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림리 학동마을 돌담길을 처음 본 것은 지난 봄 신문에서였다. 주말 여행지를 소개하면서 나온 돌담길 중에 인근에 있는 고성 학동마을이 나왔고 그것은 꽤 한참동안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미적거리는데 지역 유선방송사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에 다시 학동마을의 돌담길이며 고가가 소개되었고 그것은 가슴에 불이라도 지핀 듯 강렬하게 나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일차 답사를 나섰다 버스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돌아오고 나자 마음은 오래전 돌담길을 늘 서성거리기 시작했고 저녁시간이 비교적 여유로운 날 마침내 돌담 사이로 난 골목길을 걸어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비가 내려서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어쩌면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 버스에 오르면서 마음은 이미 골목길을 걷고 있었고 시선은 점점 변해가는 가을 들녘이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을 건성으로 훑어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통영을 거쳐 고성까지 가는 버스는 자주 있는 편이다. 한 시간이 채 안걸리는 거리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는건 여자 혼자서 낯선 곳으로 가야한다는 두려움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겹쳐서다. 그러나 일단 나서고 나면 무식할 정도로 너무나 용감하게 찾아가고는 한다. 고성에서 내려 목적지인 학림리 학동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관광안내도도 상세하게 보아놓고 고성에서 다음에 가고 싶은 곳을 찾아 교통편도 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셔가며 이것저것 메모를 하는 내가 타인들의 눈에는 꽤 신기했던가 연신 흘깃대며 쳐다 본다. 시내버스라기 보다는 예전의 완행버스처럼 털털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을 빠져나갈때 승객이라고는 달랑 나혼자였다. 시내를 돌면서 몇분의 어르신들을 더 태우고 달리는 버스의 기사님은 너무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분이다. 버스정류소와는 상관없이 어르신들의 집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정차를 해드렸고 그분들이 목적지에서 버스를 세우지 않아도 알아서 세우고는 했다. 각박한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목적지를 한 정류소 앞두고 잠깐만 정비소에 들렀다 가겠노라며 양해를 구하시는데 그만 내려서 걷겠다고 하고는 한 정류장을 걸어 학동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서 바라보는 학동마을은 산자락에 안긴 듯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뒷쪽의 산이 수태산이라고 했다. 마을을 향해 걸어가자 멀리 옛기와로 덮힌 지붕이 보인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의 반대편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거목들이 자리잡은 숲이 바라보이고 기와지붕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바라보는 마을에는 개량한 지붕을 가진 집들 사이에 옛담장처럼 만들어진 벽을 가진 건물들이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뀐채 띄엄띄엄 있었고 담장의 일부는 엣모습을 지니고 다른 일부는 개량한 집들도 더러 있었다. 마을안으로 좀 더 걸음을 옮기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길 양옆으로 도열하듯 서있는 돌담 그리고 그 사이로 뻗어있는 길. 순간 떠오른 생각이 비가 왔으면 훨씬 좋았겠다는 것이었다. 저 돌담 사이로 난 길을 촉촉하게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우산도 받지않고 걸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접어가며 천천히 돌담길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하늘을 아쉬운 마음으로 올려다 보면서.

담장이 끝나가는 곳에 덩그렇게 높은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고 그 옆에는 집안에도 같은 형태의 담장으로 구성된 구조물들이 여러군데 보이는 슬레이트 집이 있었다. 망설임도 없이 슬레이트 집 앞에 섰다. 우편물함에 있는 세대주의 이름을 보면서 잠시 망설인 것은 이곳이 진주최씨 고택이 있는 곳이고 최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씨 성을 가진 이름이어서였다. 주인이 바뀐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빼꼼히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실례합니다"
를 조심스럽게 뱉어낸다. 방에서 약간은 등이 굽은 할머니께서 나오신다.집안을 좀 보고싶은데 둘러 보아도 괜찮겠느냐는 말에 담장을 보러 왔느냐며 그러라고 하신다. 담장과 같은 돌담은 건물의 기단이며 돈대 그리고 계단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같은 형태로 쌓여져 있었다. 담장 내부의 모든 건물은 또다른 담장 위에 앉아있었고 집안의 텃밭까지도 얕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그래서 담장안은 마치 또다른 담장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학동마을 진주최씨댁의 종갓집이었고 할머니는 13대 종부(宗婦)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이집은 원래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학동마을은 학의 날개밑에 해당하는데 기와를 얹으면 무거워서 학이 날지 못해 기와를 얹지 못하고 초가를 얹었다 전한다며 지붕개량을 하던 1970년대에 슬레이트로 바꿨다고 하신다.
"내가 뭘 몰라서 집을 이리 베리놨다. 영(이엉) 엮기도 힘들고 해싸서. 이기 본시 집이 아홉채가 있었니라 내가 시집올때 아홉채가 있었는데 간수하기 에르바서 다 헐어삐고 인자 닷채뿌이 안남았다. 저기 대문간에 머심들이 살던 행랑채가 방이 두칸 있었고 대문 요짜 요기는 말마굿간이 두칸 있었니라"
최씨 집안의 종부(宗婦)가 되신지 올해로 53년이 되셨다는 할머니는 집안의 여기저기를 설명해 주셨고 그 넓은 집안에 잡초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해가며 혼자 살고 계셨다. 자손들이 잘됐으면 집을 이리 망가지게 안했을텐데 여러가지로 면목이 없다며 말끝을 흐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종부(宗婦)로서 살아온 할머니의 삶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학동마을 최씨종가는 각 건물이 모두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안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의 뒷쪽 집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가묘(家廟)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묘는 기둥만 옛것이고 지붕이며 벽은 보수를 해서 연륜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기에 근래에 지었느냐고 여쭙자 할머니는 보수를 해서 그렇다며 몇백년이 되었는지 당신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신다. 가묘로 올라가는 길도 전부 돌담을 쌓아 만들었으나 아쉽게도 중간에 계단은 유실되었는지 시멘트로 보수를 해서 걷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안채의 앞에는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왼쪽에 수직으로 곳간채가 있었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가는 길목에는 안마당이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같은 형태의 돌담으로 차단벽을 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안채의 바로 앞에는 예전에 닭을 키우던 닭장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같은 형태의 돌담으로 만들었고 지붕은 커다란 판석을 얹어두었다. 지금은 금이가서 너댓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시멘트로 이어붙여 놓았지만 예전에는 그 큰 돌이 하나의 판석이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의 왼쪽에도 수직으로 건물이 한 채 있었는데 할머니 말씀으로는 나락을 보관하던 고방이라고 하신다.
"여기 이 돌봐라 좋재? 이런 돌은 딴데가면 없을끼라"
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기운이 역력하다.

조사해 둔 자료에 의하면 학동마을의 최씨고가는 안채가 앞면 5칸의 우진각 지붕 익랑채(翼廊채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 행랑채 문간채. 할머니는 대문간채라고도 하셨다)는 앞면 4칸의 팔작지붕 곳간채는 앞면 5칸의 팔작지붕이었으며 사랑채는 앞면 7칸의 팔작지붕에 처마 네귀에 활주를 설치했다고 한다. 대문간채는 앞면 5칸의 맞배지붕 솟을 대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최씨 종가의 바로옆에 복원해 둔 최영덕씨 고가를 설명한 듯 하다. 복원해 둔 고가는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78호라는 명패를 달고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내려와 잠시 머물다 가는데 경보기도 달려있고 하다며 할머니께서는 씁쓸하게 웃으신다. 같은 문중의 집안 사람인데 예전에 제금(딴살림의 경상도 방언)나가서 옆에 산다며 학동 마을의 최씨들은 전부 이 종가에서 제금나간 사람들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종갓집 종손이 잘살었더라면 잘 된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종갓집을 복원할 수 있었을거라며 할머니는 아쉬워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나도 또한 아쉬웠던 것은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복원했다면 종갓집을 복원하는게 유력자의 집을 복원하는거 보다 의미 있는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학동마을의 담장은 인근의 수태산에서 구한 퇴적암 판석(두께 약 2~5cm)과 황토를 섞어서 쌓았다. 이제까지 내가 보았던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담장은 함부로 생긴 돌을 황토와 섞어서 쌓은 것이었다. 학동마을의 담장처럼 시루떡의 한 켜인듯 반듯하고 납작한 돌과 황토를 번갈아 쌓은 담장은 처음 보았다. 더구나 담장의 지붕도 판석으로 올려 독특한 풍토성을 엿보게 만들었다. 육영제가 어디쯤 있느냐고 여줬더니 할머니는 육영제를 아느냐며 놀라워 하셨다. 내가 아는 육영제와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육영제가 다른 것이었음을 깨달은건 잠시후였지만. 내가 아는 육영제는 진주최씨 문중의 서당을 일컫는 이름이었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신건 육영지 즉 연못이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옛날 최씨 문중의 형제분들이 여섯 분이셨고 서당을 지으며 연못도 함께 팠는데 그 연못 이름을 6형제라서 육영지라고 불렀다 한다. 서당의 이름을 육영제라 지은 것도 거기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육영제에 관한 자료에는 후손들의 학문지도와 영재육성을 위하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하니 그저 스쳐간 내 생각일 뿐이다. 걷기에는 좀 멀다며 복원해 놓은 육영제는 나도 아직 못보았노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조만간 다시 방문해서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보았노라고 그만 가겠다며 인사를 드리자 할머니는 함사코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잡으신다. 댓돌까지도 반듯한 판석암으로 놓여진 고가의 마루에서 오랜 세월 그 집과 함께 살아 온 할머니께서 우려내 주시는 녹차를 마시며 다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연륜이 더해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자이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옛날 종갓집 맏며느리인 종부(宗婦)를 얼마나 고심해서 골랐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했다. 할머니께서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기껏 종부(宗婦)는 하늘이 내려주시는거 아니겠냐는 천편일률적인 대답밖에 드릴 수 없었다. 안채의 부엌은 아직도 나무를 때는 아궁이라는 말씀에 봤으면 좋겠다고 하자 치우지 못해서 엉망이라며 박쥐가 똥도 싸고 그렇다며 손사래를 치신다. 명절에 며느리가 오면 치우라고 할테니 그때와서 보라고 하시는 할머니. 오래 된 집과 함께 세월을 보내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저 종갓집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대문을 빠져 나왔다. 2006/09/09 11:29
♣ 학동마을 찾아가는 길
위치 :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
승용차 : 고성읍에서 진주방면 국도 33호선 이용 → 상리면 부포 사거리에서 좌회전 → 하일.하이 방면
대중교통 : 고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일.하이방면 군내버스 이용 하일면 학동에서 하차(삼천포행 버스를 타도 됨)
군내버스 시간 : 08:20 11:00 12:20 12:30 14:00 16:00 18:30 (몇번인가 더 있을 것이나 현재까지 아는 시간은 이것뿐임)
(담장의 더 많은사진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86878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86945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86956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93380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93384
http://photolog.blog.naver.com/unhasu57/3293401