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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우리집 대소사
* 살림집 리모델링
* 모자간 갈등
* 토론토에서 서울로 여름휴가
* 태극권 대만 금메달
* 현명한 막내 누이
* 고교동창 문집
* 국악 지도자 증
* 국악 한마당
* 베네룩스 여행
* 우습게 본 감기
* 옆집 사무실 신축
살림집 리모델링
집을 빌라로 신축하다보니 우리가 살아야할 5층이 너무나 비좁고 안방은 침대를 놓고 나니 숨을 쉴 공간이 없이 비좁다.
여러 개의 넓은 방과 마루를 갖고 살다 신축한 집의 거실과 방을 보면 숨이 막힌다.
일단은 베란다를 만들어 거실을 확장하기로 하였다.
원인테리어에서 베란다 확장하는데 견적이 2천8백이 나왔다.
화장실이동, 보일러실 이동, 베란다 설치, 옥상계단 설치하고 1층 현관을 돌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공사를 하는 김에 세탁실을 이동하고, 재봉틀 실을 확장하고, 남측에도 베란다를 추가로 설치하기로 하였다.
2월 5일 2차 견적이 42,600,000원이다.
안방을 부엌 쪽으로 확장하자며 2백을 또 요구한다.
2차 견적이 1차 견적보다 5백 이상 뻥 튀긴 것을 알지만 4층 계단을 외벽을 뚫고 해 준다는 등 감언에 공사만 잘해주라는 의미로 흔쾌히 약속을 했다.
옆집인 11-29 임사장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고 새로 오는 주인은 집을 허물고 사무실을 짓는단다.
우리는 옆집이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이때다 싶어 급히 공사를 착수하였다.
우리 집 신축할 때 임사장이 애를 먹인 것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
특히 우리 집을 물고 늘어지던 앞집 변씨 아줌마가 이번 확장 공사 하는데 한마디 없이 조용한 것이 이상할 정도다.
공사하는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하여 걸리적거리지 않게 우리 부부는 이부자리와 먹을 것 만 챙겨서 압구정 누이네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2월22일 집 공사를 시작하는데 화장실이나 거실 벽을 허무는 것이 소음과 먼지가 보통일이 아니다.
세입자들한테 소음과 공사로 인한 불편함을 끼쳐 미안할 뿐이다.
나는 집에 있는 살림살이나 다치지 않고 공사가 빨리 끝나길 기원할 뿐이다.
원인테리어 사장이 견적에 아시바를 넣지 않았으니 3백을 더 내라, 옥상 올라가는 계단을 잘못 설치하고 수정하라고 하니 3백5십 드는데 나보고 부담하라는 등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시공자인 자기가 잘못 놓은 계단을 수정하지 않고 버팅 기는 원사장도 답답하다.
옥상계단 문제로 집사람은 돈 더 들이고 할 필요 없고 4층에서 올라오는 것을 돌아서 다니겠다는 등 나를 신경 쓰이게 한다.
나는 배내병신이 되어 안 된다고 내가 부담 하더라도 계단을 옮기라고 하였다.
옮기고 나니 잘 했다고 한다.
한 달 안에 충분히 끝내겠다던 공사는 열흘이나 더 걸려 마무리 되었다.
이런 저런 공사비가 합쳐져 깍었는데도 5천 4백이 되었다.
여기에 리모델링했다고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을 새로 사니 6천이 넘어 버렸다.
주머니에 여유 돈이 없다면 섣불리 공사를 시작하면 안 된다.
거실에 대리석 벽이 반은 날라 갔지만 새로 지은 집에 이사 온 기분이다.
숨도 못 쉴 것 같던 안방은 그런대로 참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카들이 세배를 오드라도 앉을 만한 자리가 확보 되어서 기분이 안정된다.
조그만 집에 한 번에 여러 사람이 닥치면 방법이 없었다.
모자간 갈등
큰아들 혁진네 식구가 캐나다에서 여름휴가를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6월19일 며느리와 손주인 고은 순용이가 귀국하고 큰아들 혁진이는 보름후인 7월2일 귀국하였다.
내가 공항에서 혁진이를 픽업 하고 집에 와서 온 식구들이 화기애애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평온하게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는 출근을 하는데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혁진이가 집을 나간다는데 빨리 오란다.
왜 그러냐고 하니 문통과 좌익이 일을 잘못한다고 하니 저렇게 열을 내며 야단이란다.
팔팔 도로에서 급히 차를 돌려 집에 오니 집사람은 없고 애들만 있다,
혁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구체적인 말도 없이 하는 말이 이런 부모 밑에서 자기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단다.
자초지종도 모르면서 이런 이야기를 부모의 입장에서 들으니 나의 아들은 자기인데 내가 부모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집사람은 혁진이와 말다툼을 하다 혁진이가 하도 열을 내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집에서 나갔단다.
내가 집사람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혁진이 한태는 집을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는데 내 말을 조금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혁진이 4식구 모드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간다.
한심하고 허망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모하게 목표도 없이 감정으로 집 식구 모두를 데리고 가장이 무작정 나가는 것이다.
내가 작은 아들 혁범이에게 전화를 하여 너의 형이 식구들 데리고 너희 집으로 갈 테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어제 캐나다에서 귀국하여 시차도 적응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 식구를 데리고 큰 여행가방을 끌고 나간다.
애들이 나간 후에 집사람이 들어 왔다.
무슨 일이기에 아들이 짐을 싸 가지고 나가느냐고 물으니 별로 한 말도 없었단다.
시국에 대하여 이야기하니 저렇게 열을 내고 자기를 몰아 부친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란다.
집사람이 뾰족한 말로 정부에서 무엇을 못했느니 하니 아들이 잘 했다고 치받았을 것이다.
집사람은 유투브도 보면서 현 정세에 일정한 지식을 쌓고 태극기 집회에 열심이다.
한편 혁진이는 문 정부에 호혜적이며 옹호하는 편이다.
한집안에서 좌우익이 충돌을 한 것이다.
날카로운 성질을 가진 집사람과 똑같은 성질의 혁진이가 순식간에 벌인 집안싸움이다.
나는 할 일없이 다시 출근을 하는데 혁진이가 식구들을 끌고 큰 여행가방 하나씩 끌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원하는데 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니 그만 두란다.
집사람이나 혁진이나 불안한 나날을 보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작은 아들이 화해하는 방법을 물어 현재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7월7일 내가 청계산 등산 같다오니 혁진 혁범 두 형제가 집에 와서 있다.
집사람은 어미로서 감정을 죽이고 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자식은 어찌되었건 부모에게 순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모자가 화해 무드로 갔다.
나는 등산 갔다 와서 샤워도 하기 전에 이야기를 했다.
내가 살아온 나의 상식으로는 자식이 부모에게 반기를 들고 집을 나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내 일생에 내 가정에서 자식이 집을 나가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부모 밑에서는 자기 자식들을 교육상 더 이상 맡길 수가 없다는 말에는 부모자체의 자존심까지 건드리는 일이다.
나는 내 아들이 집을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않았고 나의 가정교육의 부재인지는 몰라도 부모로서 상심이 크다.
이번 일을 봉합은 하겠으나 파여진 깊은 골은 용서한다거나 이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하는 행동 여하에 따라 풀려질 것이다.
일단 식구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라. 고 하고 집안 분란을 봉합하였다.
이 후에 휴가 일정을 같이 하면서도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사라졌다.
토론토에서 서울로 여름휴가
토론토에 사는 큰아들 혁진 식구가 서울로 여름휴가를 오기로 하였다.
본 계획은 우리가 내년에 토론토 가고 몇 년 후에나 한국에 올 계산이었다.
금년에 우리 집을 리모델링하여 거실도 넓어지고 방도 넓어졌다.
2년 전에 혁진이 식구가 왔을 때 좁은데서 고생을 하고 에어컨도 효과가 없어 더위를 타는 손주들이 고생을 하였다.
집도 리모델링하고 에어컨도 또 샀으니 서울에 휴가를 오는 것도 좋다고 하니 부부가 상의하여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6월 19일 큰 며느리가 손주 고은이와 순용이를 데리고 왔다.
큰아들은 보름 후에 와서 식구들을 데리고 7월 16일 날 같이 출국하기로 했다.
작은 아들 혁범이가 식구들을 데리고 저녁에 와서 조카들을 만났다.
순우는 사촌 누이와 형을 만나니 서로 기뻐했다.
순우는 2년 전 찍은 가족사진을 계속 가르치며 저 사진속의 누이와 형이라고 신기하게 사진과 사촌들을 번갈아 보며 대조한다.
캐나다의 조용한 마을에서 살다가 서울의 인파와 번잡한 거리를 보고 익숙해지려면 몇일이 걸릴 것이다.
아희들이라 시차를 빨리 적응하는 것 같다.
귀국하자마자 작은 며느리가 큰집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랜드를 간다, 에버랜드를 간다, 스타필드까지 쉬지 않고 데리고 다닌다.
고은이는 놀이 공원에서 쉬지 않고 고난도 놀이 기구를 타고 즐긴다.
하루 종일 타며 지치지 않는 것을 보면 체력이 월등히 좋은 것 같다.
작은 며느리의 놀이터 선정이라든지 놀이터에서 즐기는 방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월등히 잘한다.
보름이 되어 7월 2일 혁진이가 귀국하였다.
귀국하고 다음날 아침 집사람과 시국문제로 말다툼을 하여 열을 내며 자기식구들을 데리고 혁범네 집으로 갔다.
즐겁게 지내려던 여름휴가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다.
부모로서 참으로 보기 안타까운 일이다.
일주일 만에 모자간 봉합은 되었지만 앙금은 살아있다.
나는 내 일생에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는 것은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고 하였다.
식구 간에 화합은 되었지만 상처의 깊은 골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하는 행동으로 보아 풀어질 것으로 본다.
일단 화합은 되어 나간 식구들을 데리고 집에 오라고 하였다.
작은 아들이 있어 중간에 윤활유 역할을 하였다.
온 식구 9명이 대명 소노 펠리체 콘도에 짐을 풀고 오션월드 수영장에서 본격적인 여름휴가를 즐겼다.
날씨가 계속 비가 오니 수영하기가 써늘하다.
오션월드에 더운 스파 탕이 있어 다행히 몸의 온도 조절을 할 수가 있어 좋았다.
식구 간에 갈등이 있어서 그런지 2년 전 같이 몸과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지는 못하였다.
큰아들 마음도 저변에 깔려있는 마음이 있어서 나와 같을 것이다.
이번 휴가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마음 놓고 놀라고 하였다.
고은이는 물놀이 기구를 한껏 이용하고 악착같이 노는 것을 보면 신통하고 귀여워 죽겠다.
순용이는 이제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순우도 형 쫓아서 열심히 놀고 어려도 지치지 않고 잘 논다.
아희들이 잘 놀아 체력이 떨어져 몸살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휴가를 갔다 와서 사촌 조카들을 모두 불러 압구정에서 혁진이 귀국 만찬을 하였다.
사촌들 끼리 술 한 잔하며 즐겁게 이야기 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 나도 즐겁다.
혁진이 자식들은 한 달간의 휴가를 잘 즐겼을 것이다.
모든 식구가 몸 성히 잘 있다 캐나다로 떠났다.
태극권 대만 금메달
2018년 제7회 세계태극권 대회가 10월 27~28일 본산인 대만에서 열린다.
집사람이 태극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10월 26일 대만으로 출국하여 10월29일 3박4일간 있다가 귀국하였다.
2년 전에 가고 두 번째 가는 것이다.
2년 전에는 37식을 합격한 이력이 있다.
한국 태극권 협회 신사지부인 신사 문화쎈타에서 연마한 실력으로 대만대회에 참석한 것이다.
태극권은 대만의 진청궁(陳淸宮 Chern Ching Cong)이 창안하여 보급한 것으로 한국 태극권 협회는 교대역 법원 근처에 있다.
이번 대회에서 집사람은 37식 태극권의 외국 여자 장년부에서 금메달을 땄다.
외국인은 참석자가 많지 않으나 금메달을 땄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금메달을 땄다고 시상식 사진을 보내와서 축하한다고 답신을 하였다.
이 사진을 자식들에게 다 보내니 어머니 축하한다고 즉시 반응이 왔다.
나는 집사람이 대만 가 있는 동안 포럼 참석하랴 세향에 가랴 식사는 집에서 거의 하지 않고 커피나 마시는 정도다.
그러니 식기 세척할 것이 별로였다.
집사람이 귀국할 때 공항에 나오지 말라고 하여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람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의 설거지통을 보자 설거지도 안하고 무얼 했느냐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본다.
당신이 하기에 나는 안했다고 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불만이 많다.
귀국하면서 무슨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집에 오면, 금메달 축하한다고 기분 좋게 해 주려다, 말도 꺼내기 전에 큰소리가 나와 상장이나 금메달을 보지도 않았다.
서로 말도하지 않으며 냉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이상 계속되었다.
상장이나 금메달을 거실에 펴놓고 있으나 나는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귀국 하자마자 화를 내는지 알수가 없다.
남편을 두고 4일씩이나 외국에 갔다 왔으면 식사하는데 불편은 없었느냐고 주부로서 미안한 감이 있어야 하는데 적반하장으로 남편을 주눅 들게 하는 행동이 밉상머리 십다
현명한 막내누이
우리 집 5층 베란다 공사를 하는 바람에 5층에 사는 우리 부부는 잠시 공사할 동안 이사를 해야 했다.
3월 한 달 동안 살아야 할 방을 찾는데 여러 궁리를 했다.
근처의 원룸을 얻을까,
아니면 수원까지 가서 작은 어들 집에 얹혀 살까,
또는 압구정 누이 방을 하나 빌릴까,
여러 각도로 생각을 하다 가까운 누이 집을 선택했다.
누이가 짐은 가져오지 말고 몸만 오라고 하여 집사람이 안 간다고 하였다.
누이가 무슨 말이냐고 꼭 와야 된다고 하여 이불보따리와 식기, 음식물을 갖고 압구정 현대아파트 91동 천육 호의 누이 집에 건너 방을 쓰기로 하였다.
우리 집에서 전철 한 정거장 거리라 아주 편하고 좋았다.
누이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 재건축 대상이고 집 설비는 노후하고 구식이지만 사는데 는 불편이 없고 교통이 좋고 문화 인프라가 잘되어 있어 누이가 여기를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누이 혼자 살기에 우리부부와 셋이서 같이 식사하고 한집 살림이 시작 되었다.
식사는 집사람이 차리고 누이는 보좌하는 정도다.
누이는 해주는 밥을 먹어보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한다.
누이의 냉장고를 보니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양념 조리장을 보니 약 창고 정리해 놓은 것 같다.
마늘 멸치 고추 가루 깨를 비롯하여 그 여러 가지 양념을 말리고 갈아서 분말로 하여 양념 통에 넣고 뚜껑위에 하나하나 이름을 써 놓아 쉽게 찾아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해 놓으면 찾기 쉽고 사용하기 편해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대단한 생활 아이디어다.
팔십이 넘은 노인이 혼자 살며 생활하는데 미흡한 점이 하나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반찬 만드는 법이나 요리하는 프로를 보면 요점을 정리하여 메모를 하고 실천을 한다.
건강관련 정보도 듣고 발차기나 눈 비비기 등 생활건강법을 매일 실천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팔십 넘은 노인이 아직도 건강하다.
생활의 편리함에 따리 살림살이를 잘 배치하고 조리하는데 실용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잘 할 수 없는 살림살이다.
집사람과 성질이 비슷한 면이 많은데도 충돌하지 않고 잘 지낸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는 항상 견원의 사이 인데도 집사람과 막내 누이는 예상을 뒤 업고 사이좋게 잘 지낸다.
문화쎈터에도 같이 잘 다닌다.
문화쎈타에서도 자매도 아닌 시누올케가 같이 사이좋게 붙어 다니는 것을 보고는 놀란다.
압구정 노인정이나 문화쎈타에는 누이가 매일출근을 하고 문화 센터의 강좌는 거의 다 듣는 편이다.
특히 열심인건 영어 강좌인데 옛날 못한 공부를 보완하려는 듯 몇 년 동안 안경 쓰고 옛날 콘사이스에서 단어를 찾는 것을 보면 그 성의를 알아볼 수 있다.
여태껏 공부한 것을 일자별로 모아 두고 복습도 한다.
가르치는 영어선생이 놀랄 정도다.
민요에서 장구 가요 등 문화쎈타는 누이의 즐거운 놀이터다.
미술 스케치에도 실력이 돋보인다.
둘이 옷도 지을 줄 알아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사와서 같이 본을 뜨고 옷을 만든다.
같이 화사한 옷을 한 벌씩 만들어 누이는 입고 문화쎈타에 가서 자랑을 한다.
물론 노인들한테서 감탄사가 나온다.
누이나 집사람이나 이제 옷을 집에서 만드는 일에는 프로급 수준에 올랐다.
누이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동안 집사람은 나에게 잘한다.
집에서 둘이 있을 때 보다는 시누이가 있으니 더 잘하는 것 같다.
나는 세면장의 장신구를 이것저것 교체해주는 일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노인 셋이 집에 붙어있지 못하고 서로 할 일이 있다고 매일 나돌아 다닌다.
나는 친구들 모임에 열심히 쫒아 다니는 것을 누이에게 보여주는 꼴이 됐다.
나는 누이가 살림살이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추측하는 고리타분한 노인이 아니고 현명하게 살림을 잘하는 누이를 새삼스러이 보고 감탄을 하며 이제 누이의 생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막내 누이가 이렇게 현명한 줄은 이번에 같이 살면서 알게 되었다.
2018년 2월 22일날 누이 집에 가서 3월 31일까지 한 달이 넘게 있었다.
4월 8일에는 리모델링한 우리 집에 막내 누이를 초대하여 집도 보여주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고교 동창 문집
나는 생각나는 대로 쓴 나의 인생기 란 회고록을 쓰고 주위에서 많은 시선을 받았다.
군 동기생 회장시절 임관 50주년 기념으로 질풍 이란 동기생 문집을 냈다.
이 문집은 선후배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회장 시절 동창회 문집을 내자고 친구들이 제안을 해 나는 책을 내기 위해서는 무척 고생을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제일 중요한 원고를 동창들이 잘 쓰지 않을 것이다.
원고를 쓴다하여도 노인들이라 수집하기가 힘들다.
동창회의 카페도 활용하는 사람이 댓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 익숙지 않아 지금 배워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며 배울 의지들이 적다.
경비도 문제지만 편집위원들의 고생은 해본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그래도 책을 써본 친구들이 한번 해 보자고 한다.
그래서 동창 문집을 시작하기로 하고 진행하는데 진척은 없이 시간만 흐른다.
동창회 사무실 아래층에 도도출판사가 있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나의 임기가 끝나고 신임 어회장이 자기는 동창회 입장에서 문집을 못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급기야 집필위원이 모여 문제 해결방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동창회 운영이 아니라 개별 접촉하는 방법을 취하며 동아리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밀어도 힘든데 분파되어 움직이게 되니 힘은 곱절로 힘들게 되었다.
동아리 회장으로 이희준이 선정되고 김기명이 총 보좌하고 출판사 도도가 총대를 메었다.
원고가 잘 들어오지 않으니 카톡에 올라오는 글과 댓글을 가미하여 부족한 원고를 메우기로 하였다.
총 350페이지 정도는 만들어야 된다고 내가 말 하였다.
책 제목은 감성과 지성과 인성을 뜻하는 감지인 으로 하고 표지글자는 전국 서예대전에서 상을 받은 최종건이 썼다.
책 원고의 모자란 것은 도도가 댓글을 모으고 각색을 하여 500페이지나 되었다.
인쇄비 5백은 동창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충당이 되었다.
1000부인쇄하여 500부는 매출로 출판사가 맡고 500부는 책 발간에 찬성을 했던 반대를 했건 모두 한권씩 주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19일 송파농협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발간된 책을 보고는 모두 만족한 모습이다.
감지인에 대한 나의 소고
(카톡에 올린 나의 글)
우리 동기 동창회 주관으로 책 한권이 발간하게 되었다.
책 제목은 덕수 49 동창이 아니고 감성과 지성과 인성을 따서 “감지인“ 이라고 명명하였다.
동기동창이 모여 책 한권을 발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며 여타 동창이나 타 학교 동창들도 문고를 냈다는 말을 들어보기 힘든 희소가치가 있는 역작이다.
내가 회장 시절인 2017년도에 동창 몇 명이 모여 동창회 문집을 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내가 문집을 내는데 힘든 점을 지적하며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첫째 문집을 내는데 필수요건인 원고가 몇 편 안 들어 올거다.
둘째 문집을 개인 구입하려면 돈 내고 살 동창이 거의 없다.
셋째 원고를 편집하려면 출판사가 협조를 하겠지만 편집위원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다.
동창회에서 자금을 대 준다고 하여도 제대로 된 책 한권 내기란 말 같이 쉬운 것이 아니다.
동창 회보도 아닌 책을 동창회에서 발간하는 것이 쉽지는 안으나 우리 동창엔 책을 몇 권 발간한 친구도 있고 문필실력이 뛰어난 친구도 있으니 한번 해 보자고 의견을 모아 동창회에서 책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동창회 문고를 만든다고 해놓고 시간은 흐르고 결실은 없고 지지부진할 때 다크호스로 도도출판사 이사장이 나타났다.
우리 노인들 하고 사고방식도 틀리고 문장력도 틀리고 진행방법이 틀리니 구세대인 우리는 도도한테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해가 넘어 금년에 새로운 회장이 선출되어 신임회장 주관으로 책이 발간 될 것으로 생각하고 기대했다.
신임 어회장은 동창회 입장에서 책을 발간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책을 발간하기위하여 준비하든 동창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어떤 방법으로 헤쳐 나가야 되는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동창회장이라고 하면 동창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면 동창회차원에서 협조하고 도와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동창들에게 찬물을 끼었고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편집위원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방범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기로 하였다.
동창전체에게 원고 청탁을 요청하는 방법을 선별하여 요청하게 되고 원하지 않는 동창은 후 순위로 미루었다.
감지인 동아리 회장은 이희준이 맡고 김기명이 보좌하고 편집위원이 앞장서기로 하였다.
동창들에게 출판 후원금을 받아 1천부 출판비용은 충당하게 되었다.
원고가 모자라다 보니 도도가 우리 동창 카톡에서 고르고 댓글을 모아 새로운 형식의 줄거리가 형성되게 되었다.
우리 동창들만의 원고로 알차게 동창들의 책을 엮어 보려는 나의 뜻하고는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도도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도도는 감지인 이라는 타이틀을 이용하여 학교 봉사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대대적인 홍보에 나설 계획이다.
그러기 위하여 출판기념회를 12월 19일 모교의 협조를 얻어 모교 세미나 실에서 재학생 몇 명을 참석시켜 덕수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협동조합 1순위에 올려놓고 전국적인 홍보를 하려는 것이다.
책이 출판되면 동창들이 이 책 발간에 찬동을 했던 반대를 했던 모두에게 한권씩 선물로 줄 것이다.
책이 출판되기까지 관여한 모든 동창들과 도도의 노고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국악 지도사증
지도사증;
집사람이 4월 7일 사단법인 한국다문화 예술교류협회의 전통국악, 음악교육 지도사 자격 평가원에서 시행하는 제7차 국악실기시험 1급에 응시하였다.
경기민요 부문에서 국악교육 지도사 1급 자격을 취득 하였다.
국악을 배우러 여기저기 쫓아다니더니 정식으로 전통국악 교육지도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국악을 한다는 떳떳한 자격증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연수교육;
자격증을 따니 연수 교육을 해야 한단다.
연수를 받으러 11월 17일 경기도 가평으로 1박2일 연수교육을 떠났다.
2018년 11월 18일 한국다문화 예술교류협회 전통국악 음악교육 지도자 자격 평가원에서 시행하는 제4차 국악실기 및 이론 연수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연수를 하였다고 경기민요 1급 수료증을 받았다.
집사람은 국악 교육을 시킬 일도 없을 텐데 나는 국악을 제대로 했다는 표시로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그래도 국악을 한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1급 자격증을 땄으니 대단하고 수고 했다.
우수상;
집사람은 11월 3일은 한국 다문화예술교류협회가 주관하는 제3회 세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민요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경연대회를 횡성 여주 성동 등 참석하더니 결국 상장을 하나 타왔다.
재롱잔치;
11월 17일은 손자 순용이 재롱잔치가 수원 경기도청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다.
같이 가기로 했다가 집사람이 국악 연수를 가기 때문에 나 혼자 가게 되었다.
나는 이날 새벽에 덕수 롯데호텔 포럼에 참석하고 점심에 금토동 익위공 정익공 세향에 참석하고 저녁에 재롱잔치까지 참석하느냐고 바뿐 하루일정을 보냈다.
국악 한마당
집사람이 남한산성 입구 국악 학원에 몇 년 동안 다녔다.
학원 원장이 이수연이라고 국악계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인 모양이다.
서울 전통문화 예술 진흥원 성남지부의 이수연 예술단의 단장이란다.
학원에서 큰 잔치를 한다고 학원에 열심히 나가 연습을 한다.
4월 20일 성남시청 온누리 홀에서 국악 한마당을 하는데 명칭이 꽃향기에 실려오는 우리소리다.
이수연 예술단에 속해 있는 모든 문하생이 총 집합하여 국악 한마당에 참여하는 것이다.
저녁에 하는데 집사람은 아침부터 한복을 갖고 성남으로 향하였다.
초청장을 받아 우리식구들은 혁범네 식구와 혁인, 혁란이가 성남시청 강당으로 갔다.
집사람을 비롯해 예술단원들은 한복을 입고 화장은 짙게 하였다.
화장이 너머 짙어 무섭게 까지 느껴진다.
무대 화장은 이렇게 해야 되는 거란다.
이런 화장을 하기 위하여 몇 시간 씩 한 것이란다.
짖게 화장을 한 노인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강당에서 사진 찍느냐고 야단인데 정말 가관이다.
머리는 쪽을 짓고 한복은 화려하다.
두 시간 동안 공연이 이루어지는데 프로그램 따라 집사람이 무대에 나온다.
팀 중에서 집사람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맨 마지막엔 전 단원이 나오는데 무대가 꽉 찬다.
공연이 끝나고 집사람과 식구들이 다 모여 분당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혁란이는 군인간 아들이 휴가를 나와 같이 참석하였다.
이런 때 조카들이 이렇게 참석해 주니 고맙게 느껴진다.
집사람은 화장도 안지우고 쪽을 진채로 옷만 갈아입고 친구인 미영이 어머니 상에 참석하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미영이 시집식구들이 이런 차림의 집사람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베네룩스 여행
몇 년 만에 패키지 여행으로 서 유럽의 베네룩스를 다녀왔다.
장비를 사가지고 지지궁상을 떠는 바람에 마음이 불안하여 그 잘 다니던 여행을 이런 일 저런핑게로 가지 못하였다.
일 년에 5개국씩 다니던 그 열성이 그립다.
이번에 베네룩스를 다녀오니 여행의 허하던 마음이 좀 풀어진 것 같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려 베네룩스를 보고 파리공항에서 귀국하는 일정이다.
베네룩스가 그렇게 잘 사는 나라인줄은 몰랐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유럽의 알짜배기 국가들이다.
이번 여행으로 부부동반 69개국을 여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베네룩스 여행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려 베네룩스를 관광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출국하는 1주일 패키지여행이다.
인천공항에서 11/21일 출국하여 독일 도착하니 thanksgiving day다. 자고나니 Black Friday다.
X-mas가 가까워오니 온 도시는 X-mas tree 장식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어 휘황찬란하다.
상점들은 50% Sale 이라고 손님 끌기에 정신없으니 여행일정은 잘 잡힌 것 같다.
브르셀에 가니 영사관에서 테러에 의한 여행주의보가 문자 메시지로 온다.
파리로 향하는데 텔레비전에서 노랑조끼 데모대가 파리에서 난동을 핀다.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니 파리에서 노랑조끼가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휘졌고 루브르 박물관은 페쇄 했다는 보도다.
여행가서 데모대에 쫓겨 구경도 못하고 올 뻔 했다.
쁘띠 프랑스.
프랑스의 접경지 스트라스부르에 오니 고딕양식의 노들담 대 성당이 있다.
파리에만 노들담 대 성당이 있는 줄 알았더니 큰 도시에 가는 곳 마다 노들담 대 성당이 있다.
쁘띠프랑스에 가니 예쁜 건축물이 운하에 연결되어 줄지어 서 있다.
작은 프랑스라고 하더니 작지만 꼭 보고 갈만한 추천 관광 명소다.
중세 프랑스는 성이 문란하여 그 여파로 성병인 매독이 만연하게 되고 사회의 문제로 대두 되었다.
그때에 레오날드 다빈치가 자비로 한적한 도시인 알자스에 본격적인 매독을 치료하는 자선병원을 세우고 치료에 나섰다.
매독병원이 이름이 나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와 살게 되니 인파가 몰리고 이들이 기거할 수 있는 집과 음식점, 구두방등이 자연히 생겨나게 되고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도시가 쁘띠 프랑스다.
룩셈부르크.
소국인 룩셈부르크에 가니 국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GNP도 우리나라보다 5배나 많은 경제부국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지어진 고딕성당인 노들담 성당이 있다.
건축양식이 10세기에 로마네스크에서 12c 고딕 양식으로 바뀌면서 최초로 지어진 성당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협곡위에 세워진 룩셈부르크는 협곡을 가로지르는 아돌프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소국이라고 우습게 알았던 내가 부끄럽다.
룩셈브르그는 6.25 참전국가로 도시가운데 참전 기념비가 있다.
아헨.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에 아헨 대 성당이 있다.
이 아헨 대 성당이 독일에서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당 근저리에는 크리스마스 선물가게가 몰려있고 기존 상점에는 50%세일에 나도 스웨터 하나 사서 여행 중에 입고 다녔다.
명물이라는 뜨거운 핫 와인을 맛보았다.
와인에 신 레몬 액을 넣고 와인을 뜨겁게 덮인 것이 핫 와인이다.
6유로를 주니 한잔을 주는데 먹고 컵을 반환하니 3유로를 반환해 준다.
마트에서 카트를 빌리고 반환하는 기분이 든다.
퀼른.
퀼른 대성당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며 600년 동안 지어진 건물이다.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에 100년 공사로 짖는 성당은 여기에 버금갔으면 좋겠다.
독일의 세계문화유산인 이 퀼른 대 성당은 유럽의 여타 성당과 같이 성당 주위로 상점이 줄지어 있고 독일의 대 도시답게 시민과 관광객이 뒤섞여 혼잡하다.
암스텔담.
해양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던 네델란드의 풍차마을로 갔다.
풍차는 구시대의 유물로 지금은 암스텔담 북쪽의 잔제스칸스에 관광용으로 몇 기가 남아있어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암스텔담의 국제공항은 유럽의 허브공항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암스텔담 기차역도 그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암스텔담역 광장 앞으로 쭉 뻗은 대로가 암스텔담의 주요 명품거리다.
최대 번화가인 담 광장은 옛날 번영하던 네델란드 중심축이다.
지금은 없어진 상인들의 연합동맹인 길드 건물 냄새가 난다.
브르셀.
EU연합 본부가 있고 NATO본부가 있는 벨기에 수도 브르셀에 도착했다.
부르셀의 그랑팔라스 광장에 도착하여 광장을 둘러보고는 감탄을 하였다.
빅톨 유고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세계문화유산인 그랑팔라스 광장은 은광장이라고도 한다.
시내 상점에는 초콜릿 상점이 동대문시장의 옷가게 같이 많다.
사각형 광장에 공공건물과 일반건물이 혼재해 있는데 야경은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오줌싸게 동상.
그랑팔라스 뒤편에 벨기에의 명물인 오줌 싸게 동상이 있다.
어린아이가 오줌을 누는 이 오줌 싸게 동상이 브르셀의 시민이자 마스코트란다.
세계에서 3대 허무관광 이란 것이 있다.
첫째가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둘째가 부르셀의 오줌싸게 동상.
셋째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너머나 유명하여 관광객이 몰리는데 막상 가서 확인 하곤 실망한다는 것이다.
그랑팔라스 오줌싸게 통상이 있는 광장 반대편에 오줌 싸게 소녀가 있다.
오줌싸게 소녀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오줌 싸게 동상을 보는 관광객의 0.001%정도다.
서방 열강만 쳐다보다 벨기에를 보니 유럽속의 벨기에는 알짜배기 국가다.
부루헤
북쪽의 베니스라 불리는 부루헤를 안개낀 아침에 운하를 끼고 건물을 보니 환상적이다.
마르크트 광장에 가니 중세의 광장모습이 그대로 있고 크리스마스 준비하는 상점들의 추리까지 겹치니 사진 한 장 찍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난다.
여기도 노들담 대 성당이 있는데 미사 시간이라 못 들어가게 하여 미켈란제로가 그렸다는 그림을 볼 기회를 놓쳤다.
운하를 통하여 장사를 해서 부촌을 이룬 부루헤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에펠탑.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 파리 전 시가를 야경으로 보니 5백 년 전의 시가와 지금의 시가가 똑같아 나도 5백 년 전 사람이 본 그 시가지를 똑같이 보고 있다.
르브르에 가서 모나리자도 보고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을 거쳐 쇼핑쎈터로 끌려갔다.
이번 여행으로 유럽속의 베네룩스를 다시보고 고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밤새 열 시간 동안 꼬부리고 앉아 비행기타고 갈 생각을 하니 꾀가 난다.
우습게 알았던 감기
몇 년 동안은 감기에 걸리지 않고 겨울을 보냈다.
감기가 와도 콧물 흘리고 기침 조금하는 정도로 끝였다.
감기는 약이 없고 며칠 지나면 자연히 낳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금년에는 감기 예방주사도 그린 내과병원에서 맞은 상황이니 감기에 대해서는 근심을 하고 있지 않았다.
12월 5일 권사장에게 부탁하여 베란다 지붕 넥센에 판넬을 씌우는 공사를 했다.
지붕에 판넬을 올리는 것을 우습게 알고 마당에서 지붕으로 판넬을 밧줄로 올리는데 밧줄이 벗겨져 판넬이 땅으로 떨어졌다.
옆집 주차해 있는 벤츠 옆에 떨어져 벤츠에 상처를 입혔다.
공사비는 배보다 배꼽이 크게 생겼다.
오후에 소형 크레인을 불러 판넬을 지붕으로 옮기고 베란다 지붕을 씌웠다.
나는 베란다 지붕 판넬 공사를 하는데 일하는 사람의 보탬은 되지도 않지만 주인이랍시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오르락내리락 했다.
아웃도어 상의를 입을 것을 등한히 하여 저녁에 몸이 으슬으슬 추워오기 시작했다.
아웃도어를 입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었다.
그래도 뭐 약한 감기 기운으로 인정하고 초기에 조치를 하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밤에 자고 일어나니 아침에 기침이 시작하며 가래가 끌었다.
우습게 알은 감기가 조금 더 심하게 오더니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사람과 대화를 하기 곤란할 지경이다.
닷새 만에 병원에 가서 5일분 약을 받아 왔지만 차도가 별로다.
싸우나 에 가서 땀을 빼도 감기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집사람도 따라서 감기가 왔다.
집사람은 병원에 가서 내가 자기에게 감기를 옮겼다고 원망하며 약을 타 왔다.
금년에는 병원에 감기손님이 유난히 많이 온단다.
나는 보름정도 지나니 거의 완치단계인데 집사람은 아직도 콜록콜록 이다.
우습게 본 감기가 금년에 나를 보름간이나 괴롭혔다.
옆집 사무실 신축
우리 집 옆집인 11-29 임필영이 집을 팔고 새로 온 주인은 살지 않고 사무실을 짓는다고 한다.
공사를 맞은 사장은 권태경이라고 종씨다.
우리 담을 허물고 공사를 하겠다고 하여 허락하였다.
임사장 집 때문에 쌓은 옹벽이니 한전무쪽의 옹벽도 허물라고 하였다.
담 때문에 공사하기 곤란한 문제를 내가 허락해 주니 매우 감사하다고 한다.
3월 19일 공사를 시작한다고 하더니 집안에 상을 당하여 4월 30일 날 착공을 하였다.
임사장 집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이고 우리 집 쪽의 길만 터져있어 막다른 집에 다른 집 하고는 담의 높이가 한 층이 더 넘는다.
사무실을 신축하는 데는 이 층고를 활용하여 지하2층으로 설계를 하고 5층을 지으니 7층 높이라 1층이 우리 집 3층과 비슷하다.
지하층이라 옆집과 간격을 하나도 띄우지 않아도 된단다.
지층으로 설계가 나지 않았으면 담에서 1미터 떨어져서 집을 지을 텐데 담에 붙여서 지으니 우리 집만 답답하게 되었다.
설계 전체가 우리 집만 불리하게 되어 있다.
우리 집 담도 허물게 하면서 집을 짓게 해주었더니 우리 집만 손해를 보게 되었다.
구청에 가서 우리 집과 같이 대문이 우리 집 대문과 높이가 같으니 지층으로 볼 수 없다.
전체 5층으로 재설계 하던지 담에서 1미터를 띠워달라고 상담을 하였다.
아니면 지하 1층에서 불이나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 외부로 대피할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이것은 소방법에도 어긋난다고 항의 하였다.
1층에서 외부로 나갈 수 없는 집이라면 1층에 대문은 쓸데없이 왜 내었느냐,
알면서 설계하였다면 설계사무소가 사기 친 것이고,
이것을 모르고 구청에서 허가해 준다면 구청의 직무유기다 라고 어필하였다.
공사는 계속 진행되면서 공사장에 오는 차량들은 우리 집 주차장을 자유롭게 쓴다.
우리 집을 지을 때는 임사장을 비롯하여 앞집의 변씨 아줌마를 주축으로 동네사람들이 못살게 굴어 나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이번 공사에 이웃집으로 잘 협조하려고 하였더니 사람 꼴만 우습게 되어가는 것 같다.
더구나 우리 집 지을 때는 동네가 벌떼같이 덤비더니 이번 공사에는 이웃들이 우리 집 눈치만 본다.
동네에서 보기에도 우리 집이 제일 피해를 보니 우리가 어찌하나 관망하는 중이다.
처음 현장소장은 협조적이고 우리에게 잘 할려고 애쓰고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협조해 주는데 소장이 바뀌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11월까지 공사를 끝내겠다고 하더니 내년1월에나 끝날 것 같다.
집의 경계선은 한전무집의 벽 경계선에 맞추어 일직선으로 하라고 하였다.
옛날 경계선과 현재의 경계선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다.
철재가 튀어나와 경계에 맞추어 제거하라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판넬로 벽을 마감하겠다고 하더니 밖으로 벽돌을 한줄 더 쌓았다.
제거한다던 철제도 한술 더 떠서 철판으로 덮고 마감을 하였다.
소장한테 사장과 같이 약속을 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열을 올리니 아무 말도 못한다.
사장은 한전무쪽 보완 옹벽을 제거해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안했다고 오리발이다.
일 년 동안 공사에 협조해 준 것이 결과가 내가 병신이 된 꼴이다.
집사람이 1층에 환기통이 우리 집 3층으로 들어오니 제거하던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달라고 구청에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