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면(富利面) 불이리(不二里)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목으로서 고려말기 삼은의 한 사람으로 그 학풍을 높이 샀던 야은 길재가 어렸을 때 외가인 이곳에서 자랐으며 그의 신조인 불사이군의 뜻이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짐으로 불이리라고 불러오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평촌리, 양곡리, 현내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관천리와, 북쪽으로는 선원리와, 남쪽으로는 무주군 부남면과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불이리는 자리한다.
서북쪽으로 서낭당과 선돌이 있었던 서낭당고개가 있으며 금산읍에서 무주로 이어지는 국도가 서북쪽에 있어서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고려시대 초기 전후로 본다. 백제 때는 부시이현의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 초기에는 부리현에 속했다가 명종 5년(1175)부터는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지역이었으며 그 후 금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를 전후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영향과 개성 두문동의 영향아래 선비들은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보다 학문의 길을 택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원에 묻히는 생활을 선택함을 지당한 일로 생각하고 그 명문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의지아래, 이 지역에는 많은 선비들이 자리하게 되고 그 명문의 맥을 유지하는데 크게 빛을 본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동면의 지역으로 부아지 또는 불이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이정리를 병합하여 불이리라 하고 전라북도 금산군 부리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에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5.570㎢이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서 현내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들어가는 불이천이 있으며 해평길씨(海平吉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세거한다.
감무(監務) : 고려시대 현령(縣令)을 둘 수 없는 작은 현(縣)의 감독관. 1106년(예종1)에 유주(儒州:오늘의 황해도 신천(信川)), 안악(安岳), 장연(長淵) 등 41현에 감무를 두었다. 이 관직은 조선 시대까지 그대로 계승되어 오다가 나중에 현감(縣監)으로 개칭 되었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불이동, 배정이, 새말, 산탯골>
불이동
배정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불이동 또는 부아지, 불이리라고 부른다. 또한 백세청풍이라고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쇠비랑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성죽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도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들은 부아지들이라고 부른다. 길제의 백세청풍 비석이 서 있어서 불사이군의 뜻을 따서 불이동, 백세청풍이 변하여 부아지라고 부른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오룡골이라고 부른다. 해평길씨(海平吉氏)가 많이 세거한다.
배정이
불이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배정이 또는 이정리라고 부른다. 배나무 정자가 있었던 마을이라 이정리, 배정이라고 부른다. 금산에서 무주로 통하는 국도변 물이동에서 갈라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마을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세거한다.
산탯골
불이동 남쪽으로 정문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산댓골이라고 부른다.
새말
불이동 서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새말 또는 신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