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아. 당신의 운명은 다시 쓰여진다."
-->헤게모니아의 석비인 시간의 바늘에 쓰여진 글귀
*"다시 쓰여진다고? 만일 처음부터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다면 어떻
게 되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 운차이가 조용히 말했
다.
"다시 쓰여질 것도 없겠지."
-->석비의 비문을 본 네리아와 운차이의 대화
*"거기서! 이런, 빌어먹을! 카리스 누멘께 맹세코 네놈 두뇌가 상쾌한
바람을 쐬게 해주겠다!"
-->달아나는 아일페사스를 쫓으며 엑셀핸드가 외친 말
[1. 사라진 시인의 추모곡]
*"응. 쳉이 미랑 결혼해주지 않으면 미는 귀족의 첩으로 시집가거나 마
법사에게 잡혀가 실험 재료로 쓰여지거나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야. 어느 게 제일 무서워?"
"……셋 다 무서운데."
"그럼 세 개 다 당할 거야. 첩으로 팔려가는 도중에 마법사에게 납치
당해서 드래곤의 부활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게 될 거야. 아아, 불쌍한
미. 가련한 미. 그러면 안되겠지? 이런 걸 가리켜 협박이라고 하지."
-->특이한 방법으로 쳉에게 구혼을 하는 미
* "늙어죽게 만들 거야. 꽤 끔찍한 방법이지. 인생의 길이 만큼의 기나
긴 기간 동안 인생의 고통 만큼의 끔찍한 고문을 줘서 결국 고문에 못
이겨 죽게 만드는 거지. 살해 성공률 100%의 완벽한 암살법. 미는 꽤
사악하거든."
-->자신의 살해 방법을 이야기하는 미
*"코스네위? 짝사랑을 위한 꽃이잖아."
"잠깐. 자상이나 골절, 혹은 타박상에 달여먹으면 좋다…… 혹은 암살
용으로 사용되는 자이펀 비전의 독초라던가, 뭐 그런게 아니라?"
"넌 도대체 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 상냥한 아이를."
-->쳉과 킬로이의 대화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휴지라면 보급품 수레에 많이 있다만."
"제발, 보스!"
-->사이들랜드 대평원에서 쳉과 상단 보스의 대화
* "돌멩이로 쳐야지. 마음이 여린 레이디로군."
-->쳉의 12년전 회상씬에서, 소녀 미가 소년 쳉을 막대기로 때리는 것을 목격한
보스의 말
* "대개 그렇지. 그리고 반짝거리는 쪽이 칼날이야. 손잡이와 칼날을 구
분하게 되었으니 이제 검술에 대해 교육시켜주지. 손잡이는 언니 손에,
칼날은 상대방 몸에. 그것만 지킬 수 있다면 언니는 천하무적일 거야.
즉석 검술 교육 끝."
-->처음으로 검을 잡은 미에게 파가 하는 말.
* "가자! 이 자식아. 왜 늑장을 부린 거야! 내가 그런 꿈을 꿨으면 알
아서 날 깨웠어야지! 혹시 네 주인이 예지몽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
르잖냐!"
-->미의 꿈을 꾼 쳉이 달리며 캐시헌터에게 주절대는 말
*"나는 따사로운 식사 풍토를 조성하려는 것 뿐이다. 식사 때마다 네
녀석 불평하는 소리 더 못듣겠다. 비록 이게 인간이 먹기엔 많은 난점
이 있는 음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잠깐. '음식'이라고? 음식의 개념을 확대해석하겠다는 말이지?"
"응."
-->네리아가 만든 팬케이크를 먹으며 그란과 운차이가 나누는 말
*"젠장. 난 여자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싫어. 이미 잊었는지 모르지
만 난 자이펀인이란 말이다."
"나한테는 말 잘하잖아?"
"여자에게 말하는 것이 싫다고 했어."
-->운차이와 네리아의 대화
*"당신 손가락 사이에는 어떤 바람이 불지요?"
"바람은 일곱 갈래. 세번째 바람은 슬프죠."
"네번째 새끼 돼지가 죽을 때는 어떤 조문객이 옵니까?"
"이마에 푸른 띠를 매고 왼발로만 걷는 문상객이 와요."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는 재수 없는 타입이오?"
"뜨거운 감자 스프와 시든 아스파라거스의 명예에 걸고, 나는 비밀을
지켜요."
-->코렐과 네리아가 나눈 나이트호크의 암호
*"물 마시고 소화불량에 걸린 모든 성자들의 이름에 걸고, 좀더 나은
정보를 알고 싶은데……."
-->코렐에게 정보를 부탁하는 네리아의 말을 통역하는 운차이
*"너 붙잡은 다음에 도망친 발걸음 수만큼 때려준다. 알겠지? 마음대
로 달아나봐."
-->코렐이 피해 달아나자 운차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긴 말
*"얼마 받기로 했지?"
"300셀."
"좋아. 나는 3셀이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어디지?"
-->1/100 의 가격으로 코렐에게 배신을 요구하는 운차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건 모르는 사람의 일에 대해 보통 사람이 던
지는 의문으론 좀 이상하게 보일 거야. 하지만 아가씨의 분위기가 그
러니까…… 도대체 아가씨를 채근하는 것은 뭐지?"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에 대한 사랑."
-->레이저의 질문과 파의 대답
[2.시인의 귀환]
*"술을 안 주겠다면, 난 사랑을 할 거에요!"
-->이파실의 펍에서 펫시의 선언
*"후아, 후아. 정말 그런 건 처음 봤어. 어, 그러니까 말할 테니 잘
들으라구요. 으으, 그 발. 그러니까, 에, 미는 어제 오전에 처음 보는
세 사람과 함께 나타났어요. 두 명은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어요. 헤
엑. 남자 중 하나는 정말 무시무시하던 걸요! 그리고 여자가 탄 말은,
맙소사. 난 그런 말은 처음 봤어요. 그런데 그 네 사람은 말이죠, 그
러니까 처음 보는 세 사람과 미는 여기서 코렐씨와 무슨 이야기를 하
더라고요. 그러더니 코렐씨와 함께 그 사람의 집으로 갔어요. 코렐씨
의 집은 네인강에 있는 폐선이에요. 그런데 오늘 아침, 나룻터 가까운
곳에서 코렐 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요. 그리고 네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요. 나 조금 전에 그 시체 보고 오는 길이에요. 우와. 세상에!"
"아, 좋아. 이해했어.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파타로 주점에서 살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데브와 쳉
*"오우거가 변장한다고 엘프가 될 리 있소?"
-->센슨의 변장을 모두 알아봤다는 말을 들은 쟈크의 반응
*"너와 결혼하자더냐?"
-->에델린의 연락을 받은 제레인트가 화를 내자 액셀핸드가 한 말
*"아, 그래? 미인이 하는 말은 욕설도 밀어로 들리니까 걱정마."
-->욕설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그란에 대한 네리아의 대답
*"지금 이 곳에는 4 가지 종류의 종족이 있어. 드래곤, 드워프, 인간.
그리고 하나가 더 있네요."
"그게 뭔데? 펫시."
"바보."
"그럼 못써, 펫시. 어서 아프나이델에게 사과해."
"네가 바보에요, 제리."
-->콜로넬 협곡에서 나눈 펫시와 제레인트의 대화
*"아침에 잠자리에서 기어나와야 되는 것이 정말 싫어. 내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내 머리를 자신의 주먹 단련용 도구
로 사용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난 그것을 좋아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기어나오지 않아도 되는 잠자리에서 그렇게 부지
런 떨어가며 기어나오느냔 말이다. 그것도 시덥잖은 노래까지 불러가
면서. 내가 부끄럽잖아? 컨트롤 웨더!"
-->데스나이트들에게 주문을 사용하며 제레인트가 중얼거리는 말
[3.시간 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이거봐요! 그만해요! 한번만 더 죽여줘, 라고 말하면 죽여버리겠어
욧!"
-->파하스가 죽여달라고 하자 화를 내는 파
*"푸후! 후, 하아. 죽여줘."
"……그렇게 걸신들린 듯이 숨을 쉬면서 죽여달라고 말하면 호소력이
없습니다."
-->파하스의 죽여달라는 말에 대한 쳉의 반응
*"이 집 주인장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난 올라가야겠으니 네
가 대신 좀 해주겠어?"
"그러지. 사과하라는 말이지?"
"아니. 여자가 이렇게 취하도록 내버려두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들면
조만간 조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전해줘."
-->펍에서 취한 네리아를 방으로 데리고 가며 운차이가 그란에게 하는 말
*"싸우자! 내 인생에 마침표는 카리스 누멘이 정하실 테니 나완 상관
없어! 내 길은 내가 정한다!" "그래! 네가 싸워요! 그 동안 저는 도망
칠 테니까!" "몹시 고민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겠습니까, 제레인트?" "튀어요!"
-->데스나이트들에게 추격당하며 고민하는 엑셀핸드,펫시,아프나이델,제레인트
[4.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그러나, 검은 곧다. 죽음을 넘어서."
-->무스타파의 말
*"내 몸 속엔 네 피의 맹세가 흐른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넌 피의
맹세를 잊을 수 없다."
-->오크들의 피의 맹세
*"너는 애인의 언니를 추적하는 거냐, 애인의 동생을 데리고 추적하는
거냐? 아니면 애인을 고르기 위해 둘을 한 자리에 모아놓기 위해 날뛰
는 거냐?"
-->파하스가 쳉에게 던지는 질문
*"네 사촌형, 신차이는 어떤 사람이지?"
"누군가를 독살해야 된다면 방울뱀의 독을 모아 1파인트 잔을 넘치도
록 채운 다음 상대에게 그것을 간절히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만
들어 준 후, 그것을 마시고 쓰러진 상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곰곰히
생각하지. 정말 죽었을까."
-->그란이 신차이에 대해 물어보자 운차이의 대답
*"그럼 우리는 가장 먼저 떨어진 빗방울인가 보군요. 모든 빗방울들은
다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는 분명 가장 먼저 떨어지는 빗방
울이 있는 법이지요."
-->부활의 의문에 대한 그레이의 답변
*"네가 설명해. 어휘가 모자라다."
운차이는 흔쾌히 그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란은 반역자였어."
그리고 운차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다리던 그란은 곧 운차이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나도 가능하다."
"그럼 직접 하지 그랬나."
-->그란이 반역자라는 말을 설명하는 운차이
[5.거짓된 사랑의 진실]
*"뱃사람이 지상에서 끌고다니던 감정의 닻을 배까지 끌고들어오면 배
가 가라앉으니까요."
-->신차이의 말
*"안돼네, 제레인트! 도끼로 무덤을 파는 것은 중노동일세! 난 그렇게
못하니 자넨 죽어선 안돼."
-->제레인트가 죽는 시늉을 하자 엑셀핸드가 외친 말
*"야! 그래요! 돌아왔어요. 파는 못봤죠? 묘지에서는 좀비들이 무도회
를 개최했고 낚시꾼들은 도랑에서 크라켄을 몇 마리 낚아올렸어요. 트
롤 서른 여섯 마리가 물구나무 선 채로 시내를 활보했고 두 발로 선
암소들이 피리를 불며 행진했어요. 하지만 서쪽 하늘에서 날아온 드래
곤이 후욱! 해서는 다 태워버렸죠. 그리고 나는 돌아왔죠."
-->파에게 돌아와서 말하는 네리아의 횡설수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사에 전념해줄 노예는 아닙니다. 그 정도 일
에 목숨을 걸고 납치 같은 것을 시도하지는 않아요. 내 팔이 보입니
까? 당신 개가 내게 남겨준 선물입니다."
"설마."
"정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달탄이 깨물었으면 팔이 잘렸을 거에요. 미는
믿지 않아요."
"……보호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미와 퀘헤른의 대화
*"후작님은 지금 오른손으로 오른손을 쥐려고 하고 계세요."
-->할슈타일을 향한 미의 말
*"흐음. 누구 앞에서는 '사악한' 데스나이트라고 말하기는 힘들겠군
요."
"댁도 아시겠지? 내 성격에서 반인륜적인 모습들은 주로 우리 스승님
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들이오."
"……무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 스승께서는 부활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
-->경비대들에게 레티의 송가를 부르게 하며 무스타파와 솔로처의 대화
*"...(전략)...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깝냐는
질문은 부디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거짓에서 멀어요?"
-->쳉의 말에 이은 네리아의 질문
[6.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살기가 적을 꿰뚫으면 손에 쥔 것이 검이든 활이든 똑같다."
"가격은 다른데?"
-->검법에 대하여 말하는 운차이, 네리아의 반응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시도가 치터리에게 하는 말
*이거 하나만 물어보지. 똑똑한 선원 100 명이 지휘하는 배와 미치광
이 선장 1 명이 지휘하는 배 중에서 어느 배에 타겠어?
-->신차이의 명령에 불안해하는 선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이사도의 말
*"네번째 수레바퀴까지는 서로를 돕지. 하지만 다섯번째 수레바퀴부터
는 다른 바퀴들을 괴롭히지"
-->가이너 카쉬넵의 말
*"내 불운은 지겹게 맛보았다. 이제 내 행운을 시험해보겠다."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올라가며 후작이 하는 말
*"부활을 축하드리지요. 하지만 66 년만에 일어나서 이걸 맞고 잠들게
되면 당신도 참 허무할 거요. 그렇잖습니까? 이건 딜레이드 파이어볼
이라는 거요. 파이어 챠크라의 극한 회전수에서 임계점을 유지하며 알
파 3 급수를 이용해 억제하면 되는 거지. 이론만이라면 머저리 견습생
도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거야. 실제로는 좀 어려운 거지. 회전수를
포착하는 것이 조금 어렵거든. 오우, 젠장! 나는 약장수가 아닙니다.
조금 흥분했을 뿐이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횡설수설하는 거야 이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대로 말해서 나는 지금 바지를 적실 만큼
흥분했단 말입니다. 아아,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적셨다는 말은 아니
고."
-->부활한 신스라이프에게 불덩어리를 겨누며 협박하는 레이저
*"내가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이어도 내 인생은 충분히 값지다는
거야. 미."
-->미를 구한 후 그녀를 끌어안으며 쳉이 한 말
[7.멸망은 완성의 귀결]
*"이 방패를 받을 수 있겠느냐."
-->드래곤 솔저가 방패 날로 데스나이트를 무너뜨리며 한 말
*"죽음을…… 넘어서!"
-->켄턴의 로터스 경비대장이 데스나이트에게 뛰어들며 외치는 말
*"당신은 천공의 '기사' 이고, 이 놈은 데스'나이트' 일지 몰라도, 나
는 드래곤 '솔져'요. 기사도를 말할 생각이라면 둘이서만 하시오."
-->뒤에서 데스나이트를 기습하며 용아병이 무스타파에게 하는 말
*"사조님, 사조님.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건 너무하다고요."
-->데스나이트를 학살하는 솔로처를 바라보는 시몬슬의 중얼거림
*"머리 꼬리가 남아있어야 소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압니다."
-->신차이의 핏줄에 대해 고민하며 칼이 남긴 말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
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알겠니? 저는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
페사스다!"
"……그게 뭔데?"
-->자신을 소개하는 아일페사스와 이해하지 못하는 거인
*"이 새대가리 같은 거인아! 입 좀 다물고 있어. 생각 좀 하자!"
-->생각에 빠진 아프나이델이 거인에게 외친 말
[8.시간의 장인]
*"파괴하더라도 다시 부활한다면……다시 파괴하면 됩니다. 솔로쳐."
-->데스나이트가 부활하자 용아병 에카드나가 한 말
*"파하스 씨!"
"왜?"
"당신 파하스입니까?"
"……저능하다고 해줄까, 멍청하다고 해줄까? 자네가 조금 전에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놓고는 이런 황당한 질문이냐?"
-->레이저와 파하스의 대화
*"턴빌 시민들에게 소화제를 선물해야겠군."
"예?"
"턴빌 시민들은 네 심장을 꺼내 씹어먹으려들 테니까."
-->아프나이델에게 말하는 운차이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어. 피크닉이라도 나와
있는 것처럼 이 경치 좋은 언덕에 앉아서 거인에 의해 박살나는 턴빌
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만
종알거리는 너희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파하스! 레이저! 즐거운 구
경인가? 그 꼴같잖은 말만 쏟아내는 입에다가 너희들의 주먹이라도 쳐
넣어! 아프나이델! 너 혼자서 저 사지에서 탈출했나? 다른 자들은 마
차 타고 유람하듯이 나온 줄 알아? 왜 혼자서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거야! 제레인트! 머릿속이 엉망이라고? 네놈의 머릿속이 언제 엉망이
아닐 때가 있었냐! 네놈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녀석이었나? 네 앞길은
테페리가 주관하지 않느냐! 그란! 모두 다 파를 쫓아가니 너도 쫓아가
겠다고? 네가 몰려다니는 들개 새끼냐!"
-->일행들에게 쏟아붓는 운차이의 폭언
*"슬픈 그림자는 햇빛 아래 설 수 없겠지요."
-->북해로 떠나가는 신차이를 보며 치터리가 남긴 말
*"용서는 가장 큰 복수니까요."
-->루트에리노의 자손에게 복수하려는 거인에게 제레인트가 한 말
*"걸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이유로 신발을 공경하란 말이냐?"
-->신스라이프가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 한 말
[9.기다림의 해변]
*"왜 그렇게 신차이 선장을 쳐다보는 거니?"
"이건 질투다. 쳉은 질투를 하고 있어. 미는 이제 비극적인 삼각관계
의 가련한 희생물이 될 거야. 흐음. 한번 쯤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
어."
"저,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봐. 멋진 대사를 생각해낼 수 있을 거야. 어디 보자……
먼저 쳉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신차이 선장과 결투해라. 알았지? 그럼
미가 쳉의 팔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할께. 별빛마저 드문드문한 캄캄
한 밤이라도, 그대 설령 내 앞에 있지 않더라도, 미의 두 눈이 멀어버
릴지라도, 미의 눈동자는 언제나 쳉의 모습을 반사할 것을 믿지 못하
니?"
"내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면 웃을 거지?"
"당연하지. 골렘이 감동 어쩌고 하면 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웃
어."
"사실, 닭살 돋아."
"그러라고 한 말이야. 자, 이제 계란 낳아봐."
-->북해로 가는 레드 서펀트 호에서 쳉과 미의 대화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파의 마음 속에서 파가 신스라이프에게 던진 질문
*"이건 자이펀 전통의 인사법일 거야. 칼을 높이 들어 신차이 만세!
라고 외친다던가……"
-->신차이를 향해 검을 뽑는 운차이를 보며 제레인트가 한 말
*"말해두겠는데, 난 나를 죽이려드는 모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아."
-->자살하지 않겠다는 뜻의 자이펀 관용구
*"그렇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기다릴 거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라도? 아
무 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그저
이곳에서 살며?"
"예."
-->탄느완에 집을 짓는 쳉을 보며 네리아가 한 질문
[10.잊혀진 바람을 위한 변주곡]
*"설명, 설명, 설명해라. 시간, 시간, 시간이 뭔데?"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기만이지."
-->펫시의 질문, 발레드 신스라이프의 대답
*"이것봐! 설명을 해요! 제가 저기 있던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는 도대
체 어디간 거냐고 질문하기 전에 먼저 제게 그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
가 어디로 간 건지 설명해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발레드가 사라지자 당황하는 펫시
*"적극적으로 찬성이야."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근엄하게 말
했다. "그리고 그 미치광이들의 모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로 두각을 드러낼 녀석을 꼽아보라면 난 주저없이 제레인트를 들겠
어."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의 프라임 미팅 소식을 듣자 엑셀핸드의 반응
* "인간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을 중지하고 쉬고 싶을 때 쉬게 해주어
야 해."
-->신스라이프를 향한 레이저의 발언
*"이런 방식으로 합시다. 난 당신이 살아있다고 말해줄 테니, 내가 한
것만큼만 당신도 내게 해줘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걸 못
하긴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어."
-->자신의 몸이 빛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보고 레이저가 후작에게 한 말
*인간은 정말 당신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를 향한 미의 속삭임
추격하던 드워프는 기겁하며 땅으로 몸을 날렸다. 파우우욱! 아프나이
델이 쏘아낸 거대한 불의 공은 비록 발악하듯 발사한 것이지만 목표물
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숙달된 솜씨. 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날
개를 퍼득여 옆으로 몸을 피했고 그러자 불의 공은 그 뒤의 젊은 프리
스트와 땅에 쓰러진 드워프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드워프는 미친 듯
이 외쳤다.
"제레인트! 막아라! 안돼면 몸으로라도 막아!"
화르르르! 공기를 불태우며 무섭게 날아드는 파이어볼에도 불구하고
제레인트라 불린 프리스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드워프를 바라보며 말
했다.
"엑셀핸드! 그런 식으로 속마음을 노출시키는 것은 노련하지 못하다는
증거라구요."
제레인트의 눈은 드워프를 보고 있었지만 날렵하게 움직인 그의 손은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휘황찬란한 디바인 마크를 꺼내었다. 제
레인트는 허리를 크게 뒤틀며 팔을 당겼다. "으아아압!" 기합과 함께
제레인트는 디바인 마크를 쥔 손을 힘껏 앞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아프나이델이 쏘아낸 파이어볼은 제레인트의 손에 부딪히며 맹렬한 폭
음을 내었다. "오, 맙소사. 유피넬이여!" 이파실 시의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 한가운데서 일어난 이 전대미문의 광경에 기겁했다. 제레인트는
파이어볼을 튕겨낸 것이다. 제레인트가 튕겨낸 파이어볼은 허공을 향해
끝없이 쏘아져올라가 잠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뜨는 듯했다. 제레
인트는 고개를 휙 쳐들어 하늘을 보더니 자신의 위업에 감탄하며 외쳤
다.
"테페리, 좋았어요!"
훗날 이파실 시에는 그들의 도시를 지나던 한 프리스트의 믿기 어려운
전설적 위업에서 유래된 독특한 구기 종목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날아드는 공을 손에 쥔 채로 쳐내는 그 구기 종목의 이름은 그 놀라운
전설에서 테페리, 좋았어요(It's nice)! 라고 외친 프리스트의 고함소
리에서 유래되게 되었고, 테페리나이스라는 긴 이름은 게으른 후손들
에 의해 축약되어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어쨌든 당장 목숨의 구원을 받게 된 엑셀핸드라는 이름의 드워
프는 한숨으로도 땅을 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듯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가 여섯살 때였어요. 세수를 하려다가 물그릇 속에서 아버지가 죽
는 모습을 보았죠. 미는 그게 바로 다음날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네리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잠시 기다렸
다. 미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리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잠시 기다렸
다. 미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동생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요.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미의 여
동생은 이유도 묻지 않고 덩달아 펑펑 울었어요. 어릴 때는 그렇잖아
요?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들을 다독거렸지요. 마지막엔 미도
왜 울고 있는지 모르게 되어버렸어요. 그냥 목놓아 울다가 왜 울더라?
하게 되는 것.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운차이는 왠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미 역시 잠시 말을 멈추기는
했지만 운차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북받치는 감정 때문
도 아니었다. 미에게는 그냥 호흡을 조절하는 여상함밖에 없었다.
"그 날 하루는 참 길고 이상한 하루였어요. 자줏빛 먼지들이 바람에
휩싸여 대평원 위를 흘러갔고, 햇빛은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이 넓은
하늘에서, 간혹 눈을 잘못 돌리면 해를 발견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요.
그 날이 그랬어요. 하지만 동시에 참 평범한 하루이기도 했지요. 미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침에 입었던 옷을 점심식사 시간도 되기 전에 더렵
혔고, 벌로 저녁이 될 때까지 그 옷을 입고 있어야 했어요. 그 때는
그게 왜 벌인지도 몰랐지만 벌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서 수치심을 느꼈
죠. 부끄러웠어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기 보다는
미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거죠. 밖으로 나가면 모든 아이
들이 미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놀릴 것 같았어요."
미는 잠시 눈을 돌려 드라일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미는 방구석에 쪼그려앉은 채 몹시 울었어요. 점심을 먹고나
서 아이들이 찾아와서 미를 불러도 나가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렸어요.
미의 어머니는 화를 내었지만 변덕을 부리고 있는 다섯살 꼬마의 시중
을 들기에는 너무 어른이었죠.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그
들의 생에 갑자기 뛰어든, 도저히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기묘
한 생물이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에게 너무 큰 당혹감이에요. 그리고
미의 어머니도 그러셨던 거지요."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에 돌아오셨지요. 베란 의식이 있
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일찍 드시고는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셔야 했어요. 저녁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화가 나 있는
미를 보시고는 웃으시면서 거래를 제안했어요. 베란 과자 한 상자 대
착한 아이가 되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도둑 심보나 다름없는 제
안이었지만, 그래도 깨끗한 흥정 기술이었고 아버지에겐 유리한 점도
있었지요. 아버지는 흔히들 딸들이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는 법
이잖아요. 그리고 미는 그렇게 희한한 딸도 아니었거든요. 베란 과자
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골똘한 시선으로 레이븐의 귀를 노
려볼 뿐이었다. 미와 마찬가지로 말의 귀를 노려다보고 있던 운차이는
한참 동안이나 미가 다시 말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래서?"
미는 말을 시작했다. 마치 멈췄던 적이 없는 것처럼 곧장 튀어나오는
식의 말이었다.
"베란 의식 도중에 공회당에 불이 났어요. 의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전부 조금씩 다쳤지만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딱 한 사람만 죽었지요.
그 사람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나오지 못했던 거지요. 귀여운 딸
두 명에 대해 자랑하다가 술이 과했다나 봐요. 그래서 미는 아마도 별
로 고통스럽지 않게 돌아가셨을 거라고 믿어요. 간혹 그 때의 공회당
을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좀 끔찍스럽더라고요."
운차이는 이번에는 미의 말이 정말 멈췄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뭔
가 위로가 될만한 단어를 헤게모니아어로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하지
만 미는 계속 말했다.
"미는 지금도 베란 과자 따위 먹지 않아도 되니 아버지에게 상심한
미와 함께 있어요. 라고 말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요. 20년 동안
계속해서."
코렐은 그만 몸을 돌려 운차이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
꼈다. 틀림없어. 저 놈은 일부러 날 보내주고 있어. 제기랄! 코렐은
이제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할 정도까지 되어버렸다. 만일 저 놈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 붙잡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저 놈은
보다 더 많이 때리기 위해서 나를 일부러 달아나게 내버려두는 거야.
저 놈은 순종 새디스트야. 그건 저 녀석의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일 거
야. 저놈 핏줄에는 혹시 오크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닐까? 코렐은 그 점
을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이 자식아! 네 조상 중에 오크가 섞여든 건 몇 대째의 일이냐?"
나루터와 고스빌 시내를 잇는 오솔길은 고요했다. 밤이 펼치는 암흑
의 그물은 대기 중에 흩어진 빛의 파편들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물처럼 스며드는 달빛만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푸르게 빛나
고 있었다. 그리고 코렐이 멈춰선 곳은 오솔길이 끝나고 고스빌 시의
건물들이 눈 앞으로 바싹 다가서는 위치였다.
코렐은 몸 곳곳에서 나이프를 꺼내어들고서는 양손에 하나씩, 그리고
혁대에 세 개를 찔러둔 채 운차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나루터에서
이곳까지 코렐을 뒤쫓아오면서 그를 반쯤 미치게 만들던 운차이는 천
천히 멈춰서서는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전부 2,032 걸음. 내 조상 중에는 오크가 없다."
"거짓말! 나는 믿지 않아. 네 놈은 틀림없이 오크의 피를 타고 태어
난 놈이야!"
운차이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 가계에 오크에게 붙잡혔던 여자는 없었다. 음. 글쎄.
어쩌면 우리 가계에 머맨(Merman)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는 몰라. 하지
만 오크의 피는 아마 없을 거야."
코렐은 화를 낼 기운도 없어졌다.
"머맨? 인어 말이야? 젠장, 농담은 좀 농담 같이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도 편한……"
"농담이 아니다. 졸란에 사시는 내 고모님께서 고모부님과 함께 해변
가를 거닐다가 머맨에게 붙잡혀 갔던 적이 있지. 몹시 아름다운 분이
셨거든. 고모님은 다행히 도망치셨고, 신차이라 불리는 내 사촌형을
낳았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머맨의 피를 타고 태어났다는, 약간은
낭만적이지만 악취미한 농담을 하곤 하지. 물론 내 사촌형 면전에 대
고 그렇게 말하는 간 큰 녀석은 없지만. 음…… 잠깐. 그러고보니 내
외가쪽으로 맨티코어(Manticore)에게 붙잡혀갔던 아주머니가 한 분 계
시는 것 같은데. 기억을 좀 더 떠올려보지. 어쩌면 오크도 있을지 모
르겠는데."
"그렇겠지. 카레한 탑의 3층 인간의 층에는 많은 석상들이 있소. 그
중 이름없는 명가의 상을 아시오?"
사라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잘 알고 있소만?"
신차이는 사라스의 대답을 무시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굳센 오른팔로 하탄을 섬기고 곧은 왼팔로는 심장을 가리고 있지.
부릅뜬 눈은 경계하고 경계하는 정신을 나타내며 굳게 다문 입은 살기
를 갈무리한 그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
사라스는 이런 초보적인 교양에 대해 논하는 신차이 선장의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조금 전 자이펀의 가장 유서깊
은 명가 중 하나를 결딴낸 사나이의 심정이 어떨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신차이는 울림이 적은 목소리
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명가란, 그 이름없는 명가의 상의 모습뿐이오."
"선장. 그건 모든 가문의 지향하는 바 아니오?"
"틀렸소!"
신차이는 낮고 강하게 외쳤다. 사라스는 고개를 들어올리기 전 먼저
신차이 선장의 살기를 감지했다. 사라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재빨리 기
감을 약화시켰다. 세련된 예의를 사용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사라스
는 신차이 선장의 살기에 대항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장.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내 모르나……"
"모든 가문의 지향하는 바라고 하셨소? 그래서 발탄 가문이 끝장났단
말이오? 발탄 가문의 최후의 적손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야했
던 것은 모든 명가가 그 참람된 몸을 사렸기 때문 아니오."
사라스는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본 신차이의
눈을 잊기 위해선 술 한 잔이 필요하겠는걸. 사라스는 짧은 생각 하나
를 떠올렸다. 신차이에게는 정말 머맨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닐까?
"알고 계시었소?"
"바다에 나가 있다고 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은 그 가문들의
실수였소!"
신차이는 거칠게 말을 맺고는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방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곧 담배가 가득 채워진 해포석 파
이프가 공손한 노예의 손길에 의해 그의 입으로 다가왔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받아들고는 깊이 빨아들였다. 문득, 상처입은 신차이의 어깨
가 미미하게 떨렸다.
사라스는 마음 속으로 몇 가지 말들을 빠르게 정리해보고는 그 중 어
느 것도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라
스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말씀하시는 바에 일리가 없지는 않소만……"
"그건 다른 말이 필요없는 야합이오."
"……과격하게 단정하고 싶으시다면, 그렇소. 야합이라고도 할 수 있
겠지. 하지만 전통이 요구하는 바를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
장. 당신의 행동은 우리의 전통을 흔들고 있단 말이오."
으드득.
사라스는 신차이 선장이 파이프를 물어 깨트리는 모습을 보며 아연해
지고 말았다. 신차이는 부서진 파이프를 옆으로 집어던졌고 바닥에 이
마를 대고 있던 노예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신
차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댓가를 치른 거래에 다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전통이
란 말이오?"
사라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역시 신차이 선장이 발탄 가문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바다로 나가버린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모든 이들이 다 그 부모된 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
은, 인간들이 그 자식에게 가지는 유별난 애정에 비해볼 때 기괴한 일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발탄 가문의 미녀와 라이브스 가문의 호남아의 결합은 모든 이들의
축복이 함께한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남의 아내된 여자에게 곁눈
길도 주지 못하는 자이펀의 풍습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오장육부를 끊
어내는 아픔을 느꼈다는 것은 논외로 치도록 하자. 그 축복된 결합의
산물이 이 기박한 운명의 남자라니.
신혼의 꿈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어느날, 아름다운 신부는 신랑
과 함께 라이브스 가문의 해변을 걸었다. 주위의 어떤 눈도 없었기에
신부는 자유롭게 얼굴을 드러내었으며, 그 자신만을 위해 지상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 기적을 보며 신랑은 행복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 있었기에, 라이브스의 바람을 계승한 신랑도 머맨
의 습격으로부터 신부를 지키지는 못했다.
광포한 파도, 바람이 바람을 찢어발기는 극도의 혼돈. 휘몰아치는 백
사장의 모래는 이미 흉기들의 난무나 다름없었다. 신랑은 용감했다.
라이브스의 바람은 그 앞에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미쳐버린 신랑의 소문이 온 졸란을 어둡게 만들었을 때 신부는 돌아
왔다. 성미 급한 자들은 이 기적에 기뻐했지만 사려 깊은 자들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의심은 부질없는 것. 그러나 치명적인 것. 태어난 아
기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글쎄. 신랑은 그에게 라이브스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신부는 피가 빠
져나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결국, 신차이는 거친 밧줄에 손바닥이
다치지 않을 정도의 나이가 되자 두 가문의 불행을 일신에 짊어진 채
표표히 바다로 떠났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담배 담당 노예는 모든 용기를 짜내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을 했다. 신차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다가오는 새 파이프를 나꿔채었고
노예는 죽다 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파이프를 입에 물며 신차이는 불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14년이 흘렀다 해서……"
신차이의 목소리에는 14년의 피로 속에서 울려나오는 고독이 스며있
었다.
"발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겼단 말이오? 그 적손을 사지에 몰아
넣어도 아무 소리 못할 만만한 가문으로 보였단 말이오?"
그렇다. 이건 명가들의 실수다. 사라스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왜 그들은 발탄의 또다른 핏줄인 이 남자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
까. 독자(獨子)는 보호했어야 옳았다. 운차이로 하여금 발탄의 이름을
계승하도록, 이 아름다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발탄은 명가가 아니었기에…… 저 바다의 어두운 손길이
닿은 이후로 발탄은 더 이상 명가일 수 없었다. 신차이 선장이 그 모
든 것을 짊어지고 떠났다 해도 기억은 남는 법이다.
사라스는 일어났다.
신차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파이프만 태웠다. 사라스는 갈라지려
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선장. 당신의 감정이나 이유 같은 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고 싶
지 않소. 내가 듣는다 해도 당신의 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
는 것들이니까. 따라서 나는 졸란의 정화대장으로 말하겠소. 지금 하
고 있는 행동을 중지하시오. 이런 무모한 행동은 당신의 안위에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신차이는 술잔을 들어올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스는 한번 더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리고 사라스는 그 숫자를
짐작할 수도 없는 그림자 속의 노예들 사이에 신차이를 남겨둔 채 떠
났다. 덜컹. 홀로 남겨진 신차이는 두 다리를 쭉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쓸모없는 짓이지. 하지만……
신차이는 별실의 천장에 뚫려있는 채광창을 통해 사라지는 담배 연기
를 바라보았다. 담배연기는 루미너스의 얼굴에 살짝 가리는 베일이
되어 밤하늘로 번져나갔다.
"미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듣고 아무 질문도 하지 말아줘. 그냥 듣
기만 해줘. 말을 하고 싶어."
미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네리아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미의 미래는 단순해. 미는 25살에 쳉과 결혼해. 그러니까 바로 올해
지. 쳉은 미가 12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였고 미는 쳉을 말 못할
정도로 사랑해. 저 아달탄은 쳉이 소개해줬지. 어쨌든 미는 쳉과 결혼
한 다음 4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29살이 되었을 때, 미는 남
편인 쳉을 따라 여행을 떠나. 그 여행에서 쳉은 죽게 돼."
네리아는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도대체 제대로 된 감정을 불러일으
킬 수가 없이 극히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네리아는 자신의 인생
을 마치 남의 인생인 것처럼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미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쳉이 죽게 되는 곳은 디도스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 때
쯤 디도스에서는 페스트가 발생하거든. 그리고 페스트는 10년 가량 헤
게모니아를 점령할 거야. 그리고 쳉은 바로 그 병에 걸려서 죽게 돼.
미는 죽지 않아. 그리고 쳉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아. 왜 그런
줄 알아? 쳉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미를 이상
하게 바라보지. 어쨌든 미는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리고 몇 개월
후, 미는 쳉의 아기를 낳다가 죽게 돼. 임신한 몸으로 혼자서 페스트
가 횡행하는 땅을 가로질러 돌아오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야. 상당
히 지저분한 모습으로 죽게 될 거야. 그 모습을 봤지. 몸에 기름기가
다 빠져버려 가죽을 대충 뼈에 붙여둔 듯한 모습으로 아래로 피를 질
질 흘리며 죽게 돼. 무지 빨리 썩더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기는 살
아날 거야."
네리아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의 얼굴은, 미의 목소리는
도대체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표정이 아니었다. 뜨겁
게 타오르는 슬픔을 억누른 그 비인간적인 평온함은 바라보기 끔찍스
러울 정도였다. 네리아는 눈 앞이 부옇게 변해오는 것을 느꼈다.
"쳉과 미의 아기는 미의 여동생인 파에 의해서 키워져. 그 아기의 이
름은 아달탄이야. 사실 미는 미래의 미의 아기의 이름을 따서 저 개의
이름을 지은 거지. 미는 불러보지 못할 이름이라서, 아쉬워서. 하지만
미가 그런 짓을 한 바람에 파는 개의 이름을 따서 조카의 이름을 짓게
되는 거지. 우습잖아. 사실은 거꾸로인데. 무녀에게는 이런 이상한 일
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야."
미의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는 어조
의 높낮이를 그대로 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아달탄은 페스트가 횡행하는 헤게모니아에서 모진 고통을 겪
으며 살다가 10살도 되지 못해서 죽게 돼. 그다지 행복한 죽음이라고
는 하기 어려운 모습이야. 그렇게 될 수가 없지. 그리고 파 역시 페스
트에 걸리지만, 그 애는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아. 미의 여동생, 착한
아이, 파는…… 파는 자살하게 돼. 여린 아이라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
에게 일어나는 계속된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거든. 이게 미와, 그리고
미와 관련된 사람들의 미래야. 그리고…… 무녀인 미 V. 그라시엘이
지켜야 될 미래고."
네리아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떨리는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며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이게 미래를 본다는 것인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은 시간
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
을 계속 되뇌이며 살지는 않는다. 네리아는 팔이 떨어져나갈까봐 두려
워하는 사람처럼 양 어깨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까. 그러나 미는 계속 말했다.
"미는 그 모든 모습을 10년도 전에 알았어. 철이 들자마자 미의 죽
음, 그리고 미의 가족과 아들의 죽음을 모조리 봤지."
"미…… 미……"
숨이 막히는 기분 속에서 네리아는 미의 이름만을 되풀이 되풀이 불
렀다. 그러나 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공허한 목소
리로 말했다.
"행복할 수 있을까?"
봄의 따스한 공기 속에서 희미한 먼지 입자가 반짝거렸다. 어디서 흘
러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꽃향기는 퀘퀘한 여관의 공기와 뒤섞여 정체
를 알 수 없는 냄새가 되어 주위를 맴돌았다. 미는 시야 위를 떠다니
는 금빛 먼지를 바라보며 노곤하게 말했다.
"미는 조금 전에 행복하다고 말했지. 쳉과 결혼해서, 4년 동안 행복
하게 살 거라고. 그게 말이 돼? 하지만 미는 그렇게 살게 돼. 남편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여행을 함께 떠나고, 비참하게 죽어갈 아기를
낳을 거야. 자살해버릴 여동생에게 아기를 부탁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죽을 거야. 그리고 미는 사라져. 마치 있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미의
추억, 미가 걸었고, 미가 웃었던 나날들은 과거에 덮이지. 아무도 모
르게 되지."
미의 눈이 한없이 투명해지는 순간, 투명한 구슬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의 목소리는 그저 궁금하다는 투였다.
후작이 움켜쥐고 있던 칭틀은 이제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끄
구구구굿. 궤헤른은 불안한 표정으로 후작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작
의 손은 이제 창틀의 나무 속으로 파고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대로를, 정확하게는 그 건너편의 펍을 바라보며
나즈막하게 말했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와서 과거로 가는 것이네. 알겠나."
"예?"
"미래는 우리에게 계속 다가오고 있네. 과거는 우리에게서 계속 멀어
지고 있고. 자네는 그 간단한 사실도 모르나. 시간과 사람을 혼동해선
곤란해. 그래. 사람은 늙어가지. 자기 중심주의에 입각해 시간은 미래
로 간다고 헷갈려버리기 좋은 대목이야. 모든 것이 미래로 가니까 시
간도 그럴 거라고 아무 생각없이 믿고 있는 거지. 하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봐."
후작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 어딘가에
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려는 듯이.
"모든 것이 미래로 간다는 것은 뭘 의미하지."
"그것은……"
"시간이 과거로 가고 있다는 뜻이지. 미래로부터 흘러온 시간은 현재
를 지나치는 순간 과거에 가서 고정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째 논리의 유희처럼 느껴집
니다."
"닥치고 들어."
궤헤른은 흠칫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후작은 여전히 창틀을 짚
은 채 하늘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설명해줬으면 알아야 되지 않나.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라
는 것은 시간이다. 이제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뭔지에 대해 생각해
봐."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궤헤른은 약간 도전적인 태도로 말했다.
"말씀하셨잖습니까. 모든 것은 미래로 흐른다고. 시간이 과거로 흐른
다면, 예. 모든 것은 미래로 흐르겠지요."
"그 모든 것이 뭐지."
궤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의 말투에 섞여있는 미미한 짜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과연 후작은 궤헤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
했다.
"현재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은 바로 현재야. 자넨 과거의 책상다
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래의 사과를 먹을 수는 없어. 이 정도면 모든
설명이 되지 않았나."
콰지지직! 기어코 후작은 창틀의 나무를 한 웅큼 뜯어내었다. 목소리
는 전혀 높이지 않은 채, 후작은 찬란해보일 정도의 미소를 띄며 말했
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흐름의 교차점이라고
했지. 과거를 향해 흘러오고 있는 미래의 시간과, 현재에 살며 미래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것. 바로 그거야. 현재와 미
래를 이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퓨쳐 워커야!"
이루릴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제레인트의 넓은 어깨를 모두 감싸안으
려 노력하며 작게 속삭였다.
"난…… 당신의 슬픔을 모르겠어요, 제레인트. 과거가 무서우신가
요."
제레인트는 이루릴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과거가요? 물론 과거는 무섭습니다! 과거는 추억 속에 있어야 해요!
흑, 크흑! 추억 속에 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추억은 미화되고 꾸며
집니다. 그것이 다시 돌아와서, 내가 기억하는 추억과 다른 실제의 모
습을 보여준다면, 그렇다면 내 추억은 산산히 부서지겠지요. 추억 위
에 살고 있는 나 역시 부서지겠지요.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개망나니일지도 모르지요.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아, 사람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의 어깨를 빌려야 했다. 엑셀핸드는 불안한 표
정으로 돌아보았고 아일페사스는 끙끙거리듯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겼지만 아프나이델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루릴과 제레인트만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돌아오고 있을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테페리의 프리스트
가 알아차린 것은, 그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는
가. 그러나 아프나이델이 받아야할 충격은 아직 남아있었다. 제레인
트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나는 우리가 미래를 잃었다는 것이 무섭습니다. 슬픕니다!"
제레인트의 외침소리가 가져온 충격 속에서 말을 꺼낼 정도의 자제력
을 보여준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방 안에 있는 많은 종족들이 경
악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동안, 유피넬의 어린 자식만은 낮게 속
삭였다.
"제레인트……"
"미래, 미래는 이제 오지 않는 것이군요. 크흑! 우리가, 우리가 여기
서 멈췄으니까. 이제 다시는 아기가, 우리의 2세가 태어나지 않겠군
요. 농부가 뿌린 씨는 씨로 남을 것이고, 수확된 과일은 썩지 않겠군
요. 이젠 아무도 죽지 않게 되는 겁니까? 그 어떤 자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겁니까? 그렇습니까!"
이루릴은 엘프다. 따라서 입을 다물 줄은 알지만 자신을 위해서든 상
대를 위해서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테페리여…… 테페리여! 테페리여!"
제레인트의 이루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진저리쳤으며 이루릴은
걱정스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일페사스는 그 모습을 바
라보며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엘프에게 자신의 동료
를 뺏긴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말도 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위대
한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힘겨운 표정을 지었고 엑셀핸드는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끌어와 그를 앉혔다. 카알의 경우에는 이미 의자에 주저앉아서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그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샌슨은 그런 카
알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이들의 공
포와 절망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프나이델의 무릎에 올라앉
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아프나이델은 무릎을 누르는 묵
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아일페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시간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죠?"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파멸이야……."
엑셀핸드는 움찔했다. 아일페사스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응?"
"시간이 멈췄으니까."
"히잉. 멈춘 것이지 아무 것도 부서지는 것은 아니잖아? 아무도 안죽
는다면서요? 어, 데스나이트들 때문에?"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시간이 멈춘 것, 그게 바로 파멸이야. 파멸
이 뭐지, 펫시?"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말보다는 그 마지막의 호칭에 더 놀랐다.
그녀는 크게 당황한 채로 말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타오르고, 산산조각나고…… 그런 거?"
"아니야. 진정한 파멸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펫시."
아프나이델은 자신이 사용한 호칭에 어울리는 동작으로 천천히 아일
페사스의 머리를 보듬었고 아일페사스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아프나
이델의 가슴에 뺨을 댄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일페사스의 부드러
운 블론드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프나이델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괴되고, 불타오르고, 산산조각나는 것은 진행형이야. 그것 또한
파괴지만, 그 이후에 다시 태어나고, 번성하고, 찬란하게 피어날 것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하지. 파괴와 생성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재된 적극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들이야. 세상에는 진정한 파괴란 없단다. 아니, 그런 것은 없
었다고 말해야겠구나.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그것들을 모두 무
시하는 현상이야."
아프나이델은 더욱 힘껏 아일페사스를 끌어안았다. 무섭고 답답한 기
분에 아일페사스는 칭얼거리고 싶어졌지만 아프나이델의 분위기에 압
도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나이델은 더
욱 낮은 목소리로 더욱 높게 절규했다.
"펫시, 펫시! 으흑. 너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드
래곤 로드께서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들을. 비록 우리 종
족에게 필연코 따라다니는 슬프고 아픈 모습들을 보게 되더라도,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뒤에 있는 희망까지 읽어내는 법을 가르치
고 싶었지. 그게 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종족의 가장 큰 장점이
었을 텐데. 그랬는데……"
"나이드……."
"그래. 기뻐할까? 이젠 슬픔은 영원히 슬픔이겠지만, 기쁨은 영원히
기쁨이겠군. 사랑하는 부모는 절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테고, 부모
는 영원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있는 자녀를 볼 수 있게 되겠
구나. 기뻐할까? 기뻐할까…… 기뻐할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카알이 갑작스럽게 아프나이델의 말을 받았
다.
"그러나 아기를 원하는 부부는 절대로 천진한 웃음으로 집안을 채워
줄 아기를 얻지 못하겠지. 사랑하는 남녀는 절대로 결합될 수 없겠지.
그 어떤 농부가 뿌린 씨도 결실을 얻지는 못하겠지. 가장 시시한 병에
걸린 자도 영원히 그 병에 아파해야겠지. 베인 살은 아물지 않고, 다
친 마음 역시 아물 수 없겠지…… 오오! 맙소사, 유피넬이여!"
"한 통의 물은 피래미에겐 많은 물이지만 크라켄에겐 턱없이 작은 물
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같은 물."
"예. 그렇지요.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본
다면 역시 당신에겐 많은 시간이 있어요. 당신은 여기 있는 인간분들
이 모두 늙어서 인생의 허허로움을 말할 때까지도 지금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거에요. 그렇지요?"
아일페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꼭 깨물었을 뿐이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이루릴은 조용조용
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인간분들이 보기에 당신은 정지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루가 지나도, 1년이 지나도, 10년이나 100년이 지나
도 당신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산이나 바다,
혹은 언덕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라요.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니까요."
"살아있는 것이 뭔데?"
"모든 무생물들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다른 흐
름을 가질 권리를 받은 것을 의미하지요. 그게 살아있다는 것이에요.
제가 알기로 인간들의 경우에는……"
이루릴은 말을 꺼내다가 잠시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레인트
는 엑셀핸드와 악담을 덕담처럼 나누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각반의
매듭에 관해 심도있는 고찰을 수행 중이었다. 이루릴은 다시 말을 이
어나갔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다른 흐름을 더 가속하는 일에 관심이 많지
요."
"가속이라고요?"
"인간들이 날짜와 시간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예. 어제, 오늘, 내일. 시간, 분, 초, 한달, 1년, 세기……"
"때가 되면 찾아올 시간의 흐름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뭘까
요. 저는 인간들이 그것을 앞지르겠다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해요. 당
신이 그저 걷고 싶어서 산책을 한다면 당신에겐 목표가 없을 수도 있
어요. 하지만 당신이 목표물을 가지게 된다면, 거기까지 달려간다거나
걸어간다거나 언제까지 도착하겠다고 하는 의지와 힘, 방법론 등이 생
길 수 있겠지요. 인간들이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
닐까 생각해요. 다음 주까지는 이 일을 끝내겠다던가, 올해 안에 뭔가
를 하겠다거나…… 만일 인간들이 시간에 붙인 이름을 상실하게 된다
면, 그런 일들은 표현할 수조차 없게 되겠지요."
이루릴은 갑자기 생긋 웃었다.
"제가 인간어를 배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제에 대한 것이었지
요. 인간들의 말에는 시간을 지칭하는 말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시간에 따라 행동의 형식이 바뀌더군요. 심지어는 행동의 가치도 바뀌
는 거 같았어요. 인간들의 말에서 사랑했다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들
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차이를 가지더군요. 그리고 사랑할 거라
는 말 역시."
"그거 아주 달라요. 전 알아."
"그런가요? 당신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으니
까 저보다는 그들에 대한 이해가 깊을 수도 있겠군요. 사랑했다와 사
랑한다가 어떻게 다른가요?"
이루릴은 어느새 빗질을 마쳤다.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건 말이야, 음. 사랑했다는 말은, 예전에는 사랑하지만 지금은 사
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도 계속해서 사
랑한다는 말이고요."
아일페사스는 이 단순한 설명을 퍽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루
릴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예전의 사랑은 사라지나요."
"응?"
"인간들의 말은 그렇더군요. 사랑했다라는 짧은 말로 예전의 가치를
모조리 소멸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듯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서 정
말 그것이 소멸되었나요?"
"그건…… 몰라요."
이루릴은 - 노련한 모험가들이 그러하듯이 - 검집에 칭칭 묶어두었던
끈을 조금 잘라내어서는 아일페사스의 탐스러운 머릿결을 세심하게 묶
어주며 말했다.
"인간들은 잊고 싶어하더군요. 기록과 역사를 남기는 것이 인간이라
지만 그것에 속으면 안되겠지요. 오로라와 망각의 이사가 그의 처녀들
에게 극지에서만, 인간들이 살지 않는 극지에서만 오로라를 허락한 까
닭은 뭘까요. 그들이 모든 하늘에 그 아름다운 천을 펼친다면 완전한
망각을 꿈꾸는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정신없이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
문이겠지요."
둘의 대화를 듣던 아프나이델은 무심코 각반을 세번이나 묶고 말았
다. 그래. 잊고 싶어하지. 제레인트는 그의 부모를, 나는 나의 과거
를. 내 원래 이름은…… 아프나이델은 순간 한숨을 내쉬면서 세번이나
묶어버린 매듭을 어떻게 하면 칼을 대지 않고 풀 수 있을지에 대해 고
민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게 있어 시간은 망각의 축복이겠지요. 그리고 인간들에게
시간이 정지했다는 것은……"
"더이상 망각할 수 없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과거가 돌아오니까 그렇게 소스라쳤군요. 음. 하지만 전 이
해가 안돼. 루리도 말했잖니? 기록과 역사를 남기는 인간이라고요. 잊
고싶어하는 인간이라면 왜 그런 것을 남기는 거야?"
"저로선 잘 모르겠군요."
"그건 사망증명서지요."
이루릴과 아일페사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프나이델
이 각반의 매듭을 부여잡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 숙
여 자신의 각반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거는 이제 죽었음을 증명함. 과거에 대한 기록은 그런 사망증명서
겠지요. 죽은 몬스터는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죽은 과거 역시. 인간
은 기록을 보며 안심할 테죠. 아아, 이건 확실히 죽었구나. 그럼 마
음껏 자유스럽게 과거를 대할 수 있게 되겠지요. 과거 시제도 그런 의
미에요, 이루릴. 사랑했다는 말은, 이제 그 사랑은 죽었음을 선포하
고, 그 감정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겠다는 의미겠지요. 찢어지는 아
픔 없이 그 때의 사랑에 대해 추억해볼 수 있는 거죠. 그게 되살아나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으며."
이루릴은 천천히 아프나이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종이나 천이
아닌 나무처럼 아프나이델의 말을 흡수했다. 천천히, 섬세하게. 그러
나 아일페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미가 미래를 봐요. 그런데 그 속에서 죽어가는 후작님이 떠올랐어
요. 미는 그 장소와 시간을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후작님
은 어쩌시겠어요?"
"그 장소와 그 시간을 피하겠지."
"그럴 수는 없어요. 후작님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미가 본대로 죽게
되요."
후작의 눈살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빨라지는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
지 못한 채 후작은 날카롭게 질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는 말이냐."
"네."
궤헤른은 호흡을 거의 잊은 채 미를 바라보았고 후작 역시 부릅뜬 눈
으로 이 북부의 무녀를 쏘아보았다. 후작은 갑자기 손을 허리쪽으로
가져갔다. 미는 흠칫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후작은 이미 검을 뽑
아들었다. 놀란 궤헤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후작은 검으로 미를
겨냥하며 말했다.
"미래를 보려면 뭐가 필요하지."
"후작님. 이거 치우세요."
궤헤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는 검끝을 보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
선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노련한 전사와 비슷
한 모습이었지만, 궤헤른은 미를 노련한 전사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후작은 사납게 외쳤다.
"미래를 보려면 뭐가 필요한지 말해!"
"물그릇과 미의 가면이 필요해요."
"물그릇과 가면. 그런게 필요했었나. 그건 가져오지 못했군. 좋아,
대답해라. 만일 네가 한 시간 후의 미래를 보고, 그 때까지 살아있는
네 모습을 봤다고 하자. 그런데 네가 미래를 보는 것을 끝내자마자 내
가 널 찌른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지."
"미는 살아요."
"……좋아. 그렇다면 가령 네가 내 검에 의해 죽는 네 모습을 봤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이대로 검을 집어넣어 너를 살려둔다면 어떻게 되
는 거지."
"미는 죽어요."
"어째서! 내가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단 말이냐.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 손이 멋대로 움직여 너를 살리거나 죽이게 된단 말이냐! 내 자유의
지는 어떻게 되는 거냐!"
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미가 보는 미래를
모두 부정하시겠다면, 그렇다면 왜 미를 납치하신 거죠?"
"뭐라고."
"후작님은 지금 오른손으로 오른손을 쥐려고 하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음. 자기 오른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쥐려고 하면 불가능하겠죠?
이건 헤게모니아에서 이율배반을 말하는 속담이에요. 후작님은 미가
미래와 현재를 잇는다는 이유로 미를 납치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
가 보는 미래를 모두 부정하겠다고 말씀하시는군요."
후작의 검끝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처졌다. 후작은 경악에 휩싸인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을 마주보며 미는 쓸쓸한 웃음을 지
었다.
"다들 그렇죠."
황폐한 어조였다. 궤헤른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미를 바
라보았다. 뚫어지게 바라보았기에 궤헤른은 미의 길다란 속눈썹이 가
볍게 떨리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자유는 포기하기 싫어하죠. 넓고 편한
길을 걷고 싶어하지만, 제멋대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라죠. 지식과 자
유 둘 모두를 바라지요. 미 도망치면 안되죠? 저기 가서 사슴 다루는
거나 구경할래요. 미는 가죽 벗기는 일도 곧잘 했으니까 도움이 될지
도 몰라요."
미는 후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니크와 가이버 쪽을 향해 걸
어갔다. 후작은 멍한 시선으로 그 뒤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그 때
까지도 롱소드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작은 검을 집어넣고는
망토로 상체를 휘감고는 상념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후작님도 약속이 깨진 경우가 있으시겠지요. 그건 후작님과 상대방
의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슨 궤변이냐! 약속이 깨지는 것은 피치못할 사건들이 생기거나 하
기 때문이다!"
"사건들이 곧 시간이에요…… 후작님. 아무런 사건이 없는 공간은 시
간도 없는 공간이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 정지에 대해 알고 있어
요. 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어요. 그렇
잖으면 왜 사람들이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걸까요."
후작은 당황해버렸다. "심심함이라고."
"사람들은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해요. 하지만 심심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무 일도 없는 거에요. 그것은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분노를
표현할 수도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어요. 왜 수많
은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이든 바보든 가리지 않고 그렇게도 지겹게
똑같은 인사를 할까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당신의 시간은 제대
로 흐르고 있냐는 확인으로써 인사를 대신할까요."
미는 일어섰다. 후작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제지하지 않
았다. 미는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댄 채 후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구나 알고 있어요. 후작님.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늙어서 노인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대개들 그렇게 믿고 싶어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이루어지는, 즉
부채감을 가져야 되는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지요."
후작의 심정을 말할 수 있는 말은 기막히다는 말 뿐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는 말이냐. 친지가 죽고 친우가 죽고
마침내 자신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란 말이냐."
"네. 감사해야지요. 그것도 후작님이 말하는 살아가는 이유니까요.
늙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이요. 후작님이 미래를 알 수 없는 모
호성을 인생의 축복이라고 말하겠다면, 미는 미래로 갈 수 있는 그것
자체를 축복이라고 말하겠어요."
미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추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의 손이 갑자기 움직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후작은 그녀가 울
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할 말을 잃었다. 입을 틀어막은 미의
어깨가 한참 동안 떨리고나서, 미는 아직도 물기가 어려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미는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연인을 사랑할 것이고, 고아
가 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죽을 거에요. 명령대로 움직이는 골렘처럼
정해진대로 살아갈 거에요. 그리고 그것에 감사해요. 그것은 다른 누
구의 것도 아닌 미의 인생이니까요. 그래서 미는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들 거에요."
말을 하면서 미의 목소리는 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후작은 미의 흐
느끼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커다란 집중력을 발휘해야 되었다.
"그것을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후작님은 사물
을 볼 수 있는 시각에 대해 화를 내시나요? 눈이 있어서 이 슬픈 모습
들을 보게 되었다고 화를 내시나요? 그렇지는 않으실 거에요. 그리고
미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아요. 그것도 미의 것
이니까요. 후작님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부모에 대해 화를 내시나
요? 그렇지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미는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미래
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아요. 그것도 미의 것…… 으흑!"
"그건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제로 격렬한 사랑이나 끔
찍한 증오와는 별 관련을 두지 않으며 살아왔습니다. 상단의 호위무사
이긴 하지만 돈을 좋아하지도, 모험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없지요. 저는 무색무취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
만 저는 미를 사랑합니다. 저 자신도 신기한 일입니다만."
"그게 거짓인데도요!"
네리아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쳉은 그런 네리아를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거짓이라도…… 그것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도 저는 만
족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운명이라는 감독의 지시 하에 계획적
으로 베푸는 사랑이라도 제게 주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왜…… 왜지요?"
"저는 미래를 모릅니다. 따라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는 저와
결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해요! 라는 말이 입천장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네리아는 쳉의 다
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미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가끔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만족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만일 결혼한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저는 강제로
결혼해야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겠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온
다면 거꾸로 사랑하는데도 부득이하게 결혼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일 겁니다. 그렇겠죠?"
"그, 그,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두 가지 경우를 놓고 따져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그녀와 결혼한다면 저는 평생 동안 그녀를 의혹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겁니다. '미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하면서 말입니
다. 그 결혼생활은 전체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가
식적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행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는다면, 미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저와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그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는 없게 되겠지요."
쳉은 갑자기 복받치는 기분을 느끼고는 스스로 놀라버렸다. 내게 이
런 기분을 느낄 정도의 감정이 있었나? 쳉은 하늘을 바라보며 목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그 자체, 아니 그 정수라고 할까. 시간축이 나은 거 같아. 어
쨌든 북해에는 그런 것이 있어. 디도스 같은 곳에서 파는 그거, 쳇바
퀴 돌리는 다람쥐를 생각해봐."
"전에 선물했더니 놓아줬었지."
"그래. 그 쳇바퀴. 그건 어떻게 해서 돌지?"
"다람쥐가 돌리니까."
"아니……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이 도는 이유는 뭐지? 그것의 한
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잖아? 만일 그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돌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어떤 것이 돌려면 거기엔 고정된 축이 있
어야 된다는 말이군."
"그래. 북해에 있는 것에 미가 시간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것
때문이야. 축. 중심점."
"아아."
"사람들은 세상에 퍼져서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거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간을 과거로 보내고 새로운 시간들
을 만들어내. 하지만 그 축은 북해에 있지. 그래서 미는 미래를 볼 수
있어."
"궁금한 것이 있어."
"뭔데?"
쳉은 차마 묻지 못하던 것을 물을 때도 담담했다.
"네가 본 미래에서, 나는 너와 결혼하나?"
"쳉은 미래를 알려고 하는구나. 댓가가 커."
"그래?"
"하지만…… 미 반칙 좀 할래. 미는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니 미래를
본다고 했지?"
"응."
"쳉은 미를 사랑해. 쑥스러운 표정 짓지마. 이상한 얼굴이 된다? 흐
음. 어쨌든 그것이 고정된 과거야.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거야?"
"응."
"그럼 누구나 퓨쳐워커가 될 수 있겠군."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왜? 과거를 보고는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잖아."
"미를 웃기지마, 쳉. 어린애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아달탄도 그건 알걸.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자신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의 발
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강물이 범람할 수도 있고,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땅이 갈라질 수도 있고, 목적지가 드
래곤의 공격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고……"
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야…… 쳉."
"응."
"사람은 시간을 만들어내."
"응."
"그리고 시간은 사람을 떠나가."
"응."
"쳉은 미랑 결혼해야 돼."
"응."
"쳉은 미랑 결혼해서 평생 밥 짓고 빨래 하고 애 돌보며 돈 벌어오고
미만을 섬기고 미만을 생각하며 미만을 그리며 미가 히스테리를 부리
면 달래주고 미가 심심하면 재롱 떨어주고 미가 졸리면 자장가 불러줘
야 해."
"응."
"미가 졌어."
쳉은 싱긋 웃으며 캐쉬 헌터의 진로를 조금 수정했다. 그리고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미는 쳉의 손을 보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달리
는 말 사이로 뻗어간 쳉과 미의 손은 허공에서 맞닿았다. 미의 다섯
손가락이 쳉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두 사람은 한손으로
말을 달리고 다른손은 서로 깍지낀 채 숲의 머리를 파고드는 은초록빛
햇살 속을 달려갔다.
미는 얼굴에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실어보내었다.
"아이를 가지자."
쳉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조용하게 말을 계속했다.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쳉. 그 아이를 사랑해주자. 바보처럼 사랑해주
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자."
미의 매끄러운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어닥치는 바람
은 미의 눈물을 빠르게 식혔고 미는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눈물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미는 마지막까지 말했다.
"그는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안락하게 살게 되었을 땐 고생스러웠던 지난 날을 생각
하고 있겠지. 그 사람은 사실 거꾸로 살아온 거야."
"거꾸로?"
"그래. 열심히 일할 땐 안락해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상상을
즐기지. 이건 신용대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안락하게 되었을
땐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과거를 생각하지. 이건 빚갚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즐거움은 미리 배당받았기에 더 이상 받을 수 없고, 과
거에 빚갚음하며 살다가 죽는 거야."
"아아, 그렇네요. 맞아요. 그렇구나. 응응. 저 아는 척하고 있어. 똑
똑해보이죠? 비참해라……"
"순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인과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
을 느끼지만…… 좋아. 인과라고 해두자.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겠
지. 여기엔 순서가 있다. 결과가 먼저 발생하진 않아. 원인이 먼저 발
생하지. 그렇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일어날 테니. 아까 말했던 한
사람의 삶의 모습 같은 것도 이와 같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이고
안락한 노후생활이 그 결과일 거야. 알겠니?"
"좋네요. 이해해."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의 흐름을 보면 그 순서가 이상하게 바뀌어있
는 것을 알 수 있단다. 그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위를 하
고 있을 때 그는 그 결과를 즐기고 있단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예상되는 결과가 시원찮군. 관두는 것이 낫
겠어. 잘 보렴. 이 때 그 사람은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결과에만 관
심이 있을 뿐이야. 아직은 존재하지도 않는 그 결과를 사람은 앞당겨
서 즐길 수가 있어."
"아아."
"그리고 결과가 일어났을 때를 보자꾸나. 그는 이제 행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것이 뉘우침이든 즐거운
회상이든 상관없어. 그는 결과가 아닌 행위를 생각하고 있지. '젠장,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되는데.' 혹은 '만약 그 때 이러했다면.'
'그렇게 했기에 가능했지.' 등의 말들이 그것인데, 이런 말 속에 담
겨있는 감정은 좀 다를지 몰라도 행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는 차이
점이 없단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그 때의 그 행위를 즐기고 있는 거
지."
"아아. 그렇네."
"순서가 바뀌어있다는 것을 알겠니?"
"으으응. 하지만 행동하면서 동시에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잖아. 춤을
춘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까르르륵!"
"그래. 하지만 그건 시간이 아니지."
"응?"
"그럴 때 쓰는 말 하나를 들어볼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라는 말이
있겠구나."
"음음. 좋아요. 실제의 시간과 사람 마음 속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고
쳐.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시간과 떨어져 있다는 거지. 시간과 함께 있지 않아.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산다는 말은 사실 불가능하지. 그는 언제나 시
간과 별개의 존재였으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자존심을 주지. 부모와
떨어져있는 꼬마가 느끼는 자존심과 비슷한."
"별개의 존재라고?"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만든다고?"
"그래. 서로 별개여야 하지. 한 여자가 이 세상의 어떤 남자와 결혼
하든, 설령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녀 자신을 낳을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람은 시간과 별개여야 한단다. 그래야만 시간을 만들
어낼 수 있으니까."
"흐응. 괴팍한 논리다. 용서해줄게요. 그런데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
이 속으로 들어간 거야?"
목적도 없었고 출발도 없는 걸음 속에서 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눈 앞에서 그녀를 이끌고 있던 빛이 변화했다. 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가늘게 떠서 보았다. 하지만 빛은 분명히 그
형체를 바꿔가고 있었다. 먼저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리고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굴강한 팔이, 그리고 미의 눈에 익은 어깨가 나타났다.
미는 키 큰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머리를 조금 들어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을 향해 미소지었
다.
"쳉."
웃음짓고 있던 쳉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쳉은 미가 했던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를 가지자.
"그래."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미. 그 아이를 사랑해주자. 바보처럼 사랑해주
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자.
"그래."
내가 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네가 안아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너무 빨리 자신의 시간을 끝내야 되는 아이를.
"그래, 쳉. 그래."
빛이 모여들었다.
노도 같은 빛살들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 둘 빛들이 미를 향해 서서히
그 궤적을 비틀었다. 모닥불에서 튀어오르는 불티같이 작은 빛들이었
지만 그것은 거센 빛의 파도를 조용히 무시하며 미를 향해 흘러들었
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허공에 온갖 종류의 거
대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미에게로 수렴되었다. 부드럽게 날아온 빛은
미의 주위에서 주저하듯 잠시 맴돌았고 미는 그 빛들을 향해 비어있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빛은 나뭇가지를 찾아드는 작은 새처럼 미의 오
른손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미의
두 손과 그 팔과 온몸에 휘감겨들었다.
아일페사스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리고, 웃는 거지."
광풍(光風)에 휘날리며 기절했던 할슈타일 후작의 귀에 무수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깔깔거리고 껄껄거리고 미소짓고 폭소하고 홍
소하고 히죽거리고 헤죽거리고 빙글거리고 싱글거리고 웃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들게 눈을 떴고 사방에 가득 메우고 있는 빛에 놀
랐다.
화려하던 암흑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위도 빛이고 아래도 빛이
모든 방향이 빛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벌떡 일어났고 자신이 일어났
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몸이 박살나지 않았나? 그 때 저쪽이자 이
쪽이며 그쪽인 곳에서 레이저가 빛에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합시다. 난 당신이 살아있다고 말해줄 테니, 내가 한
것만큼만 당신도 내게 해줘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걸 못
하긴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어."
레이저는 히죽 웃었고, 그 웃음은 강력한 전염성으로 할슈타일 후작
을 엄습했다. 그래서 할슈타일 후작은 도리없이 웃어버렸다.
망막을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지독한 빛은 아예 동공을 안와 안쪽으로
밀어붙일 것만 같았다. 온몸이 그대로 사그라들 것만 같은 빛 속에서,
신스라이프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미를 보며 온
몸이 떨리는 분노를 느꼈다. 그 때 그의 속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보고 있나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고함질렀다. "파!"
인간은 미에게도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쳉이 그녀를 안내했고, 그리
고 인간이 그녀를 이끌고 있어요.
신스라이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웃는 거야? 그들이 나를 포기했다는 건가? 좋아! 이런, 빌어먹을!
몇몇 얼간이들이 그에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나는 존재하고 있어! 제기랄, 그건 나를 원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는……"
아니오.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나를 원하는 놈은 없다는 거냐?"
아니오. 그들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뭐야?"
미를 보세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외쳤다.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곧 없애버릴 테니까!"
미를 보세요. 부정하지 말고. 그녀는 당신에게 오고 있어요. 뒤로 돌
아가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그거야 너 때문이겠지! 어리석게도 너와 내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기도를 타고넘어가는 빛
의 질감을 아프게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손을 들어올렸다. 두 볼을 타
고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서. 파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인간은 정말 당신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목구멍을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
았다. 그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부서짐은 이제 눈물이 되어 샘솟았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를 생각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알아. 그래. 그들은 알아."
네. 신스라이프. 고마워요.
"……파. 너는……"
같이 가요.
"난, 난……"
가요. 신스라이프. 나와 같이. 그녀에게 걸어가요.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광선들이 춤추는 하늘도 존
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메운 빛 속에 시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타성이 걸음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걷고 있
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걸아갔다. 미는 미소지었다.
선망은 인고를 수놓는 장식이었고 희구는 과거를 위한 이름이었다.
미는 걸어갔다.
신스라이프는 걸어갔다.
파하스는 기어코 하프현을 다 끊어놓았다.
네리아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머뭇거리는 쳉의 손을 잡고 미
친듯이 춤추고 있었다.
신차이는 수평선을 향해 파이프 연기를 날려보내었다.
에카드나는 자신의 몸을 꿰뚫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향해 욕설을 퍼붓
고는, 그 검의 소유주를 향해 부러진 칼을 힘겹게 휘두르다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카알은 술잔을 들어올려 샌슨의 잔과 부딪히며 껄껄거렸다.
함은 눈앞에 펼쳐진 사막을 향해 희열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시오네는 울었다.
이루릴은 모든 정령을 향해 웃음지었다.
엑셀핸드는 운차이가 자신을 끌어안으려드는 줄 알고 기겁했으나, 운
차이의 목적이 단지 그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담배쌈지에 있었다는 것
을 알고는 격노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팔
을 조용히 끌어당겨 엑셀핸드의 주먹을 침착하게 막아내었다. 제레인
트는 졸도했다.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를 생각했다.
돌맨은 그란의 품에 안겨 숨이 막히도록 울고 웃었다.
궤헤른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이버가 그를 불
렀지만 궤헤른은 듣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
던, 그리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후
작님."
미는 멈춰섰다.
신스라이프는 멈춰섰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던 미는 푸훗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런 미를 보며 신스라이프는 미소띤 얼굴로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첫댓글(전략)->(중략). 그리고 중복된 문장들이 한 부분. 흐음...<<퓨쳐 워커>>는 언제나 알쏭 달쏭 하지만 무언가 의미 있는 말들로 가득하지. 과연 시간의 주인은? 인간. 별을 보고 별자리를 만드는 생명. 땅을 밟으며 길을 만드는 생명. 그리고 시간, 곧 사건을 만드는 생명. 바로 우리들이지.
첫댓글 (전략)->(중략). 그리고 중복된 문장들이 한 부분. 흐음...<<퓨쳐 워커>>는 언제나 알쏭 달쏭 하지만 무언가 의미 있는 말들로 가득하지. 과연 시간의 주인은? 인간. 별을 보고 별자리를 만드는 생명. 땅을 밟으며 길을 만드는 생명. 그리고 시간, 곧 사건을 만드는 생명. 바로 우리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