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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유언과 다짐
하루의 일기를 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것도 같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나서 되돌아
보면 아! 내가 그때 그랫었구나! 하는 으슴프레한 지난 추억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오늘은 1998년 5월 27일이다. 물론 지금은 밤이고.............
윤경이가 내일 온단다. 어제 청주까지 갔다가 들러지 않고 그냥 왔더니 ......
시간을 내서라도 들러보고 올걸 그랬나보다.
오늘 프린트기를 삼성a/s센타에 맞겼다.
금년은 왠지 나날이 바쁘게 돌아간다. 사람은 바빠야 한다지만 나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쉬어야겠다. 자야겠다. 980528이다
power-point를 배운답시도 다닌지도 벌써 3주일이다. 내일 또 아포고등학교에 가야한다.
오후에는 밭에가서 제초제를 쳤다.
바람에 자두나무가 많이 쓰러져 있었다. 방풍림을 조성해야될것같다.
어제 밤에는 종구에게 전화해서 A형 간염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오늘은 좀 고단하다. 일찍 자야겠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8강전을 보고싶다.980703
파워포인트 교육이 끝났다.
수료증도 받았다. 그러나 아직은 알수가 없다.
내일부터는 윈도우즈 95를 배우러 김천 과학대학으로 간다.
윤경이가 왔다가 내일 올라간단다. 논문 준비로 바쁘단다. 다 잘되고 있다.980719
퇴직열풍이 불고있다.
명예퇴직이 옳은것인지 어떤지를 몰라 망설이다가 그냥 계속 근무하기로 했다.
허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신청하였다.
어수선한 요즈음 착잡한 마음 뿐이다.981023
지난 20일 밤에 어머님이 우리집으로 오셨다. 대방리에가서 모셔왔다.
이제 얼마나 남아있을지 ............정말 죄송하고 애처롭다. ‘어무이’가 이렇게 되셨으니......
서울 있을 때 보다 많이 좋아 지셨다고는 하나 앞으로 얼마나 더 회복이 될런지......
내년 봄에는 밭에도 모시고 가야겠다.
지금도 자식에 대한 애정어린 마음 씀씀이가 그저 가슴 뭉클 할 뿐이다.981123.초저녁에
어머님이 가셨다.
정말 가셨다. 그 길고도 긴 여정을 시작하셨다.
한달 내내 한마디 역정도 내시지 않으셨던것이 가실준비를 하셨던것이다.
잘 잡숫고 잘 주무시고 어디한곳 흐트러짐 없는 어머님이셨다.
1912년 음력 유월 스무사흣날에 오셔서 1999년 양력으로 1월 6일 16시에 가셨다. 그날이 음력으로는 동짓달 열하흐레(1999. 11. 19)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정밀한 삶을 사셨다.. 아버님이 가신지 십년 어머님은 지금 생전에 못다한 아버님과의 얘기를 하시고 계시겠지..........
어무이! 그렇게도 단정하시고 빈틈이 없으시게 사실수 있는 방법을 저는 아직도 터득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색을 하시지 않으시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히 맞서시든 그 무서우리 만큼 큰 힘을 나는 보아왔습니다.
어무이!
나는 어무이가 외가집에 갔다오실 때 동네 앞에서 놀다가 뛰어가서 어무이가 가마 안으로 나를 불러서 가마를 같이타고 집으로 갔던것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추운겨울날 학교에서 돌아와서 추워할때 “얼른 이리로 손을 넣어라!” 하시면서 당신의 따뜻한 엉덩이 밑에 손을 넣고 녹이든 것도 생각납니다. 또 6.25때 인민군이 내가슴에 권총을 들이대며 아버지를 찾으라고 욱박지를 때 어머님은 가슴을 들이대며 “그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그러느냐 시며 죽기살기로 대어들던것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또 빨래를 한아름씩 머리에 이고 방천너머로 가셔서 늦도록 빨래를 하시고 올때는 일꾼이 지게에 지고오던 것도 생각납니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께서 수의를 입으실때 저는 잘못했다고 크게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뒤늦은 호소입니다. 어머님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신뒤였습니다.
집에서 저와같이 손뼉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한 그것들이 진짜입니다. 어무이! 정말 무서웁도록 지독하도록 자식만을 위해 한평생을 사신 어무이!
가은에서 잠깐 같이 살때도 저는 어무이 마음을 읽지 못했고, 부평에서 잠깐 있을 때도 저는 어머님의 진짜로 그 깊은 마음을 몰랐습니다.
작년 추석 한달전에 서울에서 오셔서 자식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시려고 하신것이 마지막 자식을 위한 어머님의 우리 어무이의 깊은 생각인줄을 미리 짐작도 못하였습니다.
어무이! 그때 어무이는 똥을 방에서 누고 그것을 자식들로 하여금 치우게 하신 그것이 이제와서 생각하니 그것도 골고루 집집마다 한두번씩 다 그렇게 하신것도 우연이 아니였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그것 또한 어머님의 처절하리만큼 자식사랑의 깊은 뜻이었는가 싶습니다.
겨울 밤에 창고에가서 사과 꺼내오기 내기를 하던것이며, 목화따러 갔던일, 또 등골 고추따러 갔던일, 깨떨러 갔던일, 6.25때 제가 이질에 걸려서 고생할때 철저하게 위생적으로 저를 돌보아 살려내셨던일, 그 많은 일꾼과 식구들에게 혼자서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셨던일............
어머님!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어무이가 가시던 그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저도 곧 어머님께 가겠으니 먼저 편안히 가시라고.
저와 저희 집에서도 저승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지요?
우리 아버지와 함께 저승에서 다시만나 살자구요.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큰형님의 체면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모시고 싶었지만 두형님의 체면이 구겨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백분 천분 알겠습니다.
어무이! 어무이!
분명히 내가 어무이 아버지를 찾아갈께요. 오래지않아 갈것입니다.
어무이! 어제 어무이 삼우제를 지내고 이제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산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하시던 어무이 말씀을 가슴으로 세기며 어무이를 만날 그날을 꼽아보며 오늘은 그만 얘기할께요.
아참! 어무이 윤경이가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했답니다. 어무이를 가장 많이 빼어닮은 어머님의 손녀가 이제 선생님이 될것같습니다.
어무이 나 이제 그칠께요, 좀 울어야겠습니다.
꺼이꺼이 자꾸 목이메입니다. 어무이...........1999. 1. 12. 20시 30분
윤경이가 와서 집을 정돈하였다.
둘이만 살다가 식구가 늘어나서 집에 활기가 돈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집에 보일러 물이넘어 온 집이 쑥대밭이 되었었는데 .....
장판 바꾸고, 윤경이 방 벽지까지 바꾸었다.
윤경이가 최종 합격자 발표가 2월 1일이어서 곧 올라간다고하니 몇 일 후면 다시 집이 텅빈것 같겠다.
아무쪼록 첫 발령이나 좋게 났으면 좋겠다.
종구는 열심히 하고있겠지.....믿어볼수밖에....1999. 01. 24. 저녁때..........
윤경이가 합격을하고 3월에는 발령이 나는 모양인데 제발 희망지로 났으면 좋으련만 그게 마음데로 될지 알수가 없다.
이번 주에는 011전화를 신청해야겠다.
오늘은 밭에갔다가 가야산 온천에나 다녀와야겠다. 오랫만이다.......99-02-07-10:00
오늘 윤경이가 온다. 윤경이 생일날이다. 교육을 다 마치고 이제 발령받을 날만 기다린다.
모쪼록 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가야할텐데.......
핸드폰도 두 개를 샀다. 졸업기념으로 요긴하게 쓸것을 찾으니 그것밖에 없었다.
마음에들게 잘 골랐는지 모르겠다. 이제 독립시키면 영영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것인데 적응을 잘했으면좋겠다. 종구보다너무 사회 물정을 몰라서 왠지 불안하기만 하다......1999.02/13--18:00
계획도 없이, 기분내키는데로, 즉흥적인 삶을 살아가는 당신이 원망스럽다.
초상이난 집에 놀러가겠다고 생각한 당신이 정말 한심하다.
아이들은 자꾸 나이가 들어가는데 어쩔려고 돈만쓰는지 알수가없다.
한달에 120만원씩을 어디에 쓰는지..........그래도 모자라서 쩔쩔매고있으니 이해가가질 않는다. 돈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물이들어도 많이들었다.
나에대한 태도며 말투가 정말 견디기어렵다.
나는 돈 벌어다주는 동물이 아니거늘.........99년 2월 18일 밤. 대구처형이 왔다.
오늘이 99년 4월 5일이다.
나는 지금 아내의 운전연습을 지도하러 나간다.
면허증을 받으면 여러모로 요긴하게 이용할것 같다.....09시이다.
1999년 05월 13일
어제가 내 생일인데 아침07시에 깨워서 일어났다.
1시간 동안 네게 퍼부으면서 동서간의 문제와 나와의 지난 모든것들이 마음에들지않음을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댔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얼떨결에 무슨이야기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생일 치고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생일이었다.
아침 생각도 없이 08시 출근시간이 되어 밥도 못먹고 출근하였다.
오늘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안정되어 이글을 적는다.
내가 수정을 하지않으면 이것은 항상 유효함을 밝힌다.
1. 늘 밝게 살아라.
2. 내가 죽거든 반드시 화장을하고 묘를 만들지 말것이며 제사도 지내지말아라.
납골당도 사용하지말고 흔적을 없게하라.
3. 모든 재산은 끝까지 부모공양을 잘한 자식의 몫이다.
4. 나의 흔적을 없애라. 기억에 남겨두고 싶지않다. 내가 사용하던 어떤것이라도 남겨두지말고 없애고 집도 팔고 이사를 해라.
5. 후회스러울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라. 확신없는 일은 말아라.
6. 과욕하지 말고 봉사하여라.
7.
1999.10.24
윤경이가 다녀갔다. 잘 도착했다고 전화도 왔다. 어미 아비 얼굴 한번 보려고 먼곳까지 와서 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편지를 써 놓은 것을 읽으니 더욱더 대견스럽고 기특하기도 하다.
종구는 지금도 공부에 열중하고 있겠지. 아무쪼록 잘되기만을 바랄수 밖에.....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있으나 걱정하는 마음이 탤레파시라도되어 전해질까 두렵기도하여 그냥 태연한척 하고있다.
종구야 힘내라 힘!!!!!!!!!!!!!!!!!!!!!!!!!!!!!!!!!!!!!!!!!!!!!!!!!!!!!
윤경아 건강해라!!!!!!!!!!!!!!!!!!!!!!!!!!!!!!!!!!!!!!!!!!!!!!!!!!!!!
1999.11.28(일)
다시 1주일만에 밭에 갔다왔다.
늦가을 들녘이 스잔했다.
시끌벅적하던 들판과 낮은 언덕들도 이제는 가냘픈 풀잎들만 간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저것 대충 정리를 마치고 1시가 못되어 집으로 왔다.
옥상에는 아직 별이상은 없으나 이번 겨울을 나기가 걱정은 된다.
종구-윤경이도 추운날씨에 건강하게 잘 지내리라 믿고 오늘은 여기서 접는다.
1999.12.21(화)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단축수업을 하고 학교에서 점심을 샀다.
이번이 교직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될것이기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날씨가 추워서 밭에도 못가고 그냥 며칠을 보내야겠다, 연말정산을 앞두고 각종 영수증이나 챙겨서 절세를 해야겠다. 돈이 너무 없어서 꼼작도 못하겠다. 한 삼십만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하다. 마이너스를 해야하는데 연말에는 잔고를 마이너스로 할수없다니 .....
30년 넘게 월급생활을 했어도 이렇게 쪼달리면서 살아야하는 팔자가 서글퍼진다.
종구, 윤경이는 이 추운날씨에 감기라도 안걸렸으면 좋겠다. 어멈은 이가 아파 치과에 다니는데 제발 큰 탈이 없기를 빌뿐이다. 나도 결국은 어금니를 다 빼야한다니 역시 돈이 걱정이다.
빨리 퇴직해서 두문불출하고 세상을 잊고싶다. 조금만 움직여도 돈이드니 어디 마음대로 가볼수도 없는 신세이다. 차라리 2월로 퇴직신청을 했더라면 걱정이 덜되었을 텐데.......
한 세기가 지나간다고 야다들이지만 내게는 하나도 새롭거나 아쉬운것도 없다.
방금 종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학원등록비 60만원을 보내달라는 내용...
아무리 없어도 내일은 꼭 부쳐줘야겠다.
또 어멈은 걱정이 태산 갔겠다. 농협대출금을 예금해놓은것을 기간도 되기전에 해약해야된다.
그러나 어쩔건가 자식이 공부한다는데...
내가 이제 모든것이 기억도 없고 갑자기 정신이 가물거릴때가 많아졌다. 이상하다.
이대로 살다가 아무에게도 폐를 주지않고 살짝 죽었으면 더없이 좋겠다. 갑자기 식구들도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그래야 남은 사람이라도 살라갈것 아닌가. 제발 네게도 그런 행운쯤은 찾아오도록 빌고 또 빌어보자..........21시20분에
2000년 1월 14일 낮에 쓴다.
종구는 공부에 정신없을테고, 윤경이는 영어 교육받느라 정신없을테고, 어미는 빵교육받느라 정신없을테고, 나는 그냥 정신이 없고.............
오늘이 큰동서 삼우제 날이다. 낮에 모두 우리집으로 오라고하여 점심이라도 먹여보내야한다고 어미에게 얘기해뒀는데 준비나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고 죽는것이 뭐 그리 대단한것도 아니더라, 나역시 몇년 안있어서 그모양일텐데....
별 감정도 없이 보내는 내 마음이 삭막할때로 삭막해졌는가보다.
내일은 대구에서 원길이형님 딸 시집을 보내는데 사위가 동산병원 의사라나?
어쨓든 잘도 일을 치룬다.
나는 언제?
종구 윤경이는 저희들이 스스로 결정해 살기를 바라기도해본다.
어찌 생각하면 혼자 살아도 될텐데................
생각이 흐트러져서 아무것도 쓰지못하겠다.
2000년설날은 28번째 엉망인날이다.
더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종구 윤경은 꼭알아둬라.
나는 화장(火葬)을 하고 묘를 절대로 만들지 말고 재를 아무산천이나 물이나 어디든 그냥 버려라. 그리고 제사도 절대 지내지 말아라. 잊어라. 잊지못할것도 없다. 생각나면 그냥 생각으로 버려라. 만약 이러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귀신이 되어서도 너희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확신이 서지않는한 결혼을 섯불리 하지말기를 바란다.
더럽게 재수없는 28번째 설날이되었다.
윤경아 미안하다 60만원은 전부 네어미에게 줬다. 그래야 내속이 편할것 같아서. 네 통장에 넣어줄려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중구너는 모든일을 다른사람이 믿을수 있게 하여라. 그점이 내가 부탁하는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소신껏 인생을 살아라. 이상 끝
2000년 3월 1일 오후
종구가 다녀갔다. 어쩌겠는가? 저질러진 일들을 되돌려놓을수도 없고, 탓만을 할수도없고 제딴엔 어지간히 고민도 했을텐데........이왕 이렇게 된것 그냥 넘어가는것이 온 가족마음이 오히려 더편하겠다. 너무 지나치게 이런일들이 계속되고보니 이제는 모든 의욕이 다 떨어진다.
자식이 뭐길래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 모든것이 혼돈스럽고 지루하기만하다.
28일이 차사고는 분명히 급발진인데 어디에 호소한들 무슨소용이냐.
하루하루가 이상하리만치 지루하다. 삶 그 자체가 부담스럽다.
종구는 지금 대전쯤일테고, 윤경이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학기 준비일테고. 내자는 뒷정리에 바쁘고 나는 맥이 다빠진 상태이고 그래 뭐 어찌하란 말이냐.
어차피 지루한 삶인것을...................
2000-3-30
혈연이란것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를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많은 혈연들이 모자리터에서 옹기종기 모여살다가 보면 별의별일들이 다 생기게 마련이지만 좋
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저.
많은 형제자매들이 고만고만하게 살다가보니 시샘도있고 오해도 있기마련인데.....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감싸주며 살아야한다. 그렇지 못할때는 혈연이 무슨소용이랴.
종구. 윤경아. 그리고 하순이 씨 !!!
내가 분명히 또다시 다짐하는데, 내가 의식불명이 되거든 지체말고 안락사를 신청하여 편안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하고, 내가 죽거든 입은 옷 그대로 둘것이며, 절대로 수의를 입히지 말것이며, 관습에 의한 장례식을 치루지말고 그냥 편히 화장할것이며, 납골당 같은데도 맡기지 말것이며, 묘를 만들지 말것이며, 제사를 지내지 말것이며, 그냥 생각이나거든 옛 생각이나 하면서 지내고, 서로 만나기라도 하거든 지난 일들 중에 즐거웠던 얘기들이나 하면서 보내거라. 즐거운 일들이야 뭐가 있겠나마는 그래도 너희들에게는 너희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왔으니까.
이것은 내가 괜히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뒤에 내린 결론이니 명심하고 지켜야한다. 이런 일을 가지고 공증사무소를 찾을려니 너희들 체면이 말이 아닐것 같아서 이렇게 간곡히 얘기를 해둔다.
육신은 죽음 그것으로 다한것이니 괴이치 말고 화장하여 아무데나 편리한곳에 뿌려서 흔적을 없애라. 제사 또한 부질없는 짓이니 제발 그만둬라. 그리고 너희들은 서로를 의지하지 말고 각자가 자기나름의 삶을 살아라. 서로 아무것도 바라지말고 그저 그림 보듯이 살아가면 무해무득하고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을것이다.
하루를 살아가도 깨끗이 살아라. 기대함이 크면 실망 또한 그에 비례하는 것 아니냐. 어느 누구에게나 바라지 말고 줄것만을 생각해라. 나 보다도 남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고 항상 양보해라.
그리고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너무 얽매이지 말아라. 나는 관습에서 해어나지 못하며 살아온것이 너무너무 후회스럽고 원통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이 관습의 굴래를 벗어날 자신이 없구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속박되어 살아왔지만 너희들은 자유로운 한 자연인으로 살아가야한다.
과감하게 관습에 도전하는것이 아니라 관습을 무시하는 것도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한테 뭐가 되어야한다고 얘기하지 않겠다. 너희 인생은 내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살든 그것은 모두 너희들 몫이니라. 결혼을 어떻게 하든 어떤 직업에서 어디에서 살든 이제는 내게서는 멀어진 것 아니냐. 따분하고 지칠때는 그저 심호흡 한번하고 훌훌 털어버리는 배짱있는 사람으로 살아야한다. 돈에 너무 집착도 말도 그냥 살만하면 된다. 너희 어미를 잘 봉양하고 마음 상하게 하지말아라. 싫든 좋든 너희는 너희 어미와의 한몸에서 나누어 진 것이 아니더냐. 과욕이 있더라도 모두 너희를 향한 마음이니 그렇게 알고 너희가 이해를 해라. 목숨을 던저서라도 너희들을 지킬려는 정말 맹목적 욕구 (---모성애나 사랑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 자체 아니냐. 그러니 너희 어머니의 주장을 강제로 꺾을려고 하지말고 몇날이 걸리더라도 설득을 해야한다.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너희들이 삶의 자리를 잡을 때 까지 견뎌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혈연 지연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은 나 혼자라고 굳게 생각하고 살아야한다. 일가친척에게 얽매이지 말고 눈치보지말고 너의 가치관대로 너의 마음이 시키는데로 하고, 후회하거나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 말아라. 너희가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한다고 생각하고, 굳세게 대응하되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하거나 기분나빠하지 말아라.
기분나빠서 스스로 가슴끓이면 자신만 손해이니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는 버릇이 좋더라.
싫은 일은 속히 잊어버리는 것이 참 좋더라. 남이야 뭐라든 우선 내 속이 좀 편하니까.
내가 의식 불명이 되거든 안락사를 신청하고, 죽으면 장례식 하지말고, 화장하고, 묘를 만들지말고 납골당에 두지도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는 나의 이 확고한 명령을 너희들의 어미는 결사 반대할것이다. 그러나 너희 어미 또한 그렇게 할것이니 과히 걱정 말아라.
매일이다 싶이 싸우면서도 한평생을 같이 했으니 서로를 너무나 잘 안다. 후손이 있건 없건 먼 훗날 허물어진 묘를 생각해봐라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냐. 화장후에 그 유골을 다시 묘소로 만들 생각일랑은 아예 말아라. 조상을 섬길려면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본받을 점은 본받되, 잘못은 되풀이 하지말자고 다짐하면 되는것이다. 그것도 어쩌다 생각이 나면 말이다. 죽은 조상한테 너무 매어달려서 살아서는 안된다. 요즘 세상에서 조상을 핑게 삼아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도 추해보이고 혈연을 담보로 살아가는 우리네 관습들이 너무도 지겹고 싫다. 너희들만은 모든 굴래에서 자유로워야 하지않겠니.
나는 이제 일상의 심심함을 재미있는 취미생활로 만들려고한다.
8월에 그만두고 나오면 정말 전국을 싸돌아 다녀야 겠는데....... 분재를 처분하고 몇날 몇일이건 다 잊어버리고 떠나가련다. 밭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분재부터 처분해야겠는데...... 그냥 버릴려니 너무 아깝다. 밭도 팔고 집도 팔고 이곳을 떠날려고도 생각해 봤으나 나만 손해볼것같아 그만 접어두었다. 문득 안락사 하는것과, 장례식 하지않는 것과, 화장하는 것과, 분묘 안마드는 것과, 납골당에 맡기지 않는 것과,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어서 늦은 밤에 잠도 안오고 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적었으니, 너희들은 명심하고, 꼭, 분명히 지켜야한다. 누가 뭐래도 이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니까. 또 훗날 생각날때 다시 강조할께.
2000년 6월 28일(수)
토요일 아버지 제사날부터 몹시도 속이 상했다.
일요일 밭에가서도 몹시도 속이 상했다. 이모님과 누님이 왔다간 뒤에 더더욱 몹시 속이 상했다.
월요일 학교에 가서도 몹시 속이 상했다.
어제는 도저히 못견딜것같아서 오전 수업을 하고 집에 와서 누어버렸다. 오늘은 식당에서 미음을 쑤어주어서 먹었다.
몹시 속이 상하고나면 꼭 이런현상이 나타난다. 이제 병원엘가면 영영 되돌아오지는 못할것같다.
죽어도 이곳에는 살수없다고하니 나는 어떻게할가? 혈연은 죽어서도 끊을수 없는데.......
아무리 해도 해결방안이 없다. 한가지는 죽는것.....................
2000-10-08(일)
오랫만이다.
퇴직하고 처음이다. 요즘에는 밭에가서 살다싶이한다. 내년 봄에 하우스를 다시짓고 화단을 꾸며야겠다. 흙도 넣어서 ....참 원동 증효(종민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흙이 한차에 만원에 되는지 알아봐야한다.
수입이 엄청나게 줄어서 내년에는 밭에서 수입이 어느정도 있어야한다. 준비를 잘 해야지.
종구는 여전하고, 윤경이는 활기있게 생활하는것 같다.
오늘은 밭에가서 나머지 정리를 해야지!
2001년 01월 11일 (목요일)
1. 새해 첫 이야기다.
2. 내가 죽거든 장례식을 하지않는다
3. 반드시 화장한다. 묘를 만들지 말것.
4. 제사를 없애라. 그냥 생각이 나거던 생각만을 하라.
5. 남은 재산이 있거든 끝까지 부모봉양을 잘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6.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 집착하지 않을것.--도와줄거라고 기대하지 말것.
7. 다른 사람을 도와라. 적은것이라도 실천하라.
8. 생각날때 또 쓰겠다...................................
2001-01-12-금요일
얘들아 엄마가 이제 많이 좋아지고 있는것 같다.
표정이 그렇다는것이지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을것인데.......
이제 옥상분재는 어느정도 정리를 했지만 처분을 못해서 큰일이다.
분재를 처분해서 봄에 집수리 비용으로 쓸작정이었는데 ................
2001-05-23
8백만원 쯤 들여서 집을 단장했으나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다
종구방을 서재로 만들고나니 살것같고, 윤경이 방은 옷방으로 했다
주방을 200만원이나 들여서 고치고, 김치냉장고도 90만원이나 주고 들여놨다.
거실에 장판과 벽지가 90만원이나 들어갔다. 집도색이 180만원, 가게셔트도 고치고, 커텐이며 브라인드까지.............
올해는 자두와 복숭아가 좀 생산될 것 같다. 처음 수확으로 돈맛을 볼것같으나.....
어제는 또 한바탕 굿이 벌어졌었다.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인터넷의 ID도지우고 메일도 다지우고 모든 가입된 코너에서 모두 탈퇴했다.
모르면서 우격다짐으로 의심하고 대어드는데는 기가막혀서 말문이 막혀 아뭇소리도 못했다.
어느 여자가 e-mail을 보내서 내가 그대로 얘기했더니 어디가서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누구인지 뭣하는 사람인지도 나는 모르는데, 그리고 작년봄에 온 메일이어서 그냥 그런 메일이 왔더라고 이야기 해주었을 뿐인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윤경이가 메일을 보내고싶어도 이제는 안된다. 그리고 친구들과 동료들, 또 제자들도 메일을 보낼텐데.........집에는 통신망이 없더라도 간혹 다른곳에서 메일은 확인하고 답도보냈었는데.......
매사가 이모양이니 이제 지겨워서 죽겠다.
어제밤에는 열이받쳐서 목이 뻐근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쳐다보기도 싫고 눈을 마주치기도 싫다고 했다. 오늘은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되는지 언행이 좀 다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올해가 내 회갑이거늘 시집동기간들과 원수같이 지내니 어디 말이라도 할 수가 있나. 그냥 아이들 결혼도 안시켰는데 환갑은 무슨 환갑!하고 말았다.
아---------세상이 너무 지겹다.
내일은 치과에나 가봐야겠다.
윤경이 쓰던 컴을 가져와 써보니 한결 좋다. 386보다야--그래도 펜티엄인데.....
얘들아!
자신있게 살아가거라!
다시 한번 다짐하거늘 내가 죽거든 장례식하지 말고, 화장하고, 아무데나 뿌리고, 묘를 만들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어제 오늘 계속 비가 내린다.
금년 봄가뭄이 대단한데 다행이다. 서재 정리를 좀 하고나서 몇자 적었다.
河順伊 씨와 그 아들 李鍾久와 그 딸 李允卿에게
以下에 적은 모든 것들은
반드시 지킬 것을 命하며, 모든 것이 眞實임을 나의 良心을 걸고 確認한다.====李沖基
1. 모두는 밝게 살도록 노력하라.
2. 내가 병원에 입원을 하거든 반드시 간병인을 두어 나를 돕게하되,
그 경비는 나의 재산에서 지출하라.
내가 의식불명이 되거든 지체말고 안락사가 되도록 할것이며,
죽거든 반드시 남에게 알리지도 말고,
장례식을하지 말것이며,
화장을하고, 유골은 아무곳에나 그냥 버릴것이며,
납골당도 사용하지 말고, 묘를 만들지 말것이며,
제사도 지내지않도록 하라.
3. 내가 죽은 후 나의 재산이 남아 있거든 마지막까지 부모봉양을 잘해온 사람이 가져라.
2001년 01월 11일 (목요일)
1. 새해 첫 이야기이니 잘 듣고 꼭 지켜라.
2. 내가 병원에 입원을 하거든 간병인을 두어 돕게하라. 내가 의식불명이 되거든 안락사를 시키고, 죽거든 입은 옷 그대로 둘것이며, 부고도 내지 말고, 관습에 따른 장례식을 하지말아라.
3. 반드시 화장하여 뼛가루는 아무곳에나 버려라.
4. 묘를 만들지 말것이며, 당연히 납골당에도 나를 가두어 두지 말아라.
5. 제사를 지내지 말아라. 추도일도 만들지 말아라.
6. 내가 죽은 후 남은 나의 재산이 있거든 마지막까지 부모봉양 잘하는 자식이 다 가져라.
7.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 집착하지 말것이며, 자신의 힘을 길러라.
8. 다른 사람을 도와라.
생각날때 또 쓰겠다...................................
자신있게 살아가거라!
다시 한번 다짐하거늘--- 내가 죽거든 장례식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아무데나 뿌리고,
묘를 만들지 말고, 납골당에도 맡기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만약에 내가 의식불명이 되거던 지체하지 말고 안락사의 조처를 취해라. 병원 입원비, 간병비와 그외의 모든 경비는 나의 재산으로 충당하라. 절대로 나를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라.
2001-5-30(수요일)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꼭 지켜라.
2001-6-9
얘들아!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한테 꼭 말해둘게 있다.
이런이야기는 듣지않는것만 못할 것이다.
다름이아니라 얼마전까지(퇴직하기 전) 내가 인터넷의 50대 이상만 가입이 가능한 동호회에
가입해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도 듣고 mail보내는 방법도 배우고 하면서 재미있게 활용했는데......
나는 나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고, 나의 일상생활을 수필형식으로 글을 써서 게시판에 올렸는데,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고 많은 격려(?)답신을 받았단다.
그런데 작년 여름이나 가을 쯤에 그중에 서울에 살고있다는 어떤 여자가 나에게 메일을 보냈단다. ---친구의 친정이 김천인데 자기는 성당에 볼일이 있어서 김천에 가게되면 찾아 뵙고 싶습니다---라는 요지의 간단한 메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약국에서 인터넷을 하며 여러 가족들이 이야기하던 중에 나에게 온 그 메일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메일이야 다반사로 있는일 아니냐? 누군지도 모르는데.....그렇다고 서로 메일을 주고 받은적도 없고....나는 그냥 지우지않고 그대로 뒀고 너희 엄마도 보여주었단다--별생각 없이---
발단은 여기서 부터시작이다........
며칠이 지난 뒤에 갑자기 야단이 났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아하! 그 메일 때문이구나 싶어서, 옆집에 가서 엄마가 보는 앞에서 인터넷에 등록된 모든 나의 기록을 삭제하고 모든 취미코너에서 탈퇴를 하고, 퇴직전에 그렇게 많이 모아둔 자료들을 모두 날려버렸단다. 심지어 제자들과 친구들의 메일주소까지 저절로 다 없어졌단다(이것이 가장 아깝다. 어떻게 다시 찾을수도 없고). 자료야 언젠가 다시 뽑을 수야 있겠지만, 다시 회원으로 가입을 해야지 다운받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참 곤란하게 되었다. 엄마가 인터넷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심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흔히들 뉴스꺼리로 나오는 쳇팅으로 인한 남녀간 불륜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퍼부어대는구나.
자세하게 설명해 줄려해도 들을려고도 하지 않고, 또 듣는다 해도 이해를 할려고도 않을것이고 해서 그냥 그렇게 인터넷과는 관련을 끊기로 했단다. 심지어 분재 코너에서 조차도 탈퇴를 했으니까----서로를 격려하고, 정보도 서로 교환하고...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런데 오늘 저녁에 또 야단법석을 부렸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아침 7시에 부산으로 김천분재 친구들(나보다 모두 젊은 사람들) 이 왜철쭉묘목을 사러 가기로 했는데.......
내일 허성씨(시청), 김두호씨(유한킴벌리), 박??(방울도마도재배)와 나 이렇게 넷이서 가기로 했는데, 부산까지만 가면 부산에 있는 분재 동호회원이 6인승 승합차로 안내해 주기로 약속이 된모양이다. 이것이 허성씨와 이야기한 전부이다.
그리고 김천-부산의 왕복차편은 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김두호씨차는 너무 고물이라 퍼질 것 같아서 위험하고, 허성씨는 작은 프라이드이고, 박??씨 차는 프라이드 베타여서 내차가 그래도 공간이 제일 넓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이것도 트집잡는다.
내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고........
엄마 이야기는 내가 내일 부산에 가는 목적은 ‘그전에 갔던 그 왜철쭉 분재원의 아줌마가 보고싶어서 가는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길을 모르니까 내가 나서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또 그전에 서울에서 메일을 보냈던 그 여자(나는 지금 닉네임도 아이디도 전혀 기억에도 없는데) 때문에 간다는 둥 하면서, 내가 바람이들어서 그렇다고 거품을 내면서 야단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댓구도 않을려 하다가, 너희 외할머니도 계시는데 좀 큰소리가 나왔다.
내일 가는 곳은 김천사람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김해 쪽에 있는 철쭉 분재원인 모양인데 부산사람들이 안내를 하지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찾아갈 수가 없단다.
부산에서 안내해 줄 사람은 인터넷의 분재 동호회원으로 허성씨와 김두호씨와는 만나기도했던 사람들로, 그전에는 나도 회원이었으니까 ‘꼭 모시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허성씨가 얘기해 주더라. 알고 보니 작년에 김천분재회에서 부산으로 견학갔을 때 나에게 자세한 길안내를 메일로 보내준 그 사람이란다. 50세쯤되는 남자 회사원으로 아주 착실한 사람이라더라.
그런데 엄마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완전히 의부증 환자의 증세가 뚜렸이 보인다.
그래서 퇴직후에는 외출도 않고, 그냥 밭에만 오가고 있고 일체 아무도 만나지도, 전화연락도, 하지않고 살고있는데.....
남들이 들으면 ‘무슨 의심나는 짓을 했길레 마누라가 저러지 괜히 그러겠나?’ 할것이고,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으려니 속이 뒤집혀지는 것 같아서 죽겠다.
어제 그저께 장날(6월5일)에는 밭에서 작업복으로 입을려고 한 장에 5000원하는 남방을 3개사고, 청바지를 13000원 주고 사서, 오늘 밭에 갔다가 집에오면서 청바지에 5000원짜리 남방(빨강+초록의 체크무늬)을 입고 오니 젊어뵌다며 좋아하더라 -- 그래서 나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제 밤에는 머리 염색을 한것까지도 모든 것이 계획적이라면서 퍼붓는구나. 나는 정말 어리둥절하여 말문이 다 막혔다.
드디어 내일 같이 부산에 따라간다는구나 그래서 그러자고 했다.
문제는 내일부터이다. 4명이 타고갔다가 부산에서 6인승 승합차가 나오는데 할수없이 그 복잡한 길을 내차로 뒤를 따라다녀야 겠구나. 승차정원을 초과하게 되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그 서먹함은 어떻겠나? 여기 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내일 부산에 다녀온 후로는 이제 그 젊은사람들도 나를 멀리할 것은 불을보듯 뻔하다. 괜히 자기들이 좋은 일하고 뺨맛는 꼴은 보지않을테니까, 나라도 당연히 그런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겠다. 그사람들은 뭐라 생각하겠나?
‘이선생님이 평소에, 아니면 그 전에라도, 바람을 피웠길레 마누라가 그렇게 닥달을 하지않겠나?
뭔가가 책잡힐 짓을 했던 것이 아닌가? 그냥 괜히 저러겠어? 분명히 뭔가가 있는 모양이야‘ 하면서 나를 평가절하 하면서 숙덖거리지 않겠나? 당연하지.
결혼 후 1년도 되지않아서 중학교 동기회 못나가게 방해해서 탈퇴(제명)했고,
남산동으로 이사와서 국민학교 동기회에 못나가게해서 탈퇴하게 되어, 지금도 고향친구들이 나와는 아무런 연락을 않고있고(중학교 동기생들도 마찬가지),
수석회도 돈 많이 든다고 견제를 해서 그만뒀고,
고교동창회와 분재회는 그냥 나가고 있으면서 망년회라던가 단체 여행에는 거의 불참을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제 나와 취미를 같이하는 몇 안되는 젊은 사람들마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구나.
소문은 금방 쫘-ㄱ 퍼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점점 부풀어지고----나중에는 정말로 내가 몹쓸인간이 되고 말것이 아닌가? 싶어서 서글퍼진다.
너희들도 알 것이다만 우리 집안에서는 바람피우고, 도박하고, 남과 싸워서 송사벌이고 한 전례가 없단다. 그런데 너희 엄마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성장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못볼것들을 봐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이해를 하기도 했었다 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세상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 편집증이 있는 것 같다.
너희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오래동안 사귀는 것을 못봤다. 대방리 관련건도 그렇다. 일년에 몇일이나 일을 한다고 그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나? 서로 다른 풍습에서 살아온 동기들간에 서로 부디쳐가면서 그렇게 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따돌림을 하겠나? 어느 가족이건 이제는 너희 엄마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너무 지나치다. 이웃집들과의 관계도 내가 보기에는 정답지는 못한 것 같다. 여고 동기생들과도 그렇고.
이러다보니 우리집에는 사람이 찾아 오는 집이 아니다. 내 친구들도 벌써부터 너희 엄마가 부드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난 뒤부터는 부담이되어서 올수가 없단다.
‘이선생님 집은 왠지 불편하다. 아주머니 표정만 봐도 그냥 허물없이 대해주지 않는데......’하는 소리를 여러번 듣게 되다 보니 나도 저절로 친구나 동료들이 우리집에 오지못하도록 핑계를 대고있었단다. 그러다보니 우리집은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이 되고 말았지.
이제는 나 조차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야 하니----이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형제자매간의 혈연도 못마땅해 하는 판에.............백보 양보해서 생각해도 나의 판단으로는 너희 엄마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너희들은 엄마이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생각이겠지만
너희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절대로 말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편하게 해주기위한 나의 생각을 다시한번 또 강조한다.
너희들은 이대로 실천해라.
1. 내가 숨을 거두거든 부고를 내지 말것이며, 반드시 나의 장례식은 치루지 말라. 수의를 입히지말고 죽을 때 입었던 옷 그대로 관에 넣되, 팔다리를 묶어대는 짓(염이라고 한다)을하지 말아라.
2. 반드시 화장하라......뼛가루는 아무데나 편리한 대로 버려라(뿌릴 것 없이)
3. 반드시 묘를 만들지 말라. 납골당도 안된다.
4. 반드시 제사를 지내지 말라.
5.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재산이 남아 있거든 끝까지 부모를 잘 봉양하는 사람이 나의 유산을 모두 가져라.
6. 내가 늙고 병들어 남의 도움으로만 연명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남은 내 재산의 범위안에서 병원에 입원시켜서 해결하라.---우리 가족 누구의 간병도 받지 않겠다. 간병인을 고용하여라. 그리고 의식불명이 되거든 지체없이 안락사로 편히 가게하라.
3년전부터 생각해왔던 것들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여겨져서 다 지웠었는데---- 오늘 어찌나 속이 뒤집히는지 참을 수가 없구나.
이렇게 속이 많이 상하다보면 일찍 죽을 수 있지 않겠나 싶으니까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구나. 가장 믿어주어야할 사람에게 가장 불신을 받으니, 나의 마음은 허망하다 못해 텅 비는구나. 첫 단추를 잘 꽤어야 한다. 나는 첫 단추를 잘못 꽨것같아서 이제와서 후회한다.
나는 지난일들을 후회하거나 기억속에 담아두지 않을려고 애쓰며 살아가는데--- 오늘은 정말 후회스럽고 뼈저리게 서글프다.
어쩌다가 내 삶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멍한 상태가 되었는지, 어쩌다가 이 나이를 먹도록 죽지않고 살아왔는지..................
그래도 또 내일이면 포기를 하지도 못하면서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면서 살아가겠지--
정말로 정말로 삶이 지겹다.
지금이 밤 12시 40분이다. 내일 일찍 가야하는데 잠이 들지않을 것 같다.
내일 이후의 일은 ----??
그렇지않아도 교분이 있는 사람들이 몇 안되는데, 그들마저 내일 이후에는 멀어질것이고,
너희 엄마는 ‘그러니까 김천에 살지 말고 다른데로 이사가자’고 졸라대며 이사를 가야할 핑계를 찾을것이고-----
그러나 나는 죽을때까지 이곳에 살란다. 이곳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그냥 말이다.
새로운 곳에 가서 또 이런 굿을 할 필요는 없지않겠니?
너희들만 확실히 자리 잡으면, 정말 어디 멀리 떠나보고 싶기도하다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것이고----
최소한 10일에 한번씩은 무엇을 핑계 대던지 혼자 생각한것들을-지극히 주관적인것을-마구 펼쳐대며 설치는데 이제는 내가 못견디겠다.
윤경이 너는 착실하게만 몸건강 유의하고 ‘도장’관리(요즘은 카드지?)잘하면 네 평생은 그런대로 살아갈 것이지만,
종구너는 아직 네 앞을 예측 못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단안을 내릴 수가 없구나. 네 혼자라도 먹고 살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지 못해서 말이다. 내년에 다시 한번 더 응시를 한다니 말릴수도 없고---- 나이 30이된 사람에게 뭐라고 이야기 해야겠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네가 더 넓을테니까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자꾸 이야기를 하면 마음만 더 쑥대밭이 되겠고 이쯤해서 내가 너희들한테 다짐하는 말은 끝내고 이제 눈을 좀 붙여야겠다.
다시 한번 명하노니 앞에서 말한 나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라.
2001-6-
오늘이 15일 장날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이 멍하게 지난다.
아침나절에 너희 외할머니와 함께 밭에 갔다가, 라면을 끓여먹고, 13시에 집으로 다시 모셔다 드리고 나는 다시 밭으로 갔었지.---세상을 잊고 골치아픈 모든 생각들을 잠시만이라도 잊고살려고 자신을 자학하는 셈이지. 그러나 자학같은 것은 생각히지도 않고 그냥 나무들만 돌보는거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어서 고단한 줄도 모르고 하루해가 훌쩍 지나가 버린단다.
오늘도 나뭇가지가 잘 보이지를 않아 주위를 돌아보니 어두컴컴하지 않겠나!
한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그것도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 말이다.
그저께 너희 엄마가 부산엘 따라갔었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내색을 않아서 누구도 낌세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떠벌려봤자 망신살만 뻗치니까 내가 아무말도 하지않았지.....
오늘 저녁에 서재에서 분재를 손질하는데 옆에 왔더라.
그래서 내가 얘기를 했지---“남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것 처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다. 그것도 아내로부터........의심의 내용도 지저분한 여자문제이니까 더욱더 내 자존심이 상한다. 지금까지 30년가까이 살아봤으면서 남편을 그렇게도 믿지않고 의심을 하면서 살아왔으니, 나는 뭐냐? 인생을 헛살아온 느낌이며, 지금까지 이렇게도 자존심이 상해보기는 처음이다. 내 마음이 쉽게 풀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벌서 한 달 정도 남아있는 아버님 제사가 걱정된다.”.....등등의 이야기였다. 반응은 뻔한 것 아니냐!!!! 항상 완벽한 인간이라고 우기는 것!!!
이것도 10일 전 쯤도 안되는 지난 이야기이다 만,
큰형님께서 밭에 다녀가셨다는 이야기와, 며칠전 큰형님 내외분이 성주에 다녀오시는 길에 밭에들르셨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인상이 확 바뀌더라. 시집식구 어느누구의 소식도, 이름도 듣기싫어하는 것이 역역하게 나타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니?
어느 누구라도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사귀지를 않는 것 처럼...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믿음인데 , 이제 우리 부부간에는 마지막 남은 보루까지 다 허물어졌으니 인생을 같이 이야기하며 오손도손 살기는 걸렀겠지?
나는 되도록 지나간 일들에 집착하지 않을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자꾸자꾸 지난 일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구나
이번의 <e-mail사건> (---그래 분명히 사건이다)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내 마음이 이렇게 텅빈 것 같기는 결혼 후 처음이다. 두 번씩이나 이혼을 요구해도 그냥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종구가 첫돌이 되기도 전에 한번, 그리고 두 번째는 용두동에서 살때인데 위자료를 360만원으로(--그때 그집의 시세가 180만원정도였다) 청구까지하기에 그렇게 하기로하고, 너희들을 약국에 임시로 맡길려고 내가 데리고 가기까지 했었어도..... 이번의 <사건>만큼 나의 마음이 텅 비지는 않았었단다. 이렇게 배신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도 나이 탓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구나.
집요하게 시댁과 그 친인척을 배척하는 데는 분명히 나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아서였기 때문임을 더욱더 확실하게 확인 시켜주는구나. 같이 살아온지가 30년이면 이제는 우리 집안 사람이 다되었을 것인데... 어림도 없구나. 친정의 친인척을 생각하는 것의 100분의 1이라도 생각했으면 이렇지는 않을게다. 아니 생각은 없어도 좋으니 “저주”만은 안했으면 -----
그것도 모자라 드디어 나를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다른 동기간에게는 좀 덜하겠지?
-----인터넷 문제도 이제 생각하니 약국형수께서 인터넷을 시작하면서 나와 만나는 기회가 잦아질 테니까 그렇게 되었고, 그냥 못가게 할려니 명분이 없고하니, 나에게 온 메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대방리에 들어가보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함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 형제간의 우애까지 금이가게 하고있음을---얼마나 무서운 투쟁을 하고있는지 , 전혀 승산이 없는 투쟁을 하고있는지를, 아직은 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혈연우선의 전통적인 우리들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하고 있는지를........속히 알아차리기를 빌뿐.
이 싸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경험을 해야 알것인가?
대물림해서 너희들까지 너희 엄마를 두둔하고, 여러 주장을 인정하는 줄도 내가 알고 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봐라. 그리고 넓게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너희에게 거듭 확인 하노니
내가 죽거든 수의를 입히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인체 관에 넣어 화장을 할것이며, 장례식 하지말고(물론 부고나 부조도 받지말고),
화장절차는 시청에 물어보면 자세하게 알려준다. 화장해서 뼛가루는 그냥 아무곳에나 벼려라. 그리고 주검앞에서 울지도 말고, 장례식이 없으니 손님 맞을 일도 없다. 일을 다 처리하고 난뒤에 이 유언장을 다른 가족들에게 보여줘라. 내가 얼마 후에 공증사무소에 가서 정식으로 유언장 작성을 하여 법률적 효력이 있도록 분명히 해두겠다.(지금의 이것도 유언장으로 유효하다=경북김천시황금동91-6번지 이충기 씀)
시신이 없으니 묘는 저절로 없을 테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너희 엄마가 다른 가족들과 동기간들을 만날일도 없을 테고, 그렇게 되니까 명절날이나 길흉사 때에 서로 얼굴 마주칠일도 없을테고, 남은 너희 세식구도 나로 인하여 무슨 고민할 일도 없을테니까 가장 편한 방법이다.
그래도 혹시 만약에 말이다. 그래도 어느날 문득 아비가 생각힐때는 그냥 이름 석자나 써보면서 기억나는 일이 남아있거던 그것으로 만족해라.
만약 내가 의식불명이 되거든 지체말고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야한다. 그리고 시신을 화장하는 이유는 내 몸과 마음이 썩을대로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신이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
있다면 있는거고 그런거지 신과 내세를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천당이니 극락이니 하는 것들도 있거나 말거나이다. 생노병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는 내가 아직 모자라니까.
어째 이상하게 개똥철학을하게 되었는데......각설하고------내 말을 명심해서 실천하도록 하라.
지금이 밤 3시가 조금 넘었다. 억지로라도 잠을 들여야 겠다.
잘들 자거라. 잠이 안와서 다시 색깔도 입혀보고 하다가 이제 4시가 조금 넘었구나.
다음에 다시 정리해야겠구나.
정리 하고 말고나 어디 있나? 이대로가 사실인 것을....................
꼭 실천하여라!
2001년 6월 ----- 이제는 쓸내용이 없어야 할탠데...........................
2001년 6월 16일
지금은 세벽 5시3분전이다
요즘 서울 너희 외할머니께서 며칠전에 오셔서 큰방에 주무시고 나는 종구방에 책을 옮겨놔서 거기서 자고있다
오늘 이야기는 어제일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매일 가는 밭에 어제도 갔다가 관리기가 고장이나서 일을 조금 일찍 마쳤다(19시10분쯤)
아직은 시간이 많이 있고해서 관리기 기술자를 보내고, 뒷정리를 해놓고 귀가하다가 오래만에 대방리에 들어가봤다. 요즘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공사를 하느라고 어수선하기고하고, 어느정도 진척되었는지 도 알고싶고, 두어달 전에 들어가보고 못봤기에..........
대방리에 가니까 큰형님께서 과수원에서 물을 뿌리고 계시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사과나무 뽑은 자리에 콩을 심었다더구나, 아주 깨끗이 해놨더라.
또 배봉지 싸는 얘기, 복숭아 도장지 처리방법이며, 자두나무 가지휘기, 채소농사......등등 전부 농사이야기 뿐이었다. 나도 이제 농사꾼이 되어서 그러했는가 보다.
집에 들어가자니까 형수가 안계신다더라. 그래서 호기집으로 갔다.
넷째삼촌은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있더라.
도로공사장 산에서 나온 바위덩어리(큰 것은 10톤 정도되는 것들)를 집에 옮겨놨다는 이야기만 듣고 오늘 처음 봤다. 잘 다듬으면 멋진 정원석이 되겠더라.
셋이서 넷째삼촌 마당에서 나무 이야기들과, 호기가 제천에 다녀온 이야기--친구가 제천 문화마을에 사는데 돌이며 야생화며...잘 꾸며놓고 살더란 이야기, 매발톱꽃을 한분 얻어왔다더라.
내가 준 꽃잔디는 나보다 10배는 더 많이 번식을 시켰더라. 그러다보니 8시가 되어가서 집에 올려고 나오니 큰집 부엌에 불이 켜져있더라. 보니까 형수가 나오시며 늦게 왔다고 하시며 들어오라며 반기시더라. 저녁먹고 가라고 몇번 얘기하는걸 가봐야겠다며 나오는 길에 뜰앞에 있는 클로버 같이 생긴 초물(분홍색 작은 꽃이 핀다)을 비가 오거든 한줌 옮겨심어 놓으면 다음에 내가 가져가겠다고 하고는 그냥 나왔다. 이것외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집에오니 추어탕(어제부터 할머니께 배운다고 법썩였다)을 맛있게 끓여서 보통때보다 저녁밥을 많이 맛있게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대방리 들어가 봤다는 얘기도 물론했지---이제 생각나는데 대방리 식구들은 잘있더냐는 안부의 말 한마디도 너희 어머니는 하지않더라.
그런후 너희 엄마는 소파에서 잠이들고 나는 에이리언 영화를 보다가 피곤해서 11시도 못되어 서재로 왔지.
영농일지를 쓸려고 이것 저것 공책을 찾다가 1990년 수첩을 찾았는데 2001년과 날짜-요일이 꼭같구나. 6월 스케쥴 표에다가 몇자 걸쩍거리다가 컴에다가 하던대로 할려고 워드작업을 했지.
표를 만들고 하다가보니까 졸음이 달아나서 그만 세벽2시가 되었지. 이래서는 안돼겠다 싶어 내일을 위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할 요량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
누가 잠구어놓은 문을 따고 들이닥쳐서, 깜짝놀라 잠길에 깨어보니 팬티와 런닝 차림의 너희 엄마였다.
눈을 부라리며 “대방리 가서 무슨 이야기 했어? 또 그사람들과 나를 정지구석에 콱 쳐넣을려는 의논하고왔지?.........”등등의 이야기를 시비조로 했다. 잠결에 이런 이약기를 듣고는 잠이 서서히 깨어서 시계를 보니 세벽4시 20분쯤이더라.
자------봐라. 이정도이다.
내가 형제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 조차도 싫고, 또 내가 형제자매들과 공모를하여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고 하니....
철저하게 나를 불신하고 싫어하고 ----해서 나는 이이상 어디다가 마음을 둘수가 없다.
며칠전에 너희 할아버지 제삿날에 엄마는 김천에 없겠다기에 ‘왜 멀리갔다가도 시아버지 제사가 되면 와야되는데 당신은 거꾸로 할려고?’ 라고 말을 해주었던게 생각난다.---어제 대방리에 간것도 ‘아버지 제삿날 대방리 안들어오고 다른데 갈란다는 말 했다는 것을 고자질하러 들어갔지?’하면서 악을 쓰는구나. 자꾸 형제들과 형수들과 공모를 해서 자기를 괴롭힌다는구나.
나를 바람피울 준비를 한다는둥, 괴롭힐 궁리를 한다는 둥........모든 것이 이제 내가 타켓이 되었는데 차라리 이것이 편하겠는데 내가 타켓이되고 주변사람들과는 좋아졌으면 얼마나 좋겠나?
내 주변의 친구들 다 떨어지게 하고, 우리집에는 아무도 찾아 오는-놀러오는-사람이 없다.
그전 부터---이 선생님 집에는 사모님 때문에 왠지 좀 거북스럽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일찍부터 너희 엄마가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음은 알았으나 내능력으로는 개선시키기가 어려웠나보다.
낮에 일을 많이하고 나서 이튿날 아침에는 손가락이 퉁퉁부어서 곤란했는데 지금 자판도 겨우 치겠다.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 칠란다.무엇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만 알아서 고쳐서 읽어라. 조금도 가감없이 그대로는 진실되게 기록했을 뿐이니 읽고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참 종구 방을 큰 것으로 얻어주자면서 내연금 받아서 공단에 예치시킨 것을 해약하자고 그전부터 조르다가 너희 엄마에게 맞긴 3천6백5십만원-----그것을 차라리 해약하라고 하니까 그런돈 없다고 하다가 아무말 없이 수그러지더라.
지금 5시40분 조금 지났다.
손가락이 아파서 겨우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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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오후7시30분이 넘었다.
하루종일 생 지랄을 다했다. 종구에게까지 전화로 무슨소리를 했는지............
너희 외할머니께서는 나도 똑 같다고 한다.-------딸이니까 딸편을 들더라.
김천을 떠나잔다.
나는 차라리 죽자고 했다.
나도 이제 체력이 다되었다.
2001-06-19(화요일)
오늘부터는 이상하리만큼 싹싹하다.
내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내일 장모님 모시고 가야온천엘 가기로 했다.
모처럼 오셨는데 어디 구경한번, 외식한번 못해드려서 죄송한마음 무척 크다.
마음의 짐으로 남을까봐서 겁이난다.
---하루종일(10시간 넘게) 옥상에서 왜철쭉 철사걸이와 분갈이 했음---
손이 통통 부어서 주먹을 쥘수가 없구나...................
2001-06-21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할머니들 세분을 모시고 가야산 국민관광지로 목욕여행을 떠난다.
너희 외할머니+양천 공장 할머니+농소 대방골 할머니와, 너희 어머니---- 이렇게 세 할머니를 모시고 간다. 가게된 동기는?---외할머니께서 이번 금요일에 서울로 가시면 언제 또 오실는지 모르고해서 그냥 노인들 바람이나 쏘이시게 할련다. 경제적 부담도 적고. 돈만 많다면야 어딘들 못가겠나만.
돌아가신 너희 친 할머니가 생각이나서 못내 아쉽기만하다.
할머니들이 마음이 들뜨는 분위기가 역역하다.
무사히 ‘목욕여행’을 다녀오마. 지금 아침 8시 30분이다.
지금 밤11시10분
잘다녀왔다. 돌아오는길에 밭에서 고기를 구어드렸다.
대방골 할머니는 일찍 모셔다드리고, 다른 두 노인이 꽃밭에서 풀을 뽑으셨다.
그만두시라해도 막무가내로 하셨다.
노인들이 가야온천은 처음이시란다. 흡족해 하셔서 기분이 좋다.
내일 외할머니께서 서울로 가신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 궂은 모습만 보여드려서 안됐다.
당신께서 이게 마지막이시라며 여러곳을 다니셨다.
마치 죽음을 준비라도 하시는 것 같았다.
건강하게 보내시기만을 바랄뿐이다.
내일은 관리기 수리가 다 되겠지............
2001-07-01(일요일)
윤경이가 다녀갔다. 건강해 보였다.
2001-07-03(화요일)
며칠 조용하다 싶더니 드디어 오늘 또 시작했다
점심 잘 먹고 시작한 것이 지금 저녁 9시 20분이다.
주장하는 요점은------
내가 모든 나의 동기간들과 짜고 너희 어머니를 골탕 먹일려고 그러는거란다
이제 생각해보니까 너희 할아버지 제사날이 닥쳐오니 발작을 한 것 같다
오늘 아침 일찍 자두를 따러 가서는 ‘내가 어쩌다가 이짓까지 하게되었나’하면서 탄식을 하더라.
그러면서 장사를 해야지 농사지어서 무슨 돈을 벌 수 있느냐고 한다
밭을 사놓자고 그렇게도 나를 못견디게 졸라대서 밭을 사서 너희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까지 해줬더니, 이제와서는 딴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면 팔아보자’고해도 팔지는 않고..........
밭을 살때에도 많은 이익을 얻는다고는 생각하지않고 그냥 주말농장 처럼 편한 마음으로 땅을 관리하기로 했던것인데----이제와서는 경제성을 따지면서 못마땅해 하고 , 그러면서도 팔지는 않고---
내가 정말 못견디겠다.
나의 형제간과 동기간의 인정을 다 끊어놓고---------------------
오죽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을 해놓겠나
반드시 지켜야할 일이니 다시한번 확인하고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라.
1. 내가 만약 아파서 의식불명이 되거든 지체말고 안락사를 신청해서 꼭 되게
하여라
2. 내가 만약 병원에 입원을 하여 다른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거든 지체말고 간병인을 두어라---모든 경비는 내 재산으로 충당하여라
3. 그러다가 내가 죽거든 수의를 입히지 말고 입은옷 그대로 관에 넣되 염을 하 지말아라. 장례식을 하지말아라--부고도 내지 말아라
4. 내가 죽은후에는 반드시 화장을 하고 유골 가루는 편한데로 아무곳에나
뿌려라
5. 묘를 만들지 말것이며 납골당에도 나를 가두어두지 말아라
6. 제사를 지내지 말것이며 추도일 같은 것도 만들지 말아라
7. 내가 죽은 후에도 만약에 나의 재산이 남아있거든 끝까지 부모를 잘 봉양한 사람이 모든 유산의 전부를 가져라.
8. 내가 죽은 후에는 나와 관계되는 모든 흔적들을 없애도록하여라
이상의 여덟 개 항목을 한 개라도 빠지지않도록 꼭 지켜라.
지금은 2001년 7월 3일 21시42분이다.
경북김천시황금동91-6번지의 이충기 씀.
2001년07월08일(일요일)
어찌된일인지 그저께부터는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오늘은 밭에 같이갔다가 왔다.
이번 금요일(음력5월23일)은 너희 할아버지 제사 입제 날 이다.
너희 엄마를 청주에 보낼까 생각중이다. 한사코 가지않겠단다.
윤경이가 귀찮아하지 말았으면한다.
거기까지 가서 김교수에게 실수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2001년 07월13일(금요일)
예상했던 일이지만 또 시작이다
오늘이 너희 할아버지 제사 입제날이거든.
너희 엄마가 시집 식구들과 원수같이 지나게되니까 나의 입장만 난처해지는데, 이것은 너희 엄마의 오랜 기간 동안의 철저한 나 죽이기 작전이었다.
나를 바람을 피운다고도 하고....
엄마는 나도 모르게 살며시 대구에도 다녀오고하면서도....쇼핑갔었단다.
오늘은 복지관의 다도반에서 단체로 다부동 전적지 부근의 어느곳에 간다고 해놓고, 갔다와서는 어느 집에 갔었는지 그집의 상호도 이름도 모른다니 말이되느냐?
오는길에 우리 밭에 셋이서 들렀다는구나. 그러면 단체가 아니고 승용차로 개인별로 간것아니냐/
그래놓고도 나를 못살게 구는구나. 이렇게 조그만 일들도 나를 속이면서......
남편의 아버지(시아버지라고 부르는것도 나는 불쾌하다) 제삿날에 달랑 수박하나 사들고 가라는구나. 내가 경우가 아니라고 했더니 생닭을 한 마리 사왔더라. 그래서 밭에가서 제사에 쓸 자두를 조금(정말 조금이다) 비닐봉지에 따담아서 수박과 닭고기를 함께 가져갔었다.
오늘 저녁에는 나 혼자 대방리에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들어갈 것이다.
서울 막내삼촌이 밤10시 쯤 도착하면 역에가서 같이 갈란다.
이제는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이다.
2001-07-15(일요일)
드디어 오늘 또 터졌다
이번엔 그저께 아버지 제사지낸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수박 하나만 사가면되지 닭고기까지 사갔다는 것과, 며칠전에 작은아버지 내외분이 가야온천에 목욕갔다가 오시는길에 밭에 들렀다는것의 못마땅함과, 큰아버지가 휘발유사러 주유소에 왔다가 집에 가는길에 밭에 들렀다는것의 못마땅함.....
그리고 넷째삼촌 내외의 인사성없는 것의 못마땅함과, 약국 큰어머니에게 내가 너무 다정하게 대한다면서 또한 못마땅함......등등을 무려 하시간 반이 넘게 핏대를 세우며 방바닥을 쳐가며 이야기했다.
나는 이제 4~5일 간격으로 이렇게 당하니 살수가 없구나.
그래서 곧 내가 법적 수속을 내 일방적으로 추진하여 이혼을 생각하니 그리알아라고 이야기 했더니 그래도 할수없다는구나. 이혼을 하는 것이 좋다는 구나. 어찌하노?
2001-07-16(월요일)
오늘은 또 전혀 딴 사람이되어있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이보였다.
내가 오히려 이상해 것 같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2001-07-18(수요일)
오늘은 또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다.
종구야!
며칠안으로 자두와 참외를 부쳐줄테니 냉장고에 넣어두고 친구들과 나누어먹어라.
농사라고 지어서 신선한 것은 맛도 못보는구나.
안타깝다.
난 너를 믿을란다.
2001-7-30(월)
또 시작할려다가 윤경이가 오는바람에 수그러들었는데
아직도 위태위태하다
오늘은 눈치가 이상하다 그래서 내가 얼른 서재로피신했다.
마주보지 말아야만 무사할 것 같아서.
윤경이와 여인천하를 시청한단다
서재까지와서 그런걸 봐야한다면서 강요를 한다. 모든 것이 자기본위로 결론짓고 판단한다.
웃고 이야기 해도 이제는 옳게보이지가 않는다.
2001-08-19(일)
요즘 10여일간 이빨이 아파서 얼굴이 퉁퉁부었다. 내일은 이빨뿌리남은 것을 뺄예정이다
며칠간 좀 조용하더니 어제 여고동기회 모임에 갔다오더니 또 발작을 하기시작했다
기분을 다른곳으로 돌릴려고 이리저리 유도를 했지만 허사다.
오늘 저녁 드디어 터지고 만다.
종구에게 전화할때만 해도 별일없는 것 처럼 조용히 통화를 끝내더니-----
내가 눈치를 채고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으나 그냥 건성으로 흥흥하더니 결국은
‘이놈의 새끼---저놈의 새끼----’하면서 혼자 야단이더니 전화기를 드는 것을 보고 이방으로 와서 이글을 쓴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으니 마음을 넓게 가지고 그냥 지켜보면된다고 그렇게 타일러도 막무가내이다. 정말 이제는 나도 지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남들의 자식이야기를 듣고나면 집에와서 한바탕 혼자소리로 떠들어보다가 종구한테전화해서 분풀이라도 하는것처럼 야단이니.................
이번주가 또 지겹겠다
23일과 25일에 문경과 여주로 견학을 간다하니 이틀동안은 내가 좀 편안하겠구나
왜 이렇게 까지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지겹기만하다. 괜히 내가 이렇게 나이들어서 무슨 죄나 지은것처럼 마누라 눈치를 살피는 얄궂은 신세가 되었으니.....
내 형제자매들과의 전화하는것도 못마땅하고, 내 친구들이 오는것도 내가 가는것도 못마땅하고
도무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거니?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의 방도가 없구나.
답답하기만 하다.
2001-9-20(목)
종구야!
네 마지막 등록금 225만원을 부쳤다
기나긴 여정이었다
다른 이야기야 해서 무엇하겠나
소신껏 건강한 삶을 살거라
2001-11-15(목)
요즈음 내가 문소리만 꽝하고 나도 깜짝 놀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때에는 너희 엄마 목소리에 깜짝 놀라기도한다.
그러지 않을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나 혼자서 밭에 있거나 집에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아무말이 없으면 또 무슨 요구를 할려는가? 싶기도하고, 또 시집식구문제로 시비나 걸지않으련가하고 눈치를 살피게 된다.
요즘은 윤경이 시집보낼 걱정으로 거의 매일 하루종일 신랑감 구할 걱정밖에 없다.
좀 경우에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시집이야 가겠지만 너무 서둘러대니까 내가 받아들이기가 벅차다.
금방 무슨 일을 저질러야지만 속이 후련한 모양이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중매를 부탁하는 모양이다.
내가 인터넷에 들어가서 결혼 정보회사에 등록하자고 했다.
그런데 별로 신용을 하지않는다. 인터넷을 모르기 때문인듯하다.
어쨋건 나는 지쳐있다.
그냥 멍해져가고 있다.
방향을 잃은 것 같다.
너희들이 잘 알아서 살아라.
2001-11-19(월)
요즘 너희 엄마의 생각은 온통 윤경이 시집보내는 것 뿐인것같다.
대전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부탁을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라도 말을 붙여서 윤경이 혼담을 시작하는 것 같다. 금년이 지나면 너무 나이가 많아서 서둘지 않으면 안된단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윤경이가 확실한 대답을 않고있어서 결혼에 대한 의논을 해봐야겠다. 또 정 급하다면 인터넷에 등록을 하자고했더니 그것은 별로 내키지않는 모양이다.
어쨋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너희 엄마땜에 나는 스트레스가 쌓인다.
매일매일의 대화는 오직 윤경이 신랑감 찾는 이야기 뿐이다.
2-3일간 내외가 다 같이 감기로 앓고나니 정신이 멍하다.
하루종일 쓸고 닦고하다가 3시반이되어 지금 잠깐 쉬는 중이다.
지금 저녁 7시
너희 엄마는 대전에 친척이 있다는 어떤 아줌마를 집으로 초대해놓고 집앞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 대전에있는 어떤 선생님이 자기 이종사촌이어서 소개를 시켜줄수도 있다는 말만듣고 그 아줌마를 집에 초대하여 우리사는 모양을 보여준단다. 그리고 대전에 살고있는 그 선생님을 찾아가잔다. 어처구니가 없다. 나의 상식으로는 너무 지나친 것 같기도하여 내키지 않는 만남이다.
차라리 인터넷 등록이 더 좋다고 생각되는데............
요즈음 나에게 마구 대하며 말도 함부로 하고 있다. 운전을 하다가도 무슨 말을 하면 ‘운전이나 똑바로 해!’하지를 않나, 방닦고 거실좀 닦아라! 하지를 않나. 무슨 하인에게 대하는 말투이거나 아니면 죄지은 종에게 하는 말투이다. 참고있을려니 울화통이 치밀어서 미치겠다.
그리고 참! 종구너! 내 재산을 넘어다보고 아무하는 일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너의 어머니 말이 생각나는데... 어림없는 소리 말아라. 네 살아갈 방도는 너 스스로 해결해라.
나는 이제 이 이상은 너에게 어떻게 해 줄 수가 없구나. 집+밭+공제금 합쳐봐야 얼마나 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병들면 이 재산 다들어갈지 누가 아느냐?
네 앞가림은 네가 스스로 하여라.
너한테 돈보내고 나면 100만원가지고 생활을 할려니 너무너무 고생스럽다.
그렇다고 집을 팔수도 없고, 땅은 팔아봐야 얼마되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지만...............
한달에 160만원수입으로는 정말 고달프다.
윤경이에게 돈을 부탁하지말아라.
윤경이는 제가벌어서 제앞가림을 해야되니까.
연금 125만원에 공제조합이자35만원이니까 꼭 160만원이다. 이것이 수입전부이다.
아래층 가게는 일년에 180만원이지만 도움이되지 못한다.
재산세, 자동차세, 수도-전기-까스-전화요금을 충당하지 못한다.
기름값도 보일러에 자동차에.......
종구네가 벌이를 하지못하면 궁상맞기 이를데가 없이 생활해야한다.
어쩌다가 내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곱빼기 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명퇴를 했더니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년이지나면 이제 곶감빼어 먹듯이 원금에서 조금씩 찾아서 쓰는수밖에 없다.
1천만원을 빼어서 쓰면 한달에 백만원씩 보태서 쓰면 1년은 그럭저럭 쓰지않겠나.
매년 그렇게하면 한 5년쯤은 쓰겠지.... 그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이제 삶이 지겹다.
너희 엄마가 서울에만 갔다오면 좋은 인상이 아니고....
난들 어떻게 하겠나.
이제는 의욕도 없고, 무슨 비전도 없으니 명대로나 살수 있을는지.
너희들 시집 장가 보낼때까지는 살아있어야 되는데....
그래야지 애비에미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는 듣지않겠지.
2001-11-20(화)
너희 엄마등살에 못견뎌서 내일은 충남 한산중학교에 근무하는 친구한테가서 윤경이 중매를 부탁할려고한다. 처음 가는 길이라 잘 찾아갈는지 모르겠다.
호남고속 논산나들목에서 강경으로 가서 서천쪽으로 가다가 한산면을 찾으면 되겠더라.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나면 윤경이한테도 들를 예정이다.
오늘 마우스를 바꾸고 바탕화면도 곧바로 뜨도록하니 한결 편하다.
소화가 안되는지 요즘 방귀가 계속나오고 배에 가스가 차서 많이 부대낀다.
허리가 아프고 몸에 힘이 없다. 오른쪽눈이 아프더니 오늘부터는 괜찮다.
저녁은 배추국에 밥말아서 반그릇을 맛있게 먹었다.
2001-12-5(수)
모니터가 나가서 오늘 2만원주고 중고를 하나 샀다.
네 엄마는 종구한테 갔다.
종구를 위해서 서울로 이사를 가자는데---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집과 밭을 팔아야하는데 요즘같은 불경기에 부동산 매기가 뚜-ㄱ 떨어졌는데 잘팔리겠나? 서울에 간들 어떻게 생활하나?
종구가 무슨 장사를 시작한다면 모르겠으나 그냥 가서 살면서 종구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
차라리 내가 그냥 김천에서 혼자 살고있고 너희 엄마가 종구에게 가서 같이 있어주는 것이 좋을것같은데 너희 엄마는 그것은 어림도 없다. 며칠전 예솔분재 대구경북지회를 결성하는데도 갑자기 너희엄마가 동행을 해서 허성씨도 어리둥절했었다. 그리고 오는 12월9일날 울산에서 소품분재 전시회를 한다는데 일찍부터 간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것도 너희엄마가 못마땅해해서 못갈것같다.
이렇게 저렇게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되게 되었고, 너희 엄마만 얄궂은 사람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요즘 어쩐지 내가 건망증이 아주 심하여 심각하다. 심지어 은행현금인출기에서 돈을 꺼내는데 카드만 꺼내고 돈은 그냥두기도 하고, 무엇을 어디에 뒀는데 어디두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질않는다던지, 무엇을 할려고 했었는데 무엇을 할작정이었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기가 일수이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었으면 좋겠다.
나의 존재 자체를 잊고싶다.
너희들에게 욕되지않도록만 적당히 살다 갔으면 얼마나 좋겠나!?
세월이 왜 이리도 지겨우냐?
2001-12-8(토)
오래만에 윤경이가 왔다.
오자마자 엄마는 결혼얘기부터 꺼내놓는다.
의논이 아니라 일방적 통고형식이다.
대화를 저렇게해서는 안돼는데 싶어도 내가 뭐라 말을 못하겠다.
몇마디만 오가면 또 말싸움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서울갈때에는 서울로 이사를 가자더니 갔다와서는 별말이 없다.
밭은 세를 놓자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일인가?
그리고 집을 팔려면 또.......
서울가서는 뭣을 한다?
이것 저것 스트레스만 쌓인다.
내일은 울산 소품분재 전시회에 간다.
2001-12-10(월)
울산 소품분재 전시회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내가 하고싶었던 소품이어서 모두가 마음에 꼭들었다
박희정씨도 만났고, 강촌수석의 ?씨도 만나서 반가웠다
이규명씨의 친구라는 우씨도 알게되었다
지난번 예솔의 예동회 회원이 두사람 반갑게 찾아와 주었고
부산의 깜상도, 전용봉씨도, 울산의 박진현씨, 대전의 상록수 김씨,
그리고 젊은 두사람도 만났다. 모두들 전시회에 왔다가 만나게 된 모양이다
나는 인터넷을 하지않으니 좀 서먹서먹하기는 했으나, 초창기 회원이었다고 소개를해주어서 다행이었다. 박진현씨집에 갔다가 다음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정말 기가막힌 작품들이었다
2001-12-11(화)
오후에 김천 3형제가 대구 4째 세차장과 체육관 운영하는데를 다녀왔다
건강한 이모님도 뵈었다. 4째가 소갈비살을 구어 저녁을 냈다
역시 저녁에 너희엄마와 한바탕 했다
시집식구들과 만나고 왔으니 한바탕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유인 즉슨 약국 큰엄마가 윤경이 시집을 28살에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2년이라도 너희 엄마를 대방리에 들어가게해서 일을 시킬려는 속샘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나온다
2001-12-13(목)
너희 엄마 등쌀에 못견뎌서 내일 한산엘간다
한산중학교 교감 이동준이가 내친구인데 윤경이 중매를 부탁하러간다.
아침 8시에는 출발해야지만 당일로 다녀올수있기에 억지로라도 잠을 일찍 청해봐야겠다.
그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놀러다닌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사정을 알면 얼마나 우스게감이 되겠는가를 너희 엄마는 생각지도 않는다.
--오로지 나의 생각만이 가장 옳고 바르고 참된것이라고 철저하게 믿고있는 사람이기에---
그냥 서글프고 아무생각도 나지않는 머-ㅇ한 상태로 살아갈 뿐이다.
너무 몰아대니까 이제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런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머-ㅇ 할 뿐이다.
2001-12-21(금)
17일날 한산중학교 이동준 교감에게 다녀서 청주로 갔다.
18일날은 김성청교수 내외와 상당산성에서 오골계로 점심을 대접받고 윤경이에게로 갔다가 나는 16시30분쯤 김천으로 내려오고 네 엄마는 남았다. 집에오니 19시가 되었다.
19일날은 허성씨 하우스 짓는 것을 돕고 떡국으로 저녁을 먹고 4점바둑을 뒀다. 내가 이겼다.
20일날은 밭에가서 자두나무 전정작업을 몇그루 하고 집으로 왔다.
대구 병화아저씨에게서 전화왔다--서울있는 총각 선을 보자고--내키지않아 핑계대고 미루었다.
또 사료상회 아주머니가 전화 했더라.
방금전 비데를 사러갔더니 45만원이나 해서 그냥왔다.
오는길에 지좌동 SK직영주유소에가서 카드로 3만7천원어치 넣었다. --L당:1175원이더라.
내일은 분재회 망년회를 조마찬물도랑 양어장에서 낮에 한다. 부부동반이다.
2001년 12월 24일에 너희에게 아래와 같이 남긴다.
잘 읽고 익혀서 분명하게 실행하도록 하여라.
1. 내가 병들어 기동을 못하거든 내 재산의 경비로 간병인을 두어라.
2. 내가 고통스러워하거든 안락사를 시켜라.
3. 내가 죽거든 부고를 내지말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알리되 부담이 없도 록해라.
4. 내가 죽거든 수의를 따로입히지말고 입은 옷 그대로 화장을 해라.
5. 내가 죽거든 장례식을 별도로 치루지 말아라.
6. 내가 죽거든 화장한 골분을 아무곳이나 살아있는 사람이 편한곳에 뿌 려라.
7. 내가 죽고난 뒤에는 묘소나 납골당을 만들지 말아라.
8. 내가 죽고난 뒤에는 제사를 지내지말고 그냥 모여서 묵념 만 하고,
내가 죽은 날짜에 장소를 번갈아 만나서 정을 나누는 기회로 삼아라.
9. 내가 죽고난 뒤에 나의 재산이 남아있거든, 마지막까지 부모를 잘 봉 양한 사람이 남은재산 전부를 가져라.
10. 내가 죽고난뒤에 너희 어머니 또한 나와 같이 하고 고통이 없게하여 라. (너희 어머니가 다르게 요구하면 그에 따라 행하여라)
11. 지나친 관습에 얽매이지는 말되 잊지만 않으면 된다.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너희들도 위와 같이하면 너희의 자식들이 얽매임 없이 살아갈 것이다.
너희 둘은 절대로 소리내어 다투지말고, 서로의 잘못을 탓하지말며,
서로 먼저 양보하고, 서로 경제적 도움을 바라지말고, 공평하게 살아라.
2002-1-12
지금도 매일 윤경이 시집보내는 이야기가 대화의 전부이다.
잠시도 쉬지않고 윤경이 시집보낼 생각뿐이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않는 것 같다.
두어마디만 말이 오가도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너무너무 지겹다.
2002-1-14
지금은 1월 15일 새벽5시40분이다.
지난밤 3시에 또 한바탕 했다.
윤경이 결혼 상대자 문제로----
나는 그만 살고 죽고싶다.
너희들에게 욕되게 하기싫어서 그냥 참고 살고 있다.
이제 사는 것이 싫어졌다.
그냥 죽어 없어지고 싶다.
얼마나 우리 집안이 싫은지 시어머니 제사에도 또 가지않았다.
같이 살고있는 남편의 어머니가 아니냐? 그리고 너희들 할머님이시고.
2002-1-16
하루종일 비가내린다.
속이 많이 상하면 내가 음식을 못먹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심하게 상하니까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구나.
그래서 오늘은 적게 먹고 지나니까 조금은 편한것같다.
내일은 등살에 못이겨 대구 병화아저씨에게 가볼 작정이다.
너희 엄마는 결정을 하고싶어한다. 윤경이가 결정할 문제이다.
나는 아직 서둘고 싶지않다.
청주에 살고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2002-1-20(일)
18일날 대구 병화 아저씨에게 다녀왔다.
아저씨가 중매하는 그 사람의 집안이 괜찮고 생활 정도도 좋았다
성장과정이 원만하여 성격도 좋을 것 같다.
윤경이에게 전화로 이야기하니 별무 신통이었다.
오늘 청주에 가는데 어떤 반응일지가 궁금하다.
어제 전화에서는 시집가기가 싫다는것이었는데 걱정이된다.
양가의 집안 사정이 서로 흠을 잡을수는 없는것같아서 적당할것같으나
저쪽집이 재산이 수십억원이나 되는 너무부자여서 부담이 되기는 된다.
며느리감의 키작은 것은 괴이치않는다니, 그리고 머리좋은 것을 원한다니 다행이다.
모든 것은 윤경이에게 달려있는듯하지만, 저쪽편에서 윤경이를 마음에 들어할런지가 걱정이다.
모든 것은 당사자들에게 맏기는 수 밖에 없겠다.
2002-1-23(수)
20일날 청주에 갔다가 21일날 눈보라속에서 내려왔다--혼이났다.
책꽂이를 두 개사서 방정리를 하고 혼자왔다.
22일날은 자동차 검사를 마치고, 동부화재에가서 차 보험을 들고(40만원하고 조금더),
학교에서 전화가와서 교장,교감,이각용,허민 선생님들과 같이 교장이 점심을 샀다.
오후에 백선생,이석진,허민 선생님과 같이 북삼 한증탕에 갔다가왔다.
허선생님한테 단호박을 두 개 줬다.
오는 금요일(25일) 성주 가천 숯굴에 가기로 약속했다.
어제 밤에는 종구의 전화를 받았다--장래걱정을 해줬다.
2월24일날 시험이고 25일날 학교를 마친단다.
아침 8시에 누님전화를 받았다--참나무 숯을 사서 부쳐달라는 부탁
지금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방에만 갇혀있다.
조용한 마음으로 이 글을 남긴다.
윤경이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괜찮은 사람이라면, 윤경이 마음에 든다면 말이다.
2002년 2월 3일(일요일 밤 1시부터 이글을 시작한다)
요즘 며칠간의 간격을 두고 큰소리들이 나긴했었으나 그런대로 견딜만 하였었다.
너희 엄마의 강력한 주장에 충남 한산에도, 대전 특허청에도 다녀오고, 대구에도 전화를 하고---
어제는 서울 상진이와 너희 큰 이모에게도 전화를해서 의사를 중매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하더라.
나는 밭에가서 자두나무 전정작업도 하고, 그냥 그냥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 드디어 또 시작을 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작년에 인터넷으 mail문제로 너희 엄마가 나를 의심하여 일어난 일이 있은 뒤에 모든 인터넷 관계를 끊고있다가, 얼마전에 윤경이한테 갔을 때 daum.net에 들어가서 분재동호회가 어떻게 꾸려지는지를 알아볼려고 다시 회원으로 가입을 해서 그동안의 소식들을 알아보고 인사말을 띄웠단다. 얼마후 다시 청주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모두들 몹시도 반가워하면서 야단들이었다. 내가 과거에 서로 의견을 주고 받던 사람들이 답글을 띄운 것을 반갑게 읽어봤다.
그후 며칠전에 허성씨집에 부부동반으로 초대를 받아서 갔다가 밤2시까지 즐겁게 대화를 하면서 지내다가 기분좋게 집으로 왔단다. 내가 못먹는 술도 몇잔 마시고 해서 분위기가 정말로 참 좋았단다. 그리고나서 그이튿날 아니 또 그 이튿날인가에 청주에 갔었다. 그곳에서 다시 분재코너에 들어가서 재미난 그날 밤의 일들을 생각하며 게시판에 글을 올렸었다. 이튿날 집에 오기전에 컴을 열어보니 모두들 무척이나 반가와하면서 답글을 올려놨더라. 물론 너희 엄마에게도 보여주었단다. 나도 기분이 흡족했었다.
그런데 어제 그저께 허성씨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2월2일 토요일날 분재코너의 회원 몇 명이 김천을 방문한다면서 참석을 하겠느냐고 묻길래 내가 좋다고 응답을 했단다.
그래서 어제 오후 2시에 부산에서 3명의 동호인들이 기차편으로 도착을하고, 대구 사람이 1명이 또 도착을 하여 점심을 먹고난뒤에 대구사람은 대구로 돌아가고, 부산사람들과 상주로가서 야생화 구경을 하고, 영동역에서 기차편으로 도착한 서울사람 2명과 합류하여, 황간에가서 분재구경과 저녁식사를 하고 김천의 허성씨 댁으로 왔다.
허성씨 댁에서 술을 한잔하면서 분재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모르면서 밤2시 가까이되도록 이야기를 했었단다. 부산회원 한분이 CD에 2~3천점 정도의 각종 사진자료를 만들어와서 선물로 주어서 모두들 고맙다는 인사를 했었다.---정말 귀한 자료를 잘 만들어 왔더라. 나도 물론 한 장 얻어왔다. 지금 컴이 CD를 볼수는 없으나 윤경이한테 가져가서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놀다가 김천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외지에서 온 5명은 허성씨 집에서 잠을 자고, 오늘 아침식사까지 신세를 지고말았단다.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허성씨에게 우리가 미안했었다.
내가 집에서 아침9시쯤 허성씨 집으로 가서 그 사람들과 함께 우리밭(평산방)으로 가서 찔래나무 꺾꽂이 해놓은 것을 선물로 주고 다시 허성씨 집으로 되돌아오니 대전 사람과 어떤 여자 회원이 같이와서 있었다. 그리고 김천의 김두호씨가 자기가 키운 여러 가지 분재묘목들을 캐와서 선물로 주었다.
모두들 흡족해하면서 김천의 회원들댁을 방문하기로 하고 우리집에도 왔었다. 나 까지 합하여 모두 11명이었다. 옥상의 분재를 구경하고 내려와서 엄마가 끓여주는 대추차를 한잔씩하고, 서둘러서 다른 회원댁으로 가서 구경을 하고, 직지사 식당골목에가서 점심을 먹고(회비는 1인당 1만원씩 내어 식비를 보태고 나머지는 김천회원들이 부담했다--1인당 3만원쯤이었다) 오후 4시에서 5시사이에 기차시간에 맞추어서 직지사 식당에서 모두들 떠나고,(역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김천사람들은 문태균선생님 댁에서 뒷이야기들을 하면서 저녁을 대접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짜고짜 ‘작년에 당신에게 e-mail을 보내서 꼭 만나보고싶다던 그 여자가 바로 오늘 따라온 그여자지?’하면서 야단이었다. ‘틀림없는 그 여자이다’라면서 나를 몰아세우는구나.
정말 어이가 없고,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그냥 벌렁벌렁 속이 뒤집혀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남편을 믿지않고 의심을 하는구나 싶어서, 그리고 나에대한 믿음이 없구나 싶어서 분통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었다. 너희 엄마는 그러면서 ‘사실이 아니면 왜 그렇게 펄쩍 뛰느냐? 사실이길래 그렇치!’하면서 작년보다 더욱더 나를 믿지않는게 아니냐.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큰소리로 야단법썩을 쳤단다.
그러다가 어찌나 화가나던지 내가 윤경이한테 전화를 해서 나에대한 인터넷의 모든 것을 지우고 분재동호회에서도 또 다시 탈퇴를 해놓으라고 전화를 했단다.
그리고나서도 1시간이 넘게 다투다가, 내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도저히 이제는 같이 생활을 할 수가 없겠기에 최후 통첩을 했다.
* 부부간의 믿음이 사라진 지금의 상태로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지않겠다.
* 믿음이 없고 의심만을 하는 사이는 원수지간일 뿐이다.
* 나도 이제는 너희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믿지않고 의심만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모든 취미활동을 위한 외출들을 의심하기로 하고, 또 거부 했다.
* 밭을 가꾸는 일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나도 취미활동을 하지않고 분재도 부셔버리기로 했다.--하루 혹은 며칠에 몇 개씩을 부셔버리겠다.--오늘 밤 당장에 몇 개를 부셔버렸다. 나의 마지막 취미활동까지 가로막으니 이렇게 마음에 부담이되어 가면서까지 내가 취미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생면부지의 여자회원이 참석을 했고, 나도 그냥 회원중의 한사람일 뿐인데, 내가 어찌 여자회원은 참석하지 말라고 할 수가 있느냐?
내가 그냥 그만둘 수밖에 없지않느냐? 그 여자의 이름도 닉네임도 모르는데, 엄마는 그 여자가 나를 만나러 왔단다.--철저하게 나를 불신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30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간의 믿음이 될 수있겠느냐? 서로간의 믿음이 없어진 이 상태에서는 도저히 가족이라는 기본관계마저도 이어질 수가 없다. 이렇게도 나의 자존심을 짓밟는 대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너희 엄마의 성장과정에서 얻어진 불신의 잠재의식이 나에게로 돌려져서 없어질줄 모르고 있으니, 이제는 도저히 원만한 관계로 되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참을 것 아니냐.
내가 되도록 괜한 신경을 쓰지 않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왔건만, 모두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도 없거니와 참지도 않을 것이며, 이제는 어쩔수 없이 그냥 같이 살고있는 ‘어떤 사람’으로서의 관계로만 여겨진다. 그리고 ‘부부도 가족도 아닌 원수지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이후로는 너희 엄마의 모든 언행들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따져보기로 굳게 마음먹고, 너희 엄마가 나에게 하는 그대로를 똑같이 해줄 작정이다. 그래야만 나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알것이 아니냐? 엄마가 친구들과 같이 간다는 여행도, 나들이도 의심할 것이며, 나 몰래 대구며 어디며 돌아 다니는 것도 의심해볼것이며, 도 반드시 확인도 할것이며, 이제는 나의 구미에 맞는 음식이며, 옷이며, 생활들을 확실하게 요구할 것이다.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예절도 요구할 것이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제사에도 반드시 참석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어디에도 시부모님의 제삿날을 거부하고 명절에 집안 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며느리가 있겠느냐? 어디에 털니를 해서 끼운 남편의 음식을 그렇게 먹기가 곤란하게 하는 아내가 있으며, 어디에 남편의 속옷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아내가 있으며, 어디에 부엌의 정리정돈이며 방안의 정리정돈까지 내 몰라라하는 주부가 있으며, 어디에 남편이 시댁의 형제자매들과 만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욕하는 며느리가 있으며, 어디에 남편의 직장에까지 전화를 해서 올바른 직장근무를 못하도록 긁어대는 아내가 있으며, 어디에 멀리있는 자식을 두고 저주를 퍼 부어대는 어미가 있으며, 어디에 사사건건 남편의 생활까지 믿지못하여 안달하는 아내가 있으며, 어디에 이렇게 못되 먹은 짓들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디에 또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 주장만이 가장 옳다고 우겨대는 사람이 있으며----------
아--- 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목숨을 걸고 나의 자존심을 되찾고 지킬 것이다.
너희들도 지금 나의 어러한 심정을 티끌만큼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욕하고 헐뜯지는 않을 것이다.
있지도 않은 일을 있다고 우겨대는 일이야말로, 자기 생각은 진리라고 우겨대는 태도야말로 다른 한 인간을 무참히도 허물어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악독하고도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으니 환장할 노릇이 아니냐.
분명히 말하건대---이제는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너간것같다.
이제는 되돌아 가기도 싫고, 되돌려 놓고 싶지도 않다.
너희들을 핑계로삼고 그냥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너희들을 담보로 삼아서 나를 합리화 시킬 수밖에 없는 나의 신세가 서글퍼진다.
정말 마음대로 되지않는 것이 삶이구나. 이렇게 철저하게 후회 해본적이 없었는데, 이순간 뼈저리게 지난 삶을 후회한다.
너희는 평생을 같이 살아갈 반려자를 정할때에는 반드시 성장과정을 잘 살펴서 판단해라.
나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를 찾아볼려고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뚜렷한 어떤 점을, 아니 확실한 어떤 단서를 찾지를 못하겠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모두 끊게하더니, 또 친지들과의 원활한 교류를 방해하더니, 이제는 같은 취미인들과의 교류 조차도 못하도록 집요한 병적인 방해를 하는구나.
집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나면 밖에 나가서 나의 표정이 굳어져서 사람들과의 대화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겠으나, 너무 오래동안 물고 늘어지고 없는일을 혼자 생각으로 온갖 추리를 다 새우고 있으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다.
내일 아침이면 또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속이 몹시도 상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또 전화를 해대면서 너희들에게 욕지거리를 펴붓겠지. 아니면 휙하고 밖으로 나가겠지. 아니면 너희한테 사전연락도 없이 찾아가겠지.
차라리 나혼자 있으면 그렇게도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는데.............
이제는 이정도로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 정신이 좀 가라앉은 뒤에 또 할게
참고 읽어줘서 고맙다.---지금 2월 4일 새벽 3시 5분이구나.
2002-2-4(월)
봐라! 어제 밤에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내가 새벽 5시30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깨어보니 9시반이더라.
갈곳도 없고 마음도 상하여 차를 몰고 갔는데 밭이더라. 그냥 타성에 젖어 밭으로 간거지.
그래도 나무를 보니 전정을 해줘야겠기에 몇그루를 전정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전정방법을 배울려고 이곳 저곳으로 가봤다. 오후 늦게 다시 밭으로 갔더니 엄마가 점심을 싸왔다가 되돌아 갔다는 이웃밭의 아주머니가 알려주더라. 다시 몇그루를 전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내을 한바퀴돌다가 저녁을 사서 먹었다. 아직은 분이 풀리지않아서 너희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싶지가 않다.
눈도 마주치기가 싫고, 숨소리도 듣기싫고, 발자국 소리도 듣기싫다.
이 글을 쓰고있는데 저녁밥상을 차려서 서재로 가져왔다. 나는 거들떠 보기도 싫다.
옥상의 하우스에도 가보기가 싫다.
그런데 내일 아침 새벽에 청주에 간단다. 청주의 복지관과 여성회관에 강좌을 신청한 것이 내일이 개강일이란다. 알 수 없는 의심을 나도 해야겠다. 그곳에서 윤경이 신랑감을 찾는다면서 어떤사람들과 어떤 짓을 하는지 나도 의심을 해야겠다. 그러면 너희 엄마 마음이 어떻겠느냐?
청주에서 두곳에 나가는것도 모자라서 대전에가서 또 신청을 한단다.
어디를 가나 입조심하라고 일렀거늘 또 무슨 ......
어제는 허성씨 부인에게 전화를 해서 앞으로 분재동호인들이 어디를 갈때에 내차를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자동차는 위험하니까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지않겠냐고 이야기 했단다. 자 봐라! 얼른 듣기에는 참으로 합당하고 논리적인 올바른 주장으로 들리겠지?
그러나 상대방이 들을 때에는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왜 이충기차만 이용하느냐? 당신들 차도 좀 이용해라!” 하는 것으로 들을것이 아니냐? 내가 차가 없을 때에 항상 그들의 차를 이용했었고, 또 지금도 나보다는 그들의 차를 항상 더 많이 이용하고있거늘----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허성씨부인에게 전화를 했으니 저절로 허성씨가 듣고서 오해를 할것이고, 다른 젊은 사람들은 서로서로 친구이며 친한 사이이니까, 너희 엄마 전화 이야기를 할것이고, 그렇게되면 저절로 나와의 관계가 조금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 아니냐?
이와같이 이제는 셋밖에 남지않은 젊은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끊어버리는구나.
<내가 하는 말이나, 나의 생각과 판단은 항상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다>라고 믿고있는 너희 엄마를 어떻게 감당하겠니? 틀림없이 앞으로는 나에게 어디를 가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분재와 관계되는 어떠한 이야기도 전해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켜봐야겠다. 내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삶이 지겹다. 싫다. 그러면서도 어찌할바를 모르고 멍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내일 또 내일 밭에도 가보고, 분재도 살펴보겠지....
내가 밉다. 스스로가 미워죽겠다.
2002-2-6(수)
아침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나를 못 믿겠단다. 작년에 나에게 e-mail을 보낸 그 장본인이 그저께 온 그 여자란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도무지 먹혀들지를 않는다. 화가치밀어 어찌할바를 모르겠다.
손에 닥치는데로 집어던졌다. 내안경도 깨고, 분재도 서너개 깨고, 목각도 깨고, 신문꽂이도 깨고,
아무것이나 눈에 뵈는게 없다. 그래도 눈도하나 까딱않는다. 쥐어박을 수도 없고, 아무리 이해를 시킬려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 철저한 불신이다. 내가 믿음이 가지않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아무리 생각해 낼려해도 아무것도 없다.
작년에 메일을 보낸 여자도 내가 이름도 성도 전화도 어떤 인적사항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나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서 답을 한 수십명 중의 한사람 뿐인데, 하필 그 여자가 메일로 나에게 인사를 해온 것 뿐이거늘 그게 무슨 그렇게도 의심이 가는 ‘바람피울 징조’란 말인가.
그리고 그저께 온 그여자는 더구나 내가 참석해라 말아라 할 처지가 아닌데........
작년에 40-50대이상의 사람들을 회원으로 하는 단순한 카페에 불과한데, 더구나 분재코너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나의 주소록에 깜상....등이 등재되어있고, 받은 편지함에 몇건의 메일이 있었는데, 여러메일 중의 하나일뿐---일방적으로 나에게 메일을 보내서 받은 편지함속에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알수가없다.
그저께 온 분재코너의 여자회원도 내가 오라 가라 할 입장이 아닌 사람인데. 분재코너 운영자가
게시판에 임시모임을 갖자고 ‘공고’를 했건, 나 이외의 회원들이 서로 전화로 약속을 해서 모이게 되었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분재 취미인들이 모이는 곳에 여자가 섞이지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아니면 내가 참석하는 곳에 여자회원이 참석해서는 안돼는가?
내가 참석할 때에는 반드시 여자회원이 참석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아보고 여자회원이 참석할 경우에는 나를 참석하지 말라고하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괜히 지극히 예의바르고 선량한 여러회원들을 욕먹이느니 차라리 내가 그런 모임에서 탈퇴를 할 수밖에 없다. 나 때문에 3~4백명의 회원중에서 그저께처럼 몇몇 회원이라도 서로 만나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이야기도하고 정을 나누는 그러한 활동을 제약받을려 하겠나?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인터넷으로 그리고 취미활동을 하면서 바람피울 준비나 하는 머저리같은 사람으로 만드는데는-------그리고 확고부동한 자기도취에 빠진 꼬락서니를, 그리고 말도안되는 혼자만의 추리를 내가 어떻게 고처줄수 있겠는가?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서 차라리 내가 뒤로 물러서서 그냥 방관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빼앗긴 나의 자존심을 되살려야겠다. 바람이나 피울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그러한 인간으로 치부하는데는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를 않는다. 나도 내가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닌것인데, 저도 제마음대로 추리를 하여 자기의 짐작이 마치 진리인양 떠들어 대는 꼴이 더 이상 미울수가 없다.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고 밥상을 차려와서 먹으란다. 어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속이 뒤틀리고 아파서 도저히 무엇을 먹을 수가 없다. 그냥 물만 자꾸자꾸 마시게 된다.
차라리 이러다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꼴도 보기싫고, 말소리,숨소리,발자욱 소리도 듣기싫다고 예기해주었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같이 살아온 30여년이 원통하다. 이렇게도 나를 나쁜쪽으로 매장을 시키니 어디 하소연이라도 속시원히 했음 좋겠는데, 그럴 처지도 못되고............
다음에 언젠가는 이글을 누구라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나의 심정을 다소나마 이해를 하리라고 생각한다. 저 뻔뻔스럽고 가증스럽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생활을하고 누구나 자기의 주장을 옳다고 믿고 따라야된다고 주장을 하고있으니 내가 환장하겠다.
이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지겹다. 같이 산다면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할텐데---내가 견딜수가 없겠다.
자기이야기를 듣는 제3자들은 전부 내가 ‘의심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믿을것이 뻐-ㄴ하다. 이러니 내가 환장하고 미쳐나자빠지겠다.
시집가족들과의 불화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가족으로서의 의미마저 사라졌는데....
또 자식들도 제어미를 싫어하는 눈치던데....친정의 자매들도 좋아하지는 않는 눈치던데......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아니라 한술더 떠서 자기만큼 정확하고 올바른 사람은 없다고 굳게 믿고있으니....
너희들 시집장가를 다 보내고 나면 이혼해도 좋단다. 너희들에게 흠이되어서 지금은 안됀단다.
그렇게 집요하게 이혼하자고 할 때는 언제인양 잊고서 ‘화가는데 무슨 소리를 못해!’하면서 자기의 언행에대해서는 철저하게 합리화 시킬려하니...........
죽고 싶다. 내가 죽거든 이러한 나의 고달픈 삶이 너무 오래동안 계속 반복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서 그리한 줄 알아라.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들을 확실하게 이행하여라.
2002-2-11(월)
음력섯달 그믐날 밤이다.
낮에는 눈발이 흩날리더니 이제 말끔하다.
새로운 감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설날이 닥쳤다.
그냥 조금은 부담스럽기만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가족들이 모이는 기회가되면 마음이 무거워지게되고,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어지게 되었다. 나 자신이 부끄럽기 이를데없는 일이다.
가장 흉허물없이 터놓고 만나고 반가와야할 가족이건만 내게는 부담으로 닥아오게된 것이 서글프기만하다. 이러한 삶이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렇게된 연유야 어떻든간에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와버린 길이기에 이제는 어쩔 수도 없다.
혼자이고 싶다.
아무도 없는 나 혼자이고 싶다.
안개 자욱한 아련한 들녘에 나 혼자이고 싶다.
그냥 그렇게 나 혼자이고 싶다.
그래서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그냥 있고 싶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나 혼자이고 싶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나 혼자이고 싶다.
흔적도 없이 그냥 나혼자이고 싶다.
나혼자. 나혼자.나혼자. 나혼자 그 리 고 나 혼 자 이고 싶다.
열두시가 넘어서 딸아이가 나의 눈을 갈아 준다고 나가잔다.
거절않고 나가서 꽤 많은 돈을 약속하고 새눈을 맞췄다.
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덜 익은 과일을 따먹는 기분이 났다.
대견스럽기 보다는 내가 부끄러웠다.
밝은 눈빛이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더 이상 생각지 않으려고 이것 저것 다른 상상들을 시작해도 딸아이의 작은 손망울이 생각나서 다른 상상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냥 그냥 그냥 힘없음을 실감했다.
아들아이를 멀리두고서도
간절한 마음이 솟구치면서도 전화를 못하겠다.
강하게 키운다는 것이 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못하겠다.
돌아올 대답이 더 두렵다.
아내의 말소리만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하루가 다 지나간다.
왜이럴까?
내가 이래서는 안돼는데 내가 왜 이럴까? 정말 이래서는 안돼는데 말이다.
저녁에 넷째에게서 놀러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몸도 편치않고 해서 못간다고 해놓고서도 마음한구석이 찝찝하다.
다들 밝은 마음이라고 믿으면서도 나는 이렇게 어두운 나날을 이어온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아이들이나 아내가 내 유언장을 봤을까?
그대로 실천해주어야 할텐데. 주위의 강요에 못이겨 나의 부탁을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다짐을 해 두어야겠다.
나의 자손이 있건 없건 간에 나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같이 해주기를 바라지만 강요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만은 꼭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너희들이야 너희들의 마음이 있을테니까-- 그리고 너희가 처한 환경이 있을것이고.
외출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발렌타이 데이라며 초콜렛을 준다. 특별히 주문제조한 것이라한다.
제 엄마와 나눠먹으란다. 어련할려고. 어떻게 나 혼자 먹을수 있나? 당연하지.
그러나 또 걱정이다.
내일 아이가 가고 나면 나에게 또 무슨 이야기로 들볶을것인가?
시집식구들을 만나고 난 뒤에는 반드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것이 정해진 차례인데.
이번에는 또 어떤 레파토리가 나올지 걱정이 앞선다.
지난번 메일사건 이후로 너무 답답한 나머지 속이 아주 불편하다.
도무지 배속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뻥뻥한 배가 하루종일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가장 편하다. 물만먹어도 배속이 거북하다. 그렇다고해서 병원에는 가고싶지않다. 그냥 죽어주면 좋으련만.
이것 저것 복합적으로 탈이나서 도저히 손을 쓸수 없게 되기만 바란다.
그래야만 아예 포기하고 그냥 마지막을 기다릴것이 아닌가.
내가 남겨 줄것이 너무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잊어야만 할 것들만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를 버려라. 그리고 잊도록 노력을 해라.
나의 흔적들을 남겨두고 싶지않다.
그냥 혼자서 가고싶다. 잊혀진채로 말이다.
슬퍼할 필요도 없다. 그냥 운명이니까.
운명---얼마나 좋은 핑계이냐?
끝까지 너희 셋을 보호하지못하는 내가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마음 뿐이다.
내 능력이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이것도 운명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믿으면 속이 좀 편해진다.
이렇게 쓰놓고 또 지우고 쓰고지우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나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써놓은 것을 모두 지우고서는 다시는 쓰지 않을려고 했건만 또 이렇게 쓰게 되는 구나. 이렇게 나혼자서만이라도 중얼거리지 않으면 못견딜것만 같아서 이렇게 쓰는모양이다.
내일 벌어질 일들이 자꾸자꾸 상상이된다.
별로 반가와 하지 않는 그냥 형식적인 표정들을 대할것이고, 어쩔수 없이 그냥 그렇게 같이 하는 척 할것이고, 과장된듯한 주장들을 진지한듯하게 들을것이고,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눈치를 살필것이고, 진정한 속마음은 편치않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할것이고, 너무나 너무나 형식적인 과정들이 계속될것이고, 섭섭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아쉬워하는 흐드렛 인사말들을 들으면서 일찍 나올테고,
그리고나서는 집에와서 또다시 늘 하던 그런것들을 한바탕 할테고......예들아 미안하다!!!!!!!!!!!!
2002-2-20(수)
18일날은 너희들 외할머님을 대구 작은 이모부님 댁에 모셔다 드리고 올라왔다.
오늘은 윤경이 네가 맞춰준 안경을 찾았는데 눈이 한결더 시원하고 맑아서 기분이 써-ㄱ 좋다.
엄마와 함께 세일하는 옷집에 들렀다가 내 콤비가 너무비싸서 그냥 왔다.
그리고 24일날 너희 엄마 상행차표를 사고, 나는 25일 왕복표를 예매해서 표를 사왔다.
윤경이 대구 총각 미팅은 불발인 것 같다. 대전 총각도 일단 미팅은 해보는게 좋겠다.
오늘은 밭에도 가기가 싫다.
그냥 책이나 읽어야겠다. 그저께 대구이모부님이 빌려주신 김대중주필의 논평집을 읽을란다.
눈이 밝아져서 기분좋은 날이다.
2002-02-22(금)
저녁때 종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걱정했던것과 같은 결과였다.
어찌할건가. 이제 다 지난일인 것을.
다시 마음을 돌려 다른 길을 찾을 수 밖에없다.
지난 일들을 탓하지말자. 이미 지난일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 지금 있는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후회되고 허망하고 하겠지.
인생을 살아가는데 처음닥친 크나큰 시련이라 생각하고 어제는 잊어버리고 이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다른 별도리는 없을것같다. 24일과 25일 차표는 다시 반환하면될것이고,
25일날 내려온다니까 자세한 계획을 들어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너희 엄마가 또 나에게 퍼부어대어서 잠깐 나갔다가 지금 몰래들어와서 이글을 쓴다.
제발 지난일에 집착하지말고 내일을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윤경이는 도형군과 이번주말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는데, 그리고 그저께 상진이가 소개한 인턴과정에 있는 의사도 만나봤는데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다는 이야기이다.
또 대전 특허청의 백군도 연락이 올텐데, 윤경이가 너무 바쁘겠다. 어디건 신중히 생각해서 한곳을 결정했으면 좋겠다. 금년에는 출가를 시키고 종구하나만 붇들고 살아야겠다.
인생이란 다 이런것이거늘 하면서 체념을 하면 좀 나아지려나?
어제의 일들에 얽매이지 않을려고 무진 애를 쓰건만 어쩐지 내 삶은 별로 행복한것같지않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생각하자.
종구야, 윤경아, 그리고 하순이씨,
우리 너무 기죽지 말고 그냥 그렇게 그냥 살아자.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우리들의 그릇이 이정도인 것을 . 어떻게 할건가. 너무 마음 조리지말고 그냥 그렇게 살자구나. 꿈도 꾸지 말고 너무 높이고 멀리도 보지말자.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않겠나. 서로를 탓하지말고 그냥 자기혼자 속으로만 생각하고 밖으로 표현해서 옆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말자. 그냥 그렇게 살자.
제발 자기할 도리만 하고살자. 핑계대거나 바난하지를 말자. 어떻게할 것인가도 각자 생각대로 하자.
이제는 나도 별 수가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을날만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지않느냐.
너희들의 생각이 나보다도 더 세련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무엇이건 강요는 하지않았는데. 그래서 결과도 너희들 각자의 몫이니까 그리고 너희들의 인생이니까.
뭐 길게 자꾸 얘기해봐야 별수도 없는 것을 .
이제 글을 마치면서 너희에게 다시한번 다짐을한다.
앞에서 여러번 다짐을 해놨지만 다시한번 확인하는 뜻에서 적어놓겠다. 잘 읽고 그대로 이행 하여라.
1. 내가 병들어 고통스러워 하거든 병원에 입원을 시켜라.
2. 너희가 간병을 하지말고 반드시 간병인을 두어라. 경비는 물론 내 재산에서 충당하여라.
너희들에게 느즈막에 신세지기 싫다.
3. 내가 육체적인 고통을 받지 않도록 조처를 하여라. 아픈 것은 질색이다.
4. 너희 생각에 가망이 없거나, 의사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눈치가 보이거 든 지체말고 안락사를 시켜라.
5. 내가 죽거든 수의를 입히지 말고 입고 있던 옷그대로 나무관에 넣되, 염을 하지말아라. 죽어 서 온몸이 끈에 묶이기가 싫다. 문상을 오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하지 말아라. 그냥 차나 한잔씩 대접 해라. 병원 장례식장 앞에는 ‘부의금 사절’이라고 써 붙여 놔라. 아예 부의금함을 설치하지 말아라.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을 하지 말아라. 그냥 묵념만 해라. 곡소리는 듣기 싫다.
6. 너희들도 상복을 따로 입지 말고 왼 팔에 검은 띠만 둘러라. 전통 예절에 벗어난다는 비난이 있더라도 일을 간편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다.
7. 부고를 내지 말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전화로 알리고 부조금도 받지 말아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적어도 요즘 세상에서는 말이다.
8. 죽은 그 이튿날 바로 화장을 해라. 3일장이니 뭐니 하면서 괜한 시간 끌기를 하지 말아라.
9. 죽고나서 화장을 할 때까지의 시간에 관습에 의한 제사나 노제나 상여나 그런 것들을 일체 하지 말아라. 그냥 조용하게 나의 뜻을 전해라. 나이 유언을 따른다고 말이다.
10. 화장을 하고난 뒤에 유골분은 그냥 아무 곳에나 버려라. 유골을 뿌리기 위해 따로이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아라. 유골을 뿌릴 때에는 각자 아무말 없이 그냥 조용히 뿌리기만 하면된다.
11. 집에 돌아와서는 그냥 조용히 지내거라. 내가 먼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12. 3일 탈상이니 49제니 하는 것들을 생각지도 말아라. 화장하는 날 유골을 뿌렸으면 다 끝이 난 것이다.
13. 묘지도 만들지 말것이며, 납골당 같은 것도 싫다. 왜 내가 갇혀 있어야 하나? 나는 갇혀있기 가 싫다. 자유롭고 싶다. 그러니 묘지나 납골당을 엄금하는 바이다.
14. 제사를 지내지 말아라. 내가 죽은 날(제사날)이 되거든 서로 만나서 정을 나누며 지내거라.
음식을 따로이 한다거나 다른 손님을 청한다거나 하지말고, 그냥 너희들끼리 모여서 서로 웃 으며 놀아주면 내가 더욱더 좋아할 것 아니냐. 너희 3촌이나 4촌들에게도 그렇게 말해라.
유언에 따라 어찌할수 없다고. 그리고 생전에 그렇게 약속했다고.
15. 설날과 추석날에도 따로이 의식을 차려서 하지 말아라.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 냥 잠깐 묵념을 하면된다. 생각이나면 말이다. 혼자서 하는 묵념이니까 별로 부담은 없을 것 이다.
16. 내가 죽은 뒤에는 나의 흔적들을 없애도록 하여라. 내가 쓰던 물건이나 옷이나 책이나 도구 나 또는 다른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라.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면 생각이 나게 되기 때문 이다. 죽은 사람을 자꾸 생각하면 좋지 않다. 빨리 잊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들 아이들을 위 해서는 나의 이러한 유언을 이야기해서 설득을 시키고, 가급적 잊혀지도록 정리를 하여라.
17. 이제 너희들이 가장 신경을 쓸 재산 문제를 말하겠다.
내 재산 이라고는 이 집과 밭과 얼마의 저금 뿐이다. 연금은 너희 어미 몫 이니까 말할 필요 도 없고,
만약 병원비와 간병비와, 그리고 화장장 비용, 장의 차량, 손님 접대용 차와 음료, 그외의 기타 비용을 나의 재산으로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거든 너희들이 분담을 하여라. 내 재산의 값어치가 모든 비용을 다 충당하고도 남는 것이 있거던 너희 두사람 중에서 마지 막까지 부모를 잘 보살펴서 생활한 사람이 모든 것을 거져라.
우리 내외가 스스로 밥이라도 끓여먹고 대소변이라도 혼자서 처리할수 있으면 너희들의 수 발은 원치않는다. 병들고 약해져서 혼자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매일 옆에서 뒷치 닥거리를 하는 자식이 많은 몫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부모 잘 봉양하는 자식이 남은 재산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를 절대로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라. 너희들에게 대한 맹목적이고 저돌적 인 모성애만을 가진 사람이다. 지나친 욕심도 있고 합리적이지 못한 주장을 강하게 하기는 하지만 아주 단순한 생각이니까 너희들이 십분 이해하고 편하게 해드려라.
나와는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게 살았지만, 좋은 날 보다는 궂은 날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남편을 믿지 않는 못된 습성이 있어서 내가 괴롭게 살아 왔지만 나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왔다. 사랑보다는 도리 때문에 살아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을 불신하기 때문에 정말로 많은 괴로움이 있었다. 이렇게 너희들에게 나의 마음을 다짐하면서 나의 뜻을 밝히니까 속이 후련해 진다.
집을 사거나, 이사를 하거나, 가재 도구를 사거나, 어디를 다니러 가거나 무엇하나 내 마음대 로 나의 독단으로 한 것이 없다. 결혼 직후 등산구 장사를 한것 만 나의 뜻이었지, 장사를 그만 둔 것도 나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도 한가지 더 나의 뜻대로 한 것은 너희 둘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장사를 그만둔 것과 너희 둘만 키우게된 것 이 두가지만 나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심지어 퇴직을 한것도 순전한 나의 독단적 판단은 아 니었다. 말없이 반대를 않았을 뿐이었다.
자-- 그러면 다시 정리를 해보자.
위의 17개 항목을 실천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복잡할것도 마음 쓸 것도 없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 부모 처럼은 살지 말아라.
서로 믿고 살아라. 부부 사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믿음’이다.
한 사람이 자꾸만 상대방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을 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난감하다. 서로를 믿고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 될것이 없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의심을 받는 당사자는 생활의 활력이 없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어야할 사람은 부부 사이이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이될 때에 가족 모두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노력을 해서도 도저히 믿지 못하겠거든 미련없이 갈라서라.
그리고 과욕을 말아라.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은 너희들도 그대로 흉내내어 따라서 행하여라. 예를 들면 명절 때 집안 사람들이 모이면 너희들도 참석을 하고,(물론 어쩔수 없는 사유가 있을 때는 빠지는 수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의 제사는 가급적 참례를 하도록 노력하고(매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명절날 못가면 여름이나 겨울이라도 그후에 한번씩 찾아뵈면 된다. 큰 선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부담되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면 된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져서 50-60대가 되거든 가끔씩 벌초도 하러가고 성묘도 하러 가면 좋다. 꼭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세태가 다 그러하니까 그대로 따를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좋다. 정기적으로 전화 안부를 물어야할 상대들을 리스트를 작성을 해서 두고, 매 분기별로 하던지 매월하던지 아니면 6개월 단위로 하던지 명절때만 하던지...... 구분을 해서 명단을 작성해 두고 행하여라.
가족이나 일가 친척이나 친구나 관계되는 누구이거나..... 전화로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좋다.
괜한 오해도 사지않고 그런대로 예의는 갖추는 샘이 되니까. 물론 편지를 하면 더 좋겠지만.
천냥빚도 한마디 말로 갚는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예의를 다해서 상대하면 크게 실수하지 않는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작게 말하고, 적게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같이 웃어주고 같이 슬퍼해주고, 같이 분개해주면 좋다. 그렇다고 쓸개도 없는 놈 모양으로 줏대도 없이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정정당당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의 체면치례를 잘 가려서 해야한다. 예컨데 설날에 어른께 새배(인사)를 못했거든 우선 전화로 그 사정을 알리고 훗날에 만났을 때는 설날 찾아뵙지 못했음을 양해구하면된다. 또 장례나 결혼 같은 날에 참석치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우선 신경을 써야하고, 친족 중에서도 자주 만나거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신경을 더 써야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친지들이고, 이웃들이다.
너희들을 대면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족은 그러한 기회가 없을뿐만아니라 만난다 해도 이러한 이야기를 할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모두 나의 불찰이다.
각설하고
위에서 말한 것들을 잘 지켜서 너희가 편안케되기를 바랄 뿐이다.
종구 전화받고 너희 엄마가 불이 붙을 것 같아서,밖에 나갔다가 살며시 들어와서 이렇게 썼는데 아직도 너희 엄마는 내가 이 방에 와 있는 줄을 모르는 모양이다. 저방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또 무슨 말들을 할는지. 또 무슨 후회들을 할는지. 너희들에게 전화를 해서 분풀이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나만 마주치면 무슨 소리라도 지껄여서 스트레스를 풀어 볼려는 것 같다.
저 방에 갈려니까 괜히 또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서 자판을 잘 못 두드리겠다. 이만 하자.
--------------------2002년 02월 22일 20시 35분이다.
2002-02-28(목)
종구는 하룻밤을 자고 올라갔다. 새출발을 약속했다.
아침먹고 밭에가서 퇴비 3포를 싣고 대구 동서집에 갔다주고 장모님을 모시고 왔다.
지금이 16시 40분이다.
내일은 LG모터에가서 관수용 부속을 사야겠다. 개당7000원이면 대구와 큰차이가 없다.
16口를 달아야하니까 부속값이 11만원이 넘는다. 분수호스도 800m를 사고 고무줄도 사야된다.
영농비가 너무 많이든다. 금년에는 적자를 면해야될텐데 잘될는지 모르겠다.
윤경이 맞선본것도 원점으로 되돌아간 모양이다. 급하게 서둘필요가 없거늘 제 어미는 급하기만하다. 다 잘되어야 할텐데 걱정이 된다.
2002-3-5(화)
일기예보가 맞다. 반갑게 비가 내린다.
종구.윤경이가 뭘하는지..........
밭에도 못가겠고, 분갈이도 못하겠다.
종일 쉬어야겠다.
‘해야할일’을 정리했다. 부엌 싱크대 밑의 물새는것도 수리했다.
***드디어 10일만에 또 시작했다. 10시가 못되어 종구부터시작해서 윤경이에게까지 연결되었다.
이제는 내가 집팔고 밭도 팔아서 김천을 뜨자고하니까 팔지말고 그냥 가잔다.
종구 공부하는 것 확인도하고 윤경이 혼처도 알아보기위하여 청주로 합하잔다. 물론 나는 안된다고 했고. 학교에 가서 종구공부한 것 확인도하잔다. 나는 혼자 가보고고 싶으면 그렇게하라고 했고. 오후에 집에 오니 밭이라면서 전화가와서 밭에가서 태워왔다.
밭에서는 종구 핸드폰 사주잔다. 윤경이에게 말해서 요금을 다시 내가 내기로 하고 하나 사주라고 했고. 지금은 밤 8시가 다되어가는데 그저께 외할머니에게 배운 화투패놀이를 혼자 하는 것을 보고 이방으로 왔다. 오늘은 내가 자리를 피하여 길게 이어지지를 않았다.
이정도로 끝났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또 시작할 것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숨소리만들어도 깜짝놀라겠다. 으-ㅁ하고 신음을 하기도하고 휴-하고 점쟁이가 내는듯한 이상한 한숨소리도 내고 하기에 같이 앉아있기도 부담스럽다.
나는 제발 이굴레를 벗어나고 싶다. 이제는 그냥 아무런생각도 없다.
지금 종구 너의 취업이 첫째이고, 윤경이 너의 결혼이 그다음이다. 그러고난 뒤에는 종구너의 결혼이고, 그다음이 너의 졸업이며...이것이 지금의 순서이다. 다 해결되고나면 또 다른 문제들로 나를 볶아댈텐데. 언제이고 문제를 만들어서 볶아댈텐데 내가 죽으면 끝나겠지.
2002-3-10(일)
혼자있으니까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하다.
지난 2월22일날 말한 17개항목을 잘 이행해주기 바란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이렇게 쓰는 날이 없기를 바란다.
어쩐지 부질없는 짓 같아서 하는말이다.
그냥 일찍 죽고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이다. 그만 살고싶다.
너희들 살아가는것도 보고싶지않고 그냥 나혼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몰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면서 살며시 죽고싶다. 그렇게 편하게 나를 잡아갈 귀신은 없을까?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않고 하고싶은것도 되고싶은 것도 아무것도 바라는것도 없으니까 이제 죽어야된다. 무엇하나 아쉬운것도 없으니까. 그냥 그냥 그냥.........
이제 이런말도 그만 할란다. 지겹다.
2002-3-22(금)
나는 지금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
나는 ‘그냥’ 살아왔고, ‘그냥’ 살아갈 것이다.
더 많이 가질려고 내 몫이 아닌 것을 넘보지도 않았고, 내가 앞서갈려고 남의 다리를 걸지도 않았고, 내 기분 좋자고 남 기분 잡치게 하지도 않았고, 내 말을 앞세울려고 남의 말을 가로 막지도 않았고, 내가 더 많이 쬐일려고 남의 햇살을 막아서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또
이름을 남기려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또 그러할 것이며, ‘그냥’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갈란다. 지금껏 큰 욕심도 내지 않았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그냥’ 살아 갈란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그저 ‘그냥’ 사는 것이 내 깜냥에 맞는 삶인성 싶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치도록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언제쯤인가 누구를 질투하고 의심하고 미워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꾸 뒤돌아 보게 되는 것은 아직도 내가 신념이 딸리기 때문인성 싶다.
자꾸 멀리 하늘 끝을 바라다 보는 버릇이 생겨나는 것도, 물흐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것도, 나무 가지를 휘감아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바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모두가 나이 탓 만은 아닌성 싶은데, 요즘은 그렇게 되어가는 스스로를 깜짝깜짝 놀라면서 되찾곤한다.
비닐하우스 널부러진 들판을 바라보면서 회한에 젖어 기-ㄴ 한숨을 내 쉬는 그런 내가 아니기를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꺾이고 잘려나간 억새풀 더미 넘으로 기웃거리는 하얀 외가리의 얄궂게 굽어진 모가지를 보면서, 멋진 곡을 만들어 놓은 분재를 생각하기도 하고, 멀리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뉘집의 것인지도 모르면서 저게 뭣 태우는 연기일까도 생각하면서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한다.
그래 ‘그냥 앉아 있다’.
일어서 있는 사람들 보다는 한결 더 편한 자세일런지는 모르겠으나 한걸음 앞으로 나갈때는 내가 더 뒤쳐지는 것을 생각지는 않는 것 처럼, 아무 생각없이 오늘에 안주해온 내가 이제와서 무엇을 또 무엇을 할것인가? 이 나이에 말이다.
물 흐르듯 살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여, 바람 부는 것 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여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찾을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살아간다.
조금만 손해보는 심정이되면 만사가 다 편안해 지는 것을, 한발짝만 뒤에 가면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내 몫 중에서 한 줌만 나눠주면 그렇게도 좋아들 하는 것을, 괜히 그렇게 자꾸자꾸 많이 많이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다.
이제 저만치서 ‘그냥’ 바라다만 보면서
바람 처럼 그리고 물 처럼 살란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할란다.
그래서
나는 ‘그냥’ 살아간다.
이렇게 말이다.
2002. 3. 22.
황사 바람 짙은 이른 봄날에
2002-5-7(화)
어제 오후부터 예보와 맞게 비가 내린다.
금년 봄은 가뭄이 아주 심할것이라는 기상대 예보에 맞추어 관수시설을 했는데, 금년 봄은 비가 잦아서 오히려 과습이 걱정이다.
요즘은 집안이 좀 조용하고 편안하다.
며칠전 대전대학 이봉환 군과 충북대학 최영철 군과 구미의 김선금 군에게 mail을 보냈는데 답이 왔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을 않으니까 이제 워드도 서툴다.
분재코너는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조용해서 살것같다.
2002-5-12(일)
생일날이다.
어제 아이들이 왔다.
저녁먹으러 이리저리 해매다가 늦어서야 먹었다.
과식을 해서 폭포쪽으로 한바퀴 걸었다.
오늘 늦게 일어나서 10시에 아침먹고 사진찍고 12시에 밭에가서 사진찍고,
집에와서 케익도 먹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먼저 종구 진로이야기에서 저기압이 형성됐다. 묵묵부답으로 표정이 말이아니었다.
다음은 내 유언에 관한 이야기였다.--종구는 반대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네 엄마가 끼어들어서 기분을 잡쳤다. 항상 그랬다.
종구가 먼저가고, 30분후에 윤경이가 갔다.
저녁을 먹고 앉아있다가 윤경이가 네엄마를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않아 별의별 말을 다 했다.
기분을 잡쳤다.
오늘은 왠지 우울한 날이었다.
아이들이 기분좋게 해볼려고 하는 기색이 완연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설쳐대는 네엄마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입에발린 소리를 듣는것도 한두번이지.
이렇게 오늘이 지난다.
작년 환갑때는 그래도 오늘같이 우울하지는 않고 그냥 지냈는데..........!!??
윤경이가 준 돈은 150만원이라는데 꺼내보지도 않고 두었다. 얼른 네엄마가 몫을 바라길레 어쩔까? 생각중이다. 네엄마가 그런말을 하기전에는 되돌려줄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좀더 생각해볼란다.
어쨋든 오늘은 기분이 썩 좋지않은 날이되고 말았다.
2002년 5월 29일 (수요일)
음력생일인 어제 윤경이한테서 보냈다. 나는 생각도 없이 네 엄마가 가잔다고 그냥 갔었는데 아마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너희 막내이모에게서도 전화가 와서 네엄마 계좌번호를 가르쳐주더라. 나는 음력생일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윤경이 눈치가보여서 좀 민망했다. 뭘 얻으러 간것같아서 말이다. 자식이 다 컸고 또 내가 형편이 좋지않아서인지 괜히 마음이 서글퍼지더라.
어제 저녁에 형님들 내외분을 해운대숯불구이집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했다.
진갑(생일)을 그냥 못보낸다면서 그저께 청주에서 네 엄마가 두 큰집으로 전화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반대했으나 완강히 주장해서 그렇게 되었다.
작은 큰집에서 펜티+런닝을 한벌사왔더라. 큰큰집에서는 수박을 한덩이 사왔더라.
그냥 생일날 같이 밥이나 한끼 먹자고 했기때문이었다. 회갑은 하지않았기에 올해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네 엄마는 좀 섭섭한 기분이더라. 정식으로 회갑을 하여 형제 자매들을 모두 초청했으면 부조금이라도 받았을텐데 나의 반대로 그렇지 못하니 그런가보다.
종구네가 아직 그모양이고 윤경이도 아직 결혼도 못했고 해서 내가 회갑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쨋거나 네 엄마는 좀 서운한 눈치이다.
네 엄마 회갑때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나는 내마음에 꼭 들게 되었는데 말이다. 윤경이가 준돈은 옥상 누수되는 것 방수공사를 할까 싶은데 아직 생각중이다. 팔아야할집에 수리비만 자꾸 들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마음이 편한데...........
종구네가 빨리 취직을 하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윤경이너는 최교수와 의논해봐라. 어쩐지 잘될것같은 기분이들더라.
요즘은 네엄마가 전통다도에 취미를 붙여서 그런지 별로 나를 들복지는 않는다.
어쩌다가 시작할 만하면 내가 얼른 피해버린다.
오늘도 약국이야기를 하면서 또 시작하는데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더니 그냥 수그러들더라 참 다행이었다. 네엄마 비위 맞추느라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게 아니다.
그래서 오후에 밭에 같이 갔었는데 갔다오면서 고단하다더라. 그전처럼 일도 못한다.
진작에 나는 알고있었는데......
체중을 뺄려고 노력은 하면서도 그게 잘 안되는 모양이다. 아무런 운동도 하지않는다.
제발 어디에 정신을 집중해서 즐겁다면 나는 안심이 되겠다.
지금 두시가 넘었다. 그만 잘란다.
2002-07-23(화)
나를 터무니없이 의심하는 것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나도 자포자기 상태이다.
잘못 걸려온 핸드폰이 또 문제이다. 문자메세지를 적어뒀다.전화번호도...
016-9234-3434---<빠떼리가가방에있었다 ㅋㅋ머해??마니혼났어??미>이런내용이다.
걸려온 것은 7월20일 00:47A이다.
지난번에 동호회사람들이 밭에 왔는데 몇게씩 달려있는 대석자두를 따먹으라 했었고 또 수단껏 가져가라고도 했는데 자두가 너무 익어서 물렁물렁하여 가져갈수도 없었고 또 몇 개 남지않아서 싸보낼 형편도 아니었다. 그때 서울 여자회원(나는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르는)이 왔는데 그것이 이상하고 수상하다는 것이다. 김천에서 허성씨와 김두호씨가 주선해서 나도 가입한 야생화 모임에도 첫모임에만 나가고 그만 못나가게되어서 ---여자회원이 3명있다고---젊은 사람들과도 이제 끈이 없어져서 이제는 내가 외톨이가 되었고, 얼굴들고 나다닐수도 없게 되었다.
의부증이 심해도 너무심하다.이제는 내가 때려서 다리도 팔도 아프단다.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런 증거를 댈수없는데 난들 어찌하겠나.
녹음기를 하나 사야겠다. 하는 말들을 녹음을 해야겠다. 설마설마 하다가 내가 큰 봉변을 당할것만같아서 이제부터는 나도 철저하게 방어를 해야겠다.
2002-9-9(월)
170cm높이로 물이 차올랐다
아직도 정리가 되지않았다 아비규환이다
너희엄마는 여전하다
오늘은 나의 자는 모습이 죽은사람 같았단다
어제밤에는 약국큰아버지가 윤경이를 30살에 시집가도 괜찮다고했다면서 그것은 다른 속샘으로 이야기 한것이라고 거품을 물었다
이제는 마주보기도 싫고 말한마디도 하기싫다
싫어지는 것은 어찌할수 없다
모든 것이 나를 불신하는데서 더 크게 불어나게되었다
내마음이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않는다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이번수해로 이웃이 곤란할 때 너희 엄마의 처신도 말이아니었다
일일이 이야기해봐야 뭣하겠나
그리알고 너희들의 처신을 잘해라
2002-9-18(수)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형제간의 우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나의 할아버지(너희에게는 증조할아버지) 3형게께서 그렇게도 우의가 두터웠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형님이신 우리할아버지께서 삼일이 멀다하시며 원동의 두 작은 할아버지댁을 방문하셨는데 어떤때에는 아침에 가셔서 그이튿날 오시기가 다반사였단다. 원동의 두 동생분들도 대방리에 오시면 그렇게 하셨단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났다. 그런데 밤 10시 반이되어서 너희 엄마가 ‘할아버지이야기를 왜하느냐? 그런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다시 ’정지구석에 콱 쳐박아넣을 음모를 꾸미는 것을 누가 모를줄아느냐?‘며 입에 거품을 물으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바이 덩신이 무슨 잔소리야?’ ‘형수하고 살 사람이 나하고 잘못살고있다’며 야단이다. 결국 이혼하자하여 서로 그렇게하기로 하였다.
나는 ‘네가 싫어졌다가 이제는 미워졌다’고 말했고 ‘네 숨소리조차도 듣기싫다!’고 말했다.
그리고 16일날 피부과에가서 머리에 난 사마귀와 얼굴의 사마귀를 레이져로 지졌는데(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되는 진행성 피부질환이란다.-실제로 자꾸 커져서 걱정이었다) 그것도 내가 여자를 만나기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무릅관절염이라면서 다시 재봉틀반에 들어가서 집에서도 미싱을 밟아댄다. 내가 보기에는 모두 거짓이라고 했다. 이번 수해 때에도 이웃보기가 부끄러웠다. 전혀 다른사람을 생각지않는 행동들이 못마땅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말로서라도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 몸이 아파서 도울수가 없내요’하면서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면 얼마나 좋았겠나? 전혀 그런 것이 없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더구나.
17일 낮에 대방리 큰아버지께서 오셨는데--동생집이 침수가 되었으니 궁금하여 들러셨는데
표정이 영 아니었다. 대방리에도 수해가나서 과수원이 반쯤 쓸려내려가고, 논이 뭍혔다는 이야기를 내가 해서 알고있으면서 그에대한 어떤 위로의 인사도 없이 무표정하였다. 그리고 대방리 뒷산에 산사태가 날 우려가 있어서 며칠(5일과 뒤에 또 1일)동안 피신을 했었다는 것도 알면서 그에 대한 어떠한 위로의 인사도 하지않았다/ 내가 부끄러워 할말이 없더라. 그리고 오후늦게서야 대방리 큰엄마한테서 안부전화가 왔는데도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냥 그렇게 응답을 하더라.
이렇게 시집과 관련되는 어떠한 이야기도 듣기조차 싫어하는 사람과 나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어떻게 끊을 수가 있나? 내가 형제들끼리 만나는 것 조차도 전부 너희엄마를 일시키기위한 음모를 꾸미기위해서라니 이제는 더 이상 견딜수가 없구나.
가까이에 있는 어떤 동기간과도 전부 사이가 나빠져있으니 이것이 온 집안에서알고 이웃도 알것이 아니냐? 환갑진갑이 다 지난 늙은이 집안에서 사흘이 멀다하고 큰소리가 나오니 어디 이웃 부끄러워 살겠느냐?
아프다는 사람이 집안에는 단 하루도 붙어있질 못하고 외출을 하니 전화받지않는다는 말을 수없이 듣다가 이제는 모두들 아예 전화를 할 생각을 포기했다고도 하는데--내참 창피해서......
도저히 같이 살지는 못할것같고, 이혼을 할려니 내가 김천을 떠나야겠고, 이나이에 어디에가서 무엇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아야할지가 걱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되어야된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갈수가 없다.
너희들한테는 부모의 이혼이 큰 충격이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조용한 것이 더 낳을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약국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한 모양인데 얼마간의 별거를 할 것을 조언해주더란다. 서울 큰고모에게는 무슨말을 들었는지 이야기가 없어서 모르겠다.
어쨋건 그리알고 너희들은 너희들대로 알아서 잘살아가기 바란다.
나는 더 이상 한가족이라고 생각않고 살것이다--지상최악의 마누라이니까---
2003-1-28(화)
오랜만이다.
그간의 일은 종구가 여전한 안타까움이고, 윤경이가 별진전이 없고, 윤경이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어서 안됐고, 우리 부부는 그냥 무덤덤하게 싸움없이 지났고, 친구들은 그대로이고, 들사모는 가까워졌고, 허포와 솔이파리와 문다마는 더 가까워졌고, 형제들은 그저 그렇고, 주변모두가 큰 변화없이 그저 그렇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그전보다 훨씬 어려움을 느낀다.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어쩌면 본전을 까먹어야겠다.
생활을 더 어렵게할 수밖에 없겠다.
2003년에 남기는 말
1. 나 죽거든 화장하여 뿌리고, 묘나 납골당을 절대로 만들지 말라.
2. 제사 지내지 말고 너희들 모이는 날로하여 정을 쌓는 날로하라.
3. 화장때 따로이 수의를 입히지말고 죽을 때 입었던 옷 그대로 시행하라.
4. 상주들은 곡을 하지말고 묵념만 하라.
5. 병원 영안실을 사용하고 음식을 하지말고 다과만 준비하라.
6. 나의 재산이 남아있거든 나에게 가장 끝까지 헌신한 가족이 전부 가져라.
7. 내가 병이걸려 고통스럽다고 하거던 그 통증만은 줄여줘야한다.
8. 1년더 살려고 6개월 병원신세 지는 일은 하지 말라.
9. 내가 아프거든 간병인을 두어라.--경비는 나중에 유산에서 제하라.
2003-4-22(화)
윤경이 선보는 것이 지겹다.
어디 한군데도 마음에 들지않는 모양이다.
외환은행 사람을 봤으면 좋겠는데---, 청원군청사람은 별로인모양이다.
살아가기가 고달프다. 금리가 물가를 밑돌고 있으니...........
비가 질척거려서 우울하다
오후에 영천에 화분사러가자는 연락이 왔다.
2003-6-23(월)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아침부터 비가내린다.
어제밤에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왔다.
종구는 여전히 노력중이고, 윤경이도 별다른 일이 없는것같다.
청원군청과 부천 총각중에서 결정될 것 같기도 하다. 둘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다.
윤경이보다 종구가 더 걱정이다.
너희들에게 다짐한것들은 지금도 굳게 유효하다. 명심하여서 실행하라.
2003-6-26(목)
자두가 색깔이 나지않아서 따지못했다. 장마는 닥아오는데 걱정이다.
저녁에 윤경이한테 전화를 하더니---- 부천 총각과 끊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또다시 발작적인 태도를 폭발시킨다. 금년에 시집 못보내면 이제는 재취자리밖에 없다는 둥 하면서 나에게 퍼붇기시작한다. 내가 마치 자기의 화풀이의 대상인냥 괜히 내게 퍼붇는다.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일만 있으면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땅을 치면서 퍼부어대니 내가 죽을 맛이다.
해도해도 너무하다. 이제는 괜찮아지겠지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서 살아온세월이 벌써 30년이 넘었다. 날 보고 어쩌란 말이냐. 맞장구라도 치면 더한층 길길이 뛰어대니......원 참
시집문제가 이제 자식문제로 옮겨간 모양이다.
내가 내 형제자매와의 이야기도 의심하면서...
세상만사가 자기의 뜻대로 되지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정신상태가 문제이다. 자기가 가장 옳고 다른사람은 결점이 많아서 문제라고 생각하고있으니.......
이제 다시 나의 시련이, 좌절감이, 무력감이, 무관심이 점점 더해만 간다.
어느누구도 싫어진다.
자패증이라도 걸렸으면 좋겠다.
빨리 죽고싶다. 큰 고통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고싶다.
===이상의 모든 이야기는 진실임을 맹세한다.
유언장에 포함한다.경북김천시황금동91-6번지의 이충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