양식을 마무리하고 근대를 여는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1794년(정조 18년), 갖은 파란 끝에 왕위에 올라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조선22대 임금 정조는 한양 남쪽 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수원성’은 일제 시대 이후 붙여진 별명이며 원래의 정식 명칭은 ‘화성’이다.)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어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조시대에 건설된 화성 즉, 수원성은 우리 민족 문화의 위대한 성과물 중 하나이다. 전장 6km에 달하는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 계획도시 수원의 건설은 조선 역사상 서울 건설 이후 가장 대규모의 도시 건설 사업이었다. 벌써 준공한지 202주년을 맞은 이들 문화 유산은 남아 있는 유적과 방대한 관련자료에 따라 언제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원형을 회복시켜 보호하면서 적절히 활용한다면 화성은 수원의 개성적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의 확고한 토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측성시에 거중기, 녹로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 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고, 축성당시의 성곽에 대한 설계도면 및 축성공법, 소요물자, 참여인원의 이름, 작업일 등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라는 완벽한 공사보고서를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당시 수원화성의 성역은 차원높은 도시 건설사업으로 인공과 자연의 조화, 기능과 외관의 겸비, 비상시와 평상시의 상보적 결합, 외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융합등 18C 조선조 문화 중흥기의 역량이 총결집된 걸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민족문화의 위대한 금자탑중 하나이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의 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부가 파손 소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대부분 원상태로 보수, 복원하여 총 48개의 시설물중 41개의 시설물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때, 선왕인 영조(제21대왕)의 둘째 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후 장조로 추존)에 대한 효심의 발로에서 축조한 성으로 ‘수원성’으로 불리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당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현재의 ‘융능’)하고 근처에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기복사(祈福寺로 용주사를 지어 부모은중경 등을 하사하였으며,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수원화성은 아버지의 묘소인 ‘현릉원’을 지키기 위한 정조의 효심으로 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도성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과는 달리 평산성의 형태로 정치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함께 갖추도록 설계되었고, 십자로의 건설등 대도시로서의 도시기반시설을 갖추도록 하여 도시계획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2. 화성의 정신 화성에는 정신이 살아 있다. 화성은 성으로써의 기능으로 본 정신뿐 아니라 화성의 잉태부터 축성 과정, 그리고 그 완공에 이르기까지 화성에는 정신이 살아 있다. 세상 어느 물질이든 정신이 들어있지 않는 것이 없겠지만, 또 나라 안의 여러 성들에도 나름대로의 정신이 깃들어 있지만, 수원의 화성은 뭇 성들과 다른 소중한 정신들을 지니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위한 군사적인 목적에서의 일반적인 성과 울타리로서의 성, 이런 보편적인 정신은 다른 성의 성격과 같은 것이지만 화성의 정신은 다른 여타의 성들과 구별되는 바가 많다. 1) 효의 정신
반계의 탁월한 견해는 당시 화성의 공역에 참여한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실학자들을 우대한 정조 자신이 백 여년 전 반계의 연구에 깜짝 놀라서 포상을 내리기에 이른다. 정조의 효심이 같은 시기에 작용하여 수원의 신도시 건설은 시작되었지만 그 도화선은 역시 사도세자의 묘원 천장에 심혈을 기울인 정조의 효심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모친, 혜경궁 홍씨에게 보인 효성도 수원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그래서 화성의 정신들 중에서 효성을 가장 먼저 꼽았다. 2) 실학의 정신 우리 나라에서의 실학이란 17세기 초 조선에서 형성되어 전개된 진보적 사회 사조 및 학문 연구 방법을 의미한다. 당시 양반 출신의 선진적인 지식인 계층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서양 자연과학 사상이 영향 아래 사물 혹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첫째, 부국 유민을 위하여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의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둘째, 조선의 역사, 지리 풍속, 언어, 문학을 연구하였다. 셋째 천문학, 수학, 물리학, 의학, 농학 등의 자연 과학 지식을 연구하였다. 결국 실학파 학자들은 실제 생활과 생산에 유리하거나 유용한 학문을 모두 실학 연구의 대상과 내용을 삼았고, 그렇게 해서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물론 당시의 학자들이 실학이라는 별개의 학문을 따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생활에 쓰이는 학문을 지향해야 하는 당위성은 팽배해 있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조선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으며, 서양의 보다 진보된 과학과 기술은 공리공담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자리 잡았다 이런 실학의 극성기에 화성이 건설 되었다는 것은 곧 화성이 실학의 산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실학자 우대 첫째 수원부 읍치소를 과감하게 옮긴 점은 수원의 출발부터 실학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산의 사상을 존중하여 성설을 받아들여 활용한 점이다. 둘째 거중기, 녹로, 활차 등의 공사 편의 기계를 제작한 점이다. 셋째 사용한 점은 실학이 화성의 모토가 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국가를 보다 공고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수원이 바야흐로 조선 실학의 실험장이자 연구장 이라는 의미도 되겠다. 중국에서 보아온 벽돌집의 구조와 효능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화성 건축에 실현한 점도 수원 실학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조선은 첨단 과학 도시를 소유하였던 것이다. 곧, 수원은 그 출발부터 첨단을 지향한 신도시였다. (2)기계 및 기기 개발 화성을 설명할 때에는 꼭 거중기가 거론된다. 서양의 진보된 과학 기술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중국의 기기도설 중 거중기에 관한 부분이라면 다산의 거중기는 보다 더 발전된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용적인 거중기였다. 조선의 모든 문화 역량이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도 특화 시켜나간 한 예이다 그런데 거중기에 이르면 서양의 과학 기술마저도 녹여내어서 조선의 과학 기술로 빚어 놓는 놀라운 과학적 능력을 보인 것이다. 거중기의 사용은 성벽의 축조에는 거중기의 사용이 필요 없을뿐더러 거중기를 이동하여 설치하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므로 화성의 중요 시설물 중 무거운 자재를 들어 올릴 때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3)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축성 조선의 절정기에 화성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실질적이고도 실용적인 시설물의 건설은 어떻게 하면 행궁을 보위하면서 주민들의 생업을 보살필 것인가가 축성 계획의 기본이었을 것이다. 동서남북 성문의 배치에서 볼 수 있듯이 주민들의 생활과 보호를 위해 시설물들을 가장 정당한 위치에 설치하였다. 사대문 말고도 다섯 개의 암문이 화성에는 시설되었으니 이는 곧 전시의 고립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큰 뜻은 주민들의 보호에 있었다고 해야 한다. 성 밖으로 외출할 때 일일이 성문을 통과하기란 사실 꺼림칙한 일이다. 그러나 암문을 통과하면 이를 어는 정도 해소 할 수 있다. 문으로만 보아도 실용적인 성임을 알 수 있으니 다른 제도도 이에 대입해서 실용성을 찾아보아야겠다. 4) 과학의 정신 조선시대 유생들의 학습 내용에는 이성훈련, 감성훈련 있었다. 이성교육은 문, 사, 철, 감성교육은 시, 서, 화로 되어 있어서 학문의 균형을 지켰다. 5) 축성 계획에 과학성 도입 본래의 화성 축조 계획은 토성으로 건설하는 방안, 새 수원부의 근처에 질 좋은 화장석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석성으로 계획을 수정하였으며 벽돌의 부분적인 사용이 확정되었다. 또한 여러 전란에서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여 치성의 정확한 설치, 포루의 설치, 옹성이 설치, 여장의 크기와 넓이 및 높이까지 산출해내었다. 거대한 문루를 자랑하는 장안문과 팔달문의 경우, 초대형이 무지개 돌문을 설치하는데 있어서도 정확한 작도와 시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텐데 이를 완벽하게 시설한 점은 과학 건축의 한 측면을 보이는 것이다. 6) 기계의 사용으로 인한 공기 단축 다산은 기기도설을 보고 참작하였을 뿐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 냈다. 8개의 도르래를 사용하여 공기의 단축이라는 과학성도 중요하지만, 작업자의 안전도에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유형거를 개발, 녹로나 활차등의 개발도 화성 성역의 공기를 단축하는데 한 몫을 한다. 7) 벽돌등 신소재 사용 벽돌은 잘 구워 시공만 잘하게 되면 석성보다 견고하다. 석성은 적의 중화기로 공격을 당하게 되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폐단이 없지 않으나, 벽돌로 쌓은 성은 같은 파괴력에 의해손상을 입더라도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은 부위만 허물어져 내리고 보수도 용이한 장점이 있다. 그래서 화서의 건축가들은 화성의 시설물과 성벽 중 중요한 부분에는 예외 없이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의 사용은 자재의 규격화와 대량 생산성, 그리고 성벽이나 시설물의 형태에서도 효용이 드러나서 멋들어진 곡선을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탁월하다고 하겠다. 8) 기록 정신 화성은 이제 세계가 지켜야 하는 문화유산으로 격상되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된 큰 이유는 바로 화성 성역 의궤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아무리 戰禍를 입어 성이 훼손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화성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복원할 때, 이 화성성역의궤가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화성성역의궤를 화성의 시설과 화성을 건설하기 위한 방략이나 문서들을 총망라한 책이라고 한다면, 원형을 묘정리의궤는 화성에서의 행사를 어떻게 치렀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전자가 그릇과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과 그에 관한 상세를 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책은 화성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이다. 즉 화성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위의 두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1)공사 실명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석판이다 감동은 누가 했고, 석수는 누구 등 몇 명이라고 새겼다. 이 실명판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첫째, 과거로부터 돌 일을 하는데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새기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둘째, 감동이라는 직책의 이름인데, 요즘으로 치면 감리 혹은 감독이라는 뜻일 것이다. 조선에서는 커다란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감동관을 임시로 두었는데 대개는 퇴역 관리가 맡는 것이 상례였던 듯하다. 셋째, 석수 아무개 등 몇 명이라고 새겨 놓은 글인데 여기서 우리는 공역자들의 수평적 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틈만 있으면 수직적구조를 생각해서 승진을 위한 암투를 끊임 없이 벌이는 지금의 속성에서 귀중한 한 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2)모든 공역 참가자 작업 일수 등 기록 공사를 시행하면서 각 공역소 별로 일지 형태의 등록을 작성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들을 취합하여 의궤를 간행했으니 살아 있는 기록이 된 것이다. (3)계획, 진행 등의 공문서 정리 화성이 건설이 논의되는 궁중 회의부터 관공서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 그리고 국왕의 지시 사항까지 수록한 것은 화성의궤가 단순히 국한된 공사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정조의 생각을 피부에 와 닿게 느낄 수 있으며, 당시 조정의 움직임과 지방의 형편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9) 관리 및 경영 정신 오백 칸이 넘는 행궁을 건설하면서 전체 길이 5.7킬로미터의 성을 축조 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공사였다. 이런 공사를 차질 없이 완수했다는 것은 조선의 극성기에 무르녹아 있던 여러 가지의 자질들이 농축된 결과이겠고, 그 중에서 경영과 관리의 능력 또한 최대,최고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화성이 경영과 관리 능력은 아무래도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진경 문화와 실학의 토대 위에, 전래된 매운 손 맛과 직관에 의한 자연관, 그리고 단일 민족으로서의 유구한 경험이 최고조에 올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10) 자연 존중 정신 우리에게는 옛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 하나 있는데 모든 인공적인 시설물에 자연의 숨결을 집어넣는 것이다. 절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동화되는 건축을 지향해왔던 것이다. 자연의 모습을 다치지 않게 하려다 보니 위압적이거나 거부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건축 형태였다. (1)자연 지세를 이용한 축성 원칙 어떻게 해서든지 자연과 어울리는 성을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성을 쌓으니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 절묘한 곡선이 나왔다. 구불구불한 성벽은 마치 병풍의 원리로 구불구불하니까 이 성벽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게 된다. (2)나뭇잎 모양의 평면 구조 축성 화양루라는 각루를 하나 세웠다. 여름에 여기에 오르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또 용도는 치성에 해당하기도 해서 성벽을 타고 넘나드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 할 수 있고,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은 이런 삼중 사중의 꾀가 중첩되는 힘인 것이다. (3)각 시설물들의 주변 여건 동화 적당한 거리감과 주변의 지세에 걸맞은 크기, 그리고 시설물과 시설물의 시야 확보까지, 엄밀한 계산에 기초하고 자연에 의지한 시설물이라 할 수 있다. 지세와의 관계 첫째,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각 시설물이 있으면서 주변의 여건에 순응했다 둘째, 다중의 효과를 토대로 건설했다.
3. 화성의 건축 화성의 건축은 과거의 축성 제도를 보완한 절정기의 축성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행궁의 건축은 기능적이면서 아름답게 짓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행궁의 거의 모든 건물은 팔달산의 동쪽에 의지하므로 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객사만은 그 제도의 특성으로 남향했다. 수준 높은 화성의 건축 이면에는 당시의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뒷받침했다. 행궁 : 화성의 행궁은 국왕이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수원에 행차하게 되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또한 수원을 다스리기 위한 관아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따라서 화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행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이다. 실제로 화성의 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행궁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1) 실학자들의 연구에 따른 실천 지금의 수원은 출발부터 실학 사상을 깔고 있었다. 실학의 비조하고 일컬어지는 반계유형원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지금의 수원을 지목해 당시의 수원은 접합치 않다고 갈파했고, 실학자들의 연구와 실천에 따라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서양이 일찍 감치 과학을 근거로 실학을 실천했기에 오늘날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점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 기존 수원읍의 이전 서울 답십리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부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기존의 관아와 주민들의 이전은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주를 위한 보상을 했다. 그리고 수원부에 구금되어 있던 죄수들을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석방했으면, 수원 사람으로서 유배 중이었던 사람들도 모두 특별 사면했다. 이는 단순한 보상 정책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특혜하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면서 자신의 고향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해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수원 프로젝트를 통해서 정조는 정치적으로 왕권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여진다. 3) 상업 시설 신설, 세제 지원 새 수원으로 이주하는 농민들에게 10년 동안 면세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수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상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관아 가까운 곳에다 5일장을 열어 장세를 받지 않으니 사방의 장사꾼이 몰렸고, 인삼과 관모 등의 독점 납품권을 수원 상인들에게 주었다. 또 서울의 부호 삼십 호를 모집해 무이자로 1000냥씩을 대부해 집을 짓게 해 팔도록 하고 원금은 분할 상환케 했다. 건설 경기를 활성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기와집을 짓도록 유도하기 위해 관아에서 기와를 구워 원가로 팔았다. 전주나 안성 못지 않은 상업 도시로 수원을 키우려 했던 것인데 이는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4) 농업 생산력 극대 위한 농업 시설물 확충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리 시설이 가장 중요하다. 정조와 실학자들은 이를 특히 주목해서 만석거와 축만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수문과 수갑을 설치, 수원을 농업 연구의 핵심이 되게 하는데 근본을 제공한다. 그리고 대규모의 둔전을 두어 농업 생산력 제고를 위한 연구도 병행하는데 만석거 아래에서 그 물을 받아 농사짓는 대유둔과, 축만제 아래의 서둔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원은 농업 연구의 중심 도시이니 이도 결국 화성 건설의 연장이라 할 것이다. 5) 자립 도시 기반 확립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주민의 생활이 윤택해진 가운데 상업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니 수원은 자립할 수 있는 근거을 갖게 되었다. 정조 자신이 수원에 내걸었던 ‘호호부실, 인인화락이라는 말처럼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자립은 수도를 보위하면서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는 도시 기반이었을 것이다. 6) 조선의 문화가 농축된 건축 오백 여년의 조선 역사에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탄생 되었지만 화성의 건설은 단연 으뜸이라 할 것이다. 이는 농축된 문화적 능력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결과다. 그러니까 조선의 웅집된 문화적 능력은 화성을 위해 오르막길을 내닫다가 극점에 이르러 화성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화성의 건설 이후로 보이는 정치적, 문화적 쇠퇴는 거꾸로 화성을 극점에 올려 놓는 아이러니를 낳고 말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삼국 시대의 절정들이 나라들의 멸망 직전에 완성되고, 통일신라의 절정은 불국사와 석불사의 건립, 그리고 고려의 절정기는 팔만대장경의 판각과 고려청자의 생산을 들 수 있다. 이 모두는 절정기에 쏟아진 문화유산이다. 각 시대마다 문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절정을 거친 이후에 보이는 급속한 쇠퇴는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는 것이다 역사는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1)진경 문화의 보고 관념적이고 유희적인 문화가 아니고 실제의 문화, 실용의 건축, 당 시대의 조선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다. 실학이 진경 문화를 뒷받침하는 철학을 맡았으니 진경 문화의 절정에는 이성적인 토대 위에 감성적인 결과가 있었던 것이다. 화성의 건축물 중 어느 하나라도 극점에 선 진경 문화가 농축도지 않는 것이 없으니 화성은 가위 진경 문화의 보물 창고라고 할 것이다. (2)당대 제일의 예술, 문화인, 학자 총동원 국왕의 적극적인 의지와 관료들의 경험, 그리고 시대적 여건은 화성을 건설에 당대 제일의 예술인, 문화인, 학자들의 총동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인들과 번암 체제공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학자 정치인들이 그들이다. 7) 도시 건축의 미학 역시 공사 착수 3개월 전, 정조 17년(1795년)12월6일 왕은 채제공, 조심태를 창덕궁 성정각에 불러 놓고 수원성의 기본 형태 및 시공 방안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명시한다. 첫째 성의 전체 형태는 원형이나 네모꼴로 해서는 안되고 또 외관만 살린 꼴이 되어서도 안되며 모름지기 지세의 이점을 살릴 것, 둘째 공사시에 기중, 인중지법을 연구하여 자재를 운반하는 수고를 덜도록 할 것, 셋째 성벽은 솟아오르는 처마 모양(의궤에 기록된 규형)으로 할 것이며 화원을 대동하고 가서 성지 뿐 아니라 읍내 마을 주변 산세 그리고 인가의 크고 작은 형세를 상세히 그리고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신원까지 확인해 오라고 한다. 형태는 미관보다는 구조적인 모습일 것과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계, 기구의 사용을 적극화할 것을 명령한다. 정조는 신읍을 옮긴 이듬해, 수원이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방책을 세우라고 채근한다. “첫째 가로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전포를 세우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으니 서울의 부호 수 30호를 모집하여 무이자로 1000량씩을 대부해 주고 이들로 하여금 신읍에 서로 마주보고 집을 짓게 한다. 둘째 이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으로 만들며 기와를 굽는 방책은 별도로 정부에서 마련한다. 셋째 읍치 옆에 5일장의 장시를 개설하여 한푼의 수세도 걷지 않고 자유롭게 장사하도록 한다. 8) 도시 공간의 미학적 분석 정약용은 규정에 따라 성을 직경 1200보, 둘레 3600보로 계획한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남북 대문의 거리를 1000보로 하는 곧 1000보의 원에 외접하고 1200보의 원에는 내접하는 성곽을 계획한다. 외성은 내성보다 50보 정도 크게 하자고 하는 것이므로 직경1100보 원에 외접하는 성곽을 생각한 것이겠지만 실제 둘레는 5000보 보다 크지 안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직경 1500보에 내접하는 귀죽인 네모꼴 정도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외성은 회를 섞고 증기로 찐 토성으로 만들며 시공은 구간별 도급제로 맡기자고 주장한다.필경 수원성은 외겹의 평산성으로 되었으며(대부분의 읍성은 방형성으로 많이 쌓았다)성벽은 주로 외탁만 했지만 문루 주위에는 내탁이 있는 협축을 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성벽을 높게 하는데 치중했지만 후기에는 전쟁에 포화력이 적용되는 새로운 전법에 맞게 그 두께는 두껍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9) 건축 공간의 미학적 분석 (1)문헌상의 분석 팔달문, 장안문, 방화수류정, 동장대, 서장대 등의 주요 건물은 공사의 진행이 빨라 거의 기공 후 일년내에 완성되었으며, 우진각지붕은 신중한 형태로 여겨졌으므로 주로 왕실과 관련이 깊은 한양 4대문과 여기 수원의 남북성문에만 허용되었다. 지방의 도시 성문은 모두 합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사실과 비교하면 정조의 장중한 아름다움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남북 대문에는 도성에서만 쓰일 수 있는 잡상을 시설함으로써 당시의 백성들로 하여금 혹 도성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전승 설화를 만들어 내게 했다. 반계의 합리주의적 미학을 그대로 계승하여 채체공 역시 부호 수 30호의 전방을 계획적으로 서로 마주보게 배치하고 관부에서 집을 지어주되 기와집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특권을 주고 계원이 되게하되 이들은 반드시 성내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하며, 초가집이나 지어서 다시 개축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상신한다. 이어 이들20호의 계원은 대로의 남북에 기와집을 크게 짓되 열을 지어 붙어있게 하고 거리의 모습을 닦고 단장하여 서울과 같이 번화하게 한다. 도시적인 형태의 도시 미관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2)건축의 도학적 분석 수원성곽인 경우에는 화성성역의궤 분수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곽의 크기는 물론 자재까지도 규격화, 모듈화 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수원성에 지어진 여러 시설물들은 기록된 건물의 치수를 보거나 실측된 도면을 관찰하면, 이것이 대단히 대칭적이고 규격적으로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석의 틀은 당시의 건축은 대단히 발달된 도학에 뒷받침도면서 평면 구성과 입면 설계가 하나의 기하학적 분수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공간을 면이 아닌 3차원의 세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으며 이것이 해체적이 아닌 구성적 공간조직으로 계획되었음을 입증한다 하겠다. 10) 건축 기술 및 신 재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값싸게 건설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당시의 절실한 요구였다. 인원을 동원하는 것이 곧바로 국가의 세금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도급 방법도 비록 임금에 한한 것이기 했지만 상여금 제도를 써서 대단히 빠른 공사 진척과 공사비 절감을 가져왔다. 특히 신재료로써 벽돌의 사용은 도급액을 결정하는 데 대단히 유용했다. 다산은 돌을 벽돌처럼-사고석 쌓듯-만들어서 규격화하자고 했지만 실제로는 벽돌을 만들어 썼다. 신기술은 비단 벽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통적인 목구조에도 적용되었는데 철물이 대단히 많이 쓰이고 대신 목구조의 결구 방식이 대단히 간략화 되어가고 있었다.
4. 화성의 특성 1.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읍성 제도를 따르면서도 공심돈․포루․노대 등 전례에 없던 새로운 방어시설을 충실히 갖추고 있어서 읍성과 방어성으로서의 다양한 기능을 갖추었다. 그리고 도성의 외곽을 방비하는 군사도시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수행할 수 있었다. 정조 22년(1798년) 장용외영의 편제가 5위-속5위체제로 일대 개편을 보면서 화성4대문을 중심으로 5위의 군사가 배치되고 화성 성곽은 장용외영의 본거지로서 군사 적 의미가 한층 강화되었다. 2. 화성성곽은 서울 도성처럼 산지대에는 산성과 같이 읍성을 쌓고 그 안에 도시가 형성되도록 설계했는데, 이것은 경성성(京城城)․경주성(慶州城)과 같이 방형(方形)으로 쌓는 축법과는 대조적이다. 3. 화성 성곽은 석축과 전축을 적절히 조화시켜 고구려이래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성곽 건축기술을 한층 근대적인 양식으로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각 시설물은 유사시와 평상시의 실용성을 고려하여 어느 경우나 그 기능을 복합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역시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그 견실한 기초와 축성법, 다양한 기능을 가진 시설물은 과학적인 축성기술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아울러 갖춘 조선시대 최고의 성곽건축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4. 화성 축성에는 국왕 이하 관료․지식인․예술가․백성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고, 또 이 시설물은 중흥의 극점에 달했던 정조대의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되어 이룩해 놓은 역사적인 건조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숭상하던 국왕과 진보적인 실학 사상가들의 이상이 합치되어, 그 실험적 성격과 고전적 의미가 잘 어우러진 성곽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무엇보다 화성 성곽은 원침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성내 중심부에 건립된 왕의 행행(幸行) 때 머물던 행궁을 수비한다는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장용외영이라는 국왕의 친위군영이 주둔한 이 성곽은, 왕권강화와 혁신정치, 문운의 융성을 아울러 도모하려고 했던 정조의 정치적 위용과 장려함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철저히 계획된 조선시대의 신도시 ‘수원’ 서울은 무학대사가 풍수에 의해 좌청룡 우백호의 위치로 자리잡은 도시인데 반해수원은 풍수와는 아무 관계없이 다른 목적과 의도로 지은 도시이다. 오늘날의 분당이나 일산처럼 계획된 신도시였던 것입니다. 수원은 지금 용주사가 있고 융릉, 건릉이 있었던 곳이 원래의 수원 고을 자리였다. 현재의 융릉, 건릉 매표소에서 조금 가다 보면 재실이 보이는데 그 재실이 옛날 수원의 관아 자리였던 건물을 고쳐 지금의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백여년 전 수원 고을에는 2천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나라에서 이주명령이 떨어졌고, 이에 북쪽으로 약 5㎞정도 올라가 팔달산이라는 곳 주변으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 대신 이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비를 주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현 시립대학 옆 배봉산에 무덤을 쓰고 그 후 정조가 왕이 되어 사도세자의 묘를 다시 쓰는데 수원 고을의 뒷산이 알아주는 명당이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의 팔달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두 달후에 무덤을 옮기는 일을 하고 정조가 직접 내려와 절을 하고 올라가는데 왕이 오기 전에 신도시 수원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정조대왕의 왕권강화와 수원 화성 최근까지 정조가 수원을 옮긴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효심은 하나의 구실이며 수원 화성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계획 도시로 지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18세기 당시 서울 유기전의 경제력과 대응할 수 있는 상권을 형성하기 위해 서울 종로와 같이 수원에도 종로 사거리를 만들어 놓고 그 곳에 서울과 같은 거대상권을 형성하여 경제력이 막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왕이 이곳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계획은 정조가 한 것이 아니라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이미 필요성이 주장된 바 있었다. 왕이 물러나 있더라도 군사가 있어야 하므로 맨 먼저 한 일이 왕의 호위군인 장용영의 절반을 수원으로 보낸 것이다. 수원 화성을 쌓기로 결정을 한 뒤 그 설계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당시 31살 된 다산 정약용에게 성곽 설계를 맡기게 되었다. 물론 정약용은 설계를 해본 적이 없는 학자이기 때문에 왕이 왜 설계를 맡겼는지에 대해 의문이며 다만 수원 화성을 조선에 있는 일반적인 성곽과는 다른 성곽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3)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건설 도시공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1898년 영국의 Ebenezer Howard 에 의해 전원도시 혹은 신도시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이후인 반면, 화성의 건설은 그 실천보다는 150여년이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더구나 화성은 신도시, 혹은 전원도시의 개념과 맞아 떨어지는데, 이는 첫째, 수도인 한양을 모도시(母都市)로 해서 계획적으로 조성한 위성도시였고, 둘째는 신도시의 번성을 위해 수도의 기능 일부를 이전했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자족적인 도시로 키우려고 했다는 점 등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0세기 후반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불어 닥치는 신도시의 열풍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대개의 신도시들이 잠만 자고 생활은 수도에 가서 행하는 베드타운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세계 최고의 계획된 신도시 화성은 서구의 구상보다 100여년 앞서 훌륭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4) 실학적 사고가 깃든 화성의 건축적 특성 수원 화성은 담이 낮은 읍성이나 산성의 개념보다 읍성을 높고 튼튼하게 쌓아 여기서 버티도록 하자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신진 학자들에게 이것을 맡겨서 외국의 선진적인 성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튼튼하고 영구적인 성곽을 쌓을 수 있는지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또한 왕실에 있는 여러 가지 책들을 보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성곽의 장점을 많이 참고하도록 하여 새로운 성곽을 쌓게 했던 것이다. 거기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밖에서는 높고 안에서는 흙을 조금 돋우면 밖이 내다보이는 우리 성의 특징과 장점을 살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대신에 성벽에 올라오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곳도 만들고 유사시 공격 시설도 만들게 했다. 워낙 취약한 곳이 성문이기 때문에 성문을 이중으로 쌓기도 하고 화재 발생 시 끌 수 있도록 방화수도 준비하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화성의 건축적 특징중 하나로 벽돌 이용이 있다. 18세기 당시에는 나라의 큰 목재들은 벌목으로 인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큰 재목을 주로 쓰는 관리들이나 양반들은 걱정이 없지만 백성들은 집 짓는 것부터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벽돌집은 흙으로 지으면 되기 때문에 실학자들은 ‘나라에서 벽돌을 굽기 위한 가마를 지어야한다’ 고 주장했지만 관리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실학자들이 그 공사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실학자들은 ‘이번 기회에 벽돌을 적극적으로 축성에 이용하면 벽돌 굽는 가마도 많이 생기고 차츰 벽돌이 보급 될 것’ 이라는 생각으로 벽돌을 여러 곳에 활용하였다. 새로운 구조물도 만들었는데 건물의 기둥은 목조로 하고 벽은 전돌로 쌓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처음 하는 시도였지만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수원 화성 축성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거중기’이다. 힘을 적게 들이고 일의 능률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지금의 '기중기'와 같은 장비를 고안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성벽 위까지 돌을 올릴 수 있는 실용적인 기계였던 셈이다. 또한 돌싣는 수레도 만들었는데 백성들이 돌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덜어주는 목적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초기에 백성들에게 강제 부역을 많이 시켰는데 18세기쯤에는 백성들의 의식이 점차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강제부역의 논리가 먹히지 않게 되고 부역도 많이 사라져갔다. 수원 화성 축성 때에는 인건비도 많이 들고 일의 속도나 능률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장비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정약용 선생이 거중기를 이용해 2년 반만에 길이 5.5㎞되는 성벽과 이제까지의 성벽과는 다른 튼튼한 방어력을 가진 성곽을 쌓도록 했다. 5) 격식있게 지어진 성곽의 특징 북쪽의 문으로 나가면 서울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충청도, 전라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그 곳에 도시를 만든 것이다. 열십자로 모이는 곳에 종로가 있고 큰 길 따라 개천이 흐르고 여기에 정조 대왕이 나중에 내려와 머물고 했던 ‘행궁’이 있다. 성곽이 약간 들어가 있는데 이것 역시 서울의 반듯한 성벽과는 다른 점이다. 또한 배가 부르지 않도록 성벽 군데군데 불룩한데 이것은 근처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문마다 한겹 더 울타리를 쳐서 문에 직접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서울 남대문 지붕을 보면 ‘추녀마루’라고 부르는데 용마루라고 그냥 쭉 내려와 있는데 수원의 문도 쭉 내려와 있다. 이렇게 생긴 문이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하고 수원의 장안문, 팔달문 밖에 없는 것으로, 다른 보통 문들은 ‘박공’이라고 해서 판대기나 돌로 막고 있지만, 수원의 북문과 남대문만이 긴 추녀마루를 가지고 있는것이다. 이런 긴 추녀는 북경의 천안문이나 자금성 같은 권위있는 곳에만 쓰고 있으며, 수원 화성이 얼마나 권위있고 소중하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좀 특이한 모양으로 ‘돈대’라고 불리는데 일종의 망루가 있는데 이 돈대의 안은 비어 있고 빌 ‘공(空) 마음 ’심‘(心)을 써서 ’공심돈‘이라고도 불렀다. 그 속에는 온돌방도 있고 군사 숙직실도 있다. 또한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중간 중간에 돌출되어 있는 곳은 감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한쪽에 물이 지나가는 곳에는 아치를 만들어 물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고 한적한 경치를 꾸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언제나 정자와 누각이 있듯이 이 곳에도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누각은 ‘ㄱ자’로 꺽이면서 안에 다시 돌출 부분이 생겨서 지붕 부분이 다시 복잡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이 누각의 큰 특징이다. 평면도 불규칙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목조건물에서 벽돌건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들도 보인다. 특징으로는 목조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벽돌을 가지고 메꾼 모습들이 그러하다. 그 중간 모양을 재미있게 만들어 놓기도 했으며, 동그란 아치문을 내고 목조기둥 사이에 벽돌을 채우고 벽돌부분은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십자형의 모자이크 모양을 살려두었던 것이다. 6) 화성은 18세기 문화예술의 정수, 아끼고 보존해야... 김홍도가 그린 그림으로 서장대와 행궁이 있고 중간에 성벽과 방어시설들이 담겨 있다. 사열식을 했던 건물이 서장대라고 하는 건물이며, 서쪽 산꼭대기에는 군사지휘소 건물이 남아있다. 이 수원 화성은 그 당시 18세기로서는 회화라든지 환갑잔치에 대한 문화적인 행사 또 축성기술 이런 것이 하나로 모인 종합 예술의 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5. 성곽답사 1) 화성의 여러 시설들 수원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편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처진 곳이다. 이 동서의 구릉 사이 평지에 수원부의 시가지가 전개되고 있으며 시가지를 둘러싸면서 성벽이 팔달산의 정상으로부터 반대쪽 구릉의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벽의 대부분은 경사지의 지형에 따라 불규칙하게 굽어지고 성벽의 높이도 일정하지 않다. 이러한 수원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바로 우리 나라 성곽이 갖는 독특한 점인데 이 점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우리나라의 성터는 거의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그런 까닭에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인공으로 쌓는 비용이 들지 않고서도 자연히 안팎 성이 되는 셈이므로 굳이 안팎으로 쌓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성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데서 오히려 그 특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성 벽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내지 6미터로서 평균 5미터 내외다. 그리고 성벽 위에 높이 1내지 1.2미터 정도의 여장(女墻)을 쌓고 여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놓았다. 아랫부분은 큰돌로 쓰고 위에는 작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쌓았다. 이것은 규형(圭形)이라고 하는데 그 효과가 우수하다고 하여 취하였다고 전한다. (2) 성 문 수원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의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서울을 향한 북문이 장안(長安)문, 반대 방향의 남문이 팔달(八達)문, 그리고 동서에 각각 창룡(蒼龍)문이 있다. 이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거의 같은 규모, 같은 형태이고 수원성의 남북 대문을 하는 구실을 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장안문은 서울을 향하여 북향하고 서 있는데 돌로 높이 쌓은 사다리꼴의 육축(陸築)가운데에 홍예문(아치형 문)을 내고 육축 위에는 2층으로 된 장중한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전면의 옹성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인 문의 형태가 서울의 남대문과 흡사하다. 지붕은 이른바 우진각 지붕이라고 하는 각 처마가 한데 모여지는 형식인데 이것도 서울의 남대문과 같은 형식이다. 옹성은 장안문의 육축에 잇대어서 반원형으로 쌓았는데 성문과는 달리 모두 전돌로 쌓았다. 옹성 아치의 상부에는 오성(五星)지(地)라는 구멍이 다섯 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적이 성문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고 할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으로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장안문의 좌우에는 적대(敵臺)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장안문과 반대 방향에 남향하여 서 있는 팔달문은 규모나 형태가 장안문과는 동일하다. 역시 반원형의 옹성이 있고 문 좌우에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동문인 창룡문은 장안문에 비하여 문의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한 편이다. 창룡문에도 옹성이 있는데 아치문이 정면에 설치되지 않고 서울 동대문처럼 왼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다. 화서문의 제도는 창룡문과 거의 비슷하며 다만 성벽의 일부가 휘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에 맞추어 쌓았기 때문이다. (3) 암 문(暗門) 성곽에는 흔히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데 이것이 암문이다. 수원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곧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서남 안문, 남암문이다.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암문에는 일반적으로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 암문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포사라고 부르는 일종의 망루를 세웠다. 이곳은 팔달산 한쪽의 높은 곳이어서 성의 서남 방향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한 것이다. 이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안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사면에 관문을 대고 그 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4) 수 문(水門) 수원성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성내에는 개천과 성벽이 만나는 곳에 수문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수문은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 비교적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있어 동북각루를 세우는 등 장대하게 꾸몄으며 남수문은 소박하게 만들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아치형 수문이 있고 그 위에는 화흥문이라는 누각이 세워져있다. 누각 사면에는 분합문을 달고 동, 서, 남-삼면에는 난간을 붙였다. 북쪽은 바로 성 바깥이 되므로 전돌로 성가퀴를 높이 쌓고 여러 개의 총구멍을 내었다. 이 주변은 넓은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며 일곱 개의 아치문이 열을 지어 있고 그 위에는 시원한 누각이 장대한 모습을 자랑한다. 곧 방화수류정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연못이 있다. 이곳은 수원성내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칭송되는 곳이다. (5) 장 대(將臺) 성 주변 사방을 조망하면서 장병들을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 성의 안팎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다. 동장대는 성의 동북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지형이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언덕의 등성이가 솟아 있는 곳이어서 동쪽 구릉인 일명 선암산의 가장 요지이다. 1.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장병지휘본부로서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불리워진다 노대는 팔각으로 되어 각 방위를 알려주며 전쟁시에는 장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쇠뇌를 발사하도록 되어있었고, 군무소는 지휘본부의 사무를 처리 하던 곳이다. 2. 서노대 노대란 쇠뇌(석궁)을 쏠 수 있게 만든 곳인데 누각은 없으며 대를 여덟모지게 깍아 지른 듯이 축조한 것이 특색이다. 3. 동장대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연병장의 지휘본부이다. 이 장대가 위치한 곳은 등성이가 높이 솟았다. (6) 적 대 성곽의 중간에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적군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7) 공 심 돈(空心敦) 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이미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해안 주변에 설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심돈 곧 돈의 내부가 비도록 한 것은 아마도 수원성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수원성에는 서북 공심돈,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세 군데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다. 서북 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稚)위에 있다. 치의 높이 15척이고 그 위에 전돌로 돈대를 네모지게 높이 쌓았다. 남공심돈은 남안문의 동치위에 세워져 있다. 제도는 서북 공심돈과 같고 규모가 약간 작다. 꼭대기에 건물을 지었는데 서북 공심돈과 같고 규모가 약간 작다. 꼭대기에 건물을 지었는데 관문을 달지 않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동북 공심돈은 큰 원통 모양으로 수원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의 하나이다 동장대 옆 동북 노대 서쪽에 위치하며 중국 요동 지방의 계평돈을 모방하여 전돌로 둥그렇게 돈대를 만들었다. 계단이 나선형이기 때문에 이 건물은 흔히 소라각 이라고도 한다. (8) 각 루(角樓)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있는데 이를 ‘각루’라고 한다.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있다. 1. 방화수류정이라고 부르는 이 동북각루는 그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주변 경관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로,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북쪽 수문인 화흥문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간 위치에 있다. 아래쪽으로 용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벽에 대어서 용두라는 바위위에 누각을 세웠다. 이처럼 동북 각루가 위치한 지형은 전략상으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주변 경관도 뛰어난 곳인데, 여기에 또한 빼어난 건축미를 갖춘 누각을 세워 놓은 것이다. 건물은 2층 구조이며 상층은 사방이 트인 누각이고 성곽 위로 툇마루를 달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평면 형태가 매우 복잡하여 북측면은 팔각형을 이루고 남측면은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상층은 동서 세 칸 가운데 온돌을 놓고 북쪽에 길게 물리었다. 하층 벽체는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에는 전돌로 쌓고 성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었다. 이 건물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지붕의 형태이다. 평면의 형태가 복잡한 만큼 지붕도 단순하지 않다. 팔작지붕의 꺾이고 펼쳐지는 품이 여러 겹으로 전개되면서 우리 나라의 다른 건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외관을 보여준다. 더욱이 지붕 각마루의 희게 회칠한 양성과 그 위에 올려놓은 취두 그리고 지붕 한복판 위에 놓은 절병통 등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2. 서북 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산 위 휘어 굽은 곳에 있다. 동북3칸은 모두 판자를 깔았으며 4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 판문을 설치하였고 수면에는 모두 수면(獸面)을 그렸으며 전안을 뚫어 놓았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렸으며 그 서남 한 칸을 띄우고 층제(層梯)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다. 동남 1칸은 청판(廳板)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守直)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지평에서 누의 밑까지 1.95m(5척7촌)누의 높이 2.22m(7척5촌)이고 단청은 삼토(三土)를 사용하였으며 들보 위는 회(灰)를 발랐다. 3. 서남 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도 하는데, 성의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이 서남각루가 위치한 곳은 이른바 용도하고 하여 양쪽으로 성가퀴를 쌓고 그 사이에 군량을 운반하기 위한 길을 좁고 길게 낸 곳으로 서남 암문의 밖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서남 각루는 바로 이 용도 끝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건물은 경관을 즐기기보다는 방어의 요충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건물 자체는 미적인 조화를 잃지 않고 있으면서 요충지의 군사적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9) 포 루(砲樓)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 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모두 전돌을 쌓아 벽을 이루고, 위에는 작은 누각식의 건물을 올렸는데 수원성에는 서포루, 북서포루, 동포루, 등북 포루, 남포루의 다섯 포루를 설치하였다. 1. 서포루 성신엔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루와 같다.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아래에선 한번에 쏘게되어 있어 성곽시설물로서는 가장 중무장한 요새이다. 2. 동북 포루 각건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지세가 갑자기 높아져서 용두를 굽어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10) 봉 돈 봉돈은 행궁을 지키고 성을 파수하며 주변을 정찰하여 인근에 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다섯 개의 커다란 연기 구멍을 두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벽 일부를 치성처럼 밖으로 돌출시키고 아래는 돌로 쌓고 위는 전돌을 성벽보다 높이 쌓아 상부에 성가퀴를 두었다. 내부는 3층으로 만들어서 제일 높은 곳에 다섯 개의 화두를 설치하였다. 다섯 개의 화두 가운데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만 사용하는데, 저녁마다 남쪽의 화두에서 횃불을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 석상산의 육봉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수원부의 홍천대에 있는 바다 봉화독에서 응하게 된다.
7. 세계문화 유산등록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는 종묘,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창덕궁등 다섯개가 있지만 특히 수원 화성은 다른 유적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덜 소개된 점도 있는 것 같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선정 이유로 종묘는 제사지내는 대표적인 유적이기 때문이고, 불국사는 신라때 대표적인 불교문화이기 때문이다. 또 해인사 장경판전도 세계에 자랑할만한 불교 인쇄물이라는 이유도 있고, 궁으로는 중국과 다른 양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창덕궁을 선정하게 된 것 같다 , 한편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가 성곽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어서 대표적인 성으로 선정되게 되었다.
서울 성곽과 수원 화성이 비슷하지만 서울 성곽은 도로정비 등으로 성곽을 다 헐어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수원 화성을 선정한 첫 번째 이유는 성벽자체로 보면 거의 90%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돌을 어디서 가져오고 누가 어떻게 쌓고 하는 등의 성곽건립에 대한 시시콜콜한 기록들까지 잘 보존되어 있음이 그 이유라 하겠다.
유렵으로 여행을 가보면 그리스의 유명한 신전들이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보호받고 있다. 그것은 ‘베니스 현장’에 의해 ‘문화유적은 후대에 자꾸 복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자’ 라고 유럽인들끼리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2백년 전 공사를 하면서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을 남겨놨기 때문에 원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수원 화성은 손 볼 것도 많고 성안의 도심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문화재 보존으로 인한 시민들의 불편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불이익을 받더라도 문화재를 지키자는 시민 의식이 확산되어 다행히 잘 본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
출처: 너구리아빠 원문보기 글쓴이: 너구리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