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냄새' '코고는 소리' 가득한 밤으슥한 야음 틈타 몇몇은 술보급 떠나고
[속보, 사회] 2002년 05월 14일 (화) 10:33
녹색순례 특별취재팀: 이혜영, 박경화, 이유진, 정명희 기자
파주시 파주5리 마을회관 2층, 노곤한 몸 뒤척뒤척 잠들어 있는 방안에 어김없이 아침햇살이 스며들었다.
6시, 보통때엔 아직 잠속에 파묻혀 있을 시간. '부적부적, 찌지직' 침낭을 접고 매트리스를 말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우째 이런 일이? 여자 숙소 중간에 누워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아니 이게 누구야?"
모두 시선집중, 그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머리를 긁적이는 하모 씨의 늠름한 아들.
"이상하다. 어제 분명 남자 숙소 내 배낭 위에다 안경을 벗고 잤는데…."
사태수습이 곤란해진 하모 씨 아들. 진정 어젯밤 술탓이란 말인가? 죄 없는 소주에게 원망이 돌아가야 하다니.
해마다 떠나는 순례의 가장 큰 묘미는 규칙을 어기고 여는 몰래 술자리. 어두컴컴한 으슥한 곳에 신문지를 깔고 몇몇은 술 보급 떠나고 안주를 챙기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들킬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주 맛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술맛이 아니라 규칙을 어기는 묘미를 즐기는 것이라고나 할까? 어젯밤에도 술자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둘 포섭하여 공범자로 만들다보니 저녁잠이 없는 대부분의 순례단이 대장 눈을 피해 술자리에 동참하고 말았는데 우리의 하모 씨 아들만이 정신을 놓고 말았던 것. 말 그대로 아름답지 못한 '불미스러운 일'이지만 녹색순례니까 한번쯤 넘어가는 것도 우리의 정서.
몇몇이 잠자리를 정리하고 짐정리 하는 동안 오늘 밥 당번들은 쌀 씻고 된장찌개 끓이느라 뻐근한 몸 어루만질 겨를도 없이 종종걸음이다. 6시에 일어나 7시 반에 목적지로 출발해야 하니 시간이 빠듯하기만 하다.
다섯 조 사십여 명의 밥을 수도꼭지 두 개만 바라보며 지어야 하니 북새통일 수밖에. 그나마 이층 주방의 문의 잠겨버렸다. 누군가 실수로 손잡이를 누른 채 닫아버린 모양이다. 식칼 두 개로 열쇠구멍 쑤시고 문틈을 쑤시고, 에이 안되겠다 만능 칼, 손톱깍기, 자기네 집 열쇠까지, 모든 쇠꼬챙이 다 모여봐라.
그래도 문은 꿈쩍도 하질 않고 전자제품 수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대원들이 동원되고 한 쪽에선 아슬아슬하게 벽에 매달려 주방 창을 열려고 하고. 한깟 애가 타오른 뒤에 '철컥' "우와 열렸다".
이런 모습 또한 녹색순례의 낯설지 않은 하루 풍경이다. 하긴 예전엔 불도 안 들어오고 물도 안 나오는 폐교의 전선을 잇고 수도를 연결해 숙소로 탈바꿈시킨 적도 있었다.
마당에선 몸풀기 체조를 하는 사람, 몸풀기보다 아픈 발 물집을 짜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듯 바늘 하나씩 들고 네 발바닥, 내 발바닥 들여다보며 연구하는 무허가 시술모임, 수건 목에 걸고 바지춤을 잡고 동동거리는 화장실 긴 줄, 일찌감치 마을 둘러보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나홀로파까지. 아침은 이렇게 다양한 얼굴로 시작된다.
고소한 밤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그릇 헹구고 오는 동안 아차, 탄 냄새! 급히 불을 줄여보지만 밥에는 이미 탄 냄새가 솔솔, 오늘도 참아야 하느니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요, 배움이요, 고행이지.
"우리 모둠 밥 먹으러 빨리 와요."
"김치 받아와요."
"밥 다 됐어? 소금간을 더해야지."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며칠 동안 노련해진 순례대원들의 아침상이 방이며 마당에 펼쳐진다. 낮에 먹을 도시락도 싸고 물병에 물도 채우고 미수가루와 행동식도 잊어선 안되지. 밥 준비는 한 시간, 식사시간은 길어야 10분. 먹는가 싶더니 벌써 빈 그릇 들고 숟가락 빨면서 다른 조 반찬을 기웃거리는 남성동지들. 인정 많은 한국인이 어찌 그냥 돌려보내리 누른 밥과 김치국물이라도 한 입 떠서 먹여 보내야지. 우린 이렇게 공동체를 배우지.
"순례 5일째인데도 쓰레기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절대 나와선 안됩니다. 내일도 확인하겠습니다." 순례단 정연경 대장의 지적.
40여명이 함께 자고 먹고 걷는 생활이다 보니 규칙도 많다. 쓰레기 많이 만들어내서도 안되고 분리배출 확실히 해야 하고 지정된 시간, 장소 이외에 술 담배 안되고, 샴푸나 크린싱 제품 사용해선 안되고, 물은 받아서 써야 하고, 밥은 그릇 하나로 공양하듯 먹어야 하고 등등.
그래서 순례기간 대부분이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조금이라도 자연을 덜 괴롭히는 것 역시 순례의 행동지침. 순례가 끝나면 이런 습관을 계속 지니도록 하는 것 역시 녹색순례의 의미 중 하나다.
버스 타고 잠시 이동하는 동안 하루 계획과 함께 알아야 할 것, 고쳐야 할 것에 대해 대장과 부대장, 순례 지원팀들이 번갈아 이야기한다. 하루를 산다는 건 이렇게 복잡하고 오묘한 일일지니….
순례 첫날 스산하게 쏟아지던 비도 그치고 며칠 사이 바싹 말라 길에는 온통 흙먼지 투성이다. 하얀색 순례 티셔츠는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먼지 지도를 그리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사람, 선글래스로 멋을 낸 사람, 긴 바지, 짧은 바지, 깃발을 든 기수까지 한 줄로 서서 하염없이 걸어만 간다.
사진을 찍는 일명 '찍새', 비디오 촬영 찍새, 디지털카메라 찍새, 순례단 앞뒤를 분주히 달리며 셔터를 누르는 데 여념이 없다.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벌이는 노란 끈 묶기와 돌 쌓기, 농로를 달리던 미군탱크를 멈추게 했던 장면에서 그들의 발걸음은 더 분주해져 덩달아 순례단의 표정에도 비장함이 흘렀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댄 논둑길을 걸으며, 미군기지 철망을 따라 걸으며 삼삼오오 재잘거리던 기운도 사그라들고 모두 무아지경, 말이 없다. 언제나 깨달음을 얻는 시간은 가장 극한의 순간, 번뇌가 사라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마음일 열리는 순간이니, 미군기지 녹색순례의 참의미도 이 순간 가슴으로 들어오는 때이리라.
밭둑에 잠시 앉아 쉬는 시간의 모양도 가지각색,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 벌렁 드러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이, 서로 어깨를 주물러주는 안마 조, 화장실 찾기에 바쁜 시람, 화장실은 무슨! 풀숲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 그 순간을 놓칠새라 달려드는 촬영기사, 모두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만 뽀얗다.
먹고 자고 걷는 단순한 생활에서 느는 것 오직 식욕뿐, 밥과 김, 김치뿐인 점심 도시락도 맛있게 꿀꺽, 오늘은 장을 보고 숙소인 마을회관을 섭외하면서 순례단을 위해 동분서주 지원하는 지원팀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돌렸다.
"우와!" 모두 휘둥그레진 얼굴로 달려들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잘 먹고 잘 걷자.
순례기간 동안 불문율이 있으니 그것은 발냄새와 코고는 걸로 시비 걸지 않기. 냄새야 아무리 깔끔한 사람이라도 일주일 넘게 간단한 목욕도 할 수 없는 때이니만큼 도리가 없는 법, 옆 사람의 발 냄새는 무조건 참자. 그리고 지친 몸 뒤척이기도 힘든 때니 코 고는 소리도 너그러이 참자, 가로로 세로로 틈새마다 침낭을 펴고 각각 제 모양으로 잠든 순례단, 캐캐한 발냄새와 나직히 코 고는 소리가 가득한 밤.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