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월 중국 성당에서의 최초 한국인 미사와 관련하여 종교 국 및 애국회와 상견례를 하였다. 변함없이 중국 측 과의 관계향상을 위한 본당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었다.
제4대 박 성진 요한 신부 재임 시에 이루어지게 되는 청도 중산로 주교좌성당에서의 미사봉헌은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싹 텄던 것이다.
그해 4월 청도 본당 설립 후 처음으로 청도 중산로 성당에서 제2차 세례식 및 부활미사가 거행되었다.
중국 성당에서 김 철재 바오르 신부가 집전하는 첫 세례식과 부활 미사였다. 첫 세례자는 서용원 페리오 (....)외 4명이었다. 그 뒤 첫영성체 교리를 실시하여 6월 28일 김 은영 카타리나 외(.....) 4명이 첫영성체를 모시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육신은 어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주님의 품에서 새롭게 영으로 다시 태어났다. 영생의 기쁨을 안겨주는 세례식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김 바오로 신부는 직접 자전거를 타고 신자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시부전에서 성양, 청도 신자들의 공장을 방문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기도하고 기도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8월 제1회 남성 피정이 교남 백과수 호텔에서 열렸다. 7명의 형제가 참석 하셨다.
제 2장. 본당 구축을 위한 행보
1. 제 2대 정삼덕 베네딕도 신부님(1998년 9월 ~ 1999년 12월)
초대 신부로 부임해서 중국 청도 천주교회의 기초를 다졌던 김 철재 바오로 신부가 1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9월 6일 한국 포항 홍해 본당으로 이임하였고, 9월 13일 2대 정 삼덕 베네딕또 신부가 성당동 성당에서 청도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김 철제 신부가 초대 교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 하면 2대 정 삼덕 신부의 시대는 본격적인 사목활동과 신심 단체의 활성화를 이룬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 신부는 지금도 신자들이 파워 있는 신부로 기억되어 있을 정도로 활발한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정삼덕 베네딕또 신부가 부임하면서 한인 천주교회도 좀 더 발전적인 변모를 하게 되었다. 좀더 효율적인 신자 관리를 위하여 본당의 교적을 만들기 시작 하였다. 더불어 본당 신자들의 영명 축일 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축일을 맞이한 신자들에게는 미사 때에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청도 성당이 1932년 창건 이래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99년 4월 18일 천주교당 보수기금 접수를 시작 하였다. 5월 1일 중국 청도 성당 루르나의 성모상 축성식 참석 및 성전 보수공사 관련, 신립기금 20,000원이 전달 되었다. 본당 신부와 사목위원 참석, 5월 완공 예정으로 인민페 약 160만원 정도 소요되는 대공사로 입구 확장 후 정원 조성이 이루어졌다.
사제관 구입
처음으로 사제관을 구입하였다.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노산구(현.이창구) 이촌의 아파트가 중국 기업에 팔려서 불시에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다시 이사한 금옥산장은 음침하고 누추하였으며 유난히 쥐가 많아서 살기에는 무척 불편하였다. 다행히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어서 온수를 쓸 수 있었는데 온수 사용 중 감전이 되어 정신부가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옮기고 또한 사목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은도화원을 구입하였다.
사제관으로 구입한 은도화원은 한국인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고 보안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사제관으로 적합하였다. 이사는 1월 20일에 이루어졌다.
한인 천주교회의 체계적인 운영관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10월25일 사목 협의회 회장단이 임명되었다.
제 2대 회장에 안 병철 바오로. 부 회장에 박광수 아우스딩이 임명되었다.
샹그릴라 호텔로의 이전
11월21일 성당 장소가 하이티엔 호텔 지하1층에서 샹그릴라 호텔로 이전하였다. 신자들이 늘어서 옮겼다고는 하나 그 외에도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 우선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지하 1층은 어둡고 또 빠를 함께 운영 했으므로 아이들과 드리는 미사에는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 하였다. 또 모든 미사와 행사는 우리 공동체의 뜻과 관계없이 호텔 측 편리에 의해서 이루어 졌고, 성탄 때나 호텔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호텔 측에서 몇 배나 비싸게 돈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돈의 소모를 감수 할 수 없었던 본당은 24일 성탄전야 미사는 하지 못하고, 그날이 지나고 그 다음날 25일에 호텔을 임대해야했다. 그렇게 우리의 뜻과 달리 이런저런 사정들에 얽매어 다니면서 성탄전야제 때에는 성극이나 연극을 했고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요일 미사 때에도 호텔 측에 사정이 있을 시에는 1층에서 2층으로, 호텔 측 편의대로 옮겨 다니면서 미사를 드렸다. 그러니 새로 오신 신자들은 장소를 잘 몰라서 미사 장소를 찾아 호텔을 헤매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므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2. 첫 견진성사와 첫 구역 결성
98년 11월22일 제 1차 견진 성사가 있었다. 북경 주임 신부인 김 영환 몬시뇰 베네딕또 집전으로 이루어졌다.
임철호 프란시스코 외 27명의 신자들이 견진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들에게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어 그리스도와 굳건히 맺어지는 견진성사를 받게 되었다.
98년12월24일 기준 반 구성과 신자 수 (유아 포함)
: 이촌반: 21가구 47명. 시내반:17가구 43명. 은도반: 11가구,35명. 동해안반: 8가구 21명,
합계:57가구 146명.
1998년 12월 24일 성탄 전야미사 및 성탄 축하 예술제가 하이티엔 호텔 지하 1층 저녁 6시에 거행되었다.
성탄 전야 미사는 구유안치, 촛불행열, 미사가 봉헌 되었고 이어서 성탄 축제 예술제가 열렸다. 전신자의 촛불 입장 행렬이 들어서고, 평협 회장의 개회사, 김 요한의 축시가 낭독되고 예술제 막이 오른다. 유년부와 초등부, 청소년부위 성가와 무용 발표회가 다채롭게 펼쳐져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덥혔고 성탄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려주었다.
지역 반별 연극 공연이 펼쳐지고, 아마추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진지한 교우들의 연기가 신앙의 열기를 더해가고, 개인 및 가족 단위의 장기 자랑이 소개 되어었다.
멍석을 깔아주면 프로 못지않은 재량을 선보이는 교우들의 (신들린 듯한 재능이 빛을 바라는 순간 이었다.) (열정적인 모습은 참 으로 아름다웠다.)
예술제는 다과회로 이어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성탄전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했다. 처음으로 타국에서 이루어진 성탄전야축제는 모든 교우들의 가슴을 진한 감동으로 물결치게 했다.(여울지게 했다.)
4월 4일 중국 중산로 성당에서 정 삼덕 베네딕도 신부의 집전으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다. 미사 후 신자들에게 부활 계란을 배분 하였는데 각 구역에서 그림을 그려서 봉헌한 것이어서 그 의미를 더 하였다. 뉴올리언즈에서 부활 축하 음악제가 개최 되었는데 제 1부는 중식 뷔폐식으로 이루어지고, 제 2부는 정 베네딕도 신부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성가대의 성가 합창, 중창, 청소년부 현악 중주, 피아노 협주 등 밴드 연주, 클래식기타, 종교 음악 감상, 부활 미사곡 등의 공연이 있었다. 감독 하 아삽, 연출 임 노엘, 진행 신 베드로, 음악해설 민 대건 안드레아, 조연출 청소년부, 송 스테파노가 봉사하였다.
3. 초창기 단체 설립
사목협의회 정기 총회
1999년 1월10일 사목위원회 정기 총회가 개최되었다. 개회 기도는 지도신부가, 신년사는 회장이 하였다.
각 분과장위원장의 98년도 업무 활동보고가 있었고, 총무의 결산보고, 번의가 있었다. 부회장에 의해서 99년도 기본운영방안이 토의되었다. 지도 신부에 의한 총무 및 신임 분과위원장 임명이 있었다.
총무: 하일용 아삽, 전례: 신제식 베드로, 교육: 권용안 프란치스코, 사회: 이승호 바오로, 청소년: 임경섭 노엘, 재무: 박주현 마르세리노가 임명되었다.
신임 분과위원장 운영방안이 발의되었으며, 세부실시 계획은 2월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99년도 각분과 예산이 토의되었고, 2월 예산 확정 회의를 하기로 하였다.
사목 위원들이 지켜야 할 지침서
99년도 平恊 기본 운영 방안 목적은 청도한인 천주교회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과 전 교우들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하고 平協 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임시 제정한다.
운영 방안은 개인 능력위주보다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여 고른 참여의 기회를 주고, 공조협조체제로써 튼튼한 조직 기반을 구축하여 공동체의 힘으로 운영한다. 특수상황이 발생시 전분과장이 공동 역할을 분담하여 상호 지원체제를 확립한다.
전 임원은 청도 시 종교 국에 청도한인천주교회 교우대표로 개인 이력서 첨부 정식 등록하고, 중국 정부 종교 국 규정에 따르고 매월 제출하는 종교 활동 내용 보고서에 서명하여 합법적인 중국 국경내 외국인 종교 활동을 한다.
성가대
1999년 2월7일 성가대가 발족하였다. 3월21일 성가대를 구성하여 첫모임을 가졌다. 지휘자는 민 은진 레지나가 맡았고, 4월 4일 성가대 단장에 김선혜 안젤라가 임명되었다.
성가 대원은 모두 00 명이었다.
복사단
2월28일 복사단 대 모집.
밀알 테니스
4월 11일 밀알 테니스단 창단 (단장, 권 용안 프란치스코)
사랑회
1999년 5월12일 제1차 사랑회 정기회의를 개최하였다. 사제관에서 오후 12시30분에 사목협의회 회장단의 부인들,(회장 부회장 총무.) 각 지역구 반장 5명, 레지오 단장 등 총10명이며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회의 내용은 사목 협의회 의결사항 전달 및 공동체 발전을 위한 건의 및 토의였다
지금의 구역장 협의회 형태의 모임과 거의 비슷하였다. 특별한 명칭 없이 “사랑회”라고 붙여 각 반의 반장들과 각 부서별로 모여 모임을 가지며 친교의 차원에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시작 하였다.
“사랑회”모임은 한 달에 한번 신부님의 지도하에 구체적으로 성당 안에서의 전례 예식과 성당 행사 때 각 부서 별로 할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들의 활동을 더 나은 길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남성 레지오
11월24일 첫 번째 남성 레지오 쁘레시디움 "하늘의 문"이 창단한다. 제1대 단장에 진 중민 사도요한이 선임된다.
제 3장 새로운 사목 지향과 내실화 운동
1. 제 3대 이 성진 요아킴 신부 (1998년 9월 ~ 2002년 6월)
2000년은 가톨릭교회에서 정한 대희년(大禧年)을 맞이하는 해였다. 1999년 성탄 전야의 자정을 기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정문을 열면서 시작된 이 대희년은 새로운 천년기인 제 3천년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뜻 깊은 시기에 청도 본당은 제 3대 이성진 요아킴 신부를 맞이하여 대희년의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진정한 회개와 사랑의 실천, 새 삶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대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초대 신부인 김 철재 신부와 제2대 신부인 정 삼덕 베네딕또 신부가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는 디딤돌을 만들었다면 1999년 12월 28일 이임한 이성진 요아킴 신부는 본당의 내실화에 중점을 두고 신자들 간의 구체적인 친교 활동을 펼쳐 튼실한 교회를 이루는데 사목 목표를 세웠다.
사목 지침과 신앙생활의 길잡이를 구상하여 소책자로 만들어 신자들에게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요아킴 신부의 사목지침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감 있는 공동체
청도에 교회 공동체가 설립 된지 5년 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2명 3명이 중산로 성당 에서 만나면서 시작된 우리 공동체는 300명 가까이 되는 큰 공동체로 성장 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는 외적인 성장에 중심을 둔 탓에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지만 내적으로는 교회의 원래 모습인 “하느님 나라를 이 지상에서 실현”하는데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각기 다른 지역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가 외국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다보니 공동체의 구성원 상호간에 불일치를 가져 온 것 같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국을 떠나오면서 낯선 이국땅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어떠한 어려움도 다 극복 하리라는 희망으로 중국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생활을 통해 중국생활도 많이 적응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정감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어렵고 힘이 들 때 힘이 되어주고, 기쁨을 나누는 정감 있는 공동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또한 하느님께서도 바라시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를 정감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사목의 1차 목표로 정해놓고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실현”이라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특별히 아래 사항들을 실천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전 신자 신앙생활
- 식사 전 성호경 긋기
- 매일 아침 기도, 저녁 기도 바치기
- 남의 허물 덮어주고, 남 칭찬하기
- 현 모임에 적극 참석하기
2. 청소년 심신 활동
- 주일 학교에 참석하기
- 주일학교 행사에 적극 협조하기
- 기초 기도문 외우기
3. 불신도 단체 확대
- 각종 단체에 가입 ! (레지오 마리애, ME)
- 서안 후원회 적극 활동
- 각종 취미 모임에 가입(신자 상호간의 친화도모)
4. 미사 참례 배가 운동(500명)
- 냉 담자 인도 활동
- 예비자 교리반 인도(년2회 영세)
5. 중국교회와의 유대 강화
- 중산로 성당 주일 미사 성취
- 신학생 재정적 후원
- 산동성내 기타 소 공동체 돌보기(연태, 위해, 교주, 교남, 래서)
중국 청도 한인 천주교회 본당 신부
이 성진 요아킴
2. 본당 내실화를 위한 황동
1. 반모임 활성
구역 없이 작은 소 공동체를 가꾸던 것에서 지역을 나누고 반을 정하여서 구역반 모임의 활성화를 이루기 위한 기틀을 만들었다
지역 반 구성은 겨자씨 반, 동해안반, 시내 반, 이삭 반, 은도A반, 은도B반, 이촌 반 등으로 나누었다 이로 인해서 몇몇 신자들의 모임이었던 것이 소그룹으로 나뉘어 모이면서 신부님의 사목의 지침이었던 서로 돕고 곁에서 이웃이 되어 함께 꾸리는 교회를 만들어 갔다
구역 활성화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반장의 역할과 실무교육에 치중했다. 반원들의 인원관리를 통해 소공동체의 내실화에 힘썼다. 냉담자 관리를 하여 냉담자가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꾸준히 활동하였다.
반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반원들에게 전화, 방문하여 참여하게 하였고, 참여한 반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역할을 하도록 지원했다.
새로운 신자를 방문하여 반모임에 초대하고, 주일미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반원 가정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파악해 그 문제를 잘 극복 하도록 함께 기도하고 용기를 주며 격려하였다. 각 가정의 모든 구성원이 미사에 참여하는지 파악하여 참여하는 사람들은 격려하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방문하거나 전화를 통해 미사에 참석토록 권유하였다. 가족기도 모임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는 가정에서 가족기도모임을 하도록 권하며 성가정이 되도록 기원하였다
청도지역 특성상 혼자서 명절을 지내는 형제들이 많았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청도에 남아 쓸쓸하게 지내는 형제들과 함께 명절 연미사를 지내고, 떡국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윷놀이도 하면서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2. 첫 주일 학교개교와 자모회
3월26일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 및 중고등부 신임 교사 임명장을 수여하였다. 모두 10명으로 이루어졌다.
신자들의 염원이던 주일학교가 4월2일에 초등부, 중, 고등부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開校하였다. 처음 주일학교가 구성될 때에는 초, 중. 고등부 합쳐 32명의 학생들뿐이어서 학년 구성에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 레지오 pr 형식으로 운영이 되었다. 게다가 학생들과 주일 학교의 모든 사항들을 구역 반장들과 교리교사의 자체해결로 이루어지다 보니 이로 인한 문제점이 많이 발생 되었다. 이런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자모회가 구성 되었다. 주일 학교의 교육은 교사회에서 맡게 하고, 간식 준비와 행사준비 등은 자모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주일학교가 자체적으로 활발히 성장하여 5월에는 초등부 주일학교 아동절 기념 운동회를 개최하고, 8월18~19일에 초등부 주일학교 첫 여름성경학교가 화교학교에서 열렸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 하였다.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은 어른 못지않게 청소년들에게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제일 예민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 시기에 중국생활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처음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는 주님 안에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생각하자는 교육과 어려움을 잠시 잊고 휴식을 갖게 하자는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12월에는 은총잔치를 열면서 주일학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3. 신심 활동 단체
4월3일(5월7일) "루르드의 성모" 레지오 쁘레시디움이 창단하였다. 초대 단장 이 정자 카타리나가 선임되었다. 이촌에서 창단해서 그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서 활동하다가 지역 특성상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교우들이 시내로 집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단원 감소로 청도로 옮겨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회
5월14일 대학생회 구성(청도대. 해양대) 회장: 강진 토마스.
본당의 날 행사
10월22일 제1회 "본당의 날" 행사를 청도 유아 시범학교에서 개최하였다. 체육대회는 구역 기준으로 청백으로 나누어 경쟁을 하였고, 점심도 구역별로 준비해서 먹었다.
제대회
2001년 1월 제대회가 결성되었다. 제대회장에는 최 은연 오틸리아가 선임되었다.
1월 서안 나환자 촌 돕기 운동을 하였다. 후원회를 결성하여 후원금 모금을 하였다. 서안( ) 신부를 초청하여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서안 신부의 강론이 있었다.
3. 성전 건립 기반조성
성전 건립 기반조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성전건립 기반조성을 위하여 관계자들과의 협의가 있었다.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성전 건립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현재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 샹그리라 호텔 측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 강화하기로 하였다.
중국 본당과의 협조를 긴밀히 하기 위하여 중국 본당 관계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중요 행사시에 초청, 참관 유도 및 정기적 회동 (분기 1회)을 통한 교류를 가졌다.
중국 본당 이용 횟수를 늘리는데 힘썼다. 부활절, 성탄미사, 영세 식 등 특별한 행사시에는 중국 본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방책이었다.
대축일이나 특별한 미사 때에만 중산로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지만 그 감동은 대단했다. 이성진 요아킴 신부는 주일미사도 중산로 성당으로 옮겨서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국 측과의 면담을 자주하면서 중산로 성당에서는 허락을 받아 내었으나 종교국에서 반대를 해서 뜻을 펼치지 못했다.
교회 운영의 밑바탕이 되는 교무금 납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전년도 미납 교무금 현황을 파악하여 각반 반장의 협조 아래 완납토록 촉구하였다. 더불어 교무금을 내지 않고 있는 가정을 찾아서 모든 가정이 작으나마 교무금을 납부토록 권장하였다.
2002년 2월12일 설미사가 사제관에서 있었다. 청도지역 특성상 혼자서 설 명절을 지내는 형제들이 많았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청도에 남아 쓸쓸하게 지내는 형제들과 함께 설 연미사를 지내고, 떡국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윷놀이도 하면서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앞 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