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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대한 범솥말의 회고.
설악행각 6일, 산행4일차, 백담사~봉정암
설악행각(雪嶽行脚)6일차, 산행 4일차
백담사(白潭寺)에서 봉정암(鳳頂庵)까지
노산선생 일행은 백담사에서 하룻밤을 잡니다.
백담사에 대해서는 내력을 열거한 것이 전부이며 백담사의 지주 스님이나 그밖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적지 않았습니다.
백담사는 설악의 깊은 숲 속으로 10월 초이지만 초겨울 날씨인 듯 싸늘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서리 바람을 운운하며 10월 5일, 제6일차 4일차 산행을 시작합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영시암(永矢菴)
노산선생 일행은 아침 일찍이 이 백담사를 떠나 어제 석양에 내려오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오릅니다.
그리고 수렴동계곡을 따라 오르며 어제 대승령에서 흑선동으로 내려선 길을 보며 거슬러 오르다가 목비가 있는 곳에 닿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비(木碑), 요즘으로 방향이나 거리를 나타내 주는 이정표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좌측은 늘목고개를 넘어 외설악으로 빠지는 길이 되고, 우측으로는 영시암(永矢菴)이 적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름이 등장합니다.
「늘목고개」라~
늘목고개는 길골을 뜻함입니다.
저는 백담사에서 쌍폭까지는 지난 해 9월 인문산행을 하며 조선시대 이곳을 답사한 선비와 삼연 김창흡의 발길을 따라 걸은 적이 있습니다.
삼연선생의 글에 따르면 백담사-영산담-황장폭-길골로 이어지는데 길골은 노산선생께서 늘목고개라고 기록한 지점인데 노산선생은 영산담은 길골이후에 있다고 기록하고 황장폭은 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잠시 오래전 부터 여겨왔던 영산담과 황장폭을 보고 갑니다.
<오래전 부터 영산담으로 알고 있던 곳인데 설악행각에서는 아니라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설악을 유람하고 쓴 글을 보면 영산담은 황장연 가기 전, 그러니까 백담사에서 제일 가깝게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곳을 이제까지 영산담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후 설악행각에서 나오지만 노산선생은 길골과 곰골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60년 한찬석이 쓴 설악탐승인도지에도 '영산담을 지나 약간 돌아 들면 또 하나의 소담과 소를 볼 수 있으니 물은 괴히 깊지 않으나 장이 길고 규모가 크며 물 바닥이 누렇게 보이므로 황장폭이라 부른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황장폭포 이전임을 암시하고 있습입니다.
<황장폭포, 황장연의 풍경입니다.>
노산 선생께서 백담사를 떠나 맨 처음 기록하고 있는 곳이 늘목고개인데 노산선생의 기록에 없지만 늘목고개 가기전에 황장우, 황장폭포, 황장연이 있습니다.
구, 백담사대피소를 지나 7분을 가면 등산로는 계곡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는 경치가 뛰어난데 폭포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폭포가 있는데 이곳이 황장폭포이며 폭포 아래 넓은 담은 황장연, 그리고 황장우는 모퉁이 바위를 말합니다.
곡운 김수증은 「유곡연기」에서 수렴동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서며 ‘황장우에 이르렀다, 못과 여울은 기이한 장관이다.‘라고 기록했는데 이후 삼연 김창흡은 삼촌인 김수증의 발자취를 따르며 이곳에 와서 황장연, 황장우를 확인 했고 이의숙은 곡백운담기에서 황장연이라 운운했습니다.
이러한 사항은 김창흡의 글을 연구하고 아주 여러 차례 답사하고 「설악인문기행」책을 출간한 권혁진 박사의 글에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황장폭포를 막 지나며 흑선동 입구를 보면 길죽한 담을 볼 수 있는데 이복원은 설악을 돌아보고 쓴 글에서 조연이라 기록했는데 바로 말이니 소의 여물통을 뜻하는 구유 또는 구융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구융소라 했습니다.
노산 선생께서도 흑선동 골폭포를 구유소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위치가 서로 다른 곳을 지칭한 것입니다.
다시 늘목고개, 즉 길골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설악 유람기를 보면 길동 또는 길골이라고 기록했는데 설악행각에서는 늘목고개라로 기록하였습니다.>
삼연의 삼촌인 김수증의 글에서 ‘동쪽으로 좁은 길이 나있는데 이곳이 길동(吉洞)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신흥사로 갈 수 있다고 한다.’ 라고 했으니 길동이 곳 길골인데 노산선생은 ‘늘목고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늘목고개라는 이름은 설악행각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 영시암으로 가는 길로 얼마쯤 가노라니, 길 우편으로 맑은 못이 있고 못 아래는 백사장이 보기 좋게 놓였는데, 백사장 가에는 푸른 반석이 기괴한 채로 수 십 명은 앉을만합니다. 담(潭)은 영산담(影山潭)! 안산 봉우리들의 모습이 온통 이 못물 속에 그림자 져 있다는 뜻이라 하거니와, 바위에 올라앉아 물속을 굽어보니 과연 산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사람도 보입니다. |
영산담에 도착해 맑은 물에 비친 안산의 봉우리들과 하늘과 구름과 자신도 물이 비쳐 물속에 있는 듯 한 표현입니다.
영산담(影山潭)!
영산담의 위치는 어디일까?
저는 설악산을 다니며 영산담은 백담사를 지나 황장폭포 가기 전 넓은 담으로 알고 있었으며 설악인문기행의 저자인 권혁진님도 그리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산선생의 글에서 보면 길골을 지나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권혁진님은 사미대라고 부르는 곳을 노산선생은 영산담으로 본 것 같다는 추축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측은 노산선생의 설악행각에서는 사미대라는 명소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미대?
사미대는 이의숙의 '유영시암기'와 김몽화의 '유설악록', 2곳에 사미대가 나오는데 사미대의 위치는 길동에서 영시암 방향으로 가다보면 계곡 가운데 섬이 생긴 곳을 지나게 되는데 섬으로 인해 갇혀 있는 물은 나뭇잎의 타닌 성분으로 갈색을 띠고 있습니다.
갈색 호수에서 5분을 가면 우측 계곡의 거친 물소리가 들리는데, 계곡으로 다가서보면 아주 멋있는 풍경이 펼쳐지는데 계곡 바닥에 높게 암봉이 솟아 있고 암봉 사이로 떨어지는 물은 깊은 못을 만든 명소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사미대인데 설악인문기행 저자인 권혁진님은 사미대가 곧 설악행각에서의 영산담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암튼 노산선생은 영산담에 도착해 맑은 물을 보고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영산담(影山潭) 맑은 물에 저기도 내가 있네
누가 참이온지 어느것이 그림잔지
물 속에 지나는 구름 보고, 웃고 돌아서니라.
영산담을 떠난 노산선생은 영시암으로 발길을 재촉하며 좌측 골짜기를 잠깐 설명하고 가는데 웅정동(熊井洞), 우리말 표현으로 ‘곰이골’이라 부른다고 설명하며 곰이골 안에는 7~8가구가 있다고 하며 곰이골 안에는 경승이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매대, 즉 영산담을 지나 영시암까지 가며 설담당부도, 곰골, 심원사터를 지나는데 곰골만 간단히 설명하고는 주변 산세에 대한 기록으로 채우니 이러합니다.
<곰골 초입의 풍경입니다.>
<곰골을 가로지르는 철다리의 풍경................>
얼마동안 수림 사이와 야전 곁을 지나서니, 조원봉을 남으로 안고 조그마한 청용봉 을 서로 끼고서 산미에 야취를 구유한 곳에 고창한 암자가 섰음을 봄은 물을 것 없이 저 유명한 영시암입니다.
본문을 봅니다.
영시암! 일찍이 삼연 김창흡이 숙종(肅宗) 15년(서기1689)에 아버지 김수항이 죽음을 입은, 이른바 기사년 화변을 치른 뒤로, 세상에 뜻을 끊고 산수를 사랑하여 국내의 명산대천에 그 자취를 아니 미친 곳이 없거니와, 이곳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호산무진(壺山無盡)의 영시암 기(記)에 이른바와 같이, 선생이 영원히 출세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마음을 품었기로, 그 정사의 이름마저 영시(永矢 ; 영원히 맹세한다는 뜻)라 한 것입니다. |
<노산선생께서 찍은 영시암입니다.>
영시암~
영시암은 삼연선생이 수렴동으로 들어와 한계사의 분신이었던 심원사 옆에 백운정사를 짓고 기거하였는데 화재로 소실되자 심원사에 묵으며 조선, 숙종35년인 1709년 영시암을 짓고 거하기 시작합니다.
삼연선생은 이곳에 터를 잡고 6년을 살면서 수렴동계곡과 구곡담 그리고 오세암을 지나 신흥사에 이르기까지 설악을 골고루 답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같이 생활하던 찬모가 호랑에게 물려 죽은 것입니다.
정들었던 영시암이었지만 찬모에 대한 정, 예의로 이곳 영시암을 떠나 수춘산으로 가고 나니 영시암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가 됩니다.
이 후 폐허된 영시암은 황량하기만 했는데 설정선사(雪淨禪師)가 정사를 중건하였고 이후 설정(雪淨)이 이곳에 거하며 이곳을 찾는 선비들에게 따뜻하게 해주자 많은 사람들이 찾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영화는 어디로 사라지고 노산선생 일행이 영시암을 찾았을 때 남루한 차림에 어두운 눈으로 더듬거리며 나와 반겨주었다고 하는데 법명을 물으니 추담(秋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영시암의 본래 터는 어디일까? 하는 점입니다.
현재 영시암의 주지는 현재의 자리가 맞다고, 100%맞다고 주장합니다.
설악인문기행에는 삼연 김창흡의 동생 김창즙이 형을 만나러 이곳을 들렸을 때 영시암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기록을 남겼는데 백운정사에서 3리(약1.2km정도), 계곡을 건너 남쪽, 북향, 괘나 높은 곳에 위치, 서쪽으로 선장봉과 마주봄, 뒤는 조원봉 등등 이를 바탕으로 조사해 본 권혁진박사는 현재의 자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위석격단(危石激湍)의 수렴동(水簾洞)
영시암에서의 추담스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얼마 머물지 않고 영시암을 떠난 듯합니다.
다시 본 문을 봅니다.
영시암의 뒤곁으로 오르다가, 좌로 가는 오세암(五歲菴) 길을 버리고, 우로 숲을 헤치며, 약간 비탈된 언덕을 내려서니, 훤하게 넓은 동천(洞天)이 저 깊은 구름안개 속에다 그 근원을 둔 채, 한번 지극히 화사한 한 구역을 자랑스럽게 열었습니다. 이것이 영시동 웃머리를 이어, 달리 불려지는 수렴동(水簾洞)입니다. 금강산에도 수렴동이란데가 있지요마는 금강에 비긴다면 만폭동(萬瀑洞)과 같은 곳이라, 이 설악에서도 지금부터 오르는 곳이 수석(水石) 경치의 으뜸되는 데라 하는 곳입니다. 어지러이 널린 바위 등성이를 춤추듯이 뛰어 넘으며 한참 오르니 냇바닥 바위와 석벽 사이를 파고서, 기승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터져 나오는 물이 큰 못을 이루어 발길을 막습니다. 절벽 위에 울을 두른 송백림 그늘 아래, 긴 구비 짧은 구비로 돌아 오르는 옥같이 맑은 흐름의 첫 경치로 길손의 막대를 붙들고야 마는 이 못은, 그 생김새 대로 구담(龜潭)이란 이름을 얻었거니와, 이 담이야말로 설악의 심장이라 할 이 수렴동의 첫 문이라 하겠습니다. |
<오세암 갈림길을 지납니다.>
<엷게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수렴동계곡 물이 너무 맑습니다.>
수렴동의 첫 문이라고 대단한 호평이 이어집니다.
영시암을 지나 오세암 길림길에서 우측 길로 내려서 현재는 계곡과 멀리 떨어진 상태로 거대한 절벽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지 않고 우회하여 지나고 있는데 예전에는 길이 어디로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절벽지대와 계곡을 옥류청석으로 호평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을 지나며 발아래 보이는 계곡을 보고 언젠가 계곡을 따라 올라갈 기회가 있는지 생각하고 지나고는 했던 곳입니다.
<구암과 구담입니다.>
그런데 이 맑은 물이 형상대로 구담이라 적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구담과 구암은 그리 멋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구담을 잘 못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담은 본문에서 한 차례 나오고 더 이상 구암은 거론되지 않고 지납니다.
구암과 구담을 지나면 유서 깊은 유홍굴이 있습니다.
수렴동계곡과 가야동계곡이 만나는 합수곡 아주 가까운 곳에 바위가 사람인 '人' 자와 같이 서로 기대며 작은 바위굴을 만들었습니다.
<유홍굴과 유홍굴의 위치를 담았습니다.>
지금은 수렴동 대피소가 있지만 예전에는 숙박시설이 없어 조선의 선비들은 이곳 유홍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설악구경을 했다고 하는데 조선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유홍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간 뒤 설악을 찾았던 선비들은 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하는데 처음 자고 기록한 사람인 유홍의 이름을 따서 유홍굴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제가 유홍굴을 확인 했을 때는 조금 더러워 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유홍굴을 막 지나면 합수곡이며 합수곡을 막 지나면 수렴동대피소가 있습니다.
<수렴동 대피소>
<삼연 김창흡은 이곳을 흑룡담이라 이름 짓고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노산선생은 구담 이후 가야동에 대한 이야기나 흑룡담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고 옥녀봉과 자연석탑에 대한 이야기로 건너뛰었습니다.
흑룡담은 수렴동대피소에서 계곡을 따라 가면 우측으로 넓고 깊은 못을 말함인데 삼연 김창흡은 이곳 수렴동계곡에 들어 살면서 영시암 앞에 있는 담을 청룡담이라고 시작한 후 황룡담, 백룡담, 적룡담 등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이곳은 처음에는 구유를 닮아 조담이라 불렀는데 다른 이름으로 흑룡담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삼연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설악의 비경중 하나일 것인데 어쩐 일인지 노산께서는 흑룡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이 지난 것 같습니다.
제가 28년 전 일행들과 이곳 흑룡담을 찾았을 때 주변이 너무 아름다워 30여분을 쉬어 갔던 적이 있는 곳입니다.
흑룡담을 지나면 노산선생께서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자연 석탑이라고 호평한 바위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러다 차차 물소리는 엷어가고, 그 대신 어디로 선지 향기로운 바람이 별로 시원히 가슴속까지 맑혀듭니다. 이건 또 무슨 까닭인가 했더니, 과연 계곡 한 복판에 우뚝 세워진 천작으로 된 돌탑이 이름 모를 무슨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세존이 법화의 묘한 이치를 말할 적에 그 말의 진실함을 대중에게 증명하려고 땅속으로서 솟아 오른 다보여래(多寶如來)의 전신사리봉안탑(奉安塔)은 그 어떠한 것이었던지 이 탑도 인공(人工)이라고는 손톱 하나도 들지 않은 자연탑인데, 이것은 무엇을 위하여 이루어진 탑인지요. 여러 층을 이루었건만, 다시 보면 다만 한 덩어리 바위로 된 하늘이 만든 이 탑은 아마 ‘인간은 글렀으나 자연은 옳으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위한 것이 아니오리까. 그 선(線), 그 색채, 그 안배(按排), 그 표현, 그 기교, 그 정신, 그 의도, 그 모든 점으로 보아 간 곳마다에서 오직 황홀과 침묵으로서 아로새기는 풍우의 예술적 기교도 여기 이 탑에 와서는 너무나 극치에 달한 것이라 도리어 할 말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
노산선생께서 말하는 향탑이란 어느 바위를 말함일까?
저는 본문을 읽으며 망서림없이 계곡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단상암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곡 한 복판이라는 글귀가 단상암과 맞지가 않습니다. 단상암이아니라면 계곡 한 복판에 탑을 닮은 바위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꿰어 맞춘다면 넓은 암반위에 있는 각자바위인데 이 각자바위는 본문 내용 중 맞지 않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 대목 ‘여러 층을 이루었건만, 다시 보면 다만 한 덩어리 바위로 된 하늘이 만든 이 탑’입니다.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 문득 사진을 비교해보기로 합니다.
<노산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자연산 다보여래의 사리탑이라한 불탑, 향탑입니다.>
< '설악인문기행' 실린 단상암 사진으로
위 사진과 동일한 사진으로 여겨지는데 약각 다른 것은 찍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렴동계곡을 지나며 단상암을 찍기는 했는데 사진이 어둡게 나오고 분명치 못해 블로그에 실지 않고 버려서 사진이 없습니다. 단상암 사진을 찾느라 수렴동을 지난 많은 사람들 블로그를 노크해보지만 찾을 수 없어 설악인문기행 제1권에 있는 단상암과 노산선생께서 올린 사진을 비교해보니 제 눈으로는 90%는 맞는 것 같은데 10%에 의문이 갑니다.
10%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심판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럼 단상암은 어떤 바위인가?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설악을 찾았는데 이 무명석탑에 대해 기록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하는데 박성원의 한설록에 이 바위를 단상암(丹床巖)이라고 했는데 신선이 공부했던 책상같은 맘이 들어 이름 지었다고 하고 대를 세어보니 13층이었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본문과 비교해보면 탑같이 생겼으며 큰 한 덩어리의 바위지만 여러 층으로 이루어 졌음이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입니다.
노산선생이 설악산을 찾았을 때 홍수로 물골이 지금의 계곡과 단상암이 있는 주변 2곳으로 흘러 향탑이 계곡 한 복판이 되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향탑 바위가 박성원이 단상암인지 여부는 뒤로 미루고 노산선생은 자연의 은은한 향을 풍기는 자연 석탑으로 보았으며 시 한 수를 읊습니다.
불설(佛說)이 진실(眞實)하자 다보탑(多寶塔)이 솟으시니
자연(自然)의 옳으심을 천조탑(天造塔)이 보이시니
우중(愚衆)도 이 앞에서야 아니 믿고 어이리.
단상암을 뒤로하고 다시 발길을 옮깁니다.
얼마쯤 올라가니 계곡 동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으니 이 봉우리가 옥녀봉(玉女峰)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옥녀봉은 그 위치로나 그 모양으로나 그 기품으로나, 이 골 안에서는 단연 여왕 노릇을 하는 존재이십니다. 너나없이 모든 행인이 이 앞을 지나면서는 한번 우러러 보고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얼마쯤 더듬어 오르니, 점심청이라는 넓은 반석(盤石)을 지나 상,중,하 삼수렴(三水簾)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수렴(水簾) 세채가 걸렸습니다. 수렴 속에 어느 옥녀가 들어 게신지는 모르거니와, 먼 뒷날 저 수렴이 걷히기 전에는 그의 얼굴을 세상이 못 볼 것이라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옥녀봉(玉女峰)
전국에 옥녀봉은 수 없이 많을 것인데 설악산에도 옥녀봉이 있는데 수렴동 대피소에서 수렴동으로 들어서면서 계곡 좌측으로 옥녀봉을 볼 수 있는데 겨울철에는 제모습을 봉 수 있지만 여름철에는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사진은 2017년1월 오색~백담사 산행 사진으로 수렴동계곡에서 본 옥녀봉입니다.>
<삼수렴의 풍경으로 아래서와 위에서 본 풍경입니다.>
노산선생이 현재 이곳을 지나며 글을 쓴다면 용아장성 맨 끝에 우뚝 솟은 옥녀봉이라고 쓸 것이지만 다행인지 안타까움인지 조선시대 유생들이 쓴 설악산 산행 기록에는 용아장성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옥녀봉 다음으로 나오는 명소는 삼수렴입니다.
실제로 삼수렴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을 따라 올라야 하는데 저의 경우 계곡을 따르지 않아 확실한 삼수렴을 찍지 못했으므로 기절거미님의 옥녀봉과 삼수렴으로 대신합니다.
그렇다면 용아장성이라는 이름, 다시 말해서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이 줄을 잇고 있는 능선은 해방이후 붙여진 이름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문을 보면 옥녀봉을 보고 조금 더 오르면 상,하 2개의 수렴을 설명하고 있는데 노산선생은 놀라운 경치를 보며 금강산 만폭동과 보덕굴을 그리는데 금강산 만폭동에 비유하는 곳 바로 하수렴입니다.
그러나 수렴동대피소에서 봉정암 방향으로 가면 단상암을 지나 계곡과 떨어져 가므로 자칫하면 만수폭포와 만수담을 보지 못하고 지날 수 있습니다.
백담계곡이나 수렴동계곡 모두 뛰어나지만 단상암에서 계곡으로 내려서서 계곡을 따라 백운동 합수곡까지의 비경은 금강산에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비경을 제대로 보고 지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물론 순결한 자연만으로 족합니다마는, 때로는 인공도 그 자연과 융합하고 서로 도와서 자연을 더 빛나는 수도 없지 않은 것입니다. 저기 저 조그마한 폭포(瀑布)! 하며, 가지고 놀고 싶다 하자, 다시 보니, 저기 저 잔잔한 계류(溪流)! 하고 누워보고도 싶습니다. 편평한 반석이 되면, 물도 잠깐 그 재주를 감춰버리고 심상히 흐르는 것 같게 보이나 같으나, 실상인즉 다음 곡예(曲藝)에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나 아니온지요. |
본문의 위 2줄.........
자연만으로 족하지만 때로는 인공도 자연과 융화되어 더 빛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바로 암반과 바위에 새긴 마애명과 마애각을 뜻함 같습니다.
노산선생은 마애명을 보고 조선시대 누구와 누구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마애명이 때로는 좋게 보일 수 있다고 나쁘지 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상암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면 만수폭포와 만수담이 있고 만수폭포 위로는 조물주의 화려한 예술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한 바위들이 반석위에 즐비하게 놓여져 있는데 곳곳에 마애명이 있습니다.
비선대나 계조암과 같이 마애명이나 마애각이 무수히 많지는 않은데 노산선생은 많지 않은 마애명을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아 보기가 좋다고 평가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애명에 대해 연암박지원은 “금강산을 갔을 때 경치가 뛰어난 곳에 옛사람부터 당시대 사람까지 빼곡하게 마애명을 새겼는데 돋보이게 하려고 붉은 색칠을 해서 빛나기도 했다. 천 길 낭떠러지기 깎아지른 절벽에 이름석자를 새기지만 이름을 새기는 석공의 목숨도 중요하거늘 원숭이 목숨과 같이 여긴다. 이름을 새기는 명예욕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라고 했으며, 그런가 하면 남명 조식은 지리산 산행을 하며 바위에 새긴 마애명을 보고 “대장부의 이름은 사관이 책에 기록하여 오르내려야 하는데 구차하게도 산속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 년을 전하려 한다.”고 따끔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하수렴의 각자바위 풍경입니다.>
이런 비판에도 이곳 하수렴에 마애명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고위직인 정승,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낸 사람들인데 개개인의 신상을 모두 열거할 수 없고 이름만 나열해보면, 최극명, 유백환, 유무환, 이도상, 이계, 이상악, 정원용, 정기세, 서장순, 이면인, 변종법, 정은, 루노수, 홍은섭, 송재경, 한여, 이의성, 홍광빈, 어재완, 김덕초, 홍구삼, 김광렴, 김광득, 민백홍, 민홍렬, 이정규, 이민덕, 신서우, 한상, 이재방, 이형익, 이형철 등등 이외에도 다수가 있는데 이중 정원용을 비롯해 물속에 잠겨있는 마애명도 많은데 설악인문기행 저자인 권혁진님은 이곳이 예전에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일 것이라는 추정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단상암의 가정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본문에 폭포를 보고, 넓은 암반을 보고 놀다가고 싶고 쉬어가고 싶고 누워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며 시 적인 글로 표현하였으며 눈을 뗄 수 없음을 적고 있습니다.
<삼연 김창흡이 낮잠을 즐기던 곳, 희이대입니다.>
<합수곡, 백운동의 물이 수렴동과 만나는 곳입니다.>
각자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면 물은 잔잔해지고 넓은 암반이 펼쳐지는데 삼연선생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려 쉬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곳을 희이대라 이름 짓고 시를 읊기도 했으니 이러합니다.
노산선생일행은 계곡을 따라 올라 백운동 합수곡에 도착합니다.
쌍룡폭(雙龍瀑)의 번화한 가문
노산선생 일행은 하수렴에서 비경을 보고 계곡으로 올라 오른쪽으로 큰 계곡과 만나는 합수곡에 도착하니 이곳이 백운동이라고 적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태상동이 열려 있음이 같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이 백운동으로 들어서면 지계곡이 나눠지는데 우측 계곡을 곡백운(曲白雲)이라 하고, 좌측 계곡을 직백운(直白雲)이라 하며, 직백운의 끝은 다시 제단곡(祭壇谷)으로 이어 들었는데,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 옛 신앙의 유적을 지닌 곳입니다. 그러나 짐승들 때문에 노숙하기 어려워 부득이 이 백운동 탐승을 못하지마는 길잡이 말에 의하면, 백운동에도 이 수렴동에 못지않은 경치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침내 이 골짜기 큰 길로만 밟아 가거니와 이 합수처로 부터는 다시 골짜기의 이름을 바꾸어 쌍폭동(雙瀑洞)이라 부릅니다. |
그렇습니다.
백운동에도 수렴동 못지않은 경치가 무수히 많습니다.
<노산선생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백운동의 경치로 국백운의 풍경입니다.>
백운동계곡은 현재 비법정탐방로로 통행을 제한하고 있는 구간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안내산악회에서 대부대를 이끌고 백운동을 탐승하고 있습니다.
저도 혼자서 2차례 백운동을 가 본 적이 있으면서 대부대를 운운할 수는 없지만 정말 산을 사랑하는 생각을 가지고 지났으면 하는 바람 크고요 산에서는 작은 휴지 한 장이라도 버리지 말고 버려진 쓰레기는 수거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직백운 보다는 곡백운이 더욱 아주 더 멋있으며 직백운 끝에 제단곡이 갈라지는 것은 잘 못된 기록이며 직백운으로 들어서서 약20분정도, 약0.42km 지난 곳에서 우측으로 제단곡이 시작됩니다.
노산선생은 백운동을 지나며 아쉬움이 많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백운동을 갔다 온다면 노숙을 해야 된다는 길 안내자의 말에 아쉬운 맘으로 봉정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본문을 보면 백운동 합수곡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며 쌍폭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설악산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삼연선생은 유봉정기에서 상수렴과 하수렴으로 나누고 지나온 구간을 하수렴이라 하고 이곳 합수점 위를 상수렴이라 했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홍태유는 유설악기에서 이곳 위를 십이폭동이라 했고, 김몽화는 유설악록에서 십이폭으로 기록했는데 노산선생은 쌍폭동으로 기록했다는 점으로 같은 계곡을 지나며 각각 달리 이름을 붙였으니 무엇이 정답이라고 딱히 말할 수가 없는 입장인데 저 같은 경우는 이곳을 구곡담계곡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구곡담(九曲潭)!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곡담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후 노산선생의 글에서 나오게 됩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한층 더 물소리가 요란스럽고 그 흐르는 모양조차 호기를 부립니다. 혹은 왼편으로 큰 바위를 굴려버릴 듯이, 혹은 오른편으로 큰 소나무를 꺾어버릴 듯이, 무엇이 이다지 급한지 호령이 추상같으면서, 휘우듬한 구비도 미쳐 돌아갈 겨를이 없다고 바위 바닥을 바로 질러 넘어 달려 바삐 쏘아 흘러내리는 물이, 어찌 보면 수선스러운 것 같건만, 과연 한 걸음에 열 가지 경치의 황홀함아 여기 아니고 또 어디 있으오리까. |
실제로 이곳을 지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담이 나오고, 폭포가 나오면서부터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폭포와 담이 이어집니다.
위 본문에서 보면 요란스럽게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면서 연이어 폭포가 나오며 용손, 용아, 쌍룡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노산선생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 명소가 하나 있습니다.
<연화담의 풍경입니다.>
합수곡에서 3분여 오르면 무명 담이 나오고 이곳에서 오르막을 올라 5분 정도 지나면 와폭을 거느린 담이 나오는데 이 담 좌측으로는 아파트 3~4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기암이 있는데 이곳이 연화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삼연의 유봉정기나 노산의 설악행각에 연화담이 나오지는 않으며 어느 유산기에서 연화담이라는 이름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는데 개인적인 유감이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불교용어로 명승의 이름을 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곳 연화담만해도 연꽃과 같이 생긴 못을 뜻하는데 연꽃은 불교에서는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기며 연화담에서 용손폭포를 지나면 목교가 있는데 목교의 이름이 관음교라고 표찰을 붙였습니다.
무슨 연유로 관음이라는 용어를 붙였는지 모르지만 종교를 떠나서 자연 친화적인 용어로 산봉이나 명소의 명칭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연화담을 지나 10분정도 오르면 거대한 폭포가 기다리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쌍룡폭의 지폭포가 연이어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쌍용폭의 지폭, 설악행각에서는 용손폭포, 누군가는 관음폭포라고 부릅니다.>
홍태유와 김몽화가 말한 십이폭으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나온다고 붙인 이름이며 삼연은 이곳 일대를 상수렴이라 기록했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과연 어허, 어허! 를 연발하고야 마는 용손폭(龍孫瀑), 용아폭(龍兒瀑), 쌍룡폭이 골안을 가로막고, 내 앞에서는 김가니, 이가니 누구나 다 나볏들하라는 벼락같은 호령을 내립니다. 어허! 과연 명문거족(名門巨族)이로소이다. 밑으로서 첫 번 만나는 용손폭만도 그 위엄이 이를 곳이 없는데, 다시 그 덜미 위로 떨어지는 용아폭과 삼각담(三角潭)의 웅장함을 무엇으로 견주오리까. 더구나 가장 높은 곳에서 두 가닥으로 떨어지는 쌍룡폭이야말로 거의 신성하고 엄숙한 존재로 안 볼 도리가 없습니다. 오른편 폭포는 바깥어른으로 그 높이가 1백5십척인데, 청봉곡(靑峰谷)으로서 흘러오는 물이요, 왼편 폭포는 안어른으로 그 높이가 70척인데, 봉정동(鳳頂洞)으로서 흘러오는 물입니다. 맞은편 언덕 천길 돌병풍은 치마바위라 하고 또 암룡의 안방이라고 부릅니다. |
연이어 폭포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선인들은 폭포예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한설록을 기록한 박성원은 폭포예찬의 마침표를 찍는데 예찬이 너무 길어 일부를 적어봅니다.
「폭포는 모두 10리에 걸쳐있다.
누워있어 평평하여 느린 것, 매달려 있어 세차고 급한 것 곧바로 떨어지는 것, 가로로 떨어지는 것, 빙빙 돌다 굽이지며 한두 번 꺾어지며 내려오는 것,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꺾어지며 내려오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은 2개의 비탈이 서로 이어져 저절로 층진 폭포를 만드는 것, 큰 바위가 가운데 있어 나뉘어 2개로 흐르는 것, 바위틈이 깊고 길어서 물이 그 아래로 들어가서 언뜻 보였다가 언뜻 사라지며 내려오는 것, 바위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쏟아지는 물이 성내며 싸우는 듯 서로 부딪히는 것, ....................... 어떤 것은 8번 겹쳐진 비단병풍이 뒤는 두르고 앞은 열렸는데 가운데 깨끗한 자리를 펼쳐서 평온하게 누울 수 있다.」
갖가지 형태의, 모양의, 크기의, 수량의, 형상의, 높이의, 낙차의, 길이가 길고 짧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폭포가 연이어 이어지면서 노산선생 일행은 감탄사를 연발한 것 같아 보이며 좁은 골안을 웅장한 폭포소리가 장악하니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28년전 4월초파일 이곳을 처음 올랐습니다.
폭포 한 편으로는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폭포수는 겨우내 참았던 물질을 힘차게 해댔으니 우리 일행 모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는데 당시 핸디캠으로 찍은 영상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용손이라고 등장합니다.
용손폭포라는 이름은 노산선생이 처음 지어낸 이름이며 쌍룡폭포 바로 아래 있는 3폭3단은 쌍룡폭포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용아폭포로, 용아폭포 아래 있는 3폭3담의 폭포는 용아폭포의 아들, 쌍룡폭포의 손자라는 뜻의 용손폭포라고 기록했습니다.
용손폭포 3폭3담을 지나는 중간 2폭2담을 가로지르는 철다리가 있어 철다리를 건너며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으며 2폭을 지나 우측 사면으로 오르며 바위 중간에 크게 깊지 않은 담이 있는 용손1폭1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관음교를 통과 합니다.
관음이라는 용어도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다리를 관음교라고 이름붙인 것이 못마땅한 것은 우리 토속적인 용어도 많은데 굳이 불교용어로 이름을 지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왜 관음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막 지나온 용손폭포를 관음폭포라고도 불러왔기에 누군가 붙인 관음폭포에서 빌려와 관음교라고 붙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관음교를 통해 계곡을 가로질러 계곡좌측으로 오르면 잠시 폭포를 잊고 산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가는 방향으로 멀라 용아장성의 봉우리가 칼을 세워 놓은 듯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쌍룡폭포로 올라가며 보는 용아장성의 풍경입니다.>
좌측은 자연성곽을 조물주가 만들었는지 거대한 암벽이 수백m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곳을 지날 때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 일행들이 너무 신기해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잠시 용아의 암봉을 감상하고 계곡으로 다가서면 3폭3담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용아폭포입니다.
용손폭포는 가까이에서 붙어있는 3개의 폭포인 반면 용아폭포는 조금씩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쌍용폭의 지폭, 설악행각에서는 용아폭포라고 부릅니다.>
용아폭포를 지나다 보면 거대한 암벽을 세워 앞길을 막은 듯 가로막고 있는데 이곳이 쌍룡폭입니다.
노산선생은 이렇게 10개의 폭포가 연이어 있는 것을 보고 한 가문에 비유해 큰 벼슬을 한 집안에서 아들과 손자가 연이어 가문을 빛내며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에 비유해 쌍룡폭이 용아폭포를, 용아폭포가 용손폭포를 번창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쌍룡폭!~
<쌍룡폭포의 삼각담 풍경입니다.>
2마리의 용이, 좌측은 암용이, 우측은 숫용이 하나의 담을 만들었으니 삼각담이라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좌측의 암룡폭포는 높이가 70척로 현대식으로 표기하면 21m가되는데 봉정골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고, 우측의 숫용폭포는 높이가 150척으로 45m인데 청봉골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라 하니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노산선생은 쌍룡폭에서 펼쳐진 장관을 보고 감탄에 이어 쌍룡폭포에 대한 예찬으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쌍룡(雙龍) 저 두 어른 어느 적에 만나신지
아들 손자들 무릎 아래 거느리고
상기도 사랑이 넘쳐 어깨 겸고 웃으시네.
가엾은 인생이야 청춘이 삽시언만
저 두 분 천만년에 늙을 줄 모르고서
만날 때 부르던 노래 이제토록 부르시오.
저 밖에 봉자인손(鳳子麟孫) 인물도 잘나시고
학덕(學德) 높은 이에 지예(枝藝) 또한 능(能)한이에
이 세상 어느 뉘게도 모자랄 것 없소이다.
봉정동(鳳頂洞)의 구곡담(九曲潭)
쌍룡폭포!~
어마어마하게도 웅장한 이 폭포의 비밀을 벗겨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성창산(盛昌山)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쌍룡폭 중의 오른편 폭포인 웅폭(雄瀑)을 넘어 청봉곡(靑峰谷)으로 들어서면, 복유삼폭(復有三瀑), 비류공몽(飛流空濛), 자취무제(紫翠無際)---다시 3개의 폭포 있어 날리는 물이 연기를 뿜어 자줏빛 푸른빛이 끝이없는데 연등이서(緣磴而西),시저담즉(始抵潭側)---바위 등성이를 타고 서쪽으로 오르면 못 곁에 닿는다. 담왕연가백문(潭汪然可百聞)---못에는 물이 넘실넘실 백간이나 됨직하고 일위하담(溢爲下潭), 담역여지(潭亦如之)---그 물이 넘쳐 아래 못이 되는데 그것 또한 그와 같다. 상방하규(上方下圭)---위 것은 반듯하고 아래 것은 모가 났는데 하담우일위난폭(下潭又溢爲亂瀑)---아래 못이 또 넘쳐 여러 폭포들이 되니 소견부지위십이야(所見不止爲十二也)---보기에 열 두 개도 더 됨직하다. |
라 한만큼, 또한 폭포의 승경이 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헌이나 이곳 토박이 사람들에 의하면 이곳을 12폭으로 불렀다는 말에 노산선생은 우측 큰 폭포 사면을 오르고 싶은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12폭 경치를 본다면 예정했던 봉정암까지 가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산중에서 노숙을 해야 함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위 사진은 KBS에서 항공촬영한 쌍용폭포로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위 본문을 자세히 봅니다.
성창산의 동국명산기에 기록되었다는 쌍룡폭포의 우측 폭포와 청봉골~~~
동국명산기에 기록된 것이 사실일까?
서쪽 바위 사면으로 오르면 3개의 못이 있는데 위 못에서 흘러내린 물이 아래 못을 채우고 다시 채워진 물이 넘쳐 아래로 흘러 또 아래 있는 못을 채우니 12개도 더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45m암벽이 폭포라는 쌍룡 우폭.
궁금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요?
설악이 좋아 2년째 설악만 다니는 저는 지난해 9월 쌍용 우폭으로 올라 청봉골을 따라 서북릉으로 오른 적이 있습니다.
쌍용 우폭에는 숨겨진 폭포가 3개가 더 있다는 기록은 사실이며 150척이라고 한 폭포암벽은 노산께서 아래서 보이는 부분만을 기록한 것 같고 위까지 합치면 최소한 200척이상 , 현대식으로 표현해 100m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이 숨겨진 폭포는 다른 곳에 있는 폭포와는 완전히 다른 폭포인데 100m정도 되는 암반 그것도 경사도가 60도 정도는 될법한 암반 중간 중간에 폭포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곳은 비법정탐방로로 법으로 정한 출입금지구역인데 위법을 하며 지났음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동국명산기에 기록된 3개의 못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쌍폭전망대에서 등로를 따라 오르면 좌폭포 위에 다리가 있는데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희미한 길을 따라 들어서면 우폭포 옆으로 오르며 아래로 삼각담과 전망대가 보이는데 삼각담은 전망대에서 보면 원형같이 보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글자 그대로 정삼각형으로 보입니다.
숨겨진 폭포를 보기위해 접근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삼연선생은 숨겨진폭포에 대한 언급은 업는 것으로 보아 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쌍폭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느낀 감정을 유봉정기에서 이렇게 가록했습니다.
「차츰 돌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못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쌍폭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대체로 수무지개와 암무지개가 지붕 없는 우물에서 함께 물을 마시고 날아가는 해오라기가 춤추고 용이 오르는 듯한데 서로 마주하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하 줄임 」
삼연선생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쌍폭을 보고 숫용폭포와 암용폭포에서 만들어내는 쌍무지개가 있는 곳에서 해오라기가 물을 마시고 날아가는 느낌, 용이 승천하는 느낌을 적고 있습니다.
다시 숨은 폭포를 향합니다.
잠시 후 너무나도 신비한 폭포를 만나니 동국명산기에 적시한 숨은 폭포가 나타나는데 전망대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곳에 꼭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보여주는 숨은 1폭포가 있습니다.
못이 아닌 폭포입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울 정도의 급경사 바위사면에 폭과 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폭포가 숨어 있습니다.
다시 숨은 1폭포에서 숨은 2폭포까지는 10분이 걸립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러한 폭포가 있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혼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정없이 카메라 셔터만 눌러댑니다.
숨은 2폭포에서 숨은3폭포까지는 경사진 바위사면으로 오를만한데 2~3분 거리입니다. 슴은3폭포도 역시 장관이며 숨은 3폭포에서 바위 사면 끝 계곡 시작점까지는 약3분정도가 걸리는데 숨은 폭포를 오르면서나, 위에 올라서 보는 맞은편 용아장성 능선을 보는 풍경 또한 장관입니다.
숨은 폭포 이야기는 여기서 거두고 다시 노산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노산선생은 부득이 우폭을 포기하고 좌폭으로 오르며 못내 아쉬운 맘으로 삼연의 시를 음미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컴컴해진 골짜기로 점점 들어서면서 귀신이 출몰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지 이곳 산신령이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적적으로 “그러나 이미 이 봉정곡(鳳頂谷)에 구곡담(九曲潭)의 이름이 있음을 생각하면, 전에도 사람들이 안 다닌 것도 아니었던 것이니 마음 놓고 가보리까.”라고 생각을 바꿉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니 어느 결에 포수 곁에 바짝 붙은 꼴을 보고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의 글에서 짚고 가야할 게 있습니다.
바로 구곡담입니다.
설악인문기행의 저자 권혁진박사는 구곡담이라는 지명은 노산이은상의 설악행각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했는데 위 글을 보면 전부터도 봉정골의 구곡담이라는 지명은 길잡이의 말을 빌어 기록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악행각 이전인 예전부터 구곡담이라는 명칭은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누가 언제부터 구곡담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아 알 수는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결국 호랑이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둠침침한 두어 구비를 지나고나니, 이제는 다시 물은 확을 찧고 소리는 골을 울리고 물연기 흩뿌리는 곳에 이르러 몸 째 정신 째 쇠락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노래도 다시 날개 돋혀 하늘 밖에 날아 나오고, 눈썹 속으로 숨어 버린 웃음도 활개 치고 얼굴 위에 춤추는 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마는 사람이란 이렇게 가사스러운가 봅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요? 하니 방원폭(方圓瀑)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방원폭이 구곡담 중 제1담(潭)이라 합니다. 폭포는 그리 웅장하지는 못하나, 여기서는 폭포보다, 얼른 보면 원형(圓形)이로되, 다시 보면 정사각형(正四角形)인 담이 별스러운 경치라면 별스런 경치라 하겠습니다. 방원이란 이름은 그래서 얻었나봅니다. |
어두컴컴한 계곡으로 들어서며 호랑이라도 나타날까 겁에 질려 올랐지만 결국 호랑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두 구비를 오르자 다시 계곡이 밝아진 듯합니다.
<노산선생일행이 방원폭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누가 노산선생일까 넥타이, 중절모자선자세, 중절모자앉은자세>
<이 사진은 '설악인문기행;에 실린 바원폭포입니다.>
<이 사진은 기절거미님에게서 가지고 왔습니다.>
<겨울 사진은 2017년 1월 오색~백담사 산행 시 촬영한 방원폭포의 겨울풍경입니다.>
그리고 콧노래가 다시나오고 입가에 미소가 맴돌게 한 것은 눈앞에 폭포가 반겨주기 때문인데 이 폭포가 방원폭포입니다.
방원?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아들이며 조선3대왕이 방원인데 설악산에도 방원이 있습니다.
방원? 사람 이름이 아닌 다른 뜻이 또 있습니다, 방은 사각으로 모가 난 것을 뜻하고 원은 둥글음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방원은 둥글게 보이지만 네모나게 보이고, 네모지다 생각하고 다시 보면 둥글게 보이는 것이니 방원폭포의 뜻이 그러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연 김창흡이 봉정암을 갔을 때 쓴 글에서는 방원폭포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런걸 보면 방원폭포라는 이름은 삼연의 유봉정기 이후 붙여진 듯 하다는 것이 설악인문기행 저자인 권혁진박사의 생각입니다.
사면은 ‘제일 마지막 폭포 하나는 더욱 기이하고 아름답다. 숲 사이에서 빛나는 것이 흰명주와 주렴이 날리는 듯하다.’고 기록했는데 주렴이란 창가에 친 발을 말함인데 구슬을 엮어서 만든 발을 뜻함입니다.
노산선생은 일행들과 함께 방원폭포 위, 아래로 흩어져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사진을 찍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시 한 수를 읊습니다.
둥근채 모나시고 모난채로 둥그시니
‘둥글’다 말하리까 ‘모’라 말씀 하오리까
둥근지 모나신지를 나는 미처 모릅니다.
둥글게 보이오니 둥글줄로 믿으리다
모나다 하오시니 모난줄로 아오리다
둥그나 모나나ㅅ간에 임으로만 섬기리라.
둥글어 계옵소서 모나셔도 계옵소서
모만은 마옵소서 둥금만도 마옵소서
둥글고 모나신 후제야 쓰을 곳이 있습니다.
한동안 방원폭포에서 휴식을 취한 노산선생은 다시 무거운 발길로 봉정암으로 향합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여기서부터 오르며 돌며 헤아려 가는 구곡담이 제1담인 방원폭 이외에는 하나도 그 이름을 얻지 못하고, 다만 ‘둘째소’ ‘셋째소’라고만 불려지고 있음이 섭섭합니다. 제4곡담을 지나선 때에 좌편으로 보이는 사자암(獅子岩)은 다시 더 잘 형용(形容)할 수 없는 사자요, 제9곡담의 우편으로 대석(大石) 계단을 이룬 백단대(百段臺)는 또한 문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백단대 위로 올라가보면, 과연 무슨 신전(神殿)이 거기에 놓였을는지, 천년 묶은 이끼가 인간의 발붙임을 허락하지 않으니, 또한 한스러운 채 어쩔 길이 없습니다. |
본문은 구곡담에 대한 설명입니다.
삼연의 글에서는 방원폭포는 수렴에 들지 못하고 쌍룡폭포부터 아래쪽으로 상수렴이라했고, 홍태유는 유설악기에서 십이폭동, 김몽화는 유설악록에서 십이폭으로이라 했는데 노산선생은 쌍룡폭포까지를 쌍폭동이라하고 이곳 방원폭포부터를 구곡담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인지 요즘은 대부분 이 구간을 통 털어 구곡담으로 널리 부르고 있는데 저 또한 이제까지 그리 알고 있었는데 잘 못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곡담의 구폭 중 하나인데 몇 폭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구곡담은 방원폭포로부터 시작되며 방원폭포가 1곡이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2곡. 3곡. 4곡담은 이름이 없으며 5~8까지는 기록에서도 빠져 있습니다.
마지막 9곡담은 백단대 아래 있는 것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저는 이곳으로 몇 차례 지나기는 했지만 곡담으로 여길만한 곳은 방원폭포와 방원폭포를 지나 무명담이 있는 2곳이외는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봉정암으로 오를 때 깔딱고개를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저도 처음 오를 때 너무나 힘들어 죽는 줄 알던 곳인데 통상 사자바위로 오르는 고개, 사자항이라고도 하고 사현이라고도 하는데 통상 깔딱고개로 통합니다.
<사자바위와 사현, 사자항으로 부르는 고개로 우리는 속된말로 깔딱고개라 부릅니다.>
깔딱고개 오름이 시작되는 곳 넓고 높은 수직절벽이 있는데 이곳을 백단대라 부르는 듯합니다. 본문을 보면 9곡담을 지나 백단대 우측으로 우회하여 오르지만 백단대 위는 오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음 기회가 되면 노산이 지난 백단대길로 들어서서 직접 발자취를 더듬어 볼 요량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황혼(黃昏)의 깊은 동곡(洞谷)을 내려다보고 앉은 집 한 채가 있으니 물을 것 없이 봉정곡(鳳頂谷) 위의 봉정암(鳳頂菴)입니다. 암자를 정중앙에다 놓고, 뒤에는 괴상한 바위들로 된 기이한 봉우리들로 둘렀는데 암자 오른편 동쪽의 것은 기린봉, 할미봉, 범바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암자의 북측에 있는 것들은 독성나한봉(獨聖羅漢峰), 지장봉(地藏峰), 가엽봉(迦葉峰), 아난봉(阿難峰), 그 다음으로 가장 굉걸 장대한 거암을 석가봉(釋迦峰)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지점하는 이름들을 듣고 보니 암자 동측 뒤곁의 반쯤과 암자 북측 반쯤은 결국 한 개의 연결된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 계통은 서로 판한 것임을 발견하고, 재미있게 생각합니다. 기린이니 할미니 하는 형상적 명칭은 이곳 토박이 사람들의 순수한 머리로부터 불려진 것이요, 독성지장, 가엽, 아난, 석가 등 불교적 명칭은 말할 것 없이 승려의 종교적 머리로부터 불려진 것입니다. |
노산선생 일행은 백단대를 넘어 거친 암릉길이 끝나고 잡초가 우거진 소로를 따라 오른 듯합니다.
경사진 언덕길을 어렵사리 오르니 어느덧 황혼이 물들었고 바람은 거세게 불어대는데 목표로 삼은 봉정암이 계곡아래 보인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곳이 백단대가 아닐까? 생각입니다.>
그리고 봉정암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기암들의 명칭을 거론하는데 기린봉, 할미봉, 범바위, 그리고 독성나한봉, 지장봉, 아나봉, 석가봉 등 여러 봉우리가 나옵니다.
봉정암을 감싸고 있는 7개봉에 기린봉, 할미봉, 범바위는 순수한 우리말 봉우리인데 나머지 독성나한봉, 지장봉, 아나봉, 석가봉 등 4개 봉우리는 불교 용어로 이름지은 것이 조금 못마땅합니다.
노산선생은 이러한 불교적 명칭은 승려의 머리에서부터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디시 본문을 봅니다.
승려들의 암상(岩相) 보는 눈도 어지간한 줄 알겠습니다. 과연 독성나한봉이란 것은 그 괴상한 성미를 바로 보였고, 지장봉도 ‘지옥문전누불수(地獄門前淚不收지옥문 앞에서 눈물을 못 거둔다)’하는 자비심이 그 얼굴에 띠어졌거니와, 석가봉을 향하여 연방 무슨 협의를 들어드리는 것 같은 것을 용하게도 가엽봉이라 한 것이며, 당시 천이백 대중에서도 가장 미남이더라는 말대로 무척 잘 생긴 바위를 또한 아난봉이라 한 것이며, 석가봉은 역시 바위들 중 성자(聖者)라 할만 한 수 천척(尺), 수 십간(間)의 크 바위인 것이 잘도 맞게 그 이름을 붙였습니다. |
이에 대해 노산선생은 토속적인 봉우리와 불교적인 봉우리가 반씩 혼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불교공부를 한 수 지도합니다.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제도 공부를 해봅니다.
독성나한은 괴상한 성미를, 지장봉은 지옥문전누불수하는 자비심을, 석가봉은 두말할 것 없이 성자이고, 가엽봉은 석가와 뭔가를 협의?, 아난봉은 미남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는 가운데 봉정암으로 내려서며 본 풍경을 담습니다.>
독성나한, 지장, 아난, 가섭 이런 불교의 부처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봉정암 뒤에 있는 바위봉우리들을 찾는 게 중요한데 며칠을 인터넷 앞에 앉아서 두둘겨 보아도 어느 누구도 어느 봉우리가 할미봉인지 어느 봉우리가 아난봉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봉정암에 전화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분면 봉정암에서는 8개의 바위 중 법단 좌측으로 있다는 독성나한봉, 지장봉, 아난봉, 가섭봉 그리고 석가봉을 알고 있응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033 일반전화로 어렵게 통화가 되었는데 010 스마트폰으로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갈이천정이라고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야하니 다시 010전화로 통화를 시도합니다.
여자분이 전화를 받아 전화상으로 알려줄 수가 없다며 전국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온다고 끊으라고 하기에 스님을 바꿔달라하니 직접와서 물어보라는 답변에 더 이상 떼를 쓸 수가 없어 결국 봉정암 뒤에 바위들 이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박성원의 한설록에서는 3개봉을 운운합니다.
의보라는 사람에게 박성원이 봉정이 어디냐?고 물으니 암자 뒤 줄지어 있는 봉우리를 모두 통털어 봉정이라고 답했으니 독성나한봉, 지장봉, 아난봉, 가섭봉을 봉정이라고 본 것이며 탑대 옆 거대한 바위를 노산선생은 석가봉이라고 한 반면 박성원은 사암, 즉 사자바위라고 했으며 암자 동측에 있는 바위를 노산선생은 할미봉, 기린봉, 범바위라고 한 반면 는 박성원은 화로를 닮았다고 해서 노암, 즉 향로암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보는 분께서 알고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고, 아니면 봉정암을 가실 시회가 있다면 스님께 물어보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바위 이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면 합니다.
봉정(鳳頂) 월하(月下)의 소요(逍遙)
봉정암(鳳頂菴)
봉정암은 해발 1244m 설악산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적멸보궁 사찰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정이란 봉황의 정수리를 말함입니다.
설악인문기행을 참고하면 봉정암 누리집에는 봉정을 "봉황새가 부처님 정수리로 들어갔다."라고 해석하고, 설악에서 거의 한 평생을 보낸 삼연 김창흡은 "봉황이 부리를 드리운 것 같다."라고 풀이를 했는가하면 조선시대의 안석경은 "봉황이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의 봉정이란 봉정암 암자 뒤 봉정대 위에 있는 작은 바위로 많은 사람들은 봉정을 부처바위라고 부르고 불두암이라고도 부릅니다.
본문에서는 봉정암을,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얻어 와서, 암자 서측 석대상에 칠층탑(七層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奉安)하고 이 암자를 지었다고 하며 그 후의 원효(元曉), 보조(普照), 환적(幻寂), 승운(勝雲), 설정(雪淨), 환공(幻空), 수산(睡山) 등이 계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성원의 「한설록」에는 창건유래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환적당 의천스님이 해인사에서 소장한 산수지 중에서 봉정의 여러 산봉우리가 부처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이곳을 찾게 되었으며 이곳에 암자를 세우니 봉정암이다. 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KBS에서 항공촬영한 봉정암의 풍경으로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본문을 봅니다.
우리가 이 봉정암에 들어서자, 아주 걸차게 생긴 노승(老僧)이 나와 맞아주니, 이는 금년 80여세의 고령인 춘계(春溪)주지입니다. 주지를 따라 선실(禪室)로 들어서니, 벽 위에는 ‘마하선실(摩訶禪室)’ ‘조유육죽세식일화(祖牖六竹世識一花)’ 이라고 쓴 추사의 글씨가 걸려있거니와, 듣건대, 이 주지가 일찍이 추사 계통의 문하에서 서법을 배운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지 역시 추사의 필법으로 경전의 명구를 써 붙여 놓은 것이 많은데, 문외한의 눈으로도 진기 벗은 서풍이 그 강직한 성격과 응하는 바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저녁 석공이 끝난 후, 춘계 주지와 나는 뜰에 나섰다가, 그 길로 나 혼자 암자의 경내를 거닙니다. 문득 깨달으니, 밝기도 밝은 달빛! 오! 참 오늘밤이 추석(秋夕)입니다. 산 밖에 중추가절(仲秋佳節)은 지금 어떠하온지, 여기 이 깊은 산중에는 부스럭 부스럭 떨어지는 나뭇잎소리와 물소리뿐입니다. |
본문에서 보니 노산선생이 설악행각 6일이 되고 산행4일이 되는 날, 바로 봉정암을 오른 날이 추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추석이나 설 명절이 되면 뻑적지근하게 놀고 마시고 새 옷을 장만하고 대단히 기분 좋은 날이었습니다.
이런 날 노산선생은 산(山) 역사에 한 장(丈)을 여는 행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래도 속세가 그리웠던지 아니면 속세의 추석 상황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위 사진은 KBS에서 항공촬영한 봉정암의 풍경으로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추석날 날이 어둑할 때 봉정암으로 들어서자 80고령의 주지스님이 맞아 주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주지스님과 밖에 나와 바람을 쐬며 산책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주고받은 대화내용은 적시하지 않았고 바람소리 물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사찰의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봉정암의 밤은 쓸쓸하고 세찬 바람이 부나 봅니다. 노산선생도 바람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사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전에 선답한 삼연 김창흡은 「유봉정기」에서, 베개 밑으로 바람소리가 윙윙 불어오더니 파도가 들 끓는 소리를 낸다. 봉정암은 높은 곳에 있어 꿈도 인간세계의 꿈이 아니다.라고 썼는가 하면 홍태유는 「유설악기」에서봉정암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숲과 산이 고요했는데 한 밤중이 되자 바람이 크게 일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내니 바위와 골짜기가 진동을 한다. 라고 섰습니다.
본문을 이어갑니다.
깊고 긴 동곡(洞谷)을 내려다보니, 어두운 송림(松林) 위에 달빛이 어려, 연방 신필을 들고 음영을 손질하며 그려나가는 남화의 그림 한 폭과 다름없는데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는 가슴 속에도 끝없는 골짜기를 파고 나가며, 들을수록 신비한 계시를 일러주는 듯하여, 차가운 밤바람 싫은 줄도 모르고서 바위 위에 앉은양, 눈을 떴다 감았다, 무한한 경지를 어루만져보는 이 순간, 나는 무슨 말로 지금의 내 뜻을 전할 수가 있으오리까. 쉬임 없이 들려오는 물 소리!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물 소리! 분명히 다른 곳에서 듣던 그 물소리와는 별로 달리 들리는 것이 또한 무슨 까닭이온지! 물 소리 그것이야 다를 것이 없으련마는…… ---중략--- 아니, 다시 더 생각해보면, 이 물소리와 같은 자연만으로도 족하고 또 족한 것이므로, 인간의 중언부언하는 철학이며 종교며 예술이며 무엇무엇이 필경 부질없는 사족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먼 산 달 아래서 바위와 숲 밖에 없는 길을 더듬어 이리저리 거닐며 물소리 바람소리의 무한한 계시에 느끼고 또 느끼는 오늘 이 밤은, 분명 내 일생에 거룩하고 의의 있고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이 바위가 부처바위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 바위 위에 있는 작은 바위를 부처바위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부처바위, 부처가 보이시아요................>
고요와 적막한 봉정암에서 밤을 보내며 쓸쓸한 심정으로 시 한 수를 읊습니다.
깊은 밤 이 산골에 들리는 저 물 소리
구구(句句) 절절(節節)이 오묘(奧妙)한 진리(眞理)로다
인간(人間)에 긔똥 설법(說法)은 모두 헛것 이었다.
물 소리 마음속을 긴 골 이뤄 흐르나니
밝으신 달이마저 마음 위에 비쳤나니
이대로 지녀 돌아가 고이고이 잠들리라.
시간은 흐르는 저 밤 계곡의 시내와 함께 흘러 깊은 밤,
어느덧 자정(子正)이 다되어 가도, 선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눈가에 평화의 고요한 웃음이 떠있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산중 한인, 즉 한가로운 중인 듯 착각에 빠져 잠을 청합니다.
<클릭하면 더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